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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 말없이 선비정신을 가르치는 곳 사계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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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리포터

2020. 7. 18.

 

 

 계룡 말없이 선비정신을 가르치는 곳 사계고택 

 김장생 선생이 머물던 사계고택 

 



이름 모를 새들이 한낮의 고즈넉한 고택풍경을 가르고 지나갔다. 때 맞춰 새처럼 한 무리로 모이는 사람들이 고택에 들어섰다. 아이와 엄마로 구성된 모임인 듯, 한 엄마가 해설을 하고 아이들이 듣고 묻는 모습이었다. 엄마들이 각자 공부로 무장한 듯, 김장생 선생의 스승인 율곡 이이, 선생의 아들인 김집, 또 선생의 혼인관계, 임진왜란 등 역사적인 인물과 배경이 리듬을 타며 이어졌다.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사계고택의 기와집은 3천 평 가까운 거대한 규모로 정갈하다. 양쪽대문에 붙은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한자가 다시 읽힌다. 2020년이 시작되고 봄이 오기 전부터 발발한 코로나19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기에 그 글이 새삼 기도가 되었다.
 
기와집 너머로 보이는 고층아파트, 한구석에 놓인 빨간 소화기, 그리고 높이 서 있는 전봇대가 아니라면 사계고택에서 오롯이 조선시대 중기의 분위기를 느낄 것 같다.
  


 
양반을 중심으로 과거제도가 있고 유학교육을 숭상하던 시대. 예학(禮學)의 대가 김장생(1548∼1631) 선생이 사계고택에서 훗날 쟁쟁한 유학자가 될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 아직은 ‘어린’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하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사계고택에는 김장생의 일대를 기리는 영상물이나 그의 학문,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과 예절교육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관이 있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모두 폐쇄된 상태다. 다만 고택을 둘러보며 관직을 떠나 지금의 이곳으로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던 선생의 꼿꼿한 선비정신을 더듬어 볼 뿐이다.
 
선생은 슬하에 9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두었고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둘째 아들 김집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예학을 발전시켜 문묘에 종사되었다. 부자가 함께 문묘에 종사된 유일한 경우였다. ‘문묘(文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우리나라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있는데, 곳에 따라 사성(四聖), 공자의 제자, 학식이 많은 선비 등 신라 이후 우리나라의 큰 선비들을 함께 모신 곳이다. 김장생 선생 문묘교지는 충남 논산 연산면 고정리(충남유형문화재 제 128호 지정)에 있다.
 

사진 왼쪽의 '영당', 영당은 선생이 돌아가시고 출상하기 전 이곳에 시신을 모셨던 곳이다 


 
사계고택은 선생이 55세 되던 1602년(선조 35년)에 건립하였고 선생과 정부인(貞夫人)인 순천김씨가 거주하던 곳이다. 선생의 나이 19세에 창녕조씨와 혼인하였으나 39세에 사별하고 2년후인 41세에 순천김씨와 재혼하였다. 순천김씨는 선생이 별세하자 애통해 하다가 3년상을 치르고 난 후 선생을 따랐다. 1906년 부인은 열녀명정을 받았다.
 


고택의 낮은 흙 담벼락을 보니 그늘만 있다면 그 자리에 쪼그려 앉고 싶다. 눈이 가는 대로 햇빛이 튕기듯 눈이 부시다. 한 아이가 큰 소리로 ‘저기 초가집이 있어요~’라고 하자 아이들이 그쪽으로 몰려간다. 뒤따라가는 엄마의 설명이 이어진다. 날씨가 더우니 몸이 먼저 고택 아래 초가의 그늘로 간다. 한 엄마가 ‘여기는 사계고택의 살림을 돌보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말한다.
  


초가 한구석에 놓인 엎어진 돌절구는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흙벽엔 물지게가 걸렸다. 물통을 짊어졌던 무거운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 길게 누워 쉬고 있다. 절구에 곡식을 빻거나 물 긷는 이들의 고된 숨소리가 귓가에 들릴 것처럼 생생하다. 고택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이들에게 그래도 가장 편한 공간이었을 이곳, 부엌으로 쓰였을 한 귀퉁이에는 플라스틱 바가지가 수백 년을 뛰어 넘어 느닷없이 들어온 것 같다. 
  


 
초가마당엔 두 팔을 벌려 안길 만큼의 키 큰 가죽나무와 회화나무 아래 그늘이 넉넉하다. 가죽나무 감칠맛 나는 냄새가 코에 감도는데 옆에 있는 회화나무는 볼수록 음전하다. 언뜻 보면 이파리가 아까시나무와 비슷해 평범해 보이지만, 이 나무를 집에 심으면 학자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회화나무가 진실을 밝혀주는 힘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송사를 진행하는 재판관은 반드시 회화나무 가지를 들고 재판했단다. 선생의 고택에 회화나무가 있는 건 어쩜 너무나 당연하다. 
 


 
전시관이 열렸다면 더 많은 사계선생의 역사와 유물 등을 볼 수 있었는데, 돌아가는 걸음이 아쉽다. 고택이 지어진 지 400여 년이 넘은 지금, 사계선생의 꼿꼿한 선비정신은 말없이 우리를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