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a

dante 2020. 6. 2. 17:18

 

https://koreana.or.kr/user/0010/nd27473.do?View&boardNo=00001704&zineInfoNo=0010&pubYear=2018&pubMonth=SUMMER&pubLang=Korean

 

이 사람의 일상‘길 위의 학교’에서 진리를 깨우치다

미국에 화장품 방문 판매원의 대명사인 ‘에이본 레이디(Avon lady)’가 있다면 한국에는 유산균 발효유를 가정과 직장에 배달하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있다. 1971년 처음 모습을 보인 야쿠르트 아줌마는 특정 기업 제품의 판매원이라기보다는 마치 친근하고 믿음직스러운 이웃처럼 인식되고 있다.

‘야쿠르트 아줌마’강미숙 씨는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매일 1만 보 거리를 걷는 고단한 일상에도 불구하고 모든 고객들을 항상 따뜻한 웃음으로 대한다. 19년 동안 한 동네에서 일해 온 그에게 주민들은 고객이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웃이다.

원피스를 입었을 때와 청바지를 입었을 때 걸음걸이가 같은 여성은 없다. 옷은 사람의 행동을 규정한다. 그 많은 옷 중에서도 유니폼은 가장 부자유한 옷이다. 입는 사람이 누구든 특정한 역할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그런 유니폼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군인, 경찰, 학생, 스님, 신부, 수녀, 환경미화원에서 야쿠르트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강미숙(Kang Mi-suk 姜美淑) 씨는 유독 자신의 유니폼을 좋아하는 부류에 속한다. 


“몸이 심하게 아픈 날도 저를 기다리는 고객들을 생각해서 나와요. 막상 일하러 와서 유니폼을 입으면 힘이 나니 참 희한해요. 전에 함께 일하던 친구가 ‘유니폼은 요술옷’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아요.”
1999년 4월부터 지금까지 만 19년을 야쿠르트 아줌마로 살았지만, 결근 한 번 한 적이 없는 미숙 씨의 말이다. 미숙 씨와 같은 유니폼을 입은 전국 1만 3,000여 명의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유산균 발효유 전문 업체 한국야쿠르트의 방문 판매인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들은 특정 업체의 직원이라기보다 친근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문 판매 사원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처럼 인식된 지 오래다. 하긴 이들이 전국을 누비기 시작한 것이 1971년 봄부터이니 그 역사가 거의 50년에 가깝다.
미숙 씨가 ‘요술옷’을 입고 야쿠르트 아줌마로 일한 지난 시간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유니폼 디자인이 여러 번 바뀌었으며, 판매하는 제품의 가짓수도 크게 늘었다. 제품을 나르던 손수레는 탑승이 가능한 냉장차로 발전해, 매일 1만 보 이상 걷던 수고를 어느 정도 줄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일과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매일 아침 4시 반에 기상해서 5시면 집을 나서요. 집이 있는 파주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잠들면 1시간 반 후에 동자동 사무실에 도착하죠. 사무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면서 ‘자, 또 하루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해요.”

 

19년간 맺은 인연들 
강미숙 씨의 일터는 서울역이 있는 용산구 동자동이다. 서울역은 대도시 서울의 교통 대동맥이다. 시민들의 발인 지하철과 버스는 물론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기차와 광역버스가 쉼 없이 오간다. 그러나 서울역 앞 광장을 걷다 보면 햇살 쏟아지는 아침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거리에 쓰러져 자거나 비틀거리는 노숙인들과도 마주치게 된다. 또 고층 건물들 바로 뒤에는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골목들과 무너질 듯 서 있는 낡은 집들, 남루한 모습으로 그 집 앞을 서성이거나 어두운 방안에서 신음하는 독거노인들도 있다. 
미숙 씨는 매일 발효유와 우유, 간편 식품 등이 200ℓ가량 실린 냉장차를 몰고 마치 밤과 낮처럼 다른 얼굴을 가진 동자동을 누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도 한참 올라가야 하는 사무실에서는 넥타이를 맨 고객들을, 승용차 한 대도 들어가기 힘든 골목에 납작 엎드린 단칸방에서는 독거노인들을 만난다. 그가 찾아가는 사람들은 냉장차 속 제품들보다 다양하지만, 그의 눈에는 결코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똑같아요. 회사 안에서 아무리 높은 사람도 길에 나가면 다 보통 사람이잖아요? 저는 길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제겐 다 같은 사람인 거죠.” 
미숙 씨를 따라다니다 보면 그가 동자동 사람 모두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요. 그래서 제 고객이 아니어도 저하고 친한 분들이 많아요. 회사원 고객을 찾아갔을 때 고객이 자리에 안 계시면 평소 저하고 친하게 지내던 옆자리 직원이 설명을 해 줘요. 무슨 일로 결근을 했다든가 무슨 일로 나갔으니 얼마 있으면 올 거라고요. 그렇게 친하게 지내다가 나중에 고객이 된 분들도 있죠. 영원한 고객도 없지만, 영원히 고객이 아닌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 누구에게 제품을 사라고 권하기보다는 그저 모두와 친하게 지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국의 야쿠르트 아줌마들을 대상으로 한 선발 대회에서 그가 ‘친절대상’을 받은 이유일 것이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야쿠르트 아줌마’들의 운송 수단은 어깨에 메고 다니는 가방에서 끌고 다니는 손수레로, 지금은 탑승 가능한 냉장차 코코(Coco)로 바뀌었다. 취급하는 제품들도 유제품에서 간편식, 커피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많았지만 강미숙 씨의 정성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다.

 

비로소 세상을 배우다 
미숙 씨가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활동하는 지역구는 동자동이다. 한 지역을 계속 맡기는 회사의 방침 때문에 평균 근속 기간이 9.6년인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동네의 사정을 그곳 주민들만큼 잘 알게 된다. 그렇게 한 동네에서만 오랜 시간을 보낸 미숙 씨의 고정 고객은 그에게 직접 돈을 지불하고 제품을 사 먹는 약 300가구의 일반 고객과 복지재단이나 정부의 지원으로 그의 방문을 받는 70가구의 독거노인들이다. 
“동자동에 ‘서울역 쪽방상담소’가 있어서 그런지 동자동으로 지원이 몰린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 독거노인들도 이곳으로 모이시는 것 같고요. 제가 방문하는 70가구 중에 몸이 아주 안 좋은 분들이 한 열 분 정도 돼요. 아무리 바빠도 그분들은 매일 찾아뵈려고 하죠.” 
말쑥한 차림의 직장인 고객을 대할 때나 독거노인 또는 노숙인들을 대할 때나 미숙 씨의 태도는 한결같다. 그는 결코 남의 삶을 평가하지 않고, 자신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만을 바란다. 
“주변에서 노숙인들이 무섭지 않느냐고 묻곤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아요. 겉으로는 무서워 보여도 술 때문이지,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미숙 씨는 동자동에서 보낸 세월 동안 그들로부터 어떤 봉변도 당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유니폼 덕분인 것 같아요. 언젠가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떤 노숙인이 자기 멋대로 제 물건을 남들에게 나눠 준 적이 있어요. 그때도 화가 나진 않았어요. 그저 속으로 ‘그래, 먹고 배부르고 건강해라’ 하고 생각했죠.” 
미숙 씨의 이런 긍정적 태도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인생관을 반영한다. 언젠가는 상담심리사가 되어 남들의 고민을 풀어 주고 싶은 생각에 2002년엔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하기도 했다. 
“주부로만 살 땐 세상을 참 몰랐어요. 살림하고 아들, 딸 키우는 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아이들 얘기에 귀기울이기보다는 제 말을 거스르지 못하게 키웠어요. 이제 와 생각하면 미안해요. 야쿠르트 아줌마로 살게 되면서 세상을 배웠어요. 주부로만 살 때보다 시야가 넓어졌다고 할까요? 보는 게 많으니까 생각도 많아지더라고요.”

“매일 아침 4시 반에 기상해서 5시면 집을 나서요. 집이 있는 파주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잠들면 1시간 반 후에 동자동 사무실에 도착하죠. 사무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면서 ‘자, 또 하루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해요.”

강미숙 씨의 담당 지역인 서울역 주변에는 고층 빌딩들이 늘어선 큰 길 뒤쪽에 일반 주택가가 있다. 냉장차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은 걸어서 배달을 해야 한다. 무지개 색깔로 칠한 이 가파른 계단도 그가 매일 다니는 길이다.

70세까지 입고 싶은 유니폼
미숙 씨는 워킹홀리데이로 외국에 나가 있는 딸이 만약 야쿠르트 아줌마를 하겠다고 하면 흔쾌히 하라고 할 생각이란다. 그 정도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가진 그가 이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1997년의 IMF 경제 위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인해 광고 식자 사업을 하던 남편은 졸지에 건설 노동자가 돼야 했고, 책 좋아하는 주부였던 미숙 씨는 생활비를 벌 요량으로 도서 대여점을 열었다. 책은 좋아해도 세상일엔 까막눈이어서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문화비 지출부터 줄인다는 상식도 몰라 벌인 사업이었다. 
“그때 도서 대여점을 하지 말고 바로 이 일을 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뭘 몰랐던 거지요.” 
도서 대여점은 곧 문을 닫았고, 그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다. 아이들에게 야쿠르트를 사먹이며 만났던 야쿠르트 아줌마의 모습이 좋아 보였던 데다가 아무런 자본 없이 시작할 수 있어서 마음이 끌렸다. 게다가 회사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제품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받는 개인 사업자란 점도 좋았다. 그렇게 야쿠르트 아줌마가 된 미숙 씨는 매사에 긍정적이어서 ‘긍정 여왕’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옛날엔 제품을 외상으로 먹고 갚지 않는 사람이 10%쯤 됐는데 지금은 1~2%밖에 안 돼요. 신용카드 덕에 외상으로 살 필요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시민의식이 높아진 거죠. 착한 젊은 고객들을 만나면서 나라의 미래가 밝다는 걸 알게 되었고, 노숙인들과 독거노인들을 보면서 나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나중에 자식에게 짐 되지 않게 노후 준비를 잘하고 싶어요. 건강만 허락하면 70세까지는 이대로 배달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다음에는 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예요. 지금 휴학 중인 방통대 공부도 그때 계속할지 모르죠.” 
동자동의 미숙 씨를 지켜 주고 키워 주는 게 유니폼과 고객이라면 동자동 밖의 미숙 씨를 지켜주는 건 종교다. 토요일과 일요일엔 주로 성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의 세례명은 베르나데트(Bernadette)다. 베르나데트는 1844년에 태어나 열네 살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의 발현을 본 뒤 1933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런 세례명 때문인지 19년 동안 동자동에서 성모 대신 이웃의 수많은 얼굴을 봐 온 그의 유니폼이 구도자의 제복처럼 보였다.

김흥숙 (Kim Heung-sook 金興淑) 시인

 
 
 

Koreana

dante 2020. 5. 6. 10:48

 

 

'코리아나(Koreana)'는 외무부 산하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이 발행하는 계간지로 한국을 해외에 소개하는 매체입니다. 저는 한동안 이 계간지의 '이 사람의 일상(An Ordinary Day)'이라는 코너를 맡아 취재하고 글을 썼습니다. 제가 쓴 글들을 여기에 옮겨둡니다.

 

https://koreana.or.kr/user/0009/nd8924.do?View&boardNo=00001565&zineInfoNo=0009&pubYear=2018&pubMonth=SPRING&pubLang=Korean

 

 

동이 트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은 남았는데 떡집은 벌써 불을 환히 밝히고 분주하다. 그래서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떡집 주인이 되기 어렵다. 20년 동안 서울의 조촐한 주택가에서 작은 떡집을 운영하고 있는 부부를 만나 밤잠을 설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서울 남가좌동 주택가의 풍년떡집에서 안주인 김재은 씨가 스티로폼 팩에 여러 가지 떡을 조금씩 담아 진열하고 있다. 학생부터 노인까지 동네 손님들이 이 떡들을 사가고, 그중에는 주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김재은(金材恩) 씨의 인생은 떡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전에는 힘들게 일하면서 불행했다면 이후에는 힘들게 일하지만 행복하다. 떡은 그를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사랑을 되찾아 준 고마운 직업이다. 
그가 운영하는 풍년(豊年)떡집은 서울의 오래된 동네 중 하나인 남가좌동에 있는 명지대학교 후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서 재은 씨와 남편 오세영(吳世英) 씨는 날마다 각양각색의 떡을 만들어 내느라 하루 종일 분주하다. 
“출근 시간이요? 새벽 2시, 3시, 4시…. 그때그때 달라요. 어떤 주문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 달라지죠. 하지만 몇 시에 출근하든 퇴근은 저녁 7시쯤 해요. 지하철역 부근이나 도심처럼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있는 떡집들은 밤 10시가 넘도록 문을 열기도 하는데, 우리 가게는 주택가에 있어서 어두워지면 손님이 끊기거든요.”
떡에는 방부제 같은 보존제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만드는 즉시 신속하게 배달해야 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배달이 있는 날엔 특히 이른 새벽에 나와야 한다. 
재은 씨의 노트에는 주문 내용을 비롯해 배달해야 할 날짜와 시각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떡집의 하루는 오늘 시작해서 오늘 끝나지 않는다. 어제 시작해 오늘 끝나기도 하고, 오늘부터 내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늘 떡을 만들려면 어제부터 준비해야 하고, 내일 떡을 만들려면 오늘 쌀을 씻어 미리 불려 놓아야 한다. 또 퇴근 전엔 언제나 내일 배달해야 할 떡을 확인하고 그에 맞추어 팥, 콩 등 재료를 준비한다.

콩고물이나 팥고물로 소를 넣은 후 느슨하게 반달 모양으로 빚어 만드는 바람떡은 맛이 달달하여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찰과 교회가 주요 고객
가게에 나오면 우선 떡을 찌는 보일러에 불을 켜고, 어제 씻어 물에 담가 놓았던 쌀을 건져 방아기계에 찧는다. 열 평 남짓한 풍년떡집에는 방아기계 세 대가 있다. 찧은 쌀가루를 분쇄기에 곱게 간 후 스테인리스 시루에 담아 찜통에 얹는다. 
떡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개 10~15분이면 맛있는 떡이 완성된다. 그 종류가 가래떡, 시루떡, 인절미, 약식, 모시송편, 바람떡 등 일일이 열거하기 벅찰 정도다. 그중에서도 풍년떡집의 대표 메뉴는 찹쌀 시루떡이다. 이 떡을 위해 매일 팥을 두 말(16kg)씩 삶는다. 주문 받아 만든 떡은 세영 씨가 배달하고, 몇 가지는 스티로폼 팩에 조금씩 담아 창문 앞 가판대에 진열해 놓고 판매한다. 
“모든 음식이 다 그렇지만 떡 맛의 비결은 좋은 재료예요. 언니가 전북 익산에서 직접 농사 지은 쌀, 팥, 콩 같은 재료들을 보내 줘요. 손님들 입맛이 까다로워서 재료 나쁜 것 쓰면 금방 알아요.” 
풍년떡집의 가장 큰 고객은 인근의 절과 교회다. 세영 씨의 오토바이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인 8세기에 지어진 절로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의식도 많다. 절에서는 콩가루에 버무린 찹쌀 인절미와 멥쌀가루에 녹두나 팥 고물을 켜켜로 얹어서 찌는 제사용 시루떡을 주로 주문한다.

반면에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입맛에 맞게 여러 가지 떡을 그때그때 주문한다. 재은 씨는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주 고객이 종교 시설이다 보니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스티로폼 팩에 담아 파는 떡은 일종의 맛보기용이다. 이렇게 맛본 후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 집 단골은 지난 20년간 계속 늘어났다. 전에는 주문 떡과 팩 떡의 매출이 6대 4쯤 되었지만, 이젠 9대 1에 이른다. 주택가에 자리 잡은 위치 때문인지 팩 떡을 애용하는 사람들은 학생부터 주부, 노인까지 다양하고 방문 시간대도 일정치 않다. 젊은이들은 달콤한 꿀떡을, 나이든 손님들은 담백한 시루떡이나 인절미를 많이 찾는다. 정초에는 가래떡을 타원형으로 얇게 썬 떡국용 떡이 가장 잘 팔린다. 개업 초기만 하더라도 쌀을 직접 들고 와 가래떡을 뽑아가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이젠 거의 만들어 놓은 것을 사간다.

멥쌀가루를 쪄서 기계에 넣어 둥글고 길게 뽑아 내는 흰 가래떡은 거의 모든 떡집의 기본 품목이다. 설 명절을 비롯해 평소에도 많은 가정에서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어 떡국을 끓여 먹거나 혹은 떡볶이로도 만들어 먹기 때문이다.

인쇄소를 접고 떡집을 열다 
한민족은 원시 농경시대부터 이미 떡을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떡을 만드는데, 중국에선 주로 밀가루를 쓰고 일본에선 찹쌀가루를, 한국에선 멥쌀가루를 많이 쓴다. 한국의 떡은 농업 기술과 조리 가공법이 발달한 조선 시대에 이르러 종류와 맛이 한층 다양해졌는데, 오늘날 한국인이 먹는 떡은 대개 그때의 방식을 따른다. 
한국의 떡은 만드는 법에 따라 증병(甑餠), 도병(擣餠), 전병(煎餠), 단자(團子) 등으로 불린다. 증병은 백설기나 팥 시루떡처럼 시루에 찐 떡이며, 도병은 인절미처럼 안반이나 절구에 쳐서 만든 떡이고, 화전(花煎)으로도 불리는 전병은 곡식 가루 반죽을 기름에 지진 떡이다. 그리고 경단(瓊團)으로 알려진 단자는 찹쌀이나 찰수수 가루 반죽을 밤톨만 하게 빚어 끓는 물에 삶아 고물을 묻힌 것이다. 
12세기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미 도병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있고, 13세기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떡이 제수로 쓰였음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 떡은 요즘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제상에 올리고, 첫돌을 비롯해 생일에는 흔히 떡을 해서 축하한다. 특히 음력 새해 첫날인 설 명절엔 많은 가정에서 썬 가래떡을 고기 국물에 넣어 끓인 떡국을 먹는다.

추석엔 새로 거둔 쌀을 빻아 반죽해 만든 반달형 떡에 깨, 콩, 밤 등 소를 넣어서 솔잎과 함께 찐 송편을 먹는데,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만들어 먹는 집이 많았으나 이젠 대부분 떡집에서 사다 먹는다. 아울러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결혼식 하객들에게 주로 떡을 답례로 주곤 했으나 요즘엔 답례품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기본적으로 떡 소비가 줄었어요. 전에는 혼사에 쓰이는 이바지 음식에도 떡이 꼭 들어갔지만 이젠 잘 안 해요. 백일이나 돌잔치에 하던 백설기나 수수팥떡도 요즘 부모들은 거의 하지 않고, 어쩌다가 할머니가 손주의 돌을 맞아 조금 하는 정도예요.” 
김재은 씨가 태어난 1960년대 후반엔 떡이 아주 인기 있는 별식이었지만, 그는 떡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재은 씨는 전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또래들보다 조금 늦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 때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다른 인쇄소 직원이던 세영 씨를 소개받았고, 두 사람은 재은 씨가 25세, 세영 씨가 30세 때 결혼했다. 결혼은 했지만 재은 씨는 남편을 좋아할 수도, 존경할 수도 없었다. 남편이 인쇄소를 하다 두 번이나 실패하고도 여전히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세영 씨가 종로에서 운영하던 인쇄소가 고전할 무렵 옆에 있던 떡집은 아주 잘되었다.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인쇄소 일이 갈수록 줄어들자 세영 씨는 주말마다 이웃 떡집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그러다가 인쇄소를 접고 본격적으로 떡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웃 떡집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는데, 떡의 세계에 빠진 세영 씨에게 그 떡집은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세영 씨는 매일 새벽 오토바이로 1시간을 달려 그곳으로 출근했다가 한밤중에 돌아왔고, 그러는 동안 재은 씨는 가사 도우미 등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2년 후인 1999년 8월, 부부는 빚을 얻어 남가좌동의 풍년방앗간을 인수해 풍년떡집을 열었고, 재은 씨는 세영 씨의 수제자이자 동업자가 되었다.

그에게 남은 바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건물주가 월세를 올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일손을 놓아도 풍년떡집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주문 받은 떡의 배달은 떡집의 바깥주인 오세영씨의 담당이다.

남편을 다시 보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한 번에 주문하는 양은 줄었지만 전체 매상은 늘었으니 손님 수는 늘어났다고 봐야죠.”
그 사이 부부는 빚을 갚았고 재은 씨는 떡을 사랑하게 됐으며, 두 딸은 대학을 졸업했다. 큰딸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됐고, 현대무용을 전공한 둘째 딸은 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만 재은 씨가 떡을 ‘인생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떡 덕분에 남편을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돈 생각은 못하고 떡 생각만 해요. 어떻게 해야 떡을 잘 만들까 그것만 생각하니 마치 예술가 같아요. 처음엔 그다지 좋아할 수 없었는데 점점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요.” 
자그마한 체구에 남달리 강건한 모습이랄 수도 없지만 재은 씨도 풍년떡집의 주인이 된 후 떡만 생각하는 남편 곁에서 지난 20년 동안 단 하루도 결근한 적이 없이 일을 해 왔다. 그에게 남은 바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건물주가 월세를 올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일손을 놓아도 풍년떡집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재은 씨는 떡 덕분에 행복하긴 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5년쯤 후엔 떡집을 그만두고 쉬고 싶다”고 말했다. 큰딸과 사위에게 떡집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얘기해 놓긴 했지만, 너무 힘든 일이라 강권할 수는 없다. 재은 씨가 정말 떡집을 떠날 수 있을지는 그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다. 
“인생이 꼭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김흥숙(Kim Heung-sook 金興淑)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