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7해,신시배달5917해 단기 4353해,서기 2020해, 대한민국 101해(나뉨 72해),

27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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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고고학자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여행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7)‘조선의 부활’ 알린 청진동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7)‘조선의 부활’ 알린 청진동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ㅣ경향신문 ㆍ도심 한복판서 끄집어 낸 ‘시전’ ㆍ‘서울 600년’ 서민의 삶 켜켜이 2003년 12월 말. 문화운동가 황평우씨가 종로 청진동을 기웃거렸다. 건설사(르메이에르 건설)가 주상복합건물 사업시행을 위해 낡은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었다. 재개발 면적은 8665㎡.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3만㎡ 이상의 공사를 벌일 때 문화재지표조사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이곳은 지표조사 없이 공사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폭삭 주저앉은 그대로 확인된 조선시대 시장인 시전(市厘)의 행랑(行廊). 조선정부는 시전을 개설하면서 방-마루-방-창고를 하나의 단위(40평 ..

21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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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고고학자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여행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6) 인천 계양산성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6) 인천 계양산성 인천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ㅣ경향신문 ㆍ1600년전 백제인의 논어책을 엿보다 2005년 5월11일.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인천 계양산성 내부의 집수정을 발굴하고 있었다. 계양산성은 풍납토성 발견(1997년)과 함께 이 교수가 눈여겨봤던 곳. 도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엔 바다와 강(江)이 고속도로 역할을 했을 것이 아닌가. 이 교수는 한성백제시대(BC 18~AD 475년) 중국과의 교역 관문일 것 같은 한강 하구의 계양산성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체육시설이 있었던 이곳(집수정)은 골짜기였기 때문에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그러니 집수정이 있었던 게지. 겉으로 보기에 지름이 13m 정도 돼보였는데….” 조심..

13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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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고고학자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여행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5)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下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5)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下 경주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ㅣ경향신문 ㆍ佛法의 힘 빌려 唐軍 물리쳐 문무왕의 판타지 같은 방책 670년. 당나라 유학 중인 의상대사로부터 당나라 50만 대군의 침공 급보를 들은 신라 조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문무왕은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한다. “문무왕은 여러 신하를 불러모아 방책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나섰다. ‘근래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문무왕 법민조) “문두루비법을 쓰십시오” ‘그래 불법(佛法)에 기대자.’ 문무왕은 당장 명랑법사를 모셨다. “명랑이 아뢰었다. ‘낭산(狼山)..

07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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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고고학자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여행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4)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上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4)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上 입력: 2008년 12월 05일 16:54:39 ㆍ당나라 횡포 휘둘리던 신라 구국의 뜻을 사찰에 담다 당나라 침략의 급보를 받고 구국의 일념으로 세운 사천왕사. 신들이 노닐던 신유림(낭산)과 선덕여왕의 전설이 담긴 선덕여왕릉, 그리고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조성한 망덕사지 등 1400년 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들이 한꺼번에 보인다. 671년 7월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신라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낸다. “~슬프다. 예전에는 충성과 의리를 다하더니 이젠 역신이 되었구나. 이제라도 겸손한 의리를 회복하고 순종한다면 제사와 사직은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당나라 총관 설인귀) 이것은 잘못하면 나라..

29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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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고고학자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여행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3) 동래읍성 下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3) 동래읍성 下 입력: 2008년 11월 28일 17:47:39 ㆍ조총 공세 속절없이 함락 왜병들 살육에 ‘아비규환’ “조선을 정벌할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라.” 1592년 1월,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왜병의 총병력은 30만명이었다. 마침내 4월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 여 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강토를 피로 물들인 치욕의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① 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현 부사. ②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③..

22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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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고고학자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여행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2) 동래읍성 上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2) 동래읍성 上 출처;경향신문: 2008년 11월 21일 17:28:52 ㆍ해자 바닥에 수북이 왜병 만행 ‘몸서리’ 1731년(영조 7년) 어느 날. 동래성 수축을 위해 공사를 벌이던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했다.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이 뻔한 백골들이 다수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 사이에 띠를 이뤘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여지집성·輿地集成’ 기록에서) 도랑에 묻힌 415년 전의 역사 그로부터 꼭 274년 뒤인 2005년 4월 어..

16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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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고고학자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여행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1)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下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21)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下 경향신문 : 2008년 11월 14일 17:21:40 ㆍ4세기 국내산 갑주 대거 출토‘임나일본부설’ 허구를 밝히다 흥분한 조합원이 휘두른 호미는 조합과 부산시의 창구역을 맡은 박유성의 귀 밑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쳤다. “모골이 송연했어요. 주민들도 흥분할 만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에 대한 애착이 어지간하잖아요. 새 연립주택을 지으면 집값이 올라갈 것이 뻔했는데, 문화재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니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박유성씨) 주술적 의미로 나무에 달아 흔들었던 칠두령.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은 부산시의 대안마련으로 극적인 타협점을 찾는다. 현장의 토지매입에 적극 나서는 한편, 집을 지을 수 없게 된 조합원들에게 다른 ..

09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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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고고학자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여행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0)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上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20)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上 경향신문 : 2008년 11월 07일 17:34:29 ㆍ가야고분 속 신라 금동관의 사연을 더듬다 피란민의 애환이 담긴 무허가 판자촌. 지상의 가난한 이들의 삶터 밑엔 부유하고 강력했던 1500년전 선인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지만 말머리장식 뿔잔·철덩어리·금관은 그들이 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터전을 잡았던 부산 동래 복천동 구릉. 그러나 이곳은 자연구릉이 아니라 AD 2~AD 7세기 사이 500년간이나 조성된 옛 선인들의 공동묘지였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 부두에~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현인의 ‘굳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