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dante 2020. 10. 30. 20:15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의 크기, 마음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두려움을 이용해 돈을 벌고 영향력을 키우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도 재앙을 겪고 있지만 타인들의

불행을 안쓰러워하며 그것을 덜어줄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크기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가로 잴 수 있겠지요.

 

코로나19가 오기 전에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친절'은

코로나 세상에서 더욱 의미 있는 덕목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불안한 사람들에게 친절은 매우 큰 힘이

되어주니까요. 게다가 친절은 돈을 쓰거나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고도 베풀 수 있으니, 요즘 같은 세상에 꼭 맞는

덕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요즘 겪은 일들 중엔 친절보다 불친절의 순간이

더 또렷합니다.

 

신촌의 오래된 중국식당에서는 QR코드를 찍으라는 직원에게

QR코드가 없으니 손으로 적겠다고 했다가 ‘어떻게 QR코드가

없을 수 있지?’ 하는 투의 눈총을 받았습니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서 그렇다고 설명하고 손으로 썼지만,

그 직원의 ‘맨스플레인(mansplain)’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음식을 먹지 않고 식당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평직원이 아니고 ‘이사님’이라서 직원을 가르치듯

저를 가르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제 머리가 하얀 것을 보고

디지털문명에 뒤떨어진 할머니를 교육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는 고려대학교부속 구로병원 장례식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장례식장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QR코드를 찍으라는 직원의 태도가 제법 고압적이었습니다.

 

중국식당에서처럼 QR코드가 없으니 손으로 적겠다고 했다가

그때 받았던 눈총과 비슷한 눈총을 받았습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해서 보여주니

방문객 인적사항 기록 문서에 제 이름을 적고 전화번호를

물었습니다. 번호를 알려주며, 이제는 문서에 전화번호만 쓰고

이름은 쓰지 않게 되어 있는데 왜 이름을 쓰느냐고 물으니

‘여기선 쓴다’고 가르치듯 말했습니다.

 

왜 여기만 그러느냐고 재차 묻는데 저쪽에 있던 직원 하나가

다가와 ‘여기서는 그렇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눈이 나쁜 만큼

귀가 예민한 저는 그 직원에게 큰소리로 말하지 말고 저리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떴습니다.

망자와 유족을 위로하러 간 자리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120이나 질병관리청 같은 곳에 신고를 하거나

큰소리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엔 이름과 전화번호를 썼지만 그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후엔 이름은 쓰지 않기로 했는데

왜 고려대학교 구로병원만은 이름과 전화번호 모두를 쓰라고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방문객에게 왜 그리도

불친절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례식장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곳인 만큼

방문객들의 마음이 다른 곳 방문객들과는 다르고, 그래서 더욱

친절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게다가 모든 방문객은 잠재적 고객이니

사업적으로도 친절한 것이 이익이 될 겁니다.

 

그 두 직원이 그렇게 고압적이었던 이유는 뭘까요?

병원에서 받는 대우가 나빠 스트레스가 쌓였던 걸까요?

아니면 야근하느라 잠을 못 자서 짜증이 났던 걸까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속 좁은 저는 두고두고 주변사람들에게 얘기할 겁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에는 가지 말라고. 

 

물론 저도 제가 부끄럽습니다. 코로나19 QR코드 분쟁으로 드러나는

제 마음의 크기가 겨우 이만하다는 것이.

 

 

사람의 크키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가로 잴수 았다는 말이 가슴에 꽃힙니다.
역지사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한다면 대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기를 포기한 게 아닐까요? 남에게 친절해서 손해볼 게 뭘까요? 제 부주의로 덤프트럭과 충돌할 뻔 해서 덤프기사가 잔뜩 화를 내고 내리는데 고개 숙이며 사과 했더니 금새 인상을 풀고 담 부턴 조심하시라며 차에 오르더군요. 그나저나 코로나정국이 빨리 끝나야 이런 헤프닝이 없을텐데, 러브록은 지구 인구를 5억명 수준으로 낮춰야 지구보존이 가능하다는데 어쩌죠?

 
 
 

오늘의 문장

dante 2020. 10. 27. 10:59

아주 가끔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접하고 그것을 쓴 사람에게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다가 그런 감사를 느꼈습니다.

아래의 글 때문입니다.

저는 <임꺽정>을 매우 좋아했으나 작가 홍명희의 호 '벽초'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서의동 논설위원에게 깊이 감사합니다.

 

[여적]‘평화어’ 한글

서의동 논설위원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는 일제강점기 조선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는 ‘조선 최초의 에스페란토인’이라는 뜻을 담은 ‘벽초(碧初)’를 호로 했다.

청록색은 에스페란토의 상징색이다. 벽초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지면에 고정란을 만들어 논객들의 글을 에스페란토로 실었다. 1920년 창간된 문학동인지 ‘폐허’ 표지에는 한자 ‘廢墟’와 에스페란토 ‘La Ruino’가 나란히 쓰였다. 1925년 창립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즉 카프(KAPF)는 에스페란토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의 약자다.

 

에스페란토는 폴란드 안과의사 루드비코 자라로 자멘호프가 1887년 만들었다. 자멘호프는 언어의 차이가 불화를 낳는 만큼, 모든 이들이 쉽게 배워 쓸 수 있는 공통어가 있다면 분쟁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적과 민족의 장벽을 넘어서자는 사해동포주의 이상을 지닌 ‘평화어’ 에스페란토에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이 열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에스페란토는 20세기 전반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전간기 대공황의 반동으로 전체주의와 파시즘이 발흥하면서 박해의 대상이 됐다. 나치 독일은 에스페란토를 유대인의 언어로 간주해 사용금지하고 사용자들을 처형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을 불온시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사용을 금지했다. 이런 시련을 딛고 에스페란토는 지금까지도 국제어로 널리 보급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한 달째 전쟁 중인 아르메니아 소녀들이 한글로 휴전을 호소하는 장면이 세계로 퍼지고 있다. 소녀들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 등 한글 팻말을 든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를 두고 전 세계 BTS 팬들인 ‘아미’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온다. 아미들은 한국어를 공용어처럼 쓰는 데다 국제이슈에 적극 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K팝과 한국영화 등을 한글로 검색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호소가 연관검색으로 뜰 것을 겨냥했다는 분석도 있다. 한글이 ‘평화어’로 쓰이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소녀들의 절박한 호소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전쟁은 멈춰야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262045005&code=990201#csidxe5c5832c49d4801a7eeeed6f194f244 

 

에스페란토,생경한 단어인데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전쟁 중인 아르메니아 소녀들이 한글로 평화 구호 피켓을 만들었다니 가슴 뿌듯 합니다! 우리 글 자체가 모든 면에서 최고지만 BTS와 국력 신장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코로나 선방도 거든 것 같고.....
하지만 아직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게 찔립니다

 
 
 

동행

dante 2020. 10. 25. 22:47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존경하는 윤석남 선생님과

차와 담소를 나누고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족들과 평소보다 늦은 저녁식사를 막 마쳤을 때

전화에서 문자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누굴까 기대하며 전화를 여니 부음이었습니다.

 

나흘 전 아파트 동대표회의에서 만나 대화와

미소를 나눴던 아파트 소장님의 부음.

순식간에 머리가 띵해지며 숨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막 70세를 넘긴 건강한 분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는가, 왜 그분께 좀 더 잘해드리지

못했던가, 의문과 탄식이 이어졌습니다.

 

조금 지나서야, 댁에 화재가 발생했고 소장님이

불을 끄러 들어갔다가 돌아가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갑자기 죽음을 맞은 소장님과,

화재를 당하고 남편이자 아버지인 소장님까지 잃은

가족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바로 몇 시간 전 윤석남 선생님과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또래 친구 분들 중엔

이제 어서 죽어야지 하는 분들이 있는데 선생님은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죽게 되면 죽겠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도

그림 그리는 일이 재미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에 비해 형편없는 성취를 이룬

사람이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저도 선생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큰 불평 없이

따라나서겠지만 ‘어서 죽어야지’ 하는 식의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선생님이 그림 그리기를 재미있어

하시듯, 저는 세상 구경과 글쓰기를 재미있어

하니 하는 데까지 하려는 것이지요.

 

오늘 갑자기 돌아가신 소장님에게서도 ‘어서 죽어야지’

하는 투의 말씀을 듣거나 그런 식의 분위기를 느낀 적은

없습니다. 어쩌면 작은 아파트를 관리하는 데서

재미를 느끼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 재미를 비롯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을 두고 화재로 인해

갑자기 떠나시게 되셨을 수도 있겠지요.

 

소장님, 박구정 소장님,

갑작스런 죽음 앞에 얼마나 놀라셨는지요?

 

천지신명이시여, 소장님의 영혼을 위로하시고

자유와 평안을 주소서.

유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홍옥의 계절에 떠나가신 소장님을 기리며

삼가 영전에 '홍옥' 한 알 바칩니다.

소장님, 그동안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L6IYI-5aII&feature=youtu.be&ab_channel=JimmyStrain

저도 갑자기 1년 후배와 5년 후배를 잃었습니다. 두 사람 다 아팠었지만 이렇게 쉽게 떠날 줄 몰랐는데 여자 후배는 자신의 모친 제삿날 떠났고 남자 후배는 장남 결혼도 못 시키고 떠났습니다. 이렇게 쉽게 갈 줄 알았음 좀더 잘 할 걸 후회했지만 이미......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더니 정말 그런가 봅니다. 오늘 대하는 모든 이웃과 마지막이라는생각으로 대해야겠습니다. 삼가 박 소장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