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보

마루치 2010. 12. 1. 02:30

 

 

인삼장수 형제가 황해도에 소래교회 세워

"이곳 사업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척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9월 27일) 저녁에 14명의 교인으로 한국 땅에서는 첫 번째 그리스도교회 조직을 완료했으며…."(1887년 언더우드의 보고서)

"우리는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영어로 기도하고 시작했으며 우리는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1887년 10월 아펜젤러의 일기)

19세기 후반 미국 북장로회와 북감리회가 각각 조선에 파견한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7년 가을 조선에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했음을 알리는 기록을 남겼다. 이들이 교회 설립이라는 감격을 맛보기까지는 조선에 도착한 후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두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었다. 조선의 쇄국정책이 풀리면서 의료와 교육 분야에 선교사의 입국이 허용되자 조선 선교를 자원한 것이다. 각기 다른 교단에 속했지만 일본에서 만난 이들은 그해 3월 31일 나가사키항을 출발한 상선 미쓰비시호를 함께 타고 부산을 거쳐 이날 제물포에 도착했다. 당시 아펜젤러는 26살, 언더우드는 25살이었다. 한 살 차이였던 이들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키며 선교의 씨앗을 뿌리고 교육·의료사업에 앞장섰다.

조선 정부의 전교(傳敎) 금지 방침이 느슨해지자 두 선교사는 서울 정동에 나란히 교회를 설립했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가 정동 선교사 사택에서 14명의 신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현재의 새문안교회를 창립했고, 아펜젤러 역시 그해 9월에 정동에 벧엘예배당(현재의 정동제일교회)을 마련하고 10월 9일에 첫 공개예배를 드렸다. 이 두 교회는 신자 수에서 한국 개신교계의 80%를 넘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모(母)교회'로 불린다.

한편, 이들 외국인 선교사들이 도착하기 전 조선에는 조선인들이 설립한 개신교 공동체가 있었다.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1883년 5월 세워진 '소래교회'였다. 소래교회 설립의 주역은 중국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하던 서상륜·경조 형제였다. 서씨 형제는 1880년대 초 만주에 와 있던 스코틀랜드장로교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통해 개신교를 접했다. 1882년 한글 성경 등 개신교 서적을 숨겨 들어오던 이들은 검문에 걸려 투옥됐다 탈출한 후 친척이 살던 황해도 장연으로 옮겨와 소래교회를 설립했다.

서씨 형제의 열정은 이 마을을 중심으로 서북지방에 개신교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1886년 무렵에는 약 70여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도 있다. 1887년초 언더우드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본격화할 때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고 새문안교회 설립 후 주축이 된 것도 소래교회 교인들이었다. 또 서경조는 1901년 문을 연 평양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 최초의 한국인 목사 7명 중 한 명이 됐다. 경기도 양지에 있는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정에는 1896년 증축된 소래교회의 두 번째 예배당이 복원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