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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2009. 8. 13. 11:34

 

세일러 - 은행은 이자는 만들지 않는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744033


세일러님(이하 존칭 생략)이 "은행은 이자는 만들지 않는다"는 대단히 자극적인 명제를 발표했다. 이자로 먹고 사는 은행이 이자를 만들지 않는다니...!?? 한편 상식에 반하는 주장처럼 들리기는 한데, 모든 소피즘이 그렇듯이 그것이 왜 결국 소피즘인가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궤변의 오류는 추론적인 것이 아니라 흔히 개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기초이며, 개념의 잘못을 보이려면 땅 밑에 숨은 기초를 파헤쳐 드러내는 매우 힘들고 지루한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이 글의 생소함 내지 난해함에 대해 독자들께 미리 용서를 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 위에 지어져 있는 세일러의 결론은 옳은 것처럼 여겨진다. "신용(통화) 시스템에서 팽창이 영구히 지속될 수 없다." 물론 돈이란 한낱 종이장 위의 약속 - 마치 언어처럼 모든 사람이 인정해주는 협약 convention - 일 뿐인데, 약속을 지켜줄 재화도 없이 약속을 남발할 수는 없고 또 남발해서도 안된다. 이것은 경제과학의 법칙(scientific law)이 아니라 사회윤리의 규범(social rule)이다. 규범의 파괴는 당연히 사회의 붕괴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러한 붕괴의 과정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으로 논증하려 들 때 궤변이나 미신이 생겨난다.


세일러는 여기에서 우주팽창론과 같은 물리학적 은유도 사용한다. 언제까지나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터져버리고 말테니까. 그러나 "신용이 영구히 팽창할 수 없다"는 명제는 반드시 화폐라는 허상(虛像)의 실체(實體)로서 "경제가 영구히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가 영구히 성장할련지 - 보다 근본적으로, 인류의 역사가 영구히 계속될련지 - 알 수 없다. 수천만년 전에 공룡들이 절멸하였듯이 수백만 또는 수백년 후에라도 갑자기 인류의 운명과 함께 역사도 경제도 허무히 증발할 것인지... 경제학자들은 사실 경제성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 환경론자들은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외치기도 한다. 이 경우 마이너스란 성장하지 않는다 가 아니라 종전과는 다른 쪽으로 성장 벡터의 방향(direction)을 바꾸겠다는 의미이다. 만일 벡터의 크기(magnitude)를 경제 활동의 량(量)으로 가정한다면, 그 량을 운반하기 위한 화폐의 량 즉 신용의 크기는, 비록 마이너스 성장의 경우라 하더라도, 감소하지 않거나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경제에서 재화의 생산과, 생산 및 분배구조의 변화라는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불쑥 던져진, "돈을 마음대로 찍어내서는 안된다"는 너무나 자명한 세일러의 진리는 마치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스콜라 삼단논법의 첫귀절처럼 무의미하다. 물론 모든 인간은 죽고 말겠지...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 탐욕한 자들이 빚으로 빚을 갚았기에 경제의 위기가 온 것은 부인될 수 없고, 명박 만수 같은 경제 사기범들은 징벌되어야 하며, 불신의 정권이 망해야 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의의 구현이 역사의 요구라 할지라도 그것은 불행하게도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세일러는 "불가능의 증명"을 불가능한 방법으로 하고 있다. 비록 그의 주장이 옳다 하더라도 따라서 그의 증명은 단지 궤변이다.


I.


프리드만 류의 단순화된 통화공급모형에서 통화량 M은 민간 보유 현금 C와 은행 예치 요구불예금 D의 합이며, 본원통화 B는 민간 보유 현금 C와 은행 보유 지급준비금 R의 합으로 정의된다.


M ≡ C + D, B ≡ C + R


한편 통화량 M 중에서 민간이 현금으로 보유하는 양과 요구불예금으로 보유하는 양의 비율 C/D를 현금예금비율 c라고 하고, 은행에 예치된 요구불예금 D에 대한 지급준비금 R의 비율 R/D를 지급준비율 r이라고 한다. 통화량과 본원통화와의 관계를 통화공급함수(Money Supply Function)라 부르는데, 통화승수 m은 M/B 라고 정의된다. 따라서,


m = M/B = (C + D)/(C + R)
m = (C/D + 1)/(C/D + R/D) = (c + 1)/(c + r)
M = m·B = (c + 1)/(c + r)·B


2009년 현재 지급준비율은 3.5%라고 하며, 현금예금비율은 (통계자료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통화승수 22.5에서 유추해볼 때,


m = (c + 1)/(c + r)
c = (1 - mr)/(m - 1) = (1 - 22.5 × .035)/(22.5 - 1)


약 1%로 추산된다. 그러므로 r = 3.5%, c = 1%, (세일러의 모형에서 처럼) 본원통화 5000억원이 공급되었다고 가정하면,


통화승수 m = (.01 + 1)/(.01 + .035) = 22.44..
통화량 M = 22.44.. × 5000억 = 11조2222억..
요구불예금 D = M/(c + 1) = 11조2222억/(.01 + 1) = 11조1111억..
대출총액(신용창조) L = (1 - r)·D = 10조8294억..
지급준비금 R = r·D = 3888억..
현금 C = c·D = 1111억.. 등등의 수치를 얻을 수 있다.


(실제 한국은행통계에 의하면, 2009년 1월 본원통화 평잔은 64.4조원이고 통화량 M2는 1440.2조원으로 통화승수는 22.49. 2009년 5월은 1491.5/60.0조원으로, 본원통화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통화승수가 24.82로 높아짐을 본다. 2009년 1월 기준 예금은행 총예금과 저축성예금은 각각 677.2조 606.6조 합 1283.8조원, 예금은행 대출금은 920.1조원을 기록하고 있다. 세일러의 모형은 한국경제를 120분의 1로 축소한 것이다.)


그러나 세일러의 통화공급함수는 현금예금비율 c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대출금은 대출되자 마자 즉시 모조리 은행으로 되돌아 가서 예금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대출은 하나 마나 이고, 어느 순간이라도 민간은 화폐를 보유할 수 없고, 시장에서 화폐는 기능하지 않고, 화폐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세일러는 다만 신용으로서의 화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메카니즘만을 쉽게 설명해보려 한 것 같다. 그러나 현금예금비율까지도 사상(捨象)해버린 것은 이론의 단순화가 아니라, 분명히 개념의 부재이다.


II.


세일러의 함수는 단순히 지급준비율의 기하급수이다.


M = B·(1 - r)¹ + B·(1 - r)² + B·(1 - r)³ ...
M = B/r - B = 14조2857억 - 5000억 = 13조7857억
B = R = 5000억
m = M/B = 1/r - 1 = 27.57


어느 은행이 5천억을 누구에게 빌려주었는데, 그는 즉시 그 5천억을 은행에 돌려준다는 세일러의 상상력은 드디어 경제논리 뿐 아니라 시간(時間)의 수열(數列)에 대한 초등수학의 기초를 뒤엎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모든 국민은 본원통화가 투입된지 5년후 도대체 빌려보지도 못한 돈을 게다가 년 5% 이자까지 한꺼번에 모두 갚아야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음씨 좋은 이 나라에는 고리채 복리가 없다는 것... (20년후로 가정했다면 이자 100%를 적용하고 간단히 계산을 마칠 수 있었을텐데, 왜 구태여 5년후를 가정하고 계산을 조금 복잡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세일러에 따르면, 모든 국민이, 동시에, 원금 13조7857억과 5년치 이자 3조4464억을 갚아야만 하는데, 베니스의 상인과 같은 세일러의 통화공급함수는 겨우 원금 13조7857억원 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3조4464억원은 결코 갚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이자를 매년 갚기로 한다면 통화는 6892억원이 부족할 것이며, 매달은 574억원, 매일 꼬박 갚아준다면 겨우 18억원의 통화량만 더 있으면 된다. 세일러의 경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공간이다.)


이 갚을 수 없는 이자돈이 은행 시스템의 근본적인 모순이며, 경제위기의 본질이며, 이자돈을 갚기 위해서는 남의 원금을 뺏아옴으로써 남을 죽이거나, 내 원금을 뺏김으로써 내가 죽거나 둘 중의 하나이고, 만일 우리 둘 다 원금을 뺏기기 싫다면, 우리 자손의 원금을 미리 뺏아와야만 한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워야 하는 냉혹한 화폐제도, 다단계 피라미드식 은행 시스템은 곧 붕괴한다... 이것이 세일러의 결론이다.


이 글을 쓰는 내 자신, 나는 국책은행 뿐 아니라 모든 상업은행의 전반적인 국유화를 주장하며, 증권이나 보험이나 대형유통업체의 유사 은행기능을 완전히 박탈해야 하고, 한편 건강과 연금 등 모든 사회보장은 기금(capitalization) 즉 돈놀이가 아니라, 직접적 재분배(repartition) 즉 누진적 세금에 의해서 운용하게 하여, 비노동 비생산 소득의 원천으로서의 금융시장을 최대한으로 억제하여, 화폐를 교환의 수단이라는 본연의 길로 되돌리는 것만이 금융자본주의의 공멸적 폐해를 줄이는 길임을 철저히 믿고 있는 사람이지만, 마르크스 보다도 더 마르크스 적인 세일러의 반(反)은행주의 예언 같은 것을 나는 아직 만난 적이 없다. 문제는 그의 예언이 이념에 의해서라도 최소한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화폐의 속성과 신용창조의 메카니즘 자체에 대한 무개념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III.


언젠가 아고라의 SDE님이 케인즈의 투자승수를 마치 신용창조 과정처럼 잘못 해석하고 있었듯이 (SDE님의 투자승수), 세일러도 신용창조의 무한급수가 그려주는 아킬레스의 파라독스에 빠져있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아킬레스도 세상에서 제일 느린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궤변은 한편 미적분을 탄생시킨 위대한 착상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시간(時間)이란 변수가 이차원의 종이 위에서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지도 잘 보여준다.


readme - SDE님의 투자승수
http://invisible.economist.free.fr/dm/rdm/D115_421720.htm


세일러의 무한급수를 프리드만 류의 통화공급모형에 맞추려면 약간의 정의가 더 필요하다. 계산의 편의를 위해, 첫째, 본원통화는 중앙은행의 일반은행에 대한 예금이다. 둘째, 민간 보유 현금 C 과 은행 예금 D 의 비율인 현금예금비율 C/D 대신에 대출 L에 대한 현금 C 의 비율을 현금비율 c=C/L 로 정의한다. (현실적으로 통화량 중에 차지하는 현금의 비율이 대단히 적기 때문에, C/D와 C/L의 차이는 거의 무시할만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원통화량과 지급준비율이라는 2개의 변수로 이루어진 세일러의 "신용창조 개념도" 대신에, 현금비율이 3번째 변수로 추가된 다음과 같은 기하급수들의 흐름도를 그릴 수 있다.



신용창조과정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된 Excel 모형.

https://t1.daumcdn.net/cfile/cafe/1355331F4A831C4F25?download 다운로드


결과는 본원통화량 5000억원이, 총대출 10.8조원과 총예금 11.2조원을 신용창조함으로써, 3919억원의 지급준비금을 은행에 보유케 하고, 1080억원의 현금을 시중에 유통 보유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통화량의 정의로 부터, M ≡ C + D, B ≡ C + R 인데, 따라서,


(C = 1080.6억) + (D = 111,981억)  -> (M = 113,062억)
(B = 5000억) -> (C = 1080.6억) + (R = 3919.4억)


재미있는 것은 C = B - R 이므로,


M = D + C = D + (B - R) = (D - R) + B = L + B


즉 통화량은 예금량과 현금량의 합일 뿐 아니라, 대출량과 본원통화량의 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로 부터 중앙은행이 최초에 공급하는 본원통화가 결국 왜 예금의 속성을 갖게 되며 따라서 왜 예금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추론된다. 이처럼 본원통화가 예금이라면, 중앙은행은 일반은행의 관점에서 예금주의 지위를 가지며, 따라서 그 예금주가 임치한 금전에 대한 수익 즉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FRB가 달러의 발권에 대한 수익을 갖는 - 본원통화에 대한 이자수입을 요구하는 - 시스템을 마치 사악한 국제 금융가들이 세워놓은 거대한 착취의 기계처럼 보는 음모론의 관점도 있지만, FRB가 민간의 카르텔이든 연방정부의 기관이든 중앙은행의 발권 수익은 원칙적으로 정당하다. 문제는 돈이라는 한낱 종이쪽지를 찍어주고 대가를 받아야 되느냐 마느냐 가 아니라, 찍어내는 종이쪽지의 수량을 과연 누가 결정하며 누구를 위해서 사용하느냐는 것이다.)


세일러는 은행의 관점에서 대출에 대한 이자만을 강요했지, 예금에 대한 이자를 고려하지 않았다. 만일 은행이 받을 대출이자를 5%로 가정한다면 은행이 주어야 할 예금이자 또한 2.5%는 될 것이다. 위 세일러의 경우에서 보면, 10.8조원에 대한 대출이자와 11.2조원에 대한 예금이자의 스프레드 2.5%에서 2603억원의 수익이 은행의 예금대출 활동에서 발생하고 있다. (실제 한국경제에서, 2008년 1월 통화량 M2 1286조원, 2008년도 GDP는 1023조원이며 그중 금융산업은 60.7조원으로 즉 금융산업의 소득은 -  물론 통화량은 저량 stock 이며 생산과 소득은 유량 flow 의 개념이지만 - 통화량 대비 4.7%, 전체 국민소득 대비 5.9%이다.)


IV.


세일러의 모형에서 지급준비율에 대응하는 현금예금비율이라는 현실적 개념이나, 또 시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논리적 차원이 완전히 부재하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더 심각한 오류는 과연 이자가 무엇인지 조차 그 본질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자는 소득의 개념이지 화폐의 개념이 아니다. 이자는 임금, 지대, 이윤과 함께 고전적인 소득의 4개 형태를 구성한다. 즉 경제의 모든 생산물은 임금, 지대, 이자, 이윤으로 특정지워지는 계급 또는 산업 사이에 분배된다는 말이다.


이자는 화폐로 존재하지만 다른 소득과 마찬가지로 재화의 흐름의 요소이다. 화폐자본의 대여 또는 임치에 대한 반대급부이다. 그러나 신용창조과정은 통화라는 저량 stock 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일 따름이지, 재화의 흐름 flow 이 년년의 소득이라는 유량 flow 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일러의 "지그재그"에서 재화의 생산과 교환과 분배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이자의 흐름도 나타나 있지 않다. 실물경제는 통화량이라는 허상(虛像)의 뒤에 존재한다. 다만 이자의 유량은 신용창조된 통화(예금과 대출)의 저량으로부터 비율적으로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목가치 측정의 도구(numeraire)로서의 화폐라는 재화만이 갖는 이러한 저량과 유량의 특수한 관계가 바로 세일러에게 혼동을 빚고 있다.


V.


이자가 5%라는 말은 작년에 쌀 100가마를 빌린 농부가 올해는 110가마 쯤 산출하여 5가마는 자기가 소비하거나 저축하고, 5가마는 이자로 돌려주고, 다시 100가마는 내년의 수확을 위하여 투입(농업노동자의 임금 + 종자쌀 + 각종 비용)한다는 말이다. 쌀 한 가마에 30만원이라 할 때, 화폐로 환산하면, 농부는 3000만원을 빌려 3000만원 어치인 쌀 100가마를 사서, 그것으로 쌀 110가마를 생산하여 시장에 팔아 3300만원을 벌어, 그 중 150만원은 자기가 갖고, 나머지 150만원을 이자로 지급하게 된다.


경제에 오직 쌀이라는 재화만 존재하고, 쌀은 화폐와 교환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작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10가마가 더 생겼으니, 쌀과 화폐와의 교환을 위하여 화폐가 300만원이나 부족해진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올해 쌀 100가마를 투입하여 내년에 110가마가 산출되고, 역시 내년에도 쌀 100가마를 투입하여 후내년에도 또 110가마가 산출된다면, 이것은 투입 시점에 쌀 100가마가 산출시점의 쌀 110가마로 증가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결국 매해 쌀 110가마가 생산되어 그 중 100가마는 다음 해의 수확을 위해 투입되고 나머지 10가마는 농부와 쌀을 빌려준 사람 사이에 소득으로 분배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쌀 110가마 모두가 시장에서 교환되어야 한다면, 매년 3300만원의 화폐가 쌀과의 교환을 위해 필요하다는 말일 뿐이다. 여기에서 어느날 갑자기 300만원이 부족하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사실 3300만원의 화폐가 다 필요하지도 않다. 매년 쌀이 3번에 거쳐 팔리고, 농부가 번 돈이 다시 임금이나 비용으로 쌀을 산 사람에게 모두 돌아간다면, 통화량은 1100만원만 존재하면 될 것이다. 매년 쌀이 11번에 거쳐 팔린다면 통화량은 300만원으로 충분하다. 이것을 통화의 유통속도라고 한다. (통화유통속도는 GDP를 M2로 나눈 것으로 2009년 1분기 통계치는 0.687이라고 한다.)


작년에는 100가마가 생산되었는데 올해는 110가마 내년에는 121가마 후년에는 133가마... 이렇게 매년 10%의 쌀이 더 생산되어 교환된다면, 실물경제는 매년 10%의 성장을 가져오며, 이에 따라 통화량도 매년 10%가 늘어야만, 쌀의 명목가치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경제가 성장을 하는데도 (pari passu - 같은 비율로) 통화량이 증가하지 않는다면 교환을 위한 화폐가 귀해지고, 따라서 상품의 명목가치는 하락한다. 반면에 경제성장율이 통화량 증가율보다 낮다면 상품의 명목가치는 상승한다.


통화량의 증감은 원론적으로는 명목가치를 변화시키는 외에 소득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화폐의 순환이란, 마치 피가 신체의 전 부분에 동시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각 부분에 순차적으로 파급되는 것처럼, 통화량 증감의 효과가 경제의 각 부분에 다르게 작용함으로써 각 부분에서 소득의 차이를 가져온다. 이것이 통화팽창정책의 문제이다. 하늘은 비를 골고루 내려주지 않지만, 비록 골고루 내리는 비라 하더라도 우산 장수에게는 득이 되고 해수욕장의 파라솔 장수에게는 실이 된다.


VI.


세일러의 "신용창조과정"은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프랑소와 케네의 경제표(Tableau economique, c. 1758)를 상기하게 한다. 경제표의 악명높은 "지그재그"는 지난 250년간 학자들의 연구심을 자극해왔다. 그러나 경제에서 화폐를 통한 교환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거의 존재론(ontology)적인 모순 앞에서 좌절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에게 천원을 주고 물건을 사주고, 너는 나에게 다시 그 돈 천원을 돌려주고 물건을 사간다면... 이렇게 무한히 돈과 물건을 주고 받으면 나와 너는 엄청난 수입을 올릴 것이며 우리는 엄청난 부자가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케네의 표에서 잉여가치 착취의 수단으로서 진정한 화폐의 역할을 발견하였다. 발라스는 일반균형의 연립방정식체계를 완성하였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레온티에프가 경제표로 부터 투입산출모형을 해석할 수 있었다. 경제에서 화폐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만 교환의 진정한 매개체로서의 화폐의 존재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프랑소와 케네의 경제표


그러나 모든 결론은 결국 화폐의 수량이나 위치가 아니라, 이미 철학자 존 록크가 3백년도 훨씬 전에 말했듯이, 돈을 가진 사람이 과연 국부의 증진을 위하여 그 돈을 쓰느냐 아니냐 에 달려있다. 따라서 모든 질문은 결국 어떻게 국가 전체를 위하여 돈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돈을 쓰도록 만드느냐 라는 것으로 돌아간다.


For it matters not, so it be here amongst us, whether the Money be in Thomas or Richard's Hands, provided it be so order'd, that, whoever has it, may be encouraged to let it go into the current of Trade, for the improvement of the general stock, and wealth of the Nation. Locke, Some Considerations, p. 100.


VII.


이 글은 어쩌면 세일러님에게는 혹독한 인민재판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그는 아고라 경제방에 유익한 정보를 많이 남겨주었으며,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 정보와 이론적 지식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내일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는 분명히 유익한 정보이다. "태평양의 저기압이 북상하므로 우리나라에 내일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는 이론이 적용된, 즉 인과관계가 설명된, 정보가 된다. 그러나 "내일 폭풍우가 몰아쳐야 하므로 내일 폭풍우가 몰아친다"는 궤변이고, "타로트점을 보았더니 내일 폭풍우가 몰아치노라"는 미신이 된다. 비록 그 주장하는 바가 옳다고 하더라도 궤변이나 미신은 이론이 되지 못한다.


이론이란 항상 "왜"라는 질문이다. "왜"라는 것은 우리의 눈앞에 드러난 현상이나 귀에 들리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우리 각자의 노력이다. 이 글은 그러므로 세일러님의 "은행은 이자는 만들지 않는다"는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기에 앞서, 아고라의 독자들께서 이른바 미네르바 식의 "고급정보"에 매달리기 보다는, 좀 더 겸손하고 소박하고 때때로 바보처럼 보일 수 있는 "기초개념"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를 촉구하는 뜻에서 쓴 것이다.


세일러님의 좋은 글을 앞으로도 계속 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Appendix.


(세일러의 궤변은 심심풀이 잡지에 흔히 실려지는 엉뚱한 수학퀴즈를 상기케 한다. 그러므로 다음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일러의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변을 줄 수 있다.)


친구 A B C 세명이 여행을 가서 함께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다. 카운터에서 하루 묵을 방 1개의 요금을 물어 보니 1인당 10불, 3명이면 총 30불이라고 하여 30불을 지불하고 방에 들어 갔는데... 카운터에서 온 전화를 받아 보니... 주말 할인 혜택을 적용하여 3명은 25불만 내면 된다고 하며, 할인된 5불을 벨보이에게 보내 준단다.


잠시 후 벨보이가 5불을 들고 와서 A에게 돌려 주었는데, A는 벨보이에게 수고했다고 2불을 팁으로 주고 나머지 3불은 각자에게 1불씩 나누어 주었다. 이때 B는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아래와 같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1) 당초 지불한 호텔비 :  1인당 10불 X 3명 = 30불
(2) 각자가 실제 지불한 금액 : 처음 지불한 10불 - 환급받은 1불 = 9불
(3) 벨보이 팁 : 2불
(4) 실제 지출된 총비용 : 각자가 실제 지불한 금액 9불 X 3명 + 벨보이 팁 2불 =
 27불 + 2불 = 29불
(5) 차액 : 당초 지불한 호텔비 30불 - 실제 지출된 총비용 29불 = 1불


B는 A가 1불을 삥쳤다고 노발대발 하고...
A는 삥친 돈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B가 생사람 잡는다고 하는데...
C는 둘 사이에서 누구 편도 못들고 죽을 지경...


본 사례에서 차액 1불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