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dante 2009. 10. 31. 10:27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 위기 속에서 종주국 미국도 반성중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붙들고 늘어지고, 일기예보부터 경제전망까지 틀리기를 밥 먹듯 하면서, 주가 폭락, 환율 급등, 건설업체 연쇄부도, 아파트값 급락 등을 정확히 예측한 ‘인터넷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의 입을 막는 것이 이상합니다. 방송인들과 시청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사투나잇‘을 종영한 한국방송이 미네르바 흠집 내기로 후속 프로를 시작한 것도 이상합니다.

 

-이상한 나라-

 

‘새 주소 사업’한다며 ‘황천길’ ‘부고길’등 잘못 붙인 길 이름을 다시 고치는데 1,000억 원 가까운 세금을 들이고, 퇴직 앞둔 공무원들을 ‘공로연수’로 쉬게 하는데 수백억 원을 쓰면서, 40만 명에 이르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는 게 이상합니다.

 

교사들과 학자들이 문제없다고 하는 교과서를 정부가 시키는 대로 고치지 않으면 발행 정지하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공교육 정상화 운운하며 학생부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입시정책도 이상합니다. 군대에서 억울하게 죽은 젊은이를 찾아내려 출범한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접수된 사건의 절반을 남겨두고 올해 말 ‘시한’으로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수백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 지 1년이 가깝도록 "어떻게 쓰이는 것이 효율적인가에 대해 각계의 의견을 듣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5년 동안 익명으로 8억 원 넘게 기부해온 영화배우 문근영씨가 빨간 칠을 당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문씨가 기부했던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련법을 개정하여 정부 통제를 강화하려는 한나라당 의원도 이상하고, 취한 사람이나 할 여성비하 농담을 여성지도자 초청 강연에서 해놓고 뭐가 문제냐고 하는 한나라당 의원도 이상합니다.

 

16세 장애 소녀를 9세 때부터 성추행, 성폭행해온 친할아버지 등 일가족 4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청주지법 형사11부는 이상의 정도를 뛰어넘습니다. “어려운 경제 형편에도 부모를 대신해 피해자를 키워왔고 피해자의 정신장애 정도에 비춰 앞으로도 가족인 피고인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니, 이 재판부는 정상이 아닙니다.

 

세계적 ‘피겨요정’ 김연아 선수를 국내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인 ‘그랑프리파이널’ 대회, 그런 국제행사를 겨우 2천6백석 규모의 고양 어울림누리에서 개최하기로 한 대한빙상경기연맹도 이상합니다. 이상한 일은 저 거리를 떠도는 낙엽만큼이나 무수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미네르바가 있고, 그를 ‘가장 뛰어난 국민의 경제스승’이라 부르는 김태동 교수 같은 경제학자가 있고, 문화방송이 있으니까요. 우리에겐 또 김연아가 있고, 문근영이 있고, 경제가 어려워도 기부하겠다는 네티즌들이 증가하고 있으니까요.

 

-아직 희망이-

 

무엇보다 다행인 건 겨울이 온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데 추우면 큰일이라지만 추워지지 않으면 더 큰일입니다. 경제위기는 회복될 수 있지만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재앙은 절멸로 이어지니까요. 혼자 있으면 추워도 여럿이 함께 있으면 그렇게 춥지 않습니다. 기러기 엄마들, 아이들 다 불러들여, 풍년든 배추로 넉넉히 김장하고, 돈 조금 들여 큰 재미 볼 수 있는 독서삼매에 빠져보면 어떨까요. 솟구치는 환율 덕에 수입책은 너무 비싸니 우리나라 책이 좋겠지요. 신동엽의 “밤은 길지라도 우리 來日(내일)은 이길 것이다” 같은 시를 읽으면 움츠러드는 몸 어딘가에서 붉은 불이 확 켜지는 것 같습니다. 겨울 끝엔 반드시 봄이 오고 바보들도 죽는다는 진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한국일보 칼럼

dante 2009. 10. 31. 10:24

 

지난 달 국제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1차대회에서 완벽에 가까운 연기로 우승, 온 국민에게 웃음을 선사한 ‘피겨요정’ 김연아 선수가 고려대학교의 2009학년도 2학기 수시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고대는 캐나다에서 전지훈련 중이던 김 선수가 화상 면접으로 응시할 수 있게 학칙까지 바꿨다고 합니다. 김 선수는 원하는 학교에 다니게 돼 기쁘다고 하는데 “왜 하필 고려대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합격자 발표가 불러일으킨 논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고대가 김 선수와 같은 체육특기자와 과학영재를 뽑는 수시2-1과 함께 발표한 수시 2-2 일반전형 1단계 합격자 선정 과정에서, 내신 성적이 좋은 일반고 학생들을 탈락시키고, 내신 나쁜 특목고 학생들을 다수 합격시켰다는 겁니다.

 

-김연아의 고려대행-

 

학생부에 의거해서 선발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데다 논란이 불거진 후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 받는 고대를 보니 왜 카이스트 (KAIST: 한국과학기술원)처럼 하지 못할까 안타깝습니다. 카이스트는 창의력 있는 인재 선발을 위해 2008학년도 입시부터 성적 대신 심층 면접 위주의 전형으로 바꿨는데, 그 덕에 서류전형으로는 합격할 수 없었을 학생들도 들어왔다고 합니다. 수험생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개인별 발표 주제를 1주일 전에 게시했더니 학원 등에서 미리 준비해오는 일이 있어, 앞으로는 신입생 선발 기준만 공개하고 세부적인 것은 공개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2006년 7월 취임해 카이스트의 개혁을 이끌어온 서남표 총장은 ‘모든 것을 적당히 잘하는 사람’보다 ‘한 가지가 재미있어서 열정을 쏟아 붓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서 총장은 이미 학부 1,2 학년 대상 전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게 했고, 정년보장 심사에서 40퍼센트의 교수를 탈락시켰으며, 다른 대학에서 다른 전공을 했던 학생을 선발하는 ‘2(타대학 2년)+3(카이스트 3년) 융합학사 과정’을 신설했습니다. 융합과정은 과학고 출신이 70퍼센트가 넘는 카이스트의 시야를 넓히기 위한 거라고 합니다.

 

내년부터는 석ㆍ박사과정 학생들의 졸업 연한을 2년씩 대폭 줄여, 부득이한 경우에만 심의를 거쳐 1회, 1년 연장할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수업료를 정부 예산에서 장학금으로 지원 받고 있는 카이스트 학생들이 학교에 오래 머물지 말고 사회에 나가 공헌해야 한다는 게 서 총장의 생각입니다. 작년에 영국의 더 타임스 선정 세계 대학 종합평가에서 132위를 했던 카이스트가 올해 95위가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학 및 IT 분야에선 34위, 자연과학분야에선 46위를 기록했으나, 사회과학분야에서 299위를 하여 종합평가에서 95위에 그쳤다고 하는데, 국내 대학 중 100위 안에 든 건 50위인 서울대와 카이스트뿐입니다. 고대는 작년에 243위, 올해는 236위입니다.

 

-서남표의 리더십-

 

1936년 한국에서 태어난 서 총장은 1954년에 도미, 이듬해 매사추세츠공과대학 (MIT)에 입학, 1970년 모교의 교수가 되었고, 1980년대에는 대통령의 추천과 상원 인준으로 임명되는 미국 과학재단(NSF)의 공학담당부총재로서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우리 대학들이 카이스트처럼 하지 못하는 건 총장들과 교수들이 서 총장과 다르게 ‘창의적 리더십’보다 정치적 리더십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학교는 몰라도 대통령을 배출하고 세계적 선수를 들이게 된 고대만은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학칙을 바꿔가며 뛰어난 신입생을 확보하는 것도 좋지만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제 2, 제 3의 김연아를 키워내기를 바랍니다. 가능하면 2년 안에 달라져야 합니다. 김 선수가 고대를 2년 다닌 후 카이스트의 융합과정으로 옮겨가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한국일보 칼럼

dante 2009. 10. 31. 10:21

최진실씨가 몸을 버린 지 2주가 되었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49재전이라 영혼이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일까요? ‘국민요정’ 생각을 하니 ‘국민엠씨’ 유재석씨가 떠오릅니다. 1990년대 연예계를 대표한 배우 최진실씨와 2000년대 후반 텔레비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연예인 유재석씨가 나눠 가진 ‘국민’이라는 접두어 때문이겠지요. 지난 주 한국방송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유재석씨는 현재 예능 프로그램 회당 최고의 몸값인 900만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일면식도 없는 유재석씨에게 글을 쓰게 된 건 몸값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고 몸값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위로하고 싶어서입니다. 최진실씨는 수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뜨렸지만 화면을 통해 알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과 유재석씨가 느끼는 슬픔은 비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긴 무명시절 자신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방송국 프로듀서에게 추천해준 은인을 잃은 상실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라가보지 못한 ‘별’의 자리에 오른 동료로서의 동질감.

 

-슬픔이라는 거울-

 

‘국민요정’을 잊지 못하는 대중은 핏발선 눈으로 그녀가 떠난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날 때 가장 하기 쉬운 건 희생양을 찾는 일. 최진실씨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린 ‘살인마’ 백모씨에 관한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고 ‘평생 저주’를 다짐하는 댓글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온갖 역경에서도 밝은 미소를 잃지 않던 최진실씨에게 그런 식의 추모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외침과 손가락질을 멈추고 그녀의 죽음을 거울삼아 각자의 지금을 비춰보는 것, 그것이 그녀를 기리는 옳은 방법일 겁니다.

 

타고난 외모와 재능이 있어야 들어설 수 있었던 연예계가 성형외과의 도움과 훈련으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영토가 되면서, 먼 곳의 사랑이었던 ‘별’은 누구나 될 수 있는 ‘우리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생후 2, 3년 된 아기들이 연예인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어 박수를 받고, 자녀를 ‘별’로 만들려는 엄마들 덕에 연기학원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라는 유례없는 연예공화국이 되었지만, 카리스마와 신비를 먹고 살던 연예인들은 만인의 노리개로 전락했습니다. 연예인들의 인간적이다 못해 어리석은 면을 부각시키는 프로그램이 대세를 이루면서 유재석씨는 그런 프로그램이 가장 선호하는 진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고라는 명예의 뒷면엔 늘 책임이라는 빚이 따라옵니다. 민주공화국 대통령의 책임이 국민을 편안케 하며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는 거라면, 연예공화국 대통령의 책임은 국민이 즐거운 오늘을 통해 보람찬 내일을 준비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연예공화국 대통령-

 

유재석씨! 부디 최진실씨가 남긴 슬픔의 거울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100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대중에게 웃음을 주며 자신의 이름 속 ‘희망’을 나눈 봅 호프처럼 살 것인지, 9살에 강간, 14세에 출산 등 숱한 고난을 딛고 텔레비전 역사상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 오프라 윈프리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신혼의 아내와 더불어 한국판 ‘브란젤리나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결합을 이르는 말)’를 이룰 것인지...

 

이들은 모두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나 대중의 노리개가 되지 않았으며, 자신보다 불운한 타인을 위해 나누는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유재석씨는 이미 소리 없이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니, 이제 남은 일은 오직 한 가지, 자신과 동료 연예인들을 노리개로 만드는 천박한 말의 난장을 벗어나 방송 문화의 격조를 회복하고, 대중과의 진정한 ‘해피투게더’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변덕스런 대중이 회당 900만원이라는 몸값에 문득 분노하며 질투와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기 전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