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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 일기]

한수 2020. 6. 27. 01:21

 

지영희.

선생은 1909년 평택 포승면 내기리에서 태어났다.

무악(巫樂)의 가문에서 다양한 전통악기들과 춤까지 익히고 서울로 올라와 전문 악사들을 만나 본격적인 공부를 해 나갔고, 뛰어난 음악인으로 성장했다. 특별히,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 했던 해금 연주자로서만이 아니라 국악에 대한 깊은 연구와 그것을 통한 근대화 작업에 매진했다. 

기존의 국악기들의 개량과 옛 악기들의 발굴 복원, 오선보 도입과 그를 통한 각 악기들의 교재 편찬, 민요의 채집과 채보, 그간의 민속악 합주 형식인 소편성 형태를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확장하고 거기에 지휘 개념 도입, 교습소나 학교를 설립하여 국악 교육 사업을 펼치고.. 그 와중에도 국악의 독특한 연주 양식인 시나위의 현대적 정립과 새로운 창작곡 작곡, 수많은 연주회에 해금 연주자와 지휘자로서 참여했다.

연주회 중에서는 유럽과 미국, 일본 등의 해외 연주도 있었다.

 

일제 하의, 전통 음악이 완전히 맥이 끊길 수 있는 시기에 오히려 그것을 체계화하고 본격 예술로 승화시켰으며 해방 공간과 군사 정권의 시기에 정부의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내고 급속한 서양음악의 범람 속에서 국악의 틀을 만들고 확장하면서 그 교육 시스템과 새로운 연주 방식, 국악의 미학을 완성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그런데, 말년에 국악계의 주류로부터 배척 당하고 해외로 떠나게 되고, 급기야 인간문화재 자격마져 박탈되는 등 1980년 불운하게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런데, 그 분이 남긴 것은  앞에 열거한 선구자적인 업적만이 아니라 역량 있는 제자들을 배출한 것이다. 그 제자들이 현재 한국 전통 음악 특히, 민속 음악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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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희 선생이 태어나신 곳은 내 고향 평택의 팽성면 도두리에서 직선 거리로 아마 10여 킬로미터 내외일 것이다. 내기리와 도두리 사이에는 넓은 들판이 있었고 또, 갯벌과 작은 바다가 있어서 우린 포승면 쪽을 “물근너”라고 불렀고 왕래가 쉽지 않았던 곳이었다. 지금은 그 갯벌이 평택호가 되었고 거기 다리가 놓이면서 상황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마을에서 겨우 풍물 소리와 태평소 소리를 접했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평택 농악의, 꽤나 기량 있는 분들의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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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노동은 선생은

내가 20대에 서울 교보문고(?)에서 "한국영아(兒)음악연구"라는 책을 구입하고 관심 깊게 읽으면서 알게 된 분이었고, 그 10 여 년 뒤에 <민족음악협의회>라는 진보 문예운동 단체에서 만나게 되어 인간적으로도 가까이 지내던 분이셨다.

그런데, 오래 서로 연락이 없다가 지난 달에, 평택의 지영희 박물관에서 이 책을 받으면서 그분이 몇 년 전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400여 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평전을 내고 가셨다. 그리고, 국악과 민속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과 함께..

 

지영희 선생이나 노동은 선생이 아마도 천수는 다 누리시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 같다.

이렇게 쓸쓸할 데가..

 

두 분께, 그 영령에

깊히 고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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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세 사람의 <평전>을 보았다.

[추사 김정희 평전](유홍준 저), [신영복 평전](최영묵, 김창남 저), [지영희 평전](노동은 저).

평전을 읽는 일은, 그것도 나이 들어서 평전을 보는 일은 쉽지 않다.

평전 속엔 주로 고인들의 훌륭한 족적이 남겨져 있지만,

나이가 들면, 그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춰진 갈등과 고초와 회한 같은 것들이 함께 읽혀지기 때문이다. 또, 그 분의 가족들의 모습까지도..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단언하고 싶지는 않다.)

거기에다, 평전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추체험하는 일은 고단한 여행기를 읽는 것 만큼이나 상념의 소모가 많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