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dante 2020. 11. 30. 10:51

지난 27일에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의 '내 인생의 책 -- 맹자집주'를

소개했는데, 오늘 또 한 권 위 대사의 '내 인생의 책'을 소개합니다.

바로 <죄와 벌>입니다. 지난 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그의 글에서

만난 한 줄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름 중 '라스콜'이 '이견'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십대의 어느 날 이 소설을 만난 후 욕심 많은 사람들을 볼 때면

저들이 살아 있는 게 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저들이 죽어

없어지는 게 세상에 더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식의

라스콜리니코프적 사고에 빠지곤 했습니다. 

 

위 대사는 러시아에 근무할 때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난 곳과 죽은 곳을

가보았다고 합니다. 저는 1990년인가 러시아로 출장을 갔었지만

도스토옙스키의 흔적을 만나진 못하고 왔습니다. 

그렇지만 제 기억 속 모스크바는 제가 본 세계의 도시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위성락의 내 인생의 책]⑤죄와 벌 - 도스토옙스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서울대 객원교수)

가난, 세상에 대한 반감, 이단적인 생각, 이에 기반을 둔 살인, 양심의 딜레마, 사랑, 속죄, 그리고 구원이라는 다소 통속적일 수도 있는 플롯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이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등장시켜 그들의 욕망과 집착, 죄악과 대가를 기본 플롯과 잘 교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는 부도덕한 사람, 무도덕한 사람, 잘못된 도덕에 꽂힌 사람이 등장하여 갈등을 이룬다. 잘못된 도덕에 꽂힌 사람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이다. 이름부터 시사적이다. 라스콜은 이견을 뜻한다. 그는 편벽된 확신으로 살인을 정당화하지만, 심적 갈등을 이기지 못하다가 신앙심 깊은 여인의 사랑으로 속죄하고 구원을 얻는다.

 

<죄와 벌>은 인간과 세상과 종교에 대한 생각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19세기 러시아 사회에 대한 이해도 넓힐 수 있었다. 정교한 심리 묘사와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는 덤으로 한 공부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을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서 썼다. 반체제 활동으로 10년 유배를 갔던 그가 기독교적인 구원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주제를 택한 점이 특이하다.

 

필자는 러시아에서 근무하는 동안 작가들의 유적지 탐방을 취미로 삼았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난 곳과 죽은 곳도 찾아갔다.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대문호와 그의 작품이 쓰인 현장에 대해 호기심이 있었다. 그는 아주 기이한 사람이었다. 간질병에 도박벽이 있었고, 돈에 쪼들려 쫓기듯 글을 썼다. 그는 적막한 심야에 진한 차를 마시며 집필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책상과 침실을 둘러보며, 작품의 배경이 된 거리를 찾아가면서, 도스토옙스키가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인류에게 남겨놓은 귀한 선물에 대해 감사하였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192054005&code=960205#csidx2060b8b7edafd3c91ac6d7adbb88dd7 

 
 
 

동행

dante 2020. 11. 27. 08:34

경향신문에는 '내 인생의 책'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돌아가며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의 책'은 

편협한 독서일기 같고 어떤 사람의 책 소개는 저를

부끄럽게 하고 어떤 사람의 '인생의 책'은 감동을 줍니다.

 

소개된 책 덕에 감동하기도 하고 필자의 문장에

감동하기도 하는데, 아래에 소개하는 글의 마지막

문장도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노년에 이상주의를 잊으면

추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상을 잊고 추해진 노년을 여럿 보았기에 

이 문장에 크게 공감한 것이겠지요.

 

위성락의 내 인생의 책]②맹자집주 - 주희

위성락 | 전 주러시아 대사(서울대 객원교수)

맹자에게 배운 이상 정치

대학시절 한학자를 모시고 한문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맹자>를 읽었다.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 혼란기에 서로 쟁패하던 제후들이 앞다퉈 부국강병책을 구할 때, 패도 정치를 비판하고 왕도 정치를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양혜왕’ 장에 양혜왕이 “내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맹자는 “왜 이익을 말하는가, 오직 인과 의를 찾으라”고 답한다. <맹자>는 전형적인 이상주의적 정치론을 담고 있다.

 

이탈리아 전국시대 경세가인 마키아벨리와 대척점에 서있는 이상론이다.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마키아벨리는 패도 정치에 가깝다. 흥미롭게도 마키아벨리나 맹자 모두 제후로부터 쓰임을 받지 못하였다. 맹자의 경우는 그의 이상론이 제후들의 현실적 수요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마키아벨리는 현실 정치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운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맹자>를 통해 이상적 가치에 기초한 정치를 공부할 수 있었다. 맹자 특유의 빈틈없는 논리와 압도적인 논쟁술에 매료되었다. <맹자>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시비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설득력 있는 논리 전개가 가득하다. ‘등문공’ 장구에 나오는 대장부 관련 부분은 유독 마음에 들어 책상머리에 적어두기도 했다. 전에는 ‘대장부’ 장 중 호연지기가 뿜어 나오는 부분이 끌렸으나, 이제는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그 도를 해 나가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 그 도를 행한다”는 부분이 더 끌린다.

 

<군주론>이 현실주의에 눈뜨게 한 책이었다면, <맹자>는 이상주의가 마르지 않게 해준 책이었다. 퇴직 후, 짐 속에 있던 옛날 책들을 정리하다가 누렇게 된 <맹자집주>(주석을 붙인 맹자)를 찾아냈다. 이후 간간 읽는다. 노년에 이상주의를 잊으면 추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162056005&code=960205#csidxab2f24855688608879dd9dd91ed441a 

초국적 자본주의하에서 이상론은 장식에 불과하고, 코로나 정국에서도 국가권력은 자본의 통패합,극대화에 포장만 뉴그린으로 위장해서 국민들을 속이고 있네요~~~ 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정의와 공정인데 코로나의 가르침에도 본질을 파악치 못하고 허둥대고 있으니 어쩌죠? 노쇠하면 이상주의에서 멀어지듯이 자본주의도 막장이라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중시했다면 이제는 더불어 함께 가는 공동체적 삶을 추구해야 할텐데 말입니다.

 
 
 

동행

dante 2020. 11. 16. 10:30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반성을 요구하지만

반성하는 사람은 적고, 세상은 여전히 부정과 불합리로 돌아가며 희생자를 낳습니다.

 

노동은 살아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보람을 선물해야 하지만

이 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는 노동 중에 사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희생의 원인은 한마디로 자본가를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양식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없애고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 그런 사회가 아닙니다. 아직도 개발과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나라, 이 나라는 전태일이 김용균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라, 어리석은 

나라입니다. 

 

 

[아침을 열며]리건 발렌타인과 김미숙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지난 10월,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의회에서 중대재해 사고를 낸 기업에 대한 처벌을 큰 폭으로 강화한 일명 ‘기업살인법’(industrial manslaughter law)이 통과됐다. 법안이 통과된 순간 현지 언론들이 누구보다 먼저 마이크를 들이댄 사람은 3년 전만 해도 그저 평범한 엄마였을 뿐이었던, 리건 발렌타인(Regan Ballantine)이라는 여성이었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발렌타인은 2017년 1월 산재 사고로 아들 웨슬리를 잃었다. 웨슬리는 유리 천장을 설치하는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가 12m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기타 치는 것을 좋아했고, 트럼펫을 배우고 싶어했던 웨슬리의 나이는 당시 불과 17세였다.

웨슬리는 사망 당시 안전대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안전대를 연결할 훅이 작업 현장의 어느 곳에도 설치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낙하 방지 그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웨슬리는 12m 높이 허공에 떠 있는 가느다란 철골 구조물과 위태로운 널빤지 위를 곡예하듯 걸어다니며 작업을 하다가, 전혀 놀랍지 않게, 추락했다. 하지만 웨슬리를 고용한 업체에 내려진 처벌은 고작 벌금 3만8000호주달러(약 3071만원). 호주의 1년치 최저임금보다도 적은 액수였다.

 

“(이 나라가) 아직 꿈도 펼쳐보지 못한 내 아들의 생명을 종이조각 취급했어요. 이 나라의 시스템은 단지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겁니다. 다시는 누구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 바랍니다.” 엄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발렌타인은 그 길로 거리로 나섰다. 산재 사고 유족 단체인 ‘남겨진 가족들’(Families left behind)의 대변인을 맡아 기업살인법 통과를 위해 어디든 달려갔다.

 

주의회는 감히 이들의 목소리를 끝까지 외면할 수 없었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에서 노동자가 사망하거나 중대한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전조치를 게을리한 고용주나 관리 책임자는 5년에서 최대 20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기업에는 최대 1000만호주달러(약 80억60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특히 이 법은 산재 벌금을 보험 처리할 수 없다는 조항까지 달아 고용주가 생명을 놓고 ‘비용절감’할 수 있는 길을 봉쇄했다.

 

법안이 통과된 다음날 의회 건물 앞에서 환영 집회를 연 발렌타인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제 옆에는 산재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잃었지만, 그들의 죽음은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죽음이 아닙니다. 미래 세대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반까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익숙한 이야기이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에 ‘남겨진 가족들’이 있다면, 우리 사회에는 산재 유가족들의 모임인 ‘다시는’이 있다. 3년 전 아들을 잃고 기업살인법 제정에 온 힘을 쏟게 된 발렌타인처럼, 2년 전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이었던 아들 김용균씨를 잃은 엄마 김미숙씨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김미숙씨가 올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국민 청원은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아직까지 이 이야기는 오직 결말만 다를 뿐이다. 시민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인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의회와 달리, 174석을 독점한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민 10명 중 6명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찬성하고 있는데도, “기업에 미칠 타격이 너무 클 수 있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도대체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에 비해 우리에게 무엇이 더 부족한가. 죽음이 부족한가, 유족들의 눈물이 부족한가. 우리에겐 이미 차고 넘친다. 한국에서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에 부과되는 벌금은 고작 450만원에 불과하다.

 

이 법은 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업살인법을 제정한 다른 나라들은 어디 기업에 타격을 주고 싶어서 만들었겠는가. 부디 타격을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방 가능한 노동자의 죽음을 막으라는 것이다.

나는 같은 결말을 바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통과된 날, 국회 앞에서 김미숙씨를 비롯한 ‘다시는’ 산재 유가족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이들이 “우리는 이미 가족을 잃었지만, 그들의 죽음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으로 의미를 되찾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160300045&code=990100#csidx980307a1ca4e636a4f350616e5c6f5f 

OECD 회원국중 재해사망율 1위를 기록하면서도 반성할 줄 모르는 대한민국이 부끄럽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안전시설 미비로 목숨을 잃는데 정부와 기업은 나몰라라 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데.....
국회에 게류 중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통과를 미루고 있으니 도대체 국회라는 곳이 기업의 시녀인지 모르겠습니다,자본주의의 초기인 산업자본주의 단계에서야 열악한 자본력과 시행착오로 재해가 발생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자본력이 국가 위에 군림할 단계에선 충분한 투자와 안전장치를 가동해 한 사람도 피해 당하지 않도록 기업을 철저히 규제하고 감독해얍니다. 더 이상 제 2의 전태일이 김용균이 나와선 안됩니다.우리의 김미숙씨도 호주의 발렌타인처럼 아픔을 승리로 승화시킬 수 있음 좋겠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노동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