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glassyocean18 2010. 5. 28. 08:40

28. 다음은 제자백가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의 주장들이다. (가)~(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가) 자신을 극복하고 예에 돌아감으로써 인(仁)을 행하게 된다.

(나) 배우지 않고 만들지 않아도 사람에 있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배우거나 만들어서 가 능한 것이 위(僞)* 이다.

(다) 나라도 작고 백성도 적어야 한다. 열 가지, 백 가지 도구들이 있다 해도 쓰이지 않고 … 배나 마차가 있다 해도 타지 않고 갑옷과 무기가 있다 해도 쓰이지 않는다.

(라) 군주에게 술(術)이 없으면 위에서 고단해지고, 신하에게 법(法)이 없으면 아래에서 고단해진다. 이들은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 제왕의 도구이다.

* 위(僞) : 후천적 행위

<보 기>

ㄱ. (가)를 주장한 인물은 ‘文成至聖’의 존칭으로 종교적인 숭배대상이 되었다

ㄴ. (나)를 주장한 인물의 사상은 송대 성리학들에 의해 ‘性卽理’이론의 기초가 되었 다.

ㄷ. (다)를 주장한 인물의 사상은 ‘歲在甲子’,‘黃天當立’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종 교 운동의 이론적 단서로 이용되었다.

ㄹ. ‘王覇雜道’라는 말은 (라)의 정신이 한대의 통치 방식에도 반영되었음을 보여준 다.

 

① ㄴ, ㄷ ② ㄷ, ㄹ ③ ㄱ, ㄴ, ㄷ ④ ㄱ, ㄴ, ㄹ ⑤ ㄱ, ㄷ, ㄹ

 

 

답 5

 

<문제분석>

 

 

춘추전국시대에 혼란한 정치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였다. 그때 출현한 사상들은 중국사상사를 선진(先秦)을 기준으로 분류할 만큼 중국 사상의 모태를 이루었다. 후대에 성리학, 도교 등에 영향을 줬다. (가)를 주장한 사람은 공자이다. 공자는 "仁者. 人也"라고 하여 최고의 덕목을 인(仁)으로 두었다. 인(仁)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배려를 바탕을 두고 있다. 인(仁)의 구체적인 덕목으로 부모를 섬기는 효(孝)와 어른을 섬기는 제(悌)를 두었다. 인의 실천은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형제로부터 출발하여 점차적으로 나와 멀리 있는 사람으로 확대된다고 주장하였다. (묵자는 유자의 차별애에 반대하여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겸애를 주장하였다) 인을 닦고 그것을 예로 수행하면 이 세상의 모든 혼란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극기복례) 공자의 사상은 그 당대에는 정치가로부터 외면을 받았지만 후대에 중국 사상사에 큰 영향을 줬다. 공자가 죽은 뒤에 사람들은 공자를 추앙하기 시작하였고 역대의 황제들은 곡부에 있는 공자의 공림(孔林)에 찾아가서 참배를 하고 참배 기념으로 수 많은 기념비를 세워 놓고 왔다. 공자는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 등의 시호를 받았다. (나)는 순자이다. 맹자가 공자의 인(仁)을 계승한 반면에 순자는 공자의 예(禮)를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순자는 타고 날 때부터 인간은 성(性)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때 성은 감각 작용을 말한다. 감각작용인 성이 움직일 때 인간의 희노애락 같은 정(情)이 나온다. 이러한 정(情)을 통제할 수 있는 마음이 '려'와 '능'이 인간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고 이러한 것을 인간은 후천적인 능력을 통해서 길러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을 위(僞)라고 하였다. 위는 예(禮)를 통해서 양성할 수 있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보다 규범성이 강하고 법가의 법(法)보다는 강제성은 덜하지만 자의적인 해석과 사회적 규제 때문에 법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법가는 순자의 규범성을 강한 예를 강제성이 강한 법으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후에 순자의 제자였던 이사와 한비자는 법가의 유명한 사상가가 되었다. ㄴ 성즉리의 이론적 기초를 이룬 사람은 장재와 정호이다. 장재는 천지의 성(性)의 본체로서 인간의 성이며, 기질의 성은 현실의 구체적인 인간의 성으로 구별하였다. 이것은 주자의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별할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을 이루었다. 그리고 정호는 사욕(私慾)에 가득찬 인심과 달리 선한 감정인 리(理)가 있는데 이것은 성(性)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性卽理) 주희의 성즉리설은 장재의 천지의 성 = 본연지성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정호의 성즉리설과 연결시켜 본연지성이 성이고 그 안에 리가 내재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순자의 성(性)은 성악설을 바탕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가선가악(可善可惡)의 기질지성과 연결시킬 수 있지 순수무악(純粹無惡)의 본연지성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다)는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 즉 문명의 발달 없는 무위(無爲)와 무욕(無慾)의 이상사회를 말한 노자의 소국과민론(小國寡民論)이다. 노자는 당시의 혼란된 사회의 원인을 지나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무질서와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욕(無慾)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위의 산물인 문물, 예악, 제도, 법률 등으로 구성된 사회와 문명을 부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노자가 제시한 것이 소국과민의 국가상이다. 국가의 규모는 작은 소부락 국가이어야 하며, 각기 개별적으로 고립 산재하여 그 거리는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수 있는 정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시회는 농기구, 수레, 배 등이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의 상호왕래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ㄷ.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은 태평도의 장각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킬 때 내걸었던 참위적인 성격을 띤 구호이다. 창천(蒼天)은 "기존의 하늘", 곧 한(漢) 왕조를 뜻하는 것이라면, 황천(黃天)은 황건(黃巾)과 연계된 "새로운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다. 통상 중국에서는 왕조변화를 음양상극설과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황건적이 내걸었던 구호는 특이하게 음양상생설이다. 후한의 화덕을 이어서 태평도가 토덕을 계승하겠다는 표현이다. (관련 보충자료 1참조) 태평도의 교리는 황제와 노자를 신격화한 황로신앙으로 불노(不老), 불사(不死), 장생(長生)과 부귀(富貴)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라)는 한비자의 사상이다. 한비자는 기존의 법치주의, 술치주의, 세치주의를 통합하여 제시하였다. 엄격한 형벌과 상을 통한 부국강병을 바탕으로 한 법치주의를 통해서 군주의 획일적인 지배를 정당화시켰다. 권모술수를 이용한 술치주의에 입각한 통치기술을 통해서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였다. 군주의 덕행이 아닌 권력을 의한 통치를 통한 세치주의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도덕과 정치를 분리하였다. ㄹ. '왕패잡도(王覇雜道)'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왕도정치와 법가에서 말한 패도정치를 동시에 강조하는 말이다. 왕패잡도의 정치이념은 한무제 때 확립하였다. 진시황이 법가적 통치에만 기대서 했던 것보다는 세련된 방식이다. 한무제는 유교를 관학화시켜서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법가적인 통치를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균수법, 평준법, 전매제 등 같은 경제통제정책이다. 유가와 법가나 중농억상정책을 지향했지만 법가는 경제를 직접통제하고 그 가운데 이득을 취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에 유가는 여민쟁리(국가가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는다) 입장에 따라서 국가의 직접통제를 피했다. 무제 때 확립된 이러한 통치체제는 후대 황제들에 의해 답습되었다. 공부할 때 중국의 제자백가사상을 정리해 보고 그 사상들이 후대에 정치사상과 정책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지문근거>

 

- (가) 지문 근거 공자의 인(仁) 사상

 

공자의 사상은 인(仁)으로 대표될 수 있는데, '인'은 공자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던 개념이지만 공자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어 모든 덕목의 최고 원리로 제기된다. 이러한 '인'이외의 다른 덕(德)들은 모두 '인'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仁者. 人也"라고 언급했는데, 이것은 바로 '인'이란 것은 사람다움이다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인'이란 것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인간으로서 규정될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는 개념인 것이다. 공자의 제자 번지가 '인'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애인(愛人)',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사랑이란 일종의 정감(情感)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배려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때의 다른 사람은 일반적인 인간을 가리키지만, 공자는 사랑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베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부모를 먼저 사랑하는(親親)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내 이웃사람들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내 나라사람들을 사랑하고 그것을 더욱 확대시켜 온 천하의 사람들, 즉 인류전체에 대한 사랑에까지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고 한 것이다. 효(孝)라는 것은 '인'한 마음씨와 태도로 부모를 섬기는 덕목을 의미하며, 제(悌)라는 것은 '인'한 마음씨와 태도로 어른을 섬기는 덕목을 의미한다. 공자는 '인'의 실천 역시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형제로부터 출발하여 점차적으로 내 이웃사람들, 내 나라사람들 그리고 온 천하의 사람들에까지 넓혀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인'의 실천은 효심(孝心)의 확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고대중국의 사유세계> 47p-48p * 관련 다른 책에도 근거 있음

 

- ㄱ 지문 근거

 

공자는 살아생전에 중용되지 못했으나. 죽은 뒤에 사람들은 그를 지고무상의 지위를 떠받들었다.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그를 최고로 숭상했으며 끊임없이 시호를 내렸다.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그를 최고로 숭상했으며 끊임없이 시호를 내렸다.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만세사표(萬世師表' 같은 것이 그에게 내려진 시호였다. 그의 고향에는 그를 기르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 많이 들어섰으며, 해마다 중앙과 지방의 정부가 직접 나서서 그 곳에서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다. <중국의철학산책> 17p

 

- (나) 지문 근거 순자

 

순자 사상체계의 핵심은 '인성론'이다. 순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구비되어 있는 것을 '성(性)'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성'은 인간이 태어난 후 학습과 행위를 쌓은 뒤에 나타나는 결과물이 아닌 천성적으로 몸에 갖추어져 있는 고유한 것이다. 또한 그는 타고난 본래의 것이 다양한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파생된 것도 '성'에 포함시켰다. 즉, '성'이란 것은 인간의 육체에 갖추어진 관능·감각 및 그 기능과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순자는 이러한 '성'이 움직일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들, 예를 들어 좋아함, 증오, 기쁨, 슬픔, 즐거움 등을 '정(情)'이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정'은 인간의 마음의 작용으로 선택하여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순자는 '려(慮)'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구사랄 수 있는 힘을 '능(能)'이라고 불렀다. 세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려'와 '능'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며,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고 순자는 생각했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려'와 '능'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행위, 즉 '위(僞)'이다. 또한 인위(人僞) 가운데는 이익을 지향하는 것인 '사(事)'와 윤리를 지향하는 '행(行)'이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각을 담당하는 '지(知)'가 있는데, 그것이 대상에 따라 적절히 움직이는 것을 '지(智)'라고 부르며, 그렇게 움직이는 힘을 '능(能)'이라고 한다는 순자는 언급하고 있다. <고대중국의 사유세계> 71p * 관련 다른 책에도 근거 있음

 

- ㄴ의 근거(오답)

 

장재가 말한 '천지(天地)의 성(性)'은 본체로서의 인간의 '성'이며 '기질의 성은 현실의 구체적인 인간성을 가리킨 것이다...(중략)...주자의 '성즉리(性卽理)'는 이기설과 마찬가지로 그 기본구조는 정이에서 발원하였다. 정이는 심(心)'을 신(身)이 주재로 보아 여기에 성(性)이 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심'을 형기(形氣)에서 발(發)한 '인심(人心)'과 의리(義理)에서 발한 도심(道心)과를 구별하여 '인심'은 사욕이기 때문에 위태한 것이라고 하여 이를 멸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였다...(중략)...그는 또한 '성즉시리(性卽是理)','성즉리(性卽理)'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말들을 정리해 보면 그는 인간의 심성 안에는 선한 것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도(道), 이(理)와 합치되는 것이며 그 합치되는 한에서 '성(性)'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이 같은 정이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장재의 '천지의 성'의 관념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자는 장재의 '천지의 성', '기질의 성'의 구별과 정이의 '성즉리'주장을 종합하여 정연한 인성론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강좌중국사 3권> 218p-219p

 

(다) 노자의 소국과민론

 

노자는 정치를 백성을 자연(自然)함에 방임하여 함부로 간섭할 것이 아니라고 했다. 즉, 군주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만든 제도나 법률 같은 것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폐해만 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큰 나라를 다스림은 마치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 바꿔 말하면 노자는 정치를 생선 굽는 일에 비유하여, 자꾸 이러저리 뒤적이면 생선이 다 부서지고 타 버리는 것과 같이 정치가 백성들에게 끼어 들수록 천하는 뒤죽박죽 된다는 하는 것이다. 나라는 작고 백성 수는 적어야 한다. 온갖 도구가 있지만 쓰지 않게 하며 백성들이 생명을 중시하도록 하면, 살던 곳을 버리고 멀리 옮겨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배나 마차가 있어도 탈 필요가 없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며, 의욕을 줄이고 뼈를 튼튼히 하여 늘 백성들이 무지하고 욕심이 없게 만들며, 지식인들이 제멋대로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 무위(無爲)로 다스리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고대중국의 사유세계> 91p * 관련 다른 책에도 근거 있음

 

- ㄷ 지문 근거

 

주술적인 색채가 강한 신흥종교 '태평도'를 일으킨 장각은 미신에 잘 빠지는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10여 년 동안에 10만 명의 신자를 모았다. 그는 신자를 군사적으로 편성하여 봉기를 준비했다. 184년 장각은 "창천(蒼天·한왕조)은 이미 죽었고, 황천(黃天·태평도)이 바야흐로 설 때이니 갑자년에는 천하가 대길이다"라고 선전하고, 궁중의 동지와 호응하여 일제 봉기를 노렸지만 사전에 정보가 새나가 뤄양에서 1천여 명이 살해되었다. 그 때문에 장각은 한달 정도를 앞당겨 봉기를 일으켜야 했다. <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68p * 관련 다른 책에도 근거 있음

후한 말기 황건란이 발발하기에 앞서 일반 농민 사이에는 태평도와 오두미도가 유행했는데 그 교리는 황제와 노자를 신격화한 황로신앙으로 황로의 도를 신봉하면 불노(不老), 불사(不死), 장생(長生)과 부귀(富貴)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 어지러웠던 사회속에서 현실적 욕구불만과 육체적 질병과 고통은 당시 부패하고 부조리한 정치·경제상의 여러 조건과 결부되어 정치적 혁명운동으로 비약하였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하북성 거녹인 장각이었다. <중국사 서설> 171p * 관련 다른 책에도 근거 있음

 

(라) 법가의 한비자의 사상

 

한비자는 자신의 '인성론'과 '역사론'에 기초하여 정치설을 수립하였다. 더구나 그는 군주 지상의 입장에서 통치의 수단을 생각하였다. 그는 우선 법을 절대부동의 위치에 둔다. 그는 이 세계 가운데는 우연이라도 군주를 위해 선(善)을 완수하려고 하는 사람은 소수이며 대다수의 인간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이러한 대중을 지배하려고 한다면 법은 인간의 선의에 조금도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한비자는 법으로부터 우연성과 도덕성 등 불순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모두 배제시켜 이것을 최고의 순도로 보존하려 하였다. 이때 법은 필연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며, 모든 신하와 백성에 대하여 두 가지 작용을 한다. 즉, 그는 규정된 포상으로써 이익을 주는 동시에 정해진 중벌을 통해 공포를 통감할 수 있도록 하고, 이러한 통치를 "우연적인 선(善)에 따르지 않도록 하여 필연의 도를 행한다" '현학'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군주가 이러한 법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공개하여 주지시키고 철저하게 함으로써 이것을 유일한 가르침으로 설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이 볼 때 한비자에게 있어서의 법의 주요한 목적은 선(善)을 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주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한비자도 법과 아울러 술(術)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경우에도 군주에게 신하를 믿지 말 것, 특히 용모와 지식 그리고 달변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한비자는 국가기구가 필요로 하는 관직은 백을 단위로 하여 헤아려야 할 만큼 많지만, 그 가운데 어질고 착하며 믿을 만한 관리는 열 사람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만일 구한다 하더라도 소수의 어질고 착한 사람만으로 관리를 편성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주는 포상과 중벌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여러 신하들을 감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한비자는 주장하였으며, 특히 그는 군주가 절대로 여러 신하들의 인상을 믿어서는 안 되며 다만 신하들이 관직에 부여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조용히 관찰하고 정확히 인사고과에 기초하여 냉정한 인사이동을 단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능력이 있는 자라면 하급관리나 병졸로부터 고생 끝에 올라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상을 주고 여러 차례 옮겨 재상이나 장순의 지위에 오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군주가 여러 신하들을 통제할 때 겉으로 드러난 지식과 신의를 믿지 않고 법과 술(術)에 의해서 한다면 여러 신하들은 법령의 집행자로서 비로소 백성들의 스승의 지위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고대 중국의 사유세계> 137p-138p * 관련 다른 책에도 근거 있음

 

- ㄹ 지문 근거

 

현실 정치 측면에서 한 무제의 독존유술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한 무제는 유가에게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지요. 종교 측면에서는 도가의 방사에 상당히 의존하고, 정치 측면에서 법가에 의존했습니다. 유가의 완고하고 융통성 없는 경향은 한 무제의 거창한 치적을 바라는 호탕한 성격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습니다. 한 무제가 등용한 대신들은 대부분이 유술과 형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무제가 등용한 대신들은 대부분은 유술과 형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치국을 위한 방략은 '유표법리(儒表法里 겉은 유가 속은 법가)'로 개괄할 수 있습니다...(중략)....이에 대한 한 선제는 정색하고 질책했습니다. "한나라의 제도는 본래 패도와 왕도를 병용한 것인데 어찌 덕교와 주나라의 통치만 받들어야 하는가.: 한나라의 통치제도는 패도와 왕도를 병행하는 것으로 주나라와 같은 덕정만 펼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독존유술 정책의 뒷면에는 왕도와 패도, 유가와 법가의 병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사 16마당> 137p * 관련 다른 책에도 근거 있음

 

 

 

<보충자료1> 음양상극설 입장에서 본 중국의 왕조 변화

 

초한지에 보면 유방이 한량이던 시절에 저잣거리에 큰뱀이 있어서 이를 아무도 죽이지 못하자 유방이 죽인 적이 있다. 꿈에서 왠 노파가 울고 있어 유방이 물으니 말하길 '내 아들은 백제의 아들인데 저잣거리에서 잠을 자다가 적제의 아들에게 죽였다' 라고 했다. 이를 보면 한나라는 적제의 아들 즉 '붉은색'이다. 그런데 황건적의 플랜을 보면 '蒼天已死 黃天當立'이라고 했다. 이는 푸른하늘은 이미 죽었고 누런 하들이 마땅히 서리라라는 말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붉은색'인데 왜 저이들은 '푸른하늘'이라고 했는가? 자, 이말을 설명하려면 오행종시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나라의 국덕을 설명하는 오행종시설에는 오행상극설과 오행상생설이 있다. 맨 처음에 '오행종시설'을 나라의 '덕조'로 삼은 이가 진시황제인데 진시황은 나라를 세우고 '水德=북방=흑색'으로 나라를 일으켰다고 만방에 이야기를 하며 모든 것을 검은 색으로 도배를 한다. 수는 북방을 의미하며 검은 색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진나라 전의 주나라의 오덕을 설명하기를 '화덕=남방=적색'이라고 설명을 한다. 왜 화덕이야? 불을 끄는게 물이다. 수극화의 상극설의 이론을 적용한 것이다. 상극설은 전국시대 추연의 음양오행설 이론 중 하나다. 상극은 서로 극하는 상대라는 의미로서 목극토-토극수-수극화-화극금-금극목 의 순으로 흘러간다. 춘추전국시대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시대이고 진시황은 6국의 나라를 모두 평정하고 토벌하여서 통일을 이룬 황제이다. 따라서 '상극설'로 왕조의 덕에 관한 설을 삼은 것이다. 따라서 진나라가 수덕이고 수가 이기는 상대인 화덕이 주나리인 것이다. 그러니 주나라가 상나라를 엎고 일어났으니 불이 이기는 오행인 '금=서방=백색'이라고 논을 삼는 것이다. 또 응당 하나라는 주나라의 '금덕'을 이기는 상대이니 '목=동방=청색'을 하나라의 오덕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추연의 오행상극설로 나라를 설명하다보니 심각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즉 전조를 엎고 후조를 세운 즉 '하극상'의 논리 이론을 설명하게 된 것이다. 하극상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법가의 이론으로 중무장한 진시황에게는 문제가 없는 이론이지만 초한대전을 이기고 나라를 세운 한초의 시기에는 크나큰 모순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묵가의 '선양'이라는 이론도 유학으로 끌어들여 설명하여 아름다운 전통 하는 판국에 '하극상'을 왕조 논리로 삼는 것은 그네들의 큰 문제였다. 이를 동중서가 '오행상생설'로서 풀어낸다. 즉 전조를 극하여 일어난 왕조가 아니라 전 조를 이어서 생겨난 왕조란 뜻이니 그리하여 한무제때 완전하게 바뀐다. 우선 진시황이 '수덕'이라고 한 것은 불변의 진실이니 그 앞부터 살피는 것이다. 그럼 수를 살리는 것은 무엇인가. 금생수다. 즉 금이 물을 생하는 것이니 주나라는 순식간에 '화덕'에서 '금덕'으로 바뀌고 색깔도 흰색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러다보니 상나라는 금을 생하는 오행인 '토덕'이 되고 '황색'을 주색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라는 토를 생하는 '화덕'의 나라가 되고 '적색'을 주색으로 취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진나라 뒤를 이은 한나라는 '목덕'의 나라이며 '동방'이고 '청색'이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동중서가 이론을 바꿔서 전한은 '목덕-동방-청색'의 나라가 된다. 그런데 중간에 왕망이 신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왕망은 '왕조의 오행'을 논하지 않는다. 그는 '주나라를 계승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진시황이 제멋대로 '오행'을 '왕조국운'에 대입한 것을 따를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신나라는 15년에 지나지 않았고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한다. 광무제는 '신나라'를 왕조로서의 시대로 인식을 하지 않았고 '춘추전국' 혹은 '초한대전' 시기의 난으로 인식을 하여 따로이 왕조의 덕을 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신은 전한을 이어받은 나라라고 하여 이후 후한의 왕조의 덕을 목을 이어받은 왕조라 하여 '화덕-남방-적색'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니 후한말에 '창천이사 황천당립'이라고 하는 것은 푸른 하늘이 죽어서 누런 하들이 선다고 황건적이 외친 것은 오행설 자체로는 말이 맞지 않는다. 창은 푸름이요 푸름은 나무다. 누런것은 흙이요 땅이다. 이는 상생설로 살펴서 목생화가 되어야 하므로 '화덕'을 논하지 않아서 말이 되지 않으며 상극설로 살핀다면 '목'을 깨는 '금덕'을 논해야 하는데 느닷없이 토덕을 말했으니 이는 도리어 전왕조에 깨지는 나라라는 뜻이다. 장각의 시에 숨겨진 뜻을 살펴야 하는 바 우리는 전한, 후한이라고 부르지만 후한을 사는 이들은 자기네들은 '후한'이라고 여겼겠는가 하는 점이다. 왕망이 중간에 잠시 난을 피웠을망정 우리는 전한과 같은 '한나라'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바다. 그러니 장각이 후한의 난에 황건적을 세워 창천이사라고 한것은 '전후한' 을 모두다 그냥 유방이 세운 '한나라'라는 말이다. 즉, 한나라는 이미 망했다는 말이다. 그럼 왜 자기네는 황천인가? 말했듯이 후한은 '화덕'의 나라다. 화는 토를 생한다. 화생토 오행상생설이다. 한나라는 목으로 일어나서 화로 계승된 나라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유방'의 한나라는 이미 망했고 그리하여 자기네는 '후한'의 '화덕'을 이어서 '토덕'의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다. 장각은 과거공부를 한 천재 재사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가문이 빈한하여 출세를 못한 젊은이다. 그가 이런 저런 사정을 알리가 없다. 더구나 태평도에 든 무지렁이 백성들이 왕조의 오행덕을 알리가 없다. 하지만 황건적을 기의하며 전국에 이를 공표해야 한다. 자기네의 플랜을 선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네들은 호족이고 사들인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고 아니라도 플랜을 4구로 맞추다 보니 그 중간의 생략문을 두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네이버 검색 내용 발췌>

출처 : 북소년사회과카페
글쓴이 : 북소년 원글보기
메모 :

 
 
 

카테고리 없음

glassyocean18 2010. 4. 9. 04:20

프랑크왕국 - Frankenreich

 

프랑크왕국 전반기 (메로링거왕조:481∼751).

프랑크족의 일파 살리족(族)은 민족 대이동기에 라인강을 건너 톡산드리아로 진출하였다. 당시 프랑크족은 많은 소국(小國)으로 나누어져, 각각 소왕(小王)에게 지배되고 있었는데, 브뤼셀 부근에 있던 데스파르굼의 왕 클로디오가 세력을 떨쳐 메로빙거조의 최초의 왕이 되었다. 그의 아들이 왕조 이름의 근원이 된 메로비스이다. 또 그의 아들 힐데리히 1세 때, 이미 살리족의 통일은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던 것 같다.

481년, 그 뒤를 이은 아들 클로비스 1세는 살리족 뿐만 아니라 리브라족·카마비족까지도 병합하여서 프랑크왕국을 건립하였으며, 루아르강 유역에 남아 있던 로마인 세력을 멸망시키고(486), 서고트 왕국과 부르군트왕국을 쳐 알라만족을 정복, 갈리아 남부에서 남서독일에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또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교황과의 제휴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망(511) 후, 왕국은 4명의 아들인 토이데리히 1세·클로도머·힐데베르트 1세·클로타어 1세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형제는 대외적으로는 협력하여 부르군트왕국을 멸망시키고 서고트왕국을 피레네산맥 너머로 몰아내어 바이에른족·튀링겐족을 복속시키는 등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분국(分國) 상호간의 내분을 되풀이하였다.

그 후 클로타어 1세에 의해 통일되었으나, 그의 사망(561) 후에는 또 다시 4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어, 특히 아우스트라시아분국왕(分國王) 지게베르트 1세와 네우스트리아 분국왕 힐페리히 1세와의 대립은 전국적인 내란으로까지 발전하여, 힐페리히의 아들 클로타어 2세에 의해 재통일(613)되었다고는 하나 국내 호족(豪族)들의 세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고, 실권은 호족층의 두령(頭領)인 각 분국의 궁재(宮宰)의 손에 장악되었다.

특히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카롤링거가의 대두가 현저하여 피핀(中) 때에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을 장악했고, 그 아들 카롤루스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의 싸움(732)에서 침입해 온 이슬람군을 격파하여, 사실상의 프랑크왕국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이같은 기반 위에서 그의 아들 피핀(小)은 쿠데타를 감행, 최후의 메로빙거 국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이 카롤링거조시대를 열었다(751).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옛 게르만인 가운데 서게르만 계통 프랑크족이 세운 왕국(486∼987).

부족국가에서 발전하여 차츰 다른 여러 게르만 부족을 정복, 통합하여 피레네산맥에서 엘베강에 이르는 서유럽 대부분을 포함하는 나라를 이루었다. 4세기 이후 훈족에 의하여 촉발된 게르만민족대이동 뒤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럽의 문화적·정치적 통일을 실현한 프랑크왕국은 서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적 게르만 통일국가로서 이후 중세의 여러 제도 및 그리스도교 문화의 모체가 되었다.

프랑크왕국의 역사는 그 지배왕조에 의하여 5세기말∼8세기 중엽의 메로빙거왕조와 8세기 중엽∼10세기말의 카롤링거왕조로 나뉘며, 오늘날 독일·프랑스·이탈리아 3국 형성 기초가 된 왕국의 분열은 843년의 베르�조약에서 비롯되었다.


[역사]

프랑크족은 라인강 중·하류 동쪽 기슭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을 비롯하여 많은 소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집단이었다. 4세기초 이래 라인강 하구에서 북브라반트에 거주하는 살리족, 쾰른을 중심으로 한 라인강유역의 리부아리족, 헨센지방을 중심으로 한 상(上) 프랑크족의 3대부족이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살리족은 5세기초 더욱 서쪽으로 나아가 스헬데강 유역까지 퍼졌다.

이 무렵 브뤼셀 부근에 있던 데스파르궁의 소왕(小王) 메로빙거가가 대두하였다. 이 가문에서 나온 클로비스 1세는 살리족을 통일하고 이어 리부아리족과 상프랑크족을 병합하여 5세기말 프랑크왕국을 세웠다. 메로빙거왕조는 486년 루아르강 유역에 남아 있던 로마인 세력을 멸망시켰으며, 500년 무렵에는 부르군트왕국·서고트왕국을 쳐서 갈리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또한 클로비스 1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교황과의 제휴를 시도하였다. 그가 죽은 뒤 프랑크의 관습인 분할상속원칙에 따라 왕국은 네 아들에게 나뉘어졌다. 형제는 대외적으로 협력하여 영토를 확장시켰으나, 각 분할국 사이의 이해 대립이 왕국 내분의 원인이 되어 분열과 재통일을 거듭하면서 실권을 잃어가게 되었다.

메로빙거왕조는 명목상 751년까지 존속하였으나 실권은 각 분국(分國)의 궁재(宮宰)가 장악하였고, 특히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직을 세습한 카롤링거가가 크게 대두하였다. 카롤링거가는 688년 피핀(中)이 프랑크왕국 전체의 궁재가 되고, 그 아들 카를 마르텔은 732년 투르-푸아티에싸움에서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무찔러 프랑크왕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이 기반 위에서 그의 아들 피핀(小)은 751년 쿠데타에 의해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왕조시대를 열었다. 피핀의 왕권은 로마 교황에 의해 정통으로 승인되고, 피핀의 아들 카를 대제 통치 아래 프랑크왕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서쪽은 피레네산맥, 동쪽은 엘베강, 북쪽은 흑해 연안, 남쪽은 이탈리아 중부에 이르는 서유럽 대부분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고 고전문화부흥에도 힘써 이른바 카롤링거왕조 르네상스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카롤링거왕조도 메로빙거왕조와 마찬가지로 분할상속에 의해 분열되었다. 즉 843년 베르�조약에 의하여 그 광대한 영토는 카를 대제의 세 손자에게 분할되어 중부제국(로트링겐·부르군트·북이탈리아)·서프랑크왕국·동프랑크왕국이 성립된 것이다. 이 가운데 중부제국은 다시 3분할된 뒤 명맥이 끊겼고 동프랑크는 독일왕국, 서프랑크는 프랑스왕국으로 저마다 발전해 갔다.

[통치조직]

가장 중요한 행정조직은 그라프샤프트로, 그 장관을 그라프(Graf;伯)라 하였다. 그라프샤프트는 로마시대 말기의 행정구인 키비타스를 모방한 것으로, 그라프는 도시 방위를 맡은 군대의 지휘관이었으나 뒤에 행정적·사법적 기능도 겸하게 되었다. 메로빙거왕조 초기에는 국왕이 임명권을 장악하였으나, 7세기 초에 해당지역 귀족이 임명권을 독점해 영주화(領主化)되어 갔다.

카롤링거왕조의 카를 대제는 메로빙거왕조 말기의 봉건화를 극복하기 위해 아우스트라시아 출신 측근자를 그라프로 전국에 파견하고, 순찰사를 정기적으로 내보내는 등 지방정치 정비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약화한 후기 카롤링거왕조 때는 그라프의 지방호족화 경향을 막기 어려워 그라프샤프트가 차츰 해체되었다.

[사회·경제]

프랑크왕국은 정복·확대의 결과 옛 로마계 주민 및 다른 게르만계 주민이 포함되고, 사회구성도 지역에 따라 달라졌다. 이를테면 남갈리아에서는 로마 말기 행정단위인 키비타스제도가 유지되고, 사회구조도 대토지소유자·중소토지소유자·소작인의 3계층으로 이루어졌으며, 북갈리아에서는 프랑크족 자유인과 비자유인 및 로마계 포세소레스의 3계층이 있었다.

또 라인강 동쪽지역은 기본적으로 귀족·자유인·비자유인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프랑크왕국은 그 경제적 기반을 농업에 두고 있었다. 남부를 중심으로 상품·화폐경제가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나, 카롤링거왕조시대에 경제 중심이 지중해 연안에서 북갈리아로 옮겨짐에 따라 농업 비중이 급격히 커졌다.

철제농구 보급, 말을 수레에 매는 방법의 도입 등으로 개방경지제도와 삼포(三圃)농업을 수반하는 집촌(集村)이 나타나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되었다. 또 종래 전사적(戰士的) 성격을 가졌던 게르만계 자유인 계층이 많이 농민화하여, 뒤의 봉건제 성립과도 연관된다.

이렇듯 고전고대와 중세 사이에 자리한 프랑크왕국은 민족대이동 후 게르만계 여러 민족을 통합해 그들에게 공통적 문화기반, 가톨릭이라는 공통된 신앙, 공통된 정치적 질서를 부여하여 그 뒤 서유럽 역사·문화 전개의 한 바탕을 이루었다
.

프랑크 왕국의 전성 카를대제

카롤링거왕조 제 2 대 프랑크 국왕

서방세계의 고대를 지배하였던 천년왕국 로마가 붕괴되면서, 유럽은 게르만 계열이 세운 여러왕조들이 곳곳에서 성립하였다. 하지만 이중에서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프랑크왕국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였다.

프랑스는 고대로마에서는 갈리아라고 불렸으며, 광활한 평야로 인해 농업과 목축업이 매우 발전한 곳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드넓은 평야와 농업경제력을 손에 넣고 성장한 인물중에 저 유명한 케사르를 비롯해 로마황제자리를 차지한 총독도 여러명 있었다. 그만큼 프랑스 지역은 고대로부터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으며, 이 지역을 차지한 세력이 곧 서 유럽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한 표현은 아니었다.



메로빙거왕조에 이어 프랑크왕국의 후반을 지배한 왕조

명칭은 로부터 유래하였다. 계보는 아우스트라시아 지역의 대호족 대(大)피핀(피핀 1세)으로거슬러 올라가므로 아르눌프가(家) 또는 피핀가라고도 부른다. 아르눌프의 아들 안제기젤과 대피핀의 딸 베거 사이에 출생한 중(中)피핀(피핀2세)이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가 되어 카롤링거가의 기초를 닦았다피핀2세는687년 테르트리의 싸움에서 노이스트리아를 격파, 전프랑크왕국의 궁재가 되었고 그 서자 카를 마르텔은 732년 투르·푸아티에 싸움에서 에스파냐로부터 침입한 이슬람교도를 패주시키고 카롤링거가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카롤링거가는 유럽과 로마교회의 수호자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카롤로스가 성장하는 동안 아버지인 피핀 3세(소(小)피핀)는 자신의 형을 몰아내고 통치권과 왕권을 독차지하는 일에 몰두하였고, 결국 메로빙거왕조의 왕을 폐위한 뒤 751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피핀3세는 제 91 대 교황 자카리아스의 승인을 얻어 정당성을 부여받았으며 이로부터 카롤링거왕조와 교황권의 제휴가 시작되었다

그 후임 교황인 스테파노 3세는 롬바르드족의 침공으로부터 로마의 보호를 위한 도움을 청하려고 프랑크왕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12세였던 샤를마뉴는 왕국의 장자로서 교황을 영접하였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식(聖油式)을 집전하여피핀 3세와 그의 두 아들인 카롤로스와 카를만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 귀중한 봉사의 대가로 패팽 3세는 롬바르드족을 교황의 영지에서 축출할 것을 다짐하였다

피핀 3세는 760년부터 해마다 원정에 나서 아키텐(루아르강(江) 남쪽의 프랑스)을 정복함으로써, 피레네산맥까지가 모두 프랑크왕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하였다. 이 일련의 원정에 카롤로스가 늘 동행하였다이런 젊은시절의 경험은 카롤로스의 성격과 목표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외적에 대항해 단호하게 싸우면서영토를 넓히려는 경향이나, 가까운 친척들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결심도 아버지와 똑같았다.

카롤로스 대제
샤를마뉴 Charlemagne</혹은 카를 대제라고도 한다

  768년피핀 3세가 죽자 프랑크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고, 이 싸움에서 승리한 샤를마뉴는 자기를 배신하고 카를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771년에는 동생이 죽어 카롤로스 대제의 단일통치자가 되었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카롤로스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하였고 롬바르드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하였다


 카롤로스 대제는 단일황제로 취힘하자 이교도인 작센족이 라인강 하류 지역을 공격한 앙갚음으로 첫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기 전인 772년에 지금의 니더작센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사는 작센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775년부터는 작센족 전체를 정복하여 그리스도교도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왕국에 통합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는 여러 차례의 원정 끝에 실현되었다. 작센족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775~777년에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작센족의 항복을 조인하였다.

778년 여름 카롤로스는 스페인으로 진격해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는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를 당하였다. 브르타뉴 원정 때 활약했던 롤랑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전설과 시(詩)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 참패를 계기로카롤로스대제 통치의 전반기인 정력적 팽창기가 막을 내렸다. 이후 그는 영토 보전에 힘쓰는 한편 내정을 강화하고 문화생활과 법의 지배를 보호하였다

 그런데 스페인에서 패배한 직후 작센족이 다시 봉기하였다. 세례를 받고 충성을 서약한 작센족의 저항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로, 이런 배신에는 가혹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이에 카롤로스 대제는 작센족과 18회나 되는 격렬한 전쟁끝에 그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는 작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겠다는 목표뿐만 아니라 제국에 완전히 통합시키겠다는 목표도 달성하였다. 카롤링거왕조의 세속 권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에서 본다면 이것은 작센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카롤로스 대제는 사촌이자 바이에른 공작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라인강 건너편에 남아 있는 마지막 게르만족의 독립성을 사실상 박탈하였다. 서게르만족은 이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 단위 안에 모이게 되었다. 아바르왕국(지금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과 도나우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족 국가들도 느슨하나마 프랑크왕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들은 프랑크왕국의 종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다.&이로써 카를대제는서쪽은 피레네산맥에서 동쪽은 엘베강까지, 북쪽은 북해에서 남쪽은 중부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대부분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였다카롤로스 대제는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각 부족이 시행하던 부족법전을 성문화하여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였고, 아울러 중앙에서 그라프, 순찰사 등의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지배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봉건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세 여러 봉건국가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카롤로스 대제는 또한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일찍부터 인정하였다.
 그는 교회를 존중하였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을 왕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또 교회에 대한 국왕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신이 그에게 그리스도교도들을 맡겼기 때문에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실력을 배경으로 로마 교황권과 결탁하여 그리스도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여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였다.

또한 로마 교황권과 결합해서 유럽의 종교적 통일을 이루고 800년에 로마교황 레오3세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 고위 성직자들을 왕권의 주요 기반으로 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추진, 고전문화·그리스도교·게르만 민족정신을 구성요소로 하는 유럽문화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의 전기로 아인하르트의 <카를대제전>이 있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중세유렵의 시작

 프랑크 왕국의 전성을 연 카롤링거왕조와 함께 제국을 건설한 평신도 귀족들은 새로운 정복이 새로운 이권과 봉토를 약속해주지 않는 한 왕조와 확고한 유대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800년에 이르자 이미 도달한 국경선을 넘어 밖으로 더욱 팽창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여 졌다. 

 우선 팽창정책을 지속하기엔 이미 얻은 땅을 통합·관리하며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과 기술적 수단도 불충분한 상태였다. 카를대제의 제국은 로마제국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화폐 경제, 봉급을 받는 관리, 상비군, 정비된 도로망과 통신망, 해안을 지키는 해군)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카를대제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해안은 노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806년에 카를대제는 제국을 분할해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아키텐의 루이(루트비히)를 공동 황제로 만들고 유일한 후계자로 삼았다. 카를대제가 불과 몇 달 뒤, 814년 1월 28일에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카를대제가 죽고 뒤를 이은 후세들은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을 유지하지 못하였음은 물론이고, 국제적 지위역시 하락하였기에 카를대제의 명성은 사후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왕조가 단절된 후에도 서프랑크(프랑스)왕국과 동프랑크(독일)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전통은 카를대제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교황에 대항한 대립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카를대제를 성인으로 추증(追贈)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카를대제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카를대제의 후계자라 자처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카를대제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낱말은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체크어의 kral, 폴란드어의 krol 등).

아무튼 카를대제가 이룩한 제국은 로마제국 멸망 이후 갈기갈기 찢어졌던 서유럽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후 몇 세기 동안 의지하며 이용할 수 있는 공통된 지적·종교적·정치적 유산을 궁극적으로 재구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물론 이런 유산은 카를대제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궁정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이라고 불렀다. 사실 중세의 수백년 동안 유럽 역사에 그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프랑크왕국의 분열

서로마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교황청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은 샤를 대제가 814년에 죽고, 게르만족의 유풍에 따라 제국의 영토는 그의 자손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북쪽에서는 노르만족이, 동쪽에서는 마자르족이, 서남쪽에서는 이슬람인들이 뻔질나게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프랑크왕국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동시에 맞게되었다.

제국을 상속 받은 것은 샤를 대제의 아들 루이 1세(Louis 1)로서,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측으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난세(亂世)를 헤쳐나갈만 한 능력이 절대로 부족하여, 결국은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었다. 

이 시기에 정치는 국가적인 제도가 확립되어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왕실과 지방의 세력집단(호족) 간에 인간적인 유대로 운영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조그마한 틈새만 생겨도 와해되는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이 당시의 국가는 오늘 날과는 전혀 다른 몇 가지 사실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첫째는 나라 이름이 정해진 것이 없다. 고트왕국이니 프랑크왕국이니 하는 것은 고트족이나 프랑크족이 세운 왕국이라는 뜻으로 후세에 그렇게 부른 것이고, 클로테르왕국이니 샤를제국이니 하는 것도 통치자의 이름을 국가 명칭으로 사용한 경우에 불과하였다.

둘째는 유목민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이동의 습관에 따라 정해진 수도가 없다. 샤를 대제의 아헨 궁정이라는 것도 수도라기 보다는 이곳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이고, 왕은 수시로 변하는 그의 영토 내를 직접 방문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셋째는 관직이나 관명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국가 통치에 절대 필요한 관료제나 상비군이 생긴 것은 훨씬 후에 일이고, 행정 조직은 교회와 수도원의 교구조직을 원용하거나, 그 외 유력자와의 협력으로 영토를 유지하였다. 이것도 기사 서임식 때의 맹약이나 신종례에 의존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큰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용병(傭兵)이 따로 필요하였다.

이런 사실들에 근거한다면, 이 시대에 이미 봉건제도(feudalism)가 형태면에서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40년 카를대제의 유일한 계승자인 경건왕 루트비히가 죽은 뒤 그의 아들 3형제는 계승권을 겨루었다.

843년 베르� 조약에서 그들은 제국을 3개의 왕국으로 나누는 데 합의했다. 서쪽의 서프랑크(프랑스)는 대머리왕 샤를에게, 동쪽의 동프랑크(독일)는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이탈리아 지방과 로마를 포함한 중프랑크는 로타르에게 돌아갔다. 그중 로타르는 황제의 칭호를 물려받았다. 노르만족·색슨족(작센)과 같은 신흥세력의 부상과 함께 바로 제국이 3국으로 나뉘자,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는 점점 약해져갔다.

황제 칭호는 855년 로타르에게서 그의 아들 루트비히 2세에게, 875년에는 루트비히 2세에게서 그의 숙부 대머리왕 카를에게, 그리고 877년 카를의 사망으로 제위가 비어 있던 기간이 끝난 881년에는 루트비히의 막내아들인 비만왕 카를 3세에게로 넘어갔다. 893(898)~923년과 936~987년에 한때 프랑스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이 권력을 잡긴 했지만, 887년 카를 3세가 폐위될 무렵에는 카롤링거 왕조의 세력이 거의 와해되고 말았다.

 

 

출처 : sun-star
글쓴이 : 크리슈나 원글보기
메모 :

 
 
 

카테고리 없음

glassyocean18 2010. 2. 5. 10:50

정복왕조 출현의 전조(前兆): 흉노의 쇠퇴와 만주 선비족의 등장
Fall of Xiong-nu and Rise of Manchurian Nomad Xianbei Replacing Xiong-nu
2005년 02월 17일 (목) 00:00:00 홍원탁 wthong@wontockhong.pe.kr

화평을 미끼로 한족들로부터 온갖 재화를 갈취 해 오던 몽골고원의 흉노족이 내분으로 몰락하고, 요서 초원의 소위 동호(東胡)라는 선비(鮮卑)족이 대체세력으로 나타나, 중국대륙에 본격적인 이민족 정복왕조의 등장을 예고하게 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정복왕조 출현의 전조(前兆): 흉노의 쇠퇴와 만주 선비족의 등장

洪元卓 (서울대 교수)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

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과 북으로 양분되자, 조정관료인 장궁(臧宮)은 흉노의 약세를 틈타 “고구려,” 오환, 및 선비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었다. 1 당시 광무제는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신조를 강하게 피력했다. 49년, 광무제는 푸짐한 선물과 국경무역을 제공해 선비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명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58년 이후에 후한 조정이 선비 부족장들에게 정기적으로 갖다 바친 금액은 년간 2억 7000만냥에 달했는데, 그 규모는 같은 기간 동안 남흉노에게 바친 것의 세배에 달하였다. 2

드디어 화제(和帝, 88-105) 즉위 직후인 89-93년 기간 중, 선비-남흉노-후한의 연합군이 오르콘 지역의 북흉노를 섬멸했다 살아남은 흉노 중 일부는, 몽골고원으로부터 계속 서쪽으로 달아나 발카하쉬와 아랄 초원지대를 경유해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에 까지 이르렀다. 이들 서방으로 달아난 흉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그 후손들이 “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374년경에 볼가강과 돈강을 건너 로마제국을 침공했다 441년부터 아틸라의 지휘를 받아 유럽대륙을 유린 하다가, 아틸라가 453년에 죽자, 훈족은 러시아 초원지대로 철수했다.

선사시대에 인도 북부와 이란에 정착했던 아리안족은 서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계곡으로 내려와 모헨조다로의 드라비다 문명을 파괴해 버렸다 그 잔혹상은 옛 인도의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 선명하게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7세기-3세기 기간 중에는 스키타이라는 이름으로, 또 그 이후에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남부 러시아와 시베리아 서부의 목초지대를 점거하였다. 흉노족부터 시작해 후대에 몽골고원의 투르크와 몽골족들이 계속 서방으로 밀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아리안족과의 혼혈이 심화되었다. 난폭한 관행 탓에 역사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들 보다 유전적 유동성이 훨씬 높았다. 3  기하학적 형상으로 정형화된 스키타이 동물 예술품은, 동물형상을 주제로 정형화된 오르도스 흉노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모두 신변장식용이었다 스키타이족과 흉노족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고기만을 먹고, 천막 속의 모피 위에서 잠을 자며, 술잔으로 쓰기 위해 적의 두개골을 사냥했다.

만주 서부의 선비족들은 흉노족의 내란 덕분에 독립을 되찾고, 잔존 북흉노족의 대다수와 그들 영토를 흡수 병합하였다. 퉁구스족에 비해 선비족의 문화가 몽골(혹은 투르크)적인 것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비족의 전통은 흉노족과는 달리 선출된 지도자가 제한된 지휘권만을 갖는 약한 부족연맹체였다. 크고 적은 부족장들은 이따금 개성이 강한 지도자의 영도 하에 단합을 하기도 하지만, 흔히 이들 작은 부족들은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제가끔 중국 왕조의 조공체제에 개별적으로 가입했다. 통치권이 세습되고 중앙집권화된 흉노족의 체제와는 달리, 선비족은 세습보다는 평등적 정치체제를 강조하였다. 북흉노의 쇠망이 묵특에게 정복당했던 선비 세력의 재기를 가능케 한 것이다. 4

후한 조정은 중소 선비 부족장들과 기꺼이 직접 거래를 했다. 많은 부족장들에게 그럴듯한 칭호를 수여하고, 각종 물자를 제공 함으로서, 유목민 부족들의 분열을 조장하려 했다. 변경지역의 한족 관리들은 중소 부족장들에게 지위에 걸맞은 칭호와 선물은 물론, 교역을 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면서, 그들이 개별적으로 조공체제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질투심이 강한 수많은 부족장들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조정의 보조금을 얻을 수 있도록 개별적인 거래를 하는 전략을 구사 해, 선비족 중소 부족장들 스스로가 초원지대의 단결과 중앙집권화를 반대하게끔 유도했던 것이다. 5

Barfield (1989: 85)에 의하면, 후한 시대인 AD 108년 당시, 선비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중소 부족들은 120 개에 달했으나, 흉노의 이름으로 기록된 부족들의 수는 초원지역 전체를 통해 20여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출된 선비족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 부족이 통합된 군사작전을 벌려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 부족간의 단합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당시 선비족이 채택한 전략은, 흉노와 마찬가지로, 중국본토를 야만적으로 습격해서 약탈을 한 다음 초원지대로 퇴각을 하는 것이다 보상금 혹은 교역량을 크게 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를 반복하고, 수적인 열세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중국본토를 점령하지 않았다.

공세적인 군사전략은 무관과 상인들의 출세 기회를 확대했기 때문에, 유교전통으로 훈련된 중국 조정의 문관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Jagchid and Symons, 1989, p. 54). 문신들은 진시황과 한무제가, 쉽게 평정 할 수도 없고, 중국에 편입시킬 수도 없는 땅을 놓고 흉노와 벌인 전쟁을 아주 졸렬한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조공 형식으로 포장한 유화정책을 통해 화평과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문관들은, 유목민들과 끊임없이 싸우기 보다는 그들에게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좋은 전략이라고 믿었다. 6  그러나 AD 300년 이후에 북중국을 정복한 만주 출신 정복왕조들이 채택한 전략은, 한족 조정의 전략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몽골고원의 투르코-몽골 유목민들을 아주 힘들게 만들었다.

한족 왕조들이 흉노에 이어 선비 등 유목민들과 대치한 시기(BC 206-AD 316)는 로마제국이 게르만 민족과 대치하고 있던 시기와 대충 일치했다(BC 272-AD 395). 실크로드로부터 물자를 갈취하는 흉노를 좇아내기 위해, 후한(後漢) 조정은 반초(班超)와 그의 아들 반용(班勇)을 파견하여 94-127년 기간 중 타림분지 전체를 정복했다. 그 결과, 서역으로 가는 길이 열려 불교와 그레코-헬레니즘 양식의 간다라 예술이 전파되었고, 유라시안 대륙의 서쪽 끝과의 교류도 증진되었다.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로마제국은 소빙하기 (小氷河期, BC 400-AD 300) 전반을 통해 번영을 구가했으나, 4세기, 지구 온난화 회복시작에 동반된 가뭄은 온갖 종류의 북방 야만족들이 준동하게 만들었다. 4세기는 북중국에서 5호16국시대(304-439)가 시작되는 시기와 일치하며, 유럽에서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374-453)과 일치한다. 로마 사람들한테 흉노 노릇을 하고 있던 게르만족들은, 4세기 초, 란인강으로부터 흑해에 걸쳐 전 로마제국 북방 국경선에 포진을 하고 있었다. 374년 이후의 훈족 침입은 연쇄반응을 촉발했다 미친 듯이 쫓는 훈족과 정신 없이 쫓기는 게르만족들에 의해 유럽전체가 황폐화 되었다.

Lamb(1995: 160-1)은 “우리가 카스피해 수면 높이의 변화와, 간헐적 강과 호수, 그리고 신강과 중앙아시아의 유기되어 버려진 거주지들에 대한 연구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4세기에 들어 한발이 극에 달해 실크로드 통행은 정지 상태에 빠졌었다 이러한 증거에 비추어 보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생활터전인 목초지대를 휩쓴 가뭄이, 야만 유목민족들과 그들에 쫓겨 떠돌이 신세가 된 종족들로 하여금, 서쪽 유럽대륙으로 밀려가는 연쇄반응을 촉발 해, 마침내는 로마제국을 쇠퇴시켰다는 Huntington의 (1907년)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8 (2005. 2. 12.)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Jagchid and Symons (1989: 63) 참조.

後漢書 卷十八 列傳第八 … 後匈奴飢疫 自相分爭… 建武 二十七年 宮…上書曰 … 諭告高句麗烏桓鮮卑攻其左 發河西四郡 … 如此 北虜之滅

2. Twitchet and Loewe (1986: 443)을 참조. 이 모든 비용은 산동과 강소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Jagchid and Symons (1989: 33)을 참조.

3.  Cavalli-Sforza (2000: 82)

4. Barfield (1989: 86-87) 참조. 후한서(後漢書)는 AD 177년에 올려진 상소문의, “(북)흉노가 달아 난 이후, 선비 무리는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흉노가 차지하고 있던 땅을 점거하고, 1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떠들어 대는데, 정제된 금속과 연철(鍊鐵)도 이 선비 반도들 손에 들어가 있습니다. 한족 이탈자들은 선비의 땅으로 달아나 그들의 참모 노릇을 합니다. 선비족의 무기는 옛 흉노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말들은 더욱 빨라졌습니다”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45) 참조. 후한서 185년 조에는,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선비족들이 걸핏하면 국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평화스럽게 지내는 해가 거의 없다. 그자들은 중국의 힘을 존경하거나, 중국의 관용을 고맙게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국경시장에서 교역을 할 때만 진귀한 중국 재화들을 값싸게 얻기 위해 복종을 하는 체 하며 나타난다 그들은 교역으로부터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손에 넣자마자 본성을 나타내 해를 끼친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46) 참조.

後漢書 卷九十 烏桓鮮卑列傳第八十 … 自匈奴遁逃 鮮卑强盛 據其故地 稱兵十萬 … 精金良鐵 皆爲賊有 漢人逋逃 爲之謀主 兵利馬疾 過於匈奴
後漢書 卷四十八 列傳第三十八 鮮卑隔在漠北 …故數犯障塞… 唯至互市 乃來靡服 苟欲中國珍貨… 計獲事足 旋踵爲害

5.  Barfield (1989: 246-249) 참조. Jagchid and Symons(1989: 24-51)에 의하면, 한족 조정은 때로는 이간질을 하여 선비 부족장들 사이에 싸움을 부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유목민 지도자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국경에 교역시장을 제공해 평화를 샀다.

漢書 卷九十四下 匈奴傳第六 十四下 莽將嚴尤諫曰 …中國罷耗…而天下稱武 是爲下


6. Barfield (1989: 246-249)

 
▲ Gold (with iron core) belt buckle and plaques with mythical animals excavated at Hohhot Watt, et al. (2004: 126)
Fall of Xiong-nu and Rise of Manchurian Nomad Xianbei Replacing Xiong-nu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Guang Wu-di (25-57), who founded the Later Han dynasty (25-220), re-conquered South China and northern Vietnam, and Ming-di (57-75) tried to restore the control over Xiong-nu. An outbreak of the Xiong-nu civil war after AD 47 left the Mongolian steppe fragmented for the first time in 250 years, since the rise of the nomadic empire under the leadership of Mao-dun in 209 BC. The Wu-huan and the Xianbei of Liao-xi steppe, that had both a common origin and language, threw off the Xiong-nu control.

In 48 AD, when the Xiong-nu split into two groups, a court official named Zang Gong “advocated taking advantage of Xiong-nu weakness by becoming allied with the Koguryeo, the Wu-huan, and the Xianbei to attack the Xinog-nu.” 1 Guang-wu-di, however, forcefully declared his position against war. In AD 49, Guang Wu-di attracted the Xianbei to the Han side by offering generous gifts and trade. After AD 58, the Han court made regular annual payments (to the sum of two hundred and seventy million coins) to Xianbei chieftains that amounted to almost three times the cash value made over to the southern Xiong-nu during the same period.2

During 89-93, a combined force of Xianbei, southern Xiong-nu, and Later Han troops routed the northern Xiong-nu in the Orkhon region, which likely had caused their western migration from Mongolia all the way to the southern Russian steppes, passing through the steppes of Balkhash and the Aral. The Xiong-nu of the west disappeared from history until their descendants crossed the Volga and the Don in about 374 and invaded the Roman Europe under the name of Huns, led by Attila after 441. With Attila’s death in 453, the Huns withdrew back toward the Russian steppe.

   
▲ 1st Century Gold Crown excavated at Tillya-Tepe Northern Afganistan
The Aryans that had settled in the north of India and Iran in prehistoric times dispersed west and south. The Aryans moved down to the Indus Valley around 1500 BC, destroying the Dravidian civilization of Mohenjo-Daro, whose cruelty is vividly recited in the Mahabharata. The Aryans occupied the steppes of southern Russia and western Siberia in the name of Scythians from the seventh to the third century BC, and in some other names thereafter. The Xiong-nu and, in later times, Turks and Mongols from the Mongolian steppes were bound to have heavy genetic mixing with the Aryans (farmers or nomads) on their way west. Historically, women have been much more genetically mobile than men because of brutal practices.3 Geometrically stylized Scythian animal art, like the Ordos Xiong-nu art of stylized animal motifs, was surely ornamental. Both the Scythians and the Xiong-nu were mounted archers, eating only meat, sleeping on furs in felt tents, and hunting enemy skulls to be used as drinking-cups.

The Xianbei of western Manchuria gained autonomy by default and absorbed the majority of the remains of northern Xiong-nu, including their land. We can see why the culture of Xianbei became rather Mongolic (or Turkic). Unlike the Xiong-nu, however, the Xianbei had a weak confederacy under an elected leader with limited supra-tribal leadership. Petty chieftains, who occasionally united under a charismatic leader, entered the tributary system of Chinese dynasties as small autonomous tribes. The Xianbei pattern stressed an egalitarian political system with no hereditary succession, in contrast to the Xiong-nu pattern of hereditary leadership and central authority. It was the demise of the northern Xiong-nu that gave rise to Xienbei power.4

The Later Han court was willing to deal directly with minor Xianbei chieftains. It encouraged the fragmentation of nomadic tribes by providing titles and subsidies directly to the numerous tribal leaders. The Chinese frontier officials let each tribal leader of barbarian lands participate in the tributary system individually, receiving titles and gifts appropriate to their rank, as well as the right to trade. They tried to handle petty tribal rulers separately and allow many jealous chieftains to obtain subsidies without giving up their autonomy in order to encourage them to oppose any centralization and unity on the steppe.5

According to Barfield (1989: 85), the Later Han records of AD 108 counted 120 small Xianbei tribes as compared to one or two dozen tribal groups whose names appeared in the reports for the whole steppe under the generic name of Xiong-nu. For an elected Xianbei leader, however, the best strategy to maintain tribal unity was to raid China in combined military action. The military strategy adopted by Xianbei was identical to that of Xiong-nu: the savage raiding for loot followed by withdrawal to the steppe, alternating peace and war to increase subsidies or trade, and refusal to occupy the Han Chinese land.

The civilian officials of the Chinese court, trained in the Confucian tradition, were opposed to offensive military tactics because they generated opportunities for the advancement of soldiers and merchants (see Jagchid and Symons, 1989, p. 54). They cited the wars of Qin Shih Huang-di and Han Wu-di as examples of bad policy for dealing with an area that China could never incorporate or easily pacify. Stability could be maintained by a policy of appeasement under the cloak of the tributary system. For the civilian officials, paying off the nomads was decidedly a cheaper and better strategy than constantly fighting them.6 The tactics of the conquest dynasties of Manchurian origin (that occupied North China after 300 AD), however, were quite different from the tactics of Chinese dynasties, and created great difficulties for the Turko-Mongol nomads.

The Han Chinese dynasties (206 BC-316 AD) facing the steppe nomads were contemporaneous with the Roman Empire (272 BC-395 AD) facing the German barbarians. In order to drive the Xiong-nu away from the Silk Road from which they were extracting food and wealth, the Later Han court had let generals Ban Zhao and his son Ban Yong conquer the entire Tarim basin between 94-127, introducing Buddhism and Gandharan style Greco-Hellenistic art to the east, and facilitating the contacts with the western end of the Eurasian continent.

   
▲ 4-5th Century Tomb Painting Crow, Horse and Human Figures excavated in Űrűmqi (Urumchi)
Being located at the center of the warm Mediterranean region, the Roman Empire flourished throughout the Little Ice Age (400 BC-300 AD), but the advent of global warming coupled with droughts started to activate all sorts of northern barbarians. This period coincides with the beginning of the era of Five Barbarians and Sixteen States in North China (304-439) and the Germanic Folk-movements in Europe (374-453). At the beginning of the fourth century, Germanic peoples, who had been playing the Xiong-nu to the Romans, were stretched along the whole length of the frontier from the Rhine to the Black Sea. The invasion of the Huns after 374 triggered a chain reaction. The whole of Europe was ravaged both by the wild Huns in continuous pursuit of other tribes and by the runaway Germanic tribes.

Lamb (1995: 160-1) notes: “By the fourth century AD, as we know from changes of level of the Caspian Sea and studies of the intermittent rivers and lakes and abandoned settlements in Sinkiang and central Asia, drought developed on such a scale as to stop the traffic along this route [Silk Road]. … The suggestion, made by Ellsworth Huntington in his book The Pulse of Asia in 1907, that it was the drying up of pastures used by the nomads in central Asia that set off a chain reaction of barbarian tribes and unsettled peoples migrating westwards into Europe, where they ultimately undermined the Roman empire, looks a sensible one in the light of this evidence.”

BIBLIOGRAPHY


[각주]

1 See Jagchid and Symons (1989: 63).
後漢書 卷十八 列傳第八 … 後匈奴飢疫 自相分爭… 建武 二十七年 宮…上書曰 … 諭告高句麗烏桓鮮卑攻其左 發河西四郡 … 如此 北虜之滅

2 See Twitchet and Loewe (1986: 443). The money was paid by revenues collected in Shan-dong and Kiang-su. Also see Jagchid and Symons (1989: 33).

3 Cavalli-Sforza (2000: 82)

4 See Barfield (1989: 86-87).Hou Han-shu quotes a memorial submitted in AD 177,
“Ever since the [northern] Xiong-nu ran away, the Xianbei have become powerful and populous, taking all the lands previously held by the Xiong-nu and claiming to have 100,000 warriors. … [R]efined metals and wrought iron have come into the possession of the [Xianbei] rebels. Han deserters also seek refuge [in the lands of the Xianbei] and serve as their advisers. Their weapons are sharper and their horses are faster than those of the Xiong-nu.” See Twitchett and Loewe (1986: 445).

後漢書 卷九十 烏桓鮮卑列傳第八十 … 自匈奴遁逃 鮮卑强盛 據其故地 稱兵十萬 … 精金良鐵 皆爲賊有 漢人逋逃 爲之謀主 兵利馬疾 過於匈奴

Hou Han-shu records another story told by a memorialist in AD 185, “The Xianbei people … invade our frontiers so frequently that hardly a year goes by in peace, and it is only when the trading season arrives that they come forward in submission. But in so doing they are only bent on gaining precious Chinese goods; it is not because they respect Chinese power or are grateful for Chinese generosity. As soon as they obtain all they possibly can [from trade], they turn in their tracks to start wreaking damage.” See Twitchett and Loewe (1986: 446).

後漢書 卷四十八 列傳第三十八 鮮卑隔在漠北 …故數犯障 塞…唯至互市 乃來靡服 苟欲中國珍貨...計獲事足 旋踵爲害

5 See Barfield (1989: 246-249). According to Jagchid and Symons (1989: 24-51), the Han Chinese court was, at times, able to pit one nomadic leader against another, but most often the court simply purchased peace along the frontier by establishing markets and offering profuse gifts to nomadic leaders.

6 Barfield (1989: 246-249)
漢書 卷九十四下 匈奴傳第六
十四下 莽將嚴尤諫曰 …中國罷耗…而天下稱武 是爲下

wthong@wontackhong.pe.kr.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출처; 업코리아

http://www.up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5344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