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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불상 논산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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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리포터

2020. 7. 17.

고려시대 불상 논산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에 대하여

충남 유형문화재 제55호


충청남도를 여행하다보면 참으로 다양한 역사적 유물과 만나게 되는데요, 그중에 오늘은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의 충남 유형문화재 제55호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계룡도령이 오늘 소개하려는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은 큰 오류가 두 가지 있어서 특별히 그 부분에 집중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충청남도 논산시에는 다양한 종교적 유물들이 남아 있는데, 연산면의 신풍리 마애불과 상월면의 천년 인연 상도리 마애불을 비롯해 은진면에 있어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연산면 송불암 미륵불, 관촉동 집마당에 있는 은진면 관촉리 비로자나석불입상,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그리고 지금 소개하려는 부적면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은 알려진 주소 자체부터 잘못되어 있습니다. 모든 자료에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 산 4'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그곳은 운제사의 옛 절터의 주소이고, 현재는 그 절터 중 한 곳인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 129-44에 자리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덕평리 고 박원석씨 집 울안에 밑부분이 약간 땅에 묻혀 있는 모습(아래의 사진에 묻혔던 부분의 표시가 뚜렸하죠?)으로 있다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운제사지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지면서 지금은 남향으로 돌려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운제사에서는 남서 방향의 관촉사 은진미륵불을 지그시 바라보고 서 있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보며 이곳을 찾던 신자들은 은진미륵의 인자한 작은 어머니라고도 불렀다고 전합니다.
 

석불의 불두(佛頭)는 둥근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인 육계는 과하지 않게 큼직하고, 얼굴은 파손이 심하여 이목구비의 일부만이 남아 있지만 눈·코·입은 적당한 크기로 뚜렷한 양감을 가지고 있으며 풍만한 얼굴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은 전반적으로 달걀형의 동그란 윤곽을 지녔지만 신체에 비해서는 큰 비례를 보이고 있습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이고 귀 뒤쪽의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을 마치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것처럼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크게 묘사되는 귀 부분은 마멸이 심해 세부 묘사가 잘 보이지 않지만, 그 긴 길이는 추측이 가능한 정도입니다.

그렇게 팔 아래로 내려온 옷은 양쪽 다리에서 서로 나뉘어 흐르며 허벅지와 종아리 주변으로만 두 겹의 긴 타원형 옷주름을 표현하고 하체의 육감을 강조하고 있어 특이한 경우라고 합니다.

이렇게 발 아래까지 내려온 옷자락은 은행잎 형태의 옷주름을 이루며 마무리되고 있는데, 사진에서 보듯 법의 끝자락까지만 나타나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어떤 대좌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으로 옮겨 세울 때 유실된 듯하나 어딘가에 발굴 자료가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해 소개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석불의 전면에는 방형판석 2매와 장방형의 연화문 평석 1매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조선시대 것으로 보이는 아래쪽은 팔각이고 위쪽은 사각형인 특이한 형태로 높이가 1.08m인 팔각 돌기둥 1개가 있습니다.

석조여래입상은 전체 흐름으로 보아 오른손의 경우 '시무외인(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손 모양으로, 중생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 준다는 뜻을 지니고 있음)을, 왼손은 부처가 중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준다고 하는 의미의 수인인 '여원인'(시원인, 만원인이라고도 불림)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파손이 너무 심해 정확히 알아보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논산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을 보면 전반적으로 입체감이 뚜렷하고 전체적으로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전체적인 비율에 맞지 않는 크고 거대한 두부는 마치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도 닮아 있는데 뭔가 의도를 가지고 완성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나요?

하지만 세밀함이 잘 보존된 몸체 전면과는 달리 두상과 양팔은 의도적으로 보일 정도로 부서져 있는데 억지스럽게 부서진 양손을 보면 이렇게 된 이유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동안 깨끗하게 유지되더니 이번에 만난 불상은 대나무숲 때문인지 예전처럼 불상이 전체적으로 검게 변색되어 있으며 이끼의 번식으로 표면이 부식하여 떨어져 나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불상의 뒷면은 별도의 조각 없이 평평하고 납작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학계에서는 돌로 된 거신광배를 세우려는 조치로 보고 있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아야만 보이는,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의 등에 글씨가 있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없는 듯합니다.
 

무슨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탁본이나 물을 뿌려서 확인한다면 몇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고려시대의 우수한 불상작품으로 평가받는 논산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의 특징은 불신의 크기가 1.95m나 되는 거상(巨像)인 점, 조각의 솜씨가 매끈한 점, 딱히 짚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당당해 보이는 모습, 그리고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던 운제사(雲際寺)가 당시 개태사(開泰寺) 다음가는 고려시대의 대사찰이었던 점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문신이던 정공권(鄭公權, 1333년∼1382)의 시(詩)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신이 시를 쓴다? 물론 이순신 장군도 시를 쓰고 난중일기를 남겼습니다만 뭔가 이상해서 여기저기 확인한 결과 대부분의 자료에서 정공권은 무신(武臣)으로 소개되어 있더군요.
 
무신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정공권(鄭公權)은 "원재집(圓齋集)"을 저서로 남긴 문신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초명은 정추(鄭樞), 자는 공권(公權)이었으나 뒷날 초명을 버리고 자를 이름으로 썼는데 호는 원재(圓齋), 시호가 문간(文簡)이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포의 아들입니다.

혹시라도 앞으로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을 소개할 경우 주소지는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 129-44'로 소개하고, 정공권을 무신으로 소개한 글을 그대로 옮기지 말고 반드시 '문신'으로 바꾸어서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이래야만 인터넷 특성상 잘못된 정보의 무한 유포을 막고 바른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겠지요. 

계룡도령의 주장을 요약하면, 첫째,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의 소재지를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 129-44'로 제대로 밝힐 것, 둘째 이 불상에 대해 시를 쓴 것으로 전하는 정공권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라고 바르게 알릴 것 등입니다.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을 찾아가면 입구에 주차장이 있고, 주변에 봉계공윤유선생영당과 부황역, 그리고 사계천을 끼고 돈암서원이 있었던 김집선생사당이 있고 그곳에서 옮겨 세워진 돈암서원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