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8해,신시배달5918해 단기 4354해,서기 2021해, 대한민국 102해(나뉨 73해),

무산범의구석유적(茂山─遺蹟)/회령오동유적(會寧五洞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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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시대/고고학

2020. 11. 29.

한국고고학사전(2001)

호곡동(범의구석) 유적(茂山 虎谷洞 遺蹟)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호곡동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범의구석??이라고도 부른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5차례에 걸쳐 발굴하였다. 유적은 무산읍 서쪽에 두만강과 성천수가 합쳐지는 곳에 놓여 있다. 이곳에는 ??말기?? 라고 부르는 언덕에서 시작하는 3단의 단구가 이루어져 있는데 유적은 3번째 단구 비탈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두만강가에까지 이르고 있다. 발굴 결과 4개 지점에서 50여 기의 집자리(住居址)가 드러났고 신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6시기의 문화층이 나타났다. 제1기는 신석기시대 무늬그릇이 나오는 층이고 제2~4기는 청동기시대층, 제5~6기는 철기시대에 속한다. 청동기시대는 3시기로 구분되는데 제2기층에서 붉은간토기(紅陶), 제3기층에서 갈색간토기(褐陶), 제4기층에서는 검은간토기(黑陶)가 나오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유적의 층위는 여러 시기의 집자리들이 중복된 관계로 자연 퇴적층에 의한 구분이 매우 어렵게 되어 있으나 대체로 보면 겉흙층(두께 60~80㎝) 아래에 있는 문화층의 두께는 160~180㎝쯤 되며 시기구분의 기준은 집자리들이 중복된 상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모두 10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집자리의 긴축(長軸)은 대부분 동~서 방향이며, 평면은 방형(方形)으로, 한변의 길이가 3.5~4.5m의 규모로서 큰 차이는 없다. 움의 깊이는 0.5~1.0m 사이에 위치하며, 바닥은 7기가 원토층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3기는 진흙을 다짐 처리하였다. 내부시설로는 기둥구멍(柱孔)과 화덕자리(爐址)가 확인되었으며, 화덕은 강돌(川石)을 이용하여 타원형(?圓形)으로 돌려 만들었다. 범의 구석 1기층에서 나온 무늬그릇들은 완전히 복원된 2개체(點列文) 이외에는 출토량이 적으며 무늬의 짜임새도 매우 간략하다. 번개무늬(雷文), 퇴화된 생선뼈 무늬(魚骨文), 물결무늬(波狀文), 그리고 겹입술 계통의 공렬 + 빗금무늬가 있다. 민무늬그릇은 들린굽과 평편밑의 납작밑으로 만들어졌는데 보시기, 바리(鉢), 굽손잡이 그릇 등이 있다. 범의 구석에서 나온 흑요석기는 모두 1,000여 점이나 되며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길쭉한 버들잎형으로 눌러떼기한 격지(剝片)들과 피라미드 모양의 몸돌(石核)이다. 그밖에 반마반타(半磨半打)의 도끼류, 곰배괭이와 갈돌(石棒), 그물추(漁網錘) 등이 있다. 뼈 도구로는 송곳과 바늘 종류가 있으며, 새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대롱구슬(管玉), 주판알 모양에 무늬가 새겨진 가락바퀴(紡錘車) 등이 출토되었다. 연대는 B.C. 3000년기 후반기로 알려져 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 나온 집자리는 모두 16기이다. 장방형(長方形) 평면의 움집으로 집자리의 크기는 보통 40~70㎡이고 작은 것은 20㎡ 되는 것도 있다. 제2기의 집자리는 긴축이 남~북 방향으로 놓이고 움이 깊은 것이 특징이다. 유물은 화살촉(石鏃),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도끼(石斧) 등이 나온다. 15호 집자리에서는 바닥에 나무판자를 깔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2층의 집자리에서 기장과 수수 낱알이 나온 것을 보면 당시 주민들이 곡식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농사가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40호 집자리에서는 뼈로 만든 갑옷 조각(札甲)이 나와 방어용 무기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제3기의 집자리는 긴축이 동~서 방향으로 놓이고 기둥구멍이 4줄로 나있고 주춧돌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유물로는 버들잎모양 돌화살촉(柳葉形石鏃)이 있다. 제4기의 집자리는 긴축이 남~북 방향으로 놓이고 3~4줄로 주춧돌이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토유물은 간석기(磨製石器)가 많아지고 앞 시기에 많이 쓰이던 흑요석뗀석기가 줄어든다. 3기의 19호 집자리와 4기의 33호 집자리에서는 흙단추가 나왔고 4기의 8호 집자리에서는 돼지 조각품과 흙을 빚어 만든 남자인형, 점뼈(卜骨) 등이 나와 신앙 생활에 관한 증거와 함께 남성인형은 청동기시대에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보인다. 50호 집자리에서는 청동 덩어리가 나온 것이 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의 연대는 B.C. 2000년기 후반에서 1000년기 전반에 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북한의 선사고고학 3-청동기 시대와 문화(장호수, 백산문화, 1992),

무산 범의구석 유적 발굴보고(황기덕, 고고민속문집 6, 1975),

무산 범의구석 유적에서 나온 인골에 대하여(백기하, 고고민속 65-3, 1965),

무산 범의구석 유적에서 나온 짐승뼈에 대하여(김신규, 고고민속 63-4, 1963),

무산 범의구석 원시유적 발굴 중간보고(황기덕, 문화유산 60-1, 1960)

 

사전명

한국고고학사전(2001)

 

출처;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1472

 

 

 

무산범의구석유적(茂山─遺蹟)

선사문화유적

 북한 함경북도 무산군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민무늬토기·돌화살촐 등이 출토된 집터.   

 

 

이칭  무산호곡동유적

분야  선사문화

유형  유적

시대  선사-석기

성격  집터

건립시기  신석기시대, 철기시대

소재지  함경북도 무산군 호곡동

 

정의

북한 함경북도 무산군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민무늬토기·돌화살촐 등이 출토된 집터.

 

키워드

개설

일명 ‘무산 호곡동’이라고도 한다. 두만강 상류의 계곡과 성천(城川)이 합류하는 주변에는 선사 유적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호곡동 유적은 이들 선사유적의 중심부인 무산읍 서쪽에 있다.

이 유적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 5차에 걸쳐 조사되어 약 40개의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층위는 두터운 퇴적층이 여러 시기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일부는 교란되어 있었다.

 

내용

주거지들은 그 형태와 출토유물에 의해 크게 6기로 나누고 있다.

제1기에 해당되는 제9호 주거지는 한 변의 길이가 약 380㎝인 정방형을 이루며 움의 깊이는 108㎝이다. 기둥구멍은 15개로 동서, 남북방향으로 각각 4줄로 뚫려 있다. 화덕은 중심에 있고, 바닥을 10㎝ 정도 오목하게 판 뒤 주위에 15∼25㎝ 크기의 강돌 8개를 돌려 놓았다.

출토유물은 번개무늬 등의 유문토기(有文土器)와 무문토기·돌도끼〔石斧〕·방추차(紡錘車)·연석(碾石)·가래 및 흑요석기(黑曜石器) 등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주거지가 방형 또는 장방형이고, 유물로 유문토기가 출토되는 점이다.

제2기에 해당되는 제20호 주거지는 남북 470㎝, 동서 420㎝의 장방형으로 움의 깊이는 140㎝ 내외이다. 화덕은 동쪽으로 치우친 북편 가까이에 있고, 기둥구멍은 잘 남아 있지 않다.

바닥에서 발견된 유물은 무문토기편·홍도편(紅陶片) 등과 흑요석기편·돌도끼·연석·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및 골기(骨器)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특색은 주거지가 장방형이고, 유물로 홍도가 나타나는 점이다.

제3기 유적인 제31호 주거지는 크기가 동서 540㎝, 남북 460㎝이고, 움의 깊이가 약 70㎝이다. 바닥에는 3줄로 주춧돌이 놓여 있고, 바닥의 동쪽에 반월형으로 출입구가 있으며, 지름 60∼70㎝, 높이 25㎝의 화덕이 있다.

유물로는 갈색마연토기·돌화살촉·송곳·반월형석도·방추차·흑요석기 등이 있다. 이 시기의 주거지는 장방형이 대부분이고 주춧돌이 나타나며, 갈색마연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제4기 유적인 제9호 주거지는 움의 깊이가 100㎝ 내외이고, 크기가 남북 1,150㎝, 동서 620㎝이다. 움의 동·서벽면에 7개의 초석(礎石)이 서로 대칭되게 놓여 있어, 3줄의 주열(柱列)을 이루고 있다.

화덕은 중앙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고 바닥을 좀 파낸 형태이다. 북벽에는 출입구로 생각되는 높이 20㎝, 너비 10㎝의 계단형의 대(臺)가 있다. 출토유물은 흑도(黑陶) 외 돌화살촉·돌도끼·석창(石槍)·반월형석도 등이다. 이 시기의 특색은 주거지에 주춧돌이 사용되고, 유물로 흑도와 마제석기가 출토된다는 점이다.

제5기 유적인 제5호 주거지는 동남쪽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남북 560㎝, 동서 480㎝의 크기이며, 바닥 중심부에 화덕이 있고, 주거지 서쪽에 5개, 남쪽에 4개의 주춧돌이 있다.

유물로는 흑도·이중구연토기(二重口緣土器)·마제석기·숫돌·송곳·철기편(鐵器片)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제4기와 같이 흑도가 나타나고, 새로이 철기편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제6기의 주거지인 제17호의 경우 남북이 1,270㎝, 동서가 770㎝로, 바닥은 진흙으로 잘 다져졌다. 주춧돌은 남북으로 걸쳐 4개씩 2줄로 놓여 있다. 바닥에는 굵은 기둥이 타서 넘어진 길다란 숯덩이가 있고, 중심에 큰 화덕이 있으며 주변에 6개의 작은 화덕이 있다.

유물은 토기로 흑도·우각형파수부토기(牛角形把手付土器)·고배(高杯)·시루가 있고, 철기로 철부(鐵斧)·철겸(鐵鎌) 등과 청동팔찌와 청동반지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특색은 우각형파수부토기의 출현과 철기의 본격적인 사용이다.

 

의의와 평가

이상 주거지들의 편년을 보면, 제1기는 신석기시대 후기, 제2∼4기가 청동기시대, 제5·6기는 철기시대로 보고 있다. 이 유적은 다소 교란되었으나 약 40개의 주거지가 발굴된 집단주거지로 한반도 동북지역의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 「무산범의구석유적발굴보고」(황기덕,『고고민속논문집』 1975년 6집,사회과학원출판사)

  • 「무산범의구석유적에서 나온 짐승뼈에 대하여」(김신규,『고고민속』 1963년 4호,사회과학원 고고 및 민속학연구소)

  • 「무산읍 범의구석 원시유적 발굴 중간보고」(황기덕,『문화유산』 1960년 1호,과학원출판사)

집필자

집필 (1996년)최성락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무산범의구석유적(茂山─遺蹟))]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AC%B4%EC%82%B0%EB%B2%94%EC%9D%98%EA%B5%AC%EC%84%9D%EC%9C%A0%EC%A0%81&ridx=0&tot=2275

 

 

회령오동유적(會寧五洞遺蹟)

선사문화유적

 북한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에 있는 청동기시대 토기류·석기류·골각기 등이 출토된 집터.   

 

함북 회령 오동 석기시대 유적 근경

 

분야  선사문화

유형  유적

시대  선사-청동기

성격  집터

건립시기  청동기시대

소재지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 오동

 

정의

북한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에 있는 청동기시대 토기류·석기류·골각기 등이 출토된 집터.

 

키워드

개설

이 지역에는 오동 유적 외에도 같은 읍내에서 성동(城東)·봉의(鳳儀)·검은개봉[黑狗峰]·금생(金生)·매지허리[沙乙峴] 등지의 유적이 알려져 있다.

두만강 중류 오른쪽 연안 평야지대에 있는 오동 유적은 그 중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유적으로 수만 평에 달한다. 유물포함층은 선사시대층에서 역사시대층까지 형성되어 있다.

 

내용

이 유적의 존재는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알려져 왔으나 정식발굴은 1954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1955년에 2차 발굴이 실시되었다. 약 70여 일 동안에 400㎡ 범위로 실시된 두 차례의 발굴 결과, 6기의 집터[住居址]와 작업장이 발견되었고, 유물은 토기·석기·골각기·인골(人骨) 등 5,0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집터는 모두 장방형이며, 내부시설로는 기둥구멍[柱孔]과 노지(爐址)·석기제작장이 확인되었다. 벽재(壁材)로 쓰인 갈대와 싸리나무로 엮은 진흙덩이가 발견되었다. 집터의 크기는 확인된 것의 경우, 5.8m×4.1m, 5.2m×4.5m, 9.6m×4.5m, 8.4m×6.5m이다.

출토유물은 흑요석기(黑曜石器)·돌도끼[石斧]·돌끌[石鑿]·공이[敲石]·반달돌칼[半月石刀]·돌가락바퀴[石製紡錘車]·숫돌[砥石]·골검(骨劍)·뼈살촉[骨鏃]·골제시문구(骨製施文具)·뿔괭이·치아제장식품(齒牙制裝飾品) 등의 석기·골각기와 다량의 토기류이다.

특히, 토기는 갈색토기·갈색간토기[褐色磨硏土器]·적색간토기·흑색간토기·젖꼭지손잡이토기[乳頭把手土器] 등 다양하다. 갈색간토기→적색간토기→흑색간토기→젖꼭지손잡이토기의 순서로 시기의 차이를 보인다.

이 밖에 주거지 안에서 불에 탄 사지골(四肢骨)·지골(指骨)·치아 등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또한 표토층에서는 주조한 투겁도끼[鑄造銎斧]가 채집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유적은 청동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토기·주거지·석기 등의 형식으로 보아, 서기전 6세기∼서기전 4세기에 걸치는 장기간의 청동기시대 취락의 성격을 띠며, 이어진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 『회령 오동 원시유적 발굴보고』(도유호,과학원출판사,1959)

집필자

집필 (1997년)노혁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회령오동유적(會寧五洞遺蹟))]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5%A8%EB%B6%81%ED%9A%8C%EB%A0%B9%EC%98%A4%EB%8F%99&ridx=0&tot=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