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글

빛벌 2005. 12. 12. 12:58
내용은 조금 길지만.. 수기형식이라. 읽기에 지루하진 않을겁니다.

日군함들-항공기 침공 물리친 1954년 '독도대첩'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 수기] "우리는 이렇게 독도를 지켰다"
[프레시안 박태견/기자]"언제 나라가 위태로울 때 관군이 나라를 지킨 적이 있던가. 의병이 지켰지."

옛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이다. 임진왜란때 그러했고, 구한말 때도 그러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례를 멀리서 찾을 일도 아니다. 지금 일본의 망동으로 전 국민을 분노케 하고 있는 독도의 경우만 해도 그러하다. 6.25후 한국정부의 행정력이 독도까지 미치지 못했을 때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는 우리땅"이라고 외치며 군함들과 항공기까지 동원해 독도를 침공한 일본을 보잘 것 없던 무기들로 치열한 전투끝에 물리친 이들도 다름아닌 '의병'들이었다.

고 홍순칠(1929~1986) 독도의용수비대장은 생전에 이들 이름없는 민간 의병들의 '독도지키기 투쟁 비사'를 '독도의 숨은 사연들'이란 이름으로 한 잡지에 수기 형식으로 8년간 연재했고, 이 수기는 몇해 전 <이 땅이 뉘 땅인데!>(혜안 刊)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홍 대장의 수기는 20대 중반의 울릉도 청년들 40여명이 왜 물도 나오지 않고 연간 강우량이 1천3백~1천4백mm나 돼 1년에 반 정도는 햇빛도 볼 수 없고 망망대해라 습기도 많은 독도에서 자비를 털어 무기와 식량을 구입해, 장장 3년 8개월동안 전함과 항공기로 중무장한 일본과 목숨을 건 치열한 전쟁을 치렀는가를 감동적으로 증언해주고 있다. 특히 이들의 뒤에 1883년 독도로 이주한 홍 대장의 조부 홍재현 옹의 '치열한 민족정신'이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숙연케 한다.

지금 우리 국민은 임란때 한산대첩 등 충무공의 대승을 '3대 대첩(大捷)'이라 부르며 해마다 축제를 열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홍순칠 대장 등 민간 의병들이 절해고도에서 외로이 일본 군함들과 항공기의 독도침공을 치열한 전투끝에 물리친 1954년 11월21일의 '독도대첩(獨島大捷)'에 대해선 그 실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젊은층일수록 그러하다.

이에 혜안출판사의 양해를 얻어 홍순칠 대장의 수기중 일부를 소개한다. 일본의 망동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자랑스런 독도지키기 투쟁사를 모른다면 더없이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울릉도와 독도의 개척자, 할아버지 홍재현 옹

1883년 음력 4월 초8일 강원도 강릉에서 울릉도로 낙향한 할아버지(홍재현 옹)께서 4일간 뱃길로 해서 지금의 울릉군 북면 현표동에 당도하셨을 때, 그 때 울릉도 주민이라고는 고작 두 가구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하루는 높은 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먼 동쪽바다에서 또하나의 섬을 발견하였다. 일찍이 읽은 바 있는 <세종실록> 및 <동국여지승람> 등 고서에서 밝힌 우산도(于山島), 지금의 독도임을 짐작케 되었고, 1897년 6월에 할아버지께서는 독도 길에 올라 그때 울릉도에서 향나무 한그루를 가져가서 지금의 독도 동도에 심었다.

할아버지는 울릉도에 돌아올 때는 바다사자 세 마리를 잡아와서 울릉도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칡과 소라나 생복만으로 연명하던 주민들에게 지방질을 공급하게 된 것을 퍽 기뻐하시며 이후로는 지방질을 독도에서 얻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다음해(1898년) 독도에 바다사자를 잡으러 가셨는데, 의외로 그곳에서 일본인 무라카미(村上)란 사람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대화해본즉 그들은 생업으로 바다사자를 잡아파는 동물상이라 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이 섬은 자고로 우리나라 땅인지라, 앞으로는 두번 다시 이 섬에 오지말 것을 얘기하였다. 할아버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본인이 타고온 배에 동승, 일본으로 같이 갔다.

일본에 가신 할아버지는 그곳 관헌에 울릉도와 일본사이에 위치한 우산도, 지금의 독도는 한국의 땅인지라 앞으로 일본인의 출어를 금지할 것을 당부하고 일본인이 내주는 배로 울릉도로 돌아오셨다고 내가 어릴 때 여러 번 무용담처럼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할아버지께서는 평생을 두고 돌섬(할아버지가 부르던 독도명)은 우리땅이며 울릉도의 속도인지라 울릉도 사람이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해방후인 1948년 6월30일 울릉도 어민들이 독도에 출어하였다가 폭격 연습중이던 미 5공군의 오폭으로 30여명이 폭탄에 맞아죽은 사건이 있다. 경북도지사가 1951년 독도에 위령비를 세울 때 할아버지께서 노구의 몸으로 독도에 같이 가셔서 조사를 낭독하셨다.

"천지신명이여, 이 섬은 하늘이 주신 우리의 땅이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포의 생활의 터전이기에 우리 동포가 아끼고, 또 지켜나갑니다. 오늘도 30여명의 우리 동포는 돌섬의 수호신으로 이 섬을 지키고자 합니다"라고 하시던 그 애절한 목소리의 조사 끝대목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독도에 다녀오셔서 "순칠아, 멋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반문하는 필자에게 "멋이란 외관인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참 멋이란 '인간 내재(內在)'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진(眞)의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가 싸워 독도를 되찾아라"

6.25가 터졌을 때 내가 소속된 기갑연대는 청진까지 진격했다가, 나는 원산 부근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후송돼 육군병원 생활을 하다가 1952년 7월 명예제대를 하고 지팡이를 짚고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무척 반가이 맞아주시면서도 "너 영영 병신이 되는 것은 아니냐"고 무척 걱정을 해주셨다.

어느날 지팡이를 짚고 경찰서장을 찾아갔다가 뜻밖의 사태를 목격하였다. 경찰서 마당 한쪽에 '島根縣 隱岐郡 竹島(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란 표목이 높여있는데, 그 크가기 4.5각이고 길이는 6척이나 됐다. 그 순간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얘기로만 수없이 들었던 독도사태가 실제로 발생하였구나!'

"서장님, 저 마당의 팻말이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서장의 설명은즉 독도에서 출어한 울릉도 어민들에 의해 독도 현지에서 일본이 자국영토 표기를 한 것이 발견돼 경찰서장이 대응조치로 '한국 울릉군 독도'란 팻말을 꼽았는데, 그후로도 이같은 팻말 바꿔치기가 여러번 있었다는 것이었다. 근래에 와서는 미역 따는 우리 어부들까지 일본의 위협을 받고 있어 여간 걱정이 아니라고 했다.

꽤씸한 일본놈들의 소행에 나는 분노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6.25파른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의 행정권이 독도에 미치지 못한 틈을 타서 또다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폭력으로 선량한 어민들을 위협하는 파렴치한 일본당국의 처사를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경찰서에 다녀온 나는 할아버지께 그간의 오고간 얘기이며, 미역 따러 간 우리 어민들이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함의 위협으로 작업을 중단하고 울릉도로 쫓겨 돌아온 사실등을 소상히 전해드렸다. 할아버지는 분개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울릉도를 개척할 당시 어려움도 많았고 일본사람과는 죽고 죽이는 싸움도 많이 했는데, 이제 우리가 무엇이 두려울 게 있느냐. 나는 늙어서 독도에 갈 수 없다지만 너희들은 군에서 전투하는 것도 배웠고 또 젊은 사람들 아니냐."

"독도는 울릉도 도민들이 문전옥답과 같이 애지중지하는 우리의 생활터전이니 기어이 너희들이 그곳에 가서 싸워 독도를 되찾아야 한다."

독도의용수비대 출범, 무장후 독도 입도(入島)

할아버지 말씀후 울릉도 출신 향군 40여명을 규합하여 '독도의용수비대' 조직의 필요성과 향후 독도에서 생활할 계획을 의논하고 서서히 독도 진주를 앞두고 준비에 착수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조직돼 현지에 진주하기 전인 1952년 가을, 나는 무기 등 장비를 구하기 위해 부산으로 나갔다. 할아버지께서는 군자금으로 3백만원을 주셨다. 여기에 부산으로 팔기 위해 갖고 갔던 오징어를 판 대금과, 마을 사람들의 오징어 판매 수수료를 합하니 약 5백만원의 큰 돈이 되었다. 이 가운데 2백만원을 무기구입 공작금으로 쓰고, 나머지 돈은 쌀과 개인장비, 심지어 누룩까지 부산에서 구입했다. 전우였던 변서갑 중위의 주선과 양공주들의 비상한 솜씨로 기관총을 위시하여 탄알과 M1 소총도 입수할 수 있었다. 당시 부산 '양키시장'에서는 권총과 소총을 사고팔기가 용이한 때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현지에 주둔할 전투대 2조, 각조의 인원은 15명씩이었으며, 이밖에 울릉도보급 연락소의 3명과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으로 모두 합쳐 45명이었다. 이 가운데 군 출신이 아닌 사람은 보급선의 선원과 연락소의 3명뿐이었아고, 나머지는 6.25때 각 전선에서 싸운 용사들이었다.

처음 독도에 진주할 무렵의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 3정, M1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그 이외 독도에서 생활할 장비와 현지에서 쓸 0.5톤 보트 1척 등이었다. 또 울릉도와 독도간의 통신연락을 위해 집에서 잘 기른 벨기에산 전서구 3마리를 사용하였다.

1953년 4월20일 우리는 언제 돌아올지 기약없는 장도에 올랐다. 우리가 탄 배는 만든지 10년이 넘는 낡고 보잘 것 없는 5톤미만의 오징어잡이 어선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전함이요 유일한 보급선이었다. 이날 우리는 3시간 항해끝에 독도에 상륙했다.

1953년 7월23일 '1차 전투'

의용수비대가 독도에 상륙해 막사로 진지를 구축한 지 석달이 지난 1953년 7월23일 새벽 5시 0분. 정확히 두시간씩 교대하며 근무를 서던 중 전망보초 김은호로부터 "일본 군함이다!"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우리 수비대의 막사 서 전방 2백미터 위치에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 9함이 진격해왔다.

우리 수비대원들의 동작은 기민했다. 조상달, 이상국, 화영문은 전마선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나와 함께 한 조가 되고, 나머지 대원들은 서기종의 지휘로 다른 한 조로 양분해서 공격하기로 했다. 신호탄과 함께 엄호사격을 바란다고 부탁하고 우리 결사대는 보트를 타고 PS9함과의 거리 20m까지 돌진했다.

"탕! 탕! 뚜루룩! 탕탕! 탕탕!"

연발하는 총성속에 각자가 지닌 소총과 보트에 설치된 경기관총에서 2백여발의 실탄이 PS 9함을 향해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그러나 함정 철판의 두께가 너무 두터워 구멍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총격과 육지에서 쏘아대는 지원사격에 당황한 일본함정은 가제바위 옆을 우회해 멀리 동쪽을 향해 도망갔다.

막사쪽으로 보트를 돌려 돌아오면서 바다사자 한마리를 잡아 막사에 도착했다. 그러자 부대본부에 남아 지원사격을 했던 대원들이 일제히 찰싹거리는 물 곁으로 뛰어들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특공대원들을 맞아주었다. 동해의 절해고도인 이 독도에서 나라 사랑하는 대원들의 갸륵한 마음들이 서로 부등켜 '네가 나'를 안아주는 전우애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바다사자의 즉석 불고기에 한 잔씩의 술이 돌자 좌중을 향해 한마디 말을 아니할 수 없었다.

"오늘의 전투는 순간적으로 맞게 된 것이었지만 용맹한 동지들의 조국애로써 일본함정은 물러갔소. 이는 우리 독도수비대의 승리일뿐 아니라 길이 역사에 남을 쾌거요. 다만 중화기가 없는 탓으로 PS 9정을 바닷속 깊이 격침시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그러므로 어떻게든 중화기를 구해볼 작정이요"하고 말하니 좌중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없는 동안 독도수비를 더욱 철통같이 해줄 것을 당부하고 다음날로 독도 근해에 출어중인 강원도배에 편승해 묵호에 당도했다. 이튿날 대구에 도착 즉시 경북병사구 사령부에서 모과장과 얘기가 되어 정력에 좋다는 바다사자를 잡아준다는 미끼로 M 2정을 쉽게 손에 넣었다. 또한 경북경찰국에서는 노획한 소련제 직사포 한 문과 조준대가 없는 박격포 한 문을 얻었다. 그러나 실탄이 없으니 어찌하랴!

다시 경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달렸다. 손가방에 든 군자금이라야 현금 2백만원과 바다사자의 숫놈 생식기 1개가 고작이었다. 또다시 양공주 등의 도움으로 포탄과 무기들을 구입해 독도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다음해인 1954년 8월23일 우리는 이 무기를 바탕으로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해안보안청 소속 순시선을 총격전끝에 또 퇴치할 수 있었다.

1954년 11월21일, 일본함정 3척-군항기 물리친 '독도 대첩(獨島大捷)'

1954년 11월21일. 이날 역시 일찍 일어나는 버릇 때문인지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섬 주위를 한바퀴 돌아는데, 전방 1km 해상에서 일본 함정이 독도를 향해 오고 있지 않은가? 본능적으로 좌우를 돌아보니 오른쪽, 왼쪽에도 일본 함정이 보였다. 하늘에는 일본군 비행기도 보였다. '이것들이 완전히 포위 상태에서 독도를 공격하는구나' 직감적으로 느꼈다.

막사 안에 뛰어들어 비상을 외치고 쌍안경을 들어 확인하니 1천톤급의 일본함정 PS 9, 10, 16함이었다. 평상시 훈련한대로 우리 대원들은 기민한 동작으로 전투태세를 갖추어 명령만 기다렸다.

"일본 함정이 500미터까지 접근했을 때 권총으로 신호한다. 박격포는 먼저 PS 9함을 때리고 중화기는 박격포 뒤에 쏘되 지휘탑을 파괴하고 다음 좌우쪽 10, 16함을 같은 요령으로 공격한다"고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 독도수비대가 독도에 진주한 이래 몇차례 일본함정의 침입이 있었으나 이번처럼 많은 함정이 동원되기는 처음이라 우리로서는 단단한 각오가 있어야 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일본함정. 긴장된 얼굴의 대원들. 누구 하나 말없이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

'임란때 이순신 장군은 열세의 장비로 일본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았는가? 지금의 우리는 이만한 장비로 유리한 위치인 육지에서 일본 함정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다시는 일본함정이 독도를 침입 못하게 해야지.'

나 역시 어금니를 굳게 악물었다.

일본 함정은 7백미터에서 6백미터로 다가오고, 마침내 M소총 사정거리에도 들어왔다. "탕!" 한발의 권총 신호와 함께 일제히 독도가 떠나갈듯 총성이 울려퍼지고, 6.25때 명사수인 특무상사 출신 서기종이 쏜 박격포 제1탄이 PS 9함에 명중되어 선수에서 몇 사람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본 함정은 불의의 총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PS 16함에 구조요청을 했고, PS 9함에 접근한 16함은 예인 시도를 하려고 로프가 9함에 건너가고 중화기에 치명상을 입은 PS 10함은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동쪽으로 도망을 하고 있었다.

치명상을 입은 일본 함정은 동쪽으로 사라져 가는데, 비행기만은 계속 독도를 선회하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한 눈도 비행기를 놓치지 않고 대공전 자세에서 완벽을 기하자 사태 불리로 판단한 비행기도 동쪽 하늘을 향해 사라져갔다. 일제히 일어선 대원들은 "와아!"하는 함성과 함께 서로 부둥켜 안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일본은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NHK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오 뉴스에 그들의 소위 '다케시마'에서 한국경비대가 발포를 해서 일본 해안보안청 함정들이 피해를 입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일본정부는 즉각 한국정부에 항의각서를 제출하고, 당시 독도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반송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한국-일본 정부간에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게 된다.

1956년 12월30일 우리는 독도 상륙 3년 8개월만에 무기와 임무를 국립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왔다.

박태견/기자

생업도 포기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저런분도 계신데.. 부모세대의 은총으로
편히 살면서.. 그릇된 사고를 하는 몇 몇 분들이. 참 한심스러워지네요
좀 깨달으시오. 조상들이 왜 저런 수고까지 하셨는지...
출처 : 국제방
글쓴이 : 사노라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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