력사를 찾아서

환기9217해,신시배달5917해 단기 4353해,서기 2020해, 대한민국 101해(나뉨 72해),

궁산문화(弓山文化)/궁산유적(溫泉 弓山遺蹟)/평양남경유적(平壤南京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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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시대/고고학

2020. 10. 19.

궁산문화(弓山文化)

북한에서 1950년 온천 궁산유적을 처음 발굴한 이후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 물질문화양상에 대하여 명명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1957년 봉산 지탑리유적의 발굴에서 궁산문화는 전기와 후기(1기와 2기)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평양 금탄리유적 발굴보고서에서 금탄리를 1·2문화층으로 나누어보고 이를 기존의 ‘궁산문화’에 후행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궁산문화는 4기의 편년 틀을 갖추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금탄리 1·2문화층을 ‘궁산문화’속에 포함시키면서 궁산문화 4기 편년체제가 공식화된다. 그 이후 평양 남경유적의 발굴(1979∼1981년)을 통해 남경1기와 2기를 설정함으로써 궁산4기를 2단계로 세분하게 되어, 현재 궁산문화는 5기의 편년체제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북한에서는 고고문화의 설정을 체계화시키면서 청천강 이남 및 남한전역을 포함하는 둥근밑 토기문화를 운하문화라는 하나의 문화로 설정하고 궁산문화는 그 하부의 지방유형으로 파악하고 있다.

 

궁산1기 유적으로는 궁산유적의 일부와 지탑리유적 1지구 1호주거지가 대표적이다. 이 단계는 타래문 등의 곡선계 문양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순수한 3부위 구분시문토기를 중심으로 한다. 구연부 문양은 점열문이 많으며 소수의 단사선문이 있다. 동체부 문양은 종주어골문으로 대표되며, 기타 능형문, 횡주어골문도 소량 확인된다. 평저발형토기에는 구연부 점열문 아래에 능형문이나 점열파상문을 부가문으로 시문한 예들도 확인된다. 저부 문양은 사선대문, 횡주어골문이 기본이 된다. 전체적으로 문양이 매우 정연하게 시문되며, 평저발형토기는 동체부 이하가 무문으로 남겨진 예들이 많은 반면 첨저 심발형토기는 3부위 시문이 엄격하게 잘 지켜졌다. 기종은 크게 심발과 발, 무경호, 뚜껑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형 발형토기는 주로 평저인 반면 나머지 기종은 첨·원저를 이루고 있다.

 

궁산2기지탑리유적 2지구 2호 및 3호 주거지 조사성과를 토대로 1기와 분리되었으며 봉산 마산리유적 조사를 통해 그 양상이 더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궁산유적의 일부, 온천 용반리유적의 일부, 청단 소정리유적 2지점 1호, 3지점 1·2호, 인산군 주암리유적 등이 이 단계에 해당하는 유적들이다. 이 단계의 가장 큰 특징은 타래문, 중호문으로 대표되는 곡선계 점열문의 등장이다. 기본적인 시문규칙은 궁산1기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여 구연문으로는 여전히 점열문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구연문과 동체문 사이에 부가문(또는 어깨문)이 시문되는 사례가 많아지며 부가문으로는 주로 중호문이 많다. 동체부에는 새로이 타래문이 단독으로 시문되기도 하며 원저발의 경우는 중호문이 동체문이 되기도 한다. 동체부의 기본문양은 여전히 종주어골문이다. 그러나 궁산1기의 종주어골문에 비해 상하로 압축된 형태의 종주어골문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저부 문양은 사선대문과 횡주어골문이 주로 시문되어 이전 단계와 유사하다. 궁산2기의 기종구성은 1기와 마찬가지로 심발과 발, 호로 크게 대별된다.

 

그런데, 지탑리유적 1지구에서는 주거지 퇴적층과 주거지 밖 유물로 보고된 소위 변형빗살무늬토기라고 하는 일군의 토기가 있다. 이 토기들은 지탑리유적 2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기차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북한에서는 기본적으로 궁산3기 단계의 유물로 편년하고 있다. 그러나 한영희, 미야모토[宮本一夫]는 궁산1기와 2기의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어 차이가 있다.

 

궁산3기는 금탄리유적 조사를 통해 금탄리 1문화층과 2문화층이 설정되고 난 후, 이들이 궁산문화 내로 공식적으로 편입되면서 설정되었다. 주요 유적으로는 금탄리 1문화층, 평안남도 증산 용덕리, 덕천군 남양리, 영변 세죽리 7호주거지 등을 들 수 있으며, 황해도에도 청룡리, 반월동, 소정리 1지점 등의 유적이 있다. 궁산3기 토기는 금탄리1식토기로 불리며 기본적으로 3부위 구분시문이 사라지고 기면에 2∼3종의 문양을 교대로 반복시문하는 문양패턴이 주류를 이룬다. 주요 문양은 기면전체를 몇 개의 구획대로 나누는 구획문이라 할 수 있는데, 다치의 횡선문 또는 다치압날문이 있고, 그 내부를 충진하는 문양으로 삼각집선문이 주로 사용되며 기타 횡주어골문, 능형집선문 등도 보인다. 저부에는 횡주어골문이 시문되는 예가 많다. 호형토기에는 전단계의 특징을 잇는 것으로 보이는 침선화한 타래문이 확인된다. 기종은 크게 심발형과 호형토기로 나뉜다. 앞 단계까지 존재했던 평저발형토기가 보이지 않는데, 유적 수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심발형토기는 내만하고 배가 부른 기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태토에 활석이 많이 첨가되는 것도 이 단계의 큰 특징이다. 이 단계, 이 지역의 토기가 주변의 넓은 지역 즉 한강유역, 금강하구, 강원 영동지역 등에서 소량씩 확인된다.

 

궁산4기는 금탄리 2문화층, 금탄리2식토기로 대표된다. 주요한 유적으로는 금탄리유적, 남경유적, 평양 장촌유적, 표대유적 등을 들 수 있다. 금탄리2식토기의 기본적인 특징은 전면 또는 저부를 제외한 전면에 횡주어골문을 시문하는 동일계토기, 띠대문, 1열의 융기문 등을 들 수 있고, 기형상에서 외반구연이 많아지며 배가 부르고 저부가 원저화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특징을 들 수 있다. 또한 무문양토기가 현저하게 많아지는 현상도 이 단계에 두드러진다. 남경유적의 조사를 계기로 남경1기와 2기라는 2개의 소단계로 세분되었다. 남경1기는 주로 활석질태토로 2기와 구분된다. 기종은 여전히 심발형, 발형, 호형토기로 나눌 수 있다. 심발형토기에는 저장용으로 생각되는 초대형의 토기가 두드러진다. 활석 첨가 태토가 이 단계의 이른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사라지고 모래질 태토로 바뀌게 된다.

 

궁산문화의 주거지는 시기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궁산 1·2기의 주거지는 지탑리유적 1지구 1호주거지, 2지구 2·3호 주거지, 궁산유적의 예를 볼 때 방형 및 원형 평면이 기본이다. 내부시설로는 주거지 중앙에 위석식의 노지가 있으며, 기둥배치는 일관되지는 않으나 기본적으로 4주식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 주거지 내부시설 중 특이한 것은 노지 근처에 설치된 토기 저장시설(?)이다. 대형토기의 저부를 떼어내고 거꾸로 주거지 바닥에 박아 넣은 시설인데, 이 시설에 대해서는 저장시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나 구체적으로 어떤 용도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궁산1기부터 보이며 궁산3기의 예는 아직 없지만 궁산4기에도 보이기 때문에 궁산문화 전 기간을 통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외의 시설로는 반원상으로 돌출한 출입시설이 지탑리와 마산리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궁산3기가 되면 금탄리나 남양리, 용덕리 유적에서 보듯이 새로이 장방형주거지가 등장한다. 내부시설 중 노지는 기본적으로 수혈식이 사용되는데, 주거지의 정중앙에서 벗어나 단벽 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평면형은 원형 또는 (장)방형이며 노지 주위를 점토로 돌리거나 바닥에 점토를 바른 예가 확인된다. 이러한 노지형태는 궁산4기로 이어지게 된다. 궁산4기의 주거지는 크게 2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형태는 방형 평면 주거지로 주공이나 노지는 잘 확인되지 않으나 위석식 노지가 확인되기도 한다. 주로 소형이다(금탄리 5호주거지, 남경 37호주거지 등). 다른 한 형태는 장방형 평면에 긴 복도식 출입구를 가진 주거지로 내부에는 중앙에(장)방형 노지가 있는 형태이다(남경 12호주거지, 소정리 1·2지점). 이러한 주거지 중에는 2단 굴광을 한 예도 보인다. 남경유적 31호주거지는 2단 굴광에 내부공간은 대형 장방형 평면을 하고 있으나 복도식 출입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궁산문화의 주거지는 이와 같은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원형 또는 방형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변화하는 양상은 주변지역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강 이남지역에 방형계 주거지가 궁산 2·3·4기 단계에서도 크게 유행하는데 반해 평안남도 황해지역은 궁산3기 단계부터 장방형주거지가 등장하여 궁산4기 단계에는 장방형주거지가 유행하는 것은 차이점이라 하겠다. 또한 현재까지 자료로 보는 한 후기 단계에 이르기까지 하천변 충적지가 주요한 입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주변지역과 다른 점이다. 주변지역에서는 후기로 가면서 구릉상 입지가 현저해지기 때문이다.(임상택)

 

참고문헌

조선전사1(김용간,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90), 궁산문화에 대한연구(김용남, 고고민속론문집8,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98)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출처;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539

 

 

궁산유적(溫泉 弓山遺蹟)

남포특별시(舊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에 위치한다. 발굴 당시에는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궁산리에 속해 있었다. 유적은 평양 서남쪽 광양만에 연접한 벌판에 줄지어 있는 해발 100m 미만의 구릉들 가운데 궁산부락에 연접한 자그마한 구릉인 소궁산의 동남 경사면의 상단에 위치한다. 유적 일대는 발굴당시 해안선에서 직선거리 약 2㎞ 안으로 떨어진 위치였으나 유적 형성당시에는 해안이나 섬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유적은 1949년 봄의 간단한 시굴에서 패층이 알려지면서 확인되었고, 1950년 4월 13일에서 5월 30일까지 48일간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는 ‘조선물질문화유물 조사보존위원회’의 고고학부에서 진행하였고 중앙역사박물관 학술부원들도 참여하였다. 유물층은 약 5000㎡에 걸쳐 있는데 그 중 발굴면적은 총 150㎡에 달한다. 총 6개의 지점에서 50㎡ 구덩이 하나와 10∼30㎡ 구덩이 5개를 정리하였다. 조사를 통해 5기의 주거지와 3개의 수혈을 찾았다.

 

유적의 층위는 표토층인 부식토층 20㎝ 두께로 유적 전반에 걸쳐 덮여 있고 그 아래 30㎝ 미만의 패층이 형성되어 있다. 발굴당시 동쪽 골짜기는 이미 채토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는데, 그 단애면에 패각층이 노출되어 있어 이곳으로부터 발굴을 진행하였다. 동쪽편의 1·2호 구덩이에서 빗살무늬토기와 갈돌 등이 확인되었으나 서쪽으로 갈수록 유물층이 얇아지므로 발굴지점을 서쪽으로 옮겨 유적 전면에 걸쳐 5∼6m 거리로 시굴한 후 수혈주거지를 확인하고 그 지점을 발굴조사 하였다.

 

1호구덩이는 1949년 조사하였는데, 부식토층 아래 60∼80㎝ 두께의 패층이 동서 4m에 걸쳐 노출되었다. 패층은 굴, 백합, 새합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패층 밑은 풍화암반층이었다. 그런데 패층이 끝난 지점에서 토기를 거꾸로 박아 놓은 시설이 하나 확인되었다. 이러한 시설은 궁산문화에서 주로 주거지에서 확인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구덩이에서 확인된 시설은 주거지 내에 설치되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패층 출토 유물은 활석혼입 토기편과 갈돌, 어망추, 가락바퀴, 원반상토기편 등이다.

 

2호구덩이는 1호구덩이 동쪽 6m 지점의 패층이 노출된 단애면에 설치하였는데, 부식토 밑에 약 55㎝의 혼패토층(混貝土層)이, 그 아래에는 10㎝ 정도의 혼토패각층이 확인되었다. 그 아래에는 15∼20㎝의 재가 섞인 회색점토층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는 풍화암반층이었다. 여기서는 바닥이 상대적으로 편평하고 양 측면이 급한 경사로 이루어진 일종의 수혈을 확인하였으나 주공이나 노지 등이 확인되지 않고, 바닥이 경사져 있어 주거지로 인정하기는 곤란하였다. 내부에서는 활석질 토기편과 갈돌, 석부, 뼈바늘 등 총 9점이 출토되었으나 층위상 차이는 확인할 수 없었다.

 

3호구덩이는 1호구덩이 서북쪽 25m 지점을 택하였는데, 부식토층 아래 백합과 굴을 주체로 하는 패층(100㎝)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는 10㎝의 회색점토층, 암반풍화면이 차례로 노출되었다. 이 구덩이는 직경 5.6∼5.8m의 원형수혈주거지임이 확인되었는데, 중앙에서 노지와 토기를 거꾸로 박아놓은 시설이 확인되고 주위에는 원형으로 배치된 주공이 안쪽으로 경사지게 설치되어 있었다. 서남쪽에는 2㎡의 돌출한 홈이 확인되었다. 이 주거지를 1호주거지라 명명하였다. 노지는 0.78×0.9m의 타원형 수혈에 주위에 갈판조각을 둘러놓은 형태였다. 노지 옆의 토기를 거꾸로 박아 놓은 시설 내부에서는 30㎝ 두께의 재층이 있고 그 아래 5㎝ 두께의 굳은 녹색점토층이 퇴적되어 있었다.

 

이 구덩이의 출토 유물은 활석질의 토기편과 석촉, 창, 찔개살, 석부, 자귀, 어망추, 갈돌, 숫돌 등이 있다. 석촉은 무경양익촉, 석부는 작은 사릉부(四稜斧) 형태이다. 골각기로는 사슴뿔로 만든 뒤지개가 많았고, 송곳, 예쇄, 뼈바늘과 삿바늘이 있었다. 뼈바늘에는 베실이 그대로 달려있는 상태로 확인되었다. 장식품으로 관옥이 1점 확인되었고, 이외에 사슴, 멧돼지, 개, 물소뼈 등이 확인되었다. 6.25 전쟁과정에서 도면 전부와 야장 일부를 분실하여 보고서에서 도면을 확인할 수 없다.

 

4호구덩이는 3호구덩이의 서남쪽 60m 지점에 해당되며 부식토 층 아래 약 1m의 두터운 패각층이 노출되었다. 패층은 동서 4m, 남북 5m의 구덩이 안에 퇴적되어 있었다. 패층 아래는 풍화암반층이 노출되었으나 굴곡이 심하고 노지나 주공이 확인되지 않아 주거지로 인정할 수 없었다. 패층 내에서는 1·2호구덩이와 유사하게 점선물결무늬 토기편이 많이 출토되었고, 소형의 흙구슬, 가락바퀴도 각각 20점, 10점이 출토되었다. 이외에 송곳, 석창, 어망추, 도끼, 갈돌 등이 출토되었으나 층위상 차이는 확인할 수 없었다.

 

5호구덩이는 3호구덩이 서북쪽 5m 지점에 설치하였는데, 부식토 아래 약 110㎝ 두께의 패층이 있고, 그 아래는 풍화암반층이다. 패층은 중간의 얇은 점토층을 경계로 상하 양층으로 구분되는데, 대합조개가 중심인 50㎝ 두께의 상층을 B층으로, 굴이 중심인 60㎝ 두께의 하층을 A층으로 하였다. B층 아래에는 3㎝ 정도의 얇은 점토층이 있고 여기서 점토로 둘러싸인 방형에 가까운 노지가 확인되었다. 노지는 동서 0.75m, 남북 0.8m, 깊이 0.13m 크기이며 내부에 재가 퇴적되어 있었다. 노지 동편에는 주먹크기의 자갈돌이 100여개가 깔려 있었고 부근에서는 큰 주공도 1기 확인되었다. 이것을 2호주거지로 명명하였다. 자세한 도면은 전쟁과정에서 분실하였으나 간략한 도면이 보고서에 실려있다.

 

A층의 아래는 5㎝ 두께의 녹색점토층이 깔려 있었는데, 여기서 노지와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이를 3호주거지로 명명하였으나 도면과 야장을 전쟁과정에서 모두 분실하여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없다.

 

유물은 주로 A, B층의 패층에서 출토되었는데, 3호구덩이와 거의 유사하나 B층 상부에서 작은 옥도끼가 한 점 나온 것이 주목된다. 또한 석촉이 50여 점이나 출토되었는데, 이 중 반제품 22점이 한자리에 모여 노출되기도 하였다.

 

5호구덩이 B층이 동북쪽으로 계속 연결되므로 범위를 확장해 조사한 결과 이곳에서 직경 5.5∼6m의 구덩이에 쌓여진 패층을 확인하였고 그 밑에 점토층을 확인하였다. 이 점토층 중앙에서 노지가 확인되었고, 노지 곁에 토기를 거꾸로 박은 시설이 확인되었다. 노지는 직경 0.85m, 깊이 0.2m이며 벽돌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둘러놓은 위석식으로 발굴당시 2개만이 남아 있었다. 토기를 거꾸로 박은 시설은 위에 판석이 덮인 채 확인되었으며 내부토에서는 패각부스러기와 뼈도 확인되었다. 1호주거지와 마찬가지로 바닥에는 유기물이 썩은 듯한 녹색점토층이 5㎝ 두께로 깔려 있었다. 이외에도 80여 개의 많은 주공이 확인되었다. 일부 주공 바닥에서는 자갈돌 2∼3개가 깔려 있어 원시적 주춧돌의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이 주거지를 4호주거지로 명명하였다. 출토 유물은 실측도와 야장을 분실하여 알 수 없게 되었다.

 

6호구덩이는 1호구덩이의 서남쪽 평탄지에 설치하였는데, 발굴지점 중 가장 남쪽에 해당된다. 부식토층 아래에 약 50㎝ 두께의 혼패토층이 확인되었다. 혼패토층은 중심부 길이 약 5.2m에 달하는 장방형의 반수혈에 퇴적되어 있었다. 수혈 깊이는 0.7m이다. 동북쪽벽에 계단상의 출입구가 수혈 안쪽으로 설치되어 있다. 수혈 중앙에서 서남쪽으로 다소 편재한 곳에서 점토로 둘러진 노지가 확인되었고 주위에서 14개의 크고 작은 주공이 확인되었다. 노지는 0.7×1m의 타원형에 깊이 0.35m이다. 노지 주위에는 불에 구워진 점토가 5∼20㎝ 폭으로 둘러져 있었다. 이것이 5호주거지이다. 유물은 3·5호 구덩이에서 나온 것과 차이가 없다. 멧돼지 송곳니로 만든 낫과 골제 시문구, 관옥과 유사한 골제구슬, 물소뿔 등이 주목되는 유물이다.

 

궁산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전쟁중에 분실되고 전체의 30%만이 남았는데, 남은 것을 기준으로 할 때, 활석이 혼입된 태토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석면이나 모래가 섞인 것은 극소수이다. 무문양토기는 사질계 위주이다. 문양은 구분계 위주로 구연부에 점열문을 배치하고 동체부에는 종주어골문을 시문하며, 그 사이에 횡주어골문을 시문한 형태의 것이 가장 많다. 저부는 사선대문을 시문한 것이나 무문으로 남겨놓은 것 모두 보인다. 이외에 봉산 지탑리유적 주거지 퇴적층에도 보이는 거치상의 구획 내에 격자문을 채워넣은 변형빗살무늬토기, 점선물결무늬로 동체부를 장식한 것 등이 보인다. 이 중 변형빗살무늬토기나 점선물결무늬토기는 주로 1·2·4호구덩이에서 출토하여 3·5·6호구덩이와 유물상에서 차이를 보인다.

 

출토된 동물뼈는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연구실 배문중(裵文中)이 감정하였는데, 발굴품 중 절반만이 남았지만 사슴, 영양, 멧돼지의 수량이 가장 많고, 이외에 물소, 개, 삵, 노루 등이 확인되었다. 사슴이나 영양, 멧돼지의 하악골은 남아 있는 것만 해도 100여 점에 이른다. 어류는 사어, 대구, 경골어류 등이 있고, 조개는 굴, 백합, 섭, 동죽 등이 있다.

 

궁산유적 출토 유물은 현재 북한의 궁산문화 상대편년상에서는 궁산 1기와 3기로 편년되고 있다. 3·5·6호구덩이와 같이 주거지가 확인된 지점은 주로 구분계의 점열문+종주어골문 토기 위주인데 반해 1·2·4호구덩이는 주거지도 확인되지 않고 토기상에서도 변형빗살무늬토기나 점선물결무늬 등이 주로 확인되고 있어 차이가 난다. 이 중 1·2·4호구덩이에서 출토되는 소위 변형빗살무늬토기들에 대해 궁산3기로 편년하는 것이 현재 북한의 공식 편년관이다. 그러나 남한이나 일본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존재하며 이러한 토기를 궁산 1기와 2기 사이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어쨌든 궁산유적은 중서부지역 전기∼중기에 걸치는 주거유적으로 중요하다.

 

궁산유적은 북한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최초로 ‘궁산문화’라는 명칭을 부여한 유적으로 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1949∼50년이라는 매우 이른 시기에 중서부지역의 선사문화를 파악하기 위해 학술조사한 유적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크다. 또한 유구나 유물 면에서도 서해안에 위치한 대부분의 패총이 일반적인 주거유구를 공반하지 않고 인공, 자연유물도 매우 빈약한 것에 비해 궁산유적은 5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패층 내에서도 다량의 포유류 및 어류 뼈가 확인되어 남해안지역 패총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 서해안에서는 매우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궁산유적 발굴 이후에 이러한 성격의 유적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하고자 하는 계획 속에서 지탑리, 평양 금탄리 유적 등이 조사되었고, 이 유적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북한의 궁산문화 편년관이 확립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궁산유적의 발굴이 한반도 신석기시대 문화연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임상택)

 

참고문헌

궁산 원시유적 발굴보고(도유호·황기덕, 유적발굴보고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1957)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출처;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540

 

 

 

평양남경유적(平壤南京遺蹟)

고대사유적

 북한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남경마을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돌널무덤·독무덤 관련 생활유적.   

 

분야  고대사

유형  유적

성격  생활유적

소재지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부락

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삼석구역 남경마을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와 돌널무덤·독무덤 관련 생활유적.

 

개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부락 대동강 북안 충적대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석기시대~철기시대의 복합 유적이다.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한 지역의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물질문화를 연구하는 데 주요한 표지를 이루고 있는 유적이다.

내용

1974년 4월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남경부락의 남쪽, 대동강의 북안에 제방 공사와 관련하여 지표 조사를 하던 중 강물의 침식에 의해 잘려나간 단애면에서 문화층을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9년부터 1981년까지의 기간 동안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의 범위는 남북 너비 50m, 동서 길이 1,000m 가량이다(면적 50,000㎡). 처음 조사한 지점이 1지점, 1지점으로부터 동쪽으로 450미터 떨어진 지점의 유구군이 제2지점이다. 1지점과 2지점 사이에서는 주거지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1지점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3기(31호, 32호, 37호), 청동기시대 주거지 15기(1~10호, 30호, 33~36호), 청동기시대 무덤 3기(2~4호), 철기시대 무덤 9기(1~9호)가, 2지점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2기(12호, 17호), 청동기시대 주거지 7기(11호, 13호~16호, 18호, 19호), 청동기시대 무덤 17기(1호 등)가 조사되었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서북한 지역 전형의 신석기시대 토기 외에 경부에 융기문이 있는 토기 또한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는 남경 유적 신석기시대 유구가 조사되기 이전에는 청호리와 금탄리 유적 등에서 소량 출토된 것이 있는데, 이 유적을 조사한 것을 계기로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에도 동북한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융기문토기가 일부 들어와 있었음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남경유적의 신석기시대 주거군을 토기 비교 등을 통해 궁산 유적을 표지로 하여 설정된 궁산문화 4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 구체적인 연대는 기원전 3000년기 후반에서 기원전 2000년기 초로 설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서북한 지역의 청동기문화인 신흥동유형 전형의 팽이형옹과 팽이형호 외에도 여러 기종과 형식의 토기들이 조사되었는데, 이 가운데 북한 학계에서 남양형단지라고도 부르고 있는 변형 미송리형호 등도 포함되어 있어, 미송리형호를 중심으로 한 요동과 서북한 지역 토기문화의 흐름과 시간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남경 유적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유구 간 중복 관계와 토기 및 석기의 기종 구성 및 형식 등을 고려할 때, 기원전 10~5세기의 기간 동안 각 주거군이 일정한 단계를 이루며 변모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경 유적에서 철기시대 유적은 1~7호 옹관묘 등이 있다. 옹관은 대부분 화분형토기를 2옹 또는 3옹식으로 연결하여 횡치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6호의 경우에는 회색승문타날문 옹형토기 1점과 화분형토기 2점을 합구하여 횡치하여 놓았다. 남경 유적의 화분형토기는 대체로 동체가 다소 부른 포탄형을 하고 있는데, 1호 옹관의 막음옹으로 사용한 화분형토기의 경우에는 저부가 평저가 아닌 환저여서 마치 전국연 또는 서한 전기의 환저부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구체적인 편년을 하기는 어려우나, 화분형토기와 회색승문타날문토기의 형태 등으로 보아, 늦어도 기원전 2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남경유적은 시대와 시기가 다른 유구 간의 중복 관계가 여러 단위 확인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한 지역의 선사문화, 특히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의 유물 양상의 변화는 물론 연대를 편년하는 데 중요한 표지 유적이다. 예를 들어, 신석기시대 32호 주거지 위에 청동기시대 주거지 10호와 33호가 중복되어 있고, 신석기시대 31호 주거지 남쪽 퇴적층에 청동기시대의 2호 석관묘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9호 주거지 위에 청동기시대 8호 주거지가 중복되어 있으며 청동기시대 30호 주거지가 청동기시대의 4호와 10호 주거지에 의해 각각 중복되어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 4호 주거지 내부 퇴적층 내에 철기시대의 옹관이 조성되어 있으며 신석기시대 12호 화재 주거지 내부에 벽체와 지붕 시설을 이루고 있던 탄화목이 온전히 남아 있어 당시 주거지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 신석기시대 17호 화재 주거지의 벽체에 탄화 기둥과 벽체가 상당수 남아 있어 벽체의 목가구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남경유적 청동기시대 2기층의 3호, 10호, 11호, 16호 주거지에서는 북한학계에서 남양형단지라고도 부르는 변형 미송리형호 또한 출토되었는데, 주거지의 공반 유물과 중복 관계 등과 함께 요동~서북한 지역 미송리형호의 전개 과정 및 편년과 관련하여 중요한 표지 유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이외 36호 주거지 등에서 다량의 탄화미, 조, 수수, 콩, 기장 등의 식물 유체가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농경과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참고문헌

  • 『남경유적에 관한 연구』(김용간,석광준,과학,백과사전출판사,1984)

  • 「기원전 3~1세기 중국 동북과 서북한 지역의 물질문화와 연․진. 한」(오강원,『제43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대회문집: 원사시대 사회문화 변동의 본질』,한국상고사학회,2016)

  • 「요동~서북한지역 미송리형호의 지역문화와 사회문화적 함의」(오강원,『한국상고사학보』 85,2014)

  • 「청동기~철기시대 요령․서북한 지역 물질문화의 전개와 고조선」(오강원,『동양학』 53,2013)

  •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유형과 연문화와의 관계」(오강원,『한국상고사학보』 71,2011)

집필자

집필 (2016년)오강원(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8F%89%EC%96%91%EB%82%A8%EA%B2%BD%EC%9C%A0%EC%A0%81&ridx=0&tot=1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