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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ngery 2019. 2. 14. 01:47

김진태 등이 1980년 광주때 북조선 군이 투입되어 혼란을 야기했다는 지만원의 주장을 옹호하는 미친 짓을 하였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중3때 부산에서 벌어진 것을 알지.

어릴 때 기억을 되짚어 보자꾸나.

 

그때도 북조선 "간첩이 남포동 육교에서 독침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고 불온세력이 있다고 선전해댔다.

그런데

왜 광주에서 했던 것처럼 부산, 마산에서 군대가 미친 살륙을 안했느냐?

 

청와대 도청사건이나 박동선 로비사건으로 당시 최악의 관계가 한미관계.

지미카터는 주한미군철수를

공약으로 당선되었고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내세워 핵개발 감행했으니 미국이 박정희를 좋아할 리 만무.

 

1979년 6월 30일 "인권대통령" 지미 카터가 방한했을 때 청와대 만찬시 1시간 넘게 밥도 못먹게 박정희가 한국안보상황을 장황하게 교육시켰으니 카터가 노발대발했던 터.

 

79년 8월 9일에는 YH 무역 여공들이 김영삼의 신민당사에 점거농성했고.

8월 11일 경찰들이 여공은 물론 신민당 국회의원까지 폭행하고

김경숙씨는 진압과정에서 추락 사망했다.

 

그러자 9월 16일 김영삼은 뉴욕타임즈회견에서 미국이 박정희지지를 철회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래서 "79년 9월 카터는 공개적으로 박정희를 제거하라고 하였다"-2004.4.4.엠비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러자 박정희가 뽑은 국회 1/3의 유신정우회가 충성경쟁을 하고

공화당이 뒤질세라 김영삼을 "사대주의자"로 몰아 10월 4일 김영삼의원을 제명시켰다.

그러니 10월 16일 부산마산에서 데모가 일어나서 박정희가 위수령을 때린 것.

하지만 당시는 미국이 박정희를 제거하려고 했기에 부산마산은 유혈사태가 없었던 것이 80년 광주와 차이란다.

 

"1980년 5월 9일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이 전두환에게 유혈진압을 주문"

서해문집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5월 15일 서울역에서 학살을 저지르다

끝까지 싸우자는 유시민이가 아니라

군대의 진입을 겁낸 심재철의 주장에 따라

학생들이 돌아가는 바람에 연기된 것.

 

김영삼의 부산 마산은 79년 10.16.에 이미 들고 일어났던 터라 전두환은 1980.5.17. 김영삼은 가택연금시킨 데 반해 김대중을 구속하여 광주를 유혈진압의 타겟으로 선택한 것.

부산이 아니라 광주로 선택당한 것일 뿐,

부산에서도 "차지철이가 200만 명 죽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도 한국군은 미군명령 들어야했기에 광주에서처럼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란다.

하지만 79년 12.12.때 9사단장 노태우가 휴전선에서 군을 빼서 서울로 진공한 뒤, 미국에게 핵개발 포기를 약속했다.

그렇기에 "60년대 아시아의 농구스타 박신자의 남편이자 주한 미정보기관들의 장인 브레드나가 한국은 군부가 계속 집권해야한다고 결정했다."-리영희의 <대화>

 

12.12때 대구에 있었기에 쿠데타에 별다른 기여를 못한 게 정호용이다.

12.12.쿠데타를 반대하여 짤린 정병주 소장의 후임으로 특전사령관이 된 정호용은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 연행토록 한 것.

 

우리가 군대에서 들었던 것처럼

"베트남에서 시위군중에게 헬기에서 M60으로 갈긴 것이다."

 

남녀불문 마구잡이 폭행 여자는 잡아서 성폭행.

미항모가 부산항에 입항해서

북조선을 핵공격하겠다며

유혈진압 응원했는데

 

12.12때도 미군의 핵공격에 찍소리도 못내던

북조선이 어찌 감히 광주에 개입했을까?

간도 크다. ㅎ

 

79년 10.26.이후 비상계엄이고

12.12쿠데타로 전두환이가 계엄사령관이니

1980년 5월에 광주까지 북조선 특수군이 내려왔다고 주장하는 지만원과 김진태 등 자유한국당 패거리들은

전두환을 경계소홀로 총살시키자는 애들.

 

전두환이를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