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문학/시와 수필

금동이 2015. 6. 3. 11:30

 

 

 

 

 

따뜻한 종이컵

강문숙


종이컵이 따뜻하다

공원 한 귀퉁이에 허름한 중년처럼

앉아 있는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마시다가, 문득

객쩍은 생각을 해본다


짚둥우리속에서 막 꺼낸 달걀은

암탉의 항문으로 나온 게

안 믿어질 만큼

희고 따뜻하다, 매끈하다


혓바닥 아래 고인 침처럼 상긋하게

피어난 옥잠화의 흰 살결

벌의 항문을 거쳐서 피어난 꽃들,

그 향기도 대저 항문의 그것이니


쿰쿰한 엄마를 열고 나온

신생의 애물단지들아

희고 아름다운, 향기롭고

따뜻한 것들의 떠나온 문은 하나다

종이컵을 내려놓고, 슬쩍 만져본다




그 집

강은교


그 집은 아마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신혼 시절 제일 처음 얻었던 언덕빼기 집

빛을 찾아 우리는 기어오르곤 했어


손에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는 두드렸어

그러면 문은 대답하곤 했지

삐꺽 삐꺽 삐꺽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빛이 거기서 솟아나고 있었어

싱크대 위엔 미처 씻어주지 못한 그릇들이 쌓여 있었지만


그 창문도 아마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싸구려 커튼이 밤낮 출렁거리던 그 집

자기들이 얼마나 멀리 아랫동네를 바라보았는지를

그 자물쇠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자기들이 얼마나 단단히 사랑을 잠글 수 있었는가를

그 못자국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자기들이 얼마나 무거운 삶의 옷가지들을 거기 걸었었는지를

어느 날 못의 팔은 부러지고 말았었지


새벽은 천천히 오곤 했어

그러나 가장 따뜻한 등불을 들고

그대를 기다리곤 하던 그 나무계단을 잊을 순 없어

가장 깊이 숨어 빛을 뿜던 그 어둠을 잊을 순 없어


아, 그 벽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저녁이면 기대앉아 커피를 들던

그 따스한 벽

순간도 영원인 환상의 거미 날아오르던 곳

자기가 얼마나 튼튼했는지를

사랑의 잠 같았는지를




나는 늙은 여자가 좋다

강은진


나는 늙은 여자가 좋다

어떤 손놀림에도 일어서지 않을

평온한 유방을 가졌기 때문에

바람에게 여러 갈래 길을 터주는

성근 머리칼을 가졌기 때문에

빈 등을 쓸어줄 때 바스락 소리를 내는

비닐같은 손가죽을 가졌기 때문에

늙은 여자가 좋다

구름을 닮아 가는 실루엣을

기교없는 음성을

눈가의 주름을

좋아한다

치욕을 먼저 잊는 망각의 기술로 여자를 잊고

달처럼 흐르고 흙처럼 젖으며 몸으로 치르는 계절

시간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그 파동 속에 있어서

나는 늙은 여자가 좋다

태어날 때 그랬듯 잇몸으로 울고 웃고

물말아 밥을 먹다가 문득

제사상에 바나나와 커피를 올려달라 유언하는 소리

가까운 험담은 못 듣고

먼 산 꽃 지는 건 가장 먼저 알아챌 때

어느 새벽 고요히 머리 빗는 소리

그래서 나는 늙은 여자가 좋다

좋아서 억새처럼 누웠다가

여자처럼 늙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늙은 여자가, 좋다




KTX 

강해림


나는 세상의 모든 일방통행을 사랑한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흔들리지 않고

시간의 화살표가 지시하지 않는

역방향에 몸을 실어


아주 오래 전 그래왔던 것처럼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듯 통과해 갈 것이다

꿈의 속도가 날 실어 나르느라 멍멍하겠지만

내 꼬리뼈가 퇴화하던 고생대나 신생대 그 어디쯤,

내 아득함이 아득함을 불러

그리운 진원지로


공룡의 아가리 속 같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오지 않는 종말,

캄캄함의 서늘한 진동을 허파 가득 느낄 것이다

아기 공룡의 울음 같은

이명耳鳴을 들을 것이다


어느 환승역에선가

이라는 이름의 그대가 합승해주리라

환상만이 내 엔진 오일이요

연료라 믿으면서


잘 있거라

내 생의 일방통행으로 날 밀어 넣었던 것들아

창밖의 딱 한 번 눈 마주치고 이별했던

들꽃들아




명함 

고경숙


그가 명함대신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주었네  건네받은 종이컵 얄팍한 팔락임에 하마터면 손을 데일 뻔 했고 5할도 못 채운 커피의 단맛에 확 뱉어버리고 싶었는데,


그가 쳐다보고 말했네 피곤할 땐 단 게 좋아요


그의 땀냄새가 고스란히 컵에 지문을 찍고 노동으로 단련된 팔뚝 관절속으로 되돌아갔네 그의 몸에는 뿌리깊은 우화가 서식하는 듯 입을 벌릴 때마다 웃음이 튀어나왔네 손바닥으로 치자 거스름반환구에서 동전들이 놀라 떨어지네 싱긋 겸연쩍은 손가락 사이에서 은빛 커플링 가랑가랑 사랑을 발아시키고 있었네 나는 실망했지만 묻지 못하네


경쾌한 거짓바람과 거짓인사가 악수를 하네 연락 주십시오! 그를 기억하기 위해선 커피 냄새를 기억해야 하고, 웃을 때 보았던 치열을 떠올려야 하네  내 것이 아닌 반지의 반짝임을 기억해야 하네


그의 흐릿한 뒷모습을 기억해야 하네.




비오는 날 화장실에서

구광렬


오줌을 눈다

마지막 방울들이

링게르 수액처럼 떨어질 쯤

몸이 떨리면서 드르륵 닫힌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나갔나

쫓겨나는 놈과 쫓아내는 놈

그들에게도 위계질서는 있는가

단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저 오줌 또한 나였으리

자판기 커피 한 잔이

내가 되었던 시간, 막이 내려지고

몸 밖, 아니 괄약근 밖으로 나오면

모두 구심력을 잃고 비릿해진다.


이 몸의 전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진가

창틀을 때리는 저 빗방울도

산발로 맞고 다시 카페인처럼

신경세포들을 흥분시키며 안으로 스미기만 하면

그 역시 몸이 되는 것인가

아님

순전히 쫓아내는 놈의 기분에 달린 것인가




아침 일곱 시 반

구재기 


커피를 마시며 곧 헤어질

오늘 하루의 아내와 만난다


하나 된 인연으로

얼굴을 익히며 몸과 마음으로

천년을 움직이기고도 남을

쓰디 쓴 기쁨의 이별을 준비한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갈 길을 가야할 시간

자신 있게 떠나보내고 나면

의심하는 것보다 서로를

믿는 것이 그렇게도 쉬운 일이로구나


잠들기 전

혹은 잠에서 깨어나서야

뜬눈으로 마주하는 데는 겨우 서너 시간

하루 이십 사 시간의 삼 · 사를 위하여

눈물 없이 맞아야 할 아침 일곱 시 반


출근 전

아내와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신앙 같은 이별의 만남을 다짐한다




그대 떠난 뒤

권순진


허약한 약속 허물어진 뒤 짧은 입맞춤

진한 내출혈의 커피

윗입술의 붉은 추억 대신

아랫입술 검은 기억 깨물다

빛깔만 나누고 돌아와 누운 자리

사방팔방 무늬만 쇠창살처럼 무거워 눈을 감는다

뒷모습 보이기 전 왜 긴 말이 필요치 않았던지

흙벽에 기대어 하늘이라도 보았다면 


언 땅 긴 그림자로 누워 기억의 끄나풀 하나 당길 때

철컥 자물쇠 다시 잠기는 소리의 높은 음계

팔뚝 정맥 고스란히 스며든 너의 불꽃

너에게 붙들린 3악장

애써 맨얼굴로 비벼 끈다

그 눈에 담긴 한 폭의 그림

그 입술에 묻은 한 소절의 노래

내 마음의 지평선까지

데인 상처 긴 비명으로 남을지라도




불멸의 오랑우탄

권혁웅


종이와 펜을 쥐어준 다음 무한한 세월이 흐르면

오랑우탄이 햄릿을 쓸 수도 있다*고요? 진리는 우연한 것이므로

옆집 여자의 옷 벗는 시간처럼

머리를 싸매 쥔 그와 마주칠 수도 있다고요?

파지 너머에는 비명횡사한 아버지가 있고

엎지른 커피 물 위에선

미친 여자가 둥둥 떠내려가기도 한다고요?

조물주는 하급신이어서 저의 근원이 저라고 생각한다고

영지주의자들은 가르칩니다

제 근원이 자신임을 모르는 오랑우탄은

확실히 고수지요 양곤마兩困馬도 오궁도화五宮桃花

오랑우탄의 몫은 아니지요

가만히 앉아서 바나나나 까먹는 모습이

불멸의 엠블럼이라면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죽느냐, 사느냐

중얼거리는 건 예정된 비극이로군요

답은 언제나 전자니까요

죽음이 패를 뒤집을 때까지 게임은 계속되고

오랑우탄의 집필도 계속되지요

햄릿은 죽고 종이는 구겨지고 펜은 부러져도

저 불멸의 짐승은 주름 많은

제 손금을 들여다보고 있겠죠 서쪽에서 귀인이 올 테니

어서 바나나 껍질이나 치워라, 그러면서

서둘러라, 옆집 여자 옷 다 입겠다, 그러면서

    * 루이스 페르난도 베리사무,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에서




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를 비집고 걸어갔다

기형도 


그리하여

겨울이다. 자네가 바라던 대로

하늘에는 온통 먹물처럼 꿈꾼 흔적뿐이다.

[雪]의 실밥이 흩어지는 空中 한가운데서

타다 만 휴지처럼 한 무더기 죽은 새[鳥]들이 떨어져내리고

마음 한가운데선

간혹씩 몇 발 처연한 총성이 울리었다

아무도 豫言하려 하지 않는 時間

밤새 世上의 낮은 울타리를 타넘어 추운 벌판을 홀로 뒹굴다가

몽환의 빗질로 우리의 차가운 이마를 쓰다듬고

저 혼자 우리의 記憶 속에서 달아났다.

알 수 있을까, 자네

꿈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굳게 빗장을 건 얼음판 위에서 조용한 깃발이 되어

둥둥 떠올라 타오르다 사라지는 몇 장 불의 냉각을

오, 또 하나의 긴 거리, 가스 희미한 내 기억의 迷路

날아다니는 외투 하나만큼의 허전함.

겨울 오후3시, 그 휘청휘청한 권태의 비탈

텅 빈 서랍 속에 빛나는 압정 한 개

춥죠? 음.  …… 춥군. 그런데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리하여 水平으로 쓰러지는 한 컵의 물. 한 컵 빛의 悲鳴.

잠자는 물. 그 빛나는 죽음. 얼음의 꿈. 토막토막 끊어지는 秒針

우리는 世上과 타협하지 않은 최후의 무리였다.

모든 꿈이 소멸된 지상에 홀로 남아

두꺼운 외투와 커피 한 잔으로

겨울을 정복하는 꿈을 꾼다.

춥죠? 음. …… 춥군. 그런데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거리를 한 개 끈으로 뛰어다닐 때의 해질 무렵

건물마다 새파랗게 빛나는 면도 자국.

이것이 희망인가 절망일 건가 불빛 속에서

낮게낮게 솟아오르는 중얼거림

깨지 못하는 꿈은 꿈이 아니다. 미리 깨어 있는 꿈은 悲劇이다.

鋪道위에 고딕으로 반사되는 발자국마다

살아있다. 살아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희미한 음향을

듣는가 자네 아직도 꿈꾸며

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를 비집고 걸어갔다.




겨울 찻집에서 ㅡ 네 입술에 공기 묻었다

김강태


어두운 노을을 입술에 묻힌 채

너는 들어왔지

그을음이 입술연지에 흐르고

오물거릴 때마다 미끄러지는 공기

너는 우유빛 크림

한동안 멀거니

그들의 때 아닌 속 비명에 귀를 푼다

크림은 눈송이

흙색 마알간 늪에 간단히 머릴 적시다

티스푼의 마찰음에

하얀 이 희끗 반득,

내 숨결 질량을 잔 알맹이로 나누어

식은 네 찾잔에 총총히 따른다

속마음에 옮아간 새 공기 부족,

겨울 밖을 외출하고 온 너를 위해

블랙 커피알 갈피마다 서린 갈증을

흙색으로 깔아 올린다


묘연히 지피는 슬픔




<시조>

덩굴장미 

김경자


돌담 위에 고개 밀고 웃고 있는 덩굴장미

올여름도 찾아와서 그려 주는 너의 모습

손끝에

빠져나가는

주고받은 이야기들.


커피 내음 퍼져 있는 앞집 찻집 창가에서

구름 양 떼 몰고 가는 목동 되어 노래하면


붉은빛

덩굴장미에

하얀 나비 입 맞춘다.




자동판매기 

김광문


동전 몇 닢에

아랫도릴 열어 젖힌다.

심심풀이로 가져가는 하얀 순결.


잠시 쉬고 싶어요

머리가 빙빙 돌아요

깜박 조는 사이 들어오는 발길질

이게 돈만 집어 삼켜!


모두들 돌아간 뒤에도

혼자서 깜깜한 밤을 지켜야 한다.

세 발자국만 옮겨 갈 수 있다면

창밖으로 찾아오는 별들이랑 얘기를 나눌 수 있으련만!

밤새 끓이는 외로움


이틑날 맨 먼저 사무실에 나온 이가

문득 모닝 커피가 생각나

짤랑짤랑 동전을 떨어뜨리면

왈칵 쏟아내는 눈물


그는 지긋이 눈을 감고 음미하지만

실은 그것이 한 잔의 외로움이라는 것을

끝내 눈치채지 못한다.




눈이 나빠지다

김기택


빈속에 먹은 커피가 독했는지 좀 어지럽다.

거리를 걷는데

바닥을 밟는 순간

자꾸 바닥이 허공과 섞여 푹푹 들어간다.

허공이 많이 섞인 바닥을 밟다가

한쪽 발이 또 비틀거린다.

그동안 눈이 많이 나빠졌다.

촛점을 맞추려 하면

글자도 거리도 자꾸 공기가 섞여 흐릿해진다.

그걸 보려고 눈알은 더욱 커진다.

눈에 공기가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이다.

때로 공기는 딱딱하고

글자와 거리는 물렁물렁해서

공기에 가려진 글자가 갑자기 흐려졌다가

한참 꾸물거리고 난 후에야 또렷해진다.

건물 한쪽이 느닷없이 벙튀기처럼 부풀었다가

움푹 들어갔다가

흐릿해졌다가

발이 바닥을 한번 헛디디고 나서야

겨우 튼튼한 모서리를 되찾아 또렷해진다.

공기와 섞여 흐릿해진 사람들이

나를 관통하며 휙휙 지나간다.

공기와 섞여 윤곽이 흐릿해진 내 몸이

가로수를 관통하며 지나가려다가 쿵 부딪힌다.

손대신 눈알이 먼저 이마를 더듬는다.




슬며시 눈을 감으면

김나영


감자탕 먹으러 가는 길 건너편, 조그만 커피 전문점 하나 있지, 멀리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어들이던, 아직 문 열고 들어가 본 적 없는, 간판이 짙은 코발트빛이었던가 차양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기억나지 않는, 이름도 모르는, 문득 문득 문턱을 넘고 싶은, 슬며시 눈을 감으면 내게로 스며드는, 실내악이 사향고양이 꼬리처럼 낭창거리고 있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길 건너편, 손가락이 긴 바리스타가 제조해주는 깊고 부드러운 루왁커피에 마른 혀끝 오래 적시고 싶은, 커피 볶는 향이 다탁 사이로 플레어스커트처럼 일렁이고 있을 것만 같은, 그 어렴풋한 현(玄)의 세계 내게서 멀어지지도 더 가까워지지도 않는, 내 마음의 소슬함이 망명가서 꽂아놓은, 하얀 깃발 하나 혁명처럼 마르고 닳도록 펄럭이고 있는,

  



DUTCH COFFEE

김득진


그녀에게 들풀의 땀내

아픔 어루만져 뿜어내는

숨비소리


이제 울지 말라고

제스민 향 손수건 건네는데

하마 오지 못한 고달픈 눈길

유리잔에 깔려 있다

깊이 다른 빛이며 향

지친 옷자락 붙드는데

섬섬옥수 빚은 선물

눈물로 답하는 그녀




커피 마시는 개

김사이 


생후 5개월째인 발발이는

화원 안을 뛰어다니며 매일 사고를 친다

하루에 석 잔 넘게 커피를 마시는 그놈은

인간으로 산다


남자 직원이 두들겨 패면

가랑이 밑으로 쏙 들어가 찍소리도 않다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면 그제야 발라당 뒤집어진다

슬슬 눈치를 보며 꼬리를 살랑거릴 때

어김없이 놈에게 커피 한 잔이 수여된다

개팔자가 상팔자 맞는가

하는 짓이 낯 뜨거워 붉어진 채 돌아서는데


야성은 어디에 버렸는지

재미 삼아 때리는 매질을 고스란히 맞으며

보답인 양 던져주는

커피와 샌드위치에 길들여져 간다

너는 살 만하니?

짖지 못하는 나도 놈과 다를 게 없다

내가 나를 버리고 있나 보다


천덕꾸러기 그놈은

시들고 상처가 난 꽃들과 난 뿌리들

수북히 쌓여 있는 구석으로 달려가

거품 물고 먹어댄다

가끔 그렇게 미친 행동을 한다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네잎클로버

김상미

 

누군가 내 이야기를 한다. 내가 그 뒤에 앉아 있는 것도 모르고 속닥속닥 뜨거운 커피 향을 흘린다, 낯 뜨거운 한낮이 지나고 서서히 다가오는 오후, 진실한 글쓰기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창밖 오후의 공기는 자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잡아당겨 훼손시키고, 나는 일어나 그들을 돌아본다, 너무 익은 과일처럼 새콤달콤함이 사라진 늦여름의 가로수, 그 길을 수도자처럼 천천히 걸어가는 자전거, 비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에너지에 홀려 눈멀어가는 언어들, 자만 붙으면 무엇이든 히죽히죽 용서가 되는 대도시, 도시의 야만들, 괜찮아, 괜찮아, 사람마다 슬픔을 삼키고 아픔을 뱉어내는 것은 다 다른 법, 별빛 한 줄기에도 하루의 얼굴을 벗고 고단한 구두끈을 풀어 잠자리에 들면, 새 힘이 생길 거야, 새 날이 올 거야, 우리는 결국 한 식구, 서로서로 너무 닮아 보이는 노인들처럼, 아무리 끊고 싶어도 끊어지지 않는 낮과 밤의 주인공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긴 골목길을 지나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광대한 지구를 앓는 아픈 사람들, 언젠가는 나도 그 숲에서 네잎클로버를 찾게 될 거야. 건강한 네잎클로버를 찾아 멋지게 떠날 거야, 긴 비 내린 뒤 파랗게 개는 하늘처럼, 그렇게 눈부신 햇살 속에 불타는 시집을 꽂고서!




바깥에 사는 사람

김소연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사람은

가장 바깥에 산다 그곳은 춥다 


버스에 외투를 벗어두고 종점에서 내린 적이 있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의 공항이었다

맨발로 비행기에 올라 더 멀리 나는 갔었다 


옆자리에는

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의 이어폰에서 찌거찌걱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같은 이별을 경험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때 그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한 사람은

내가 벗어둔 외투를 챙겨 입고

혹독한 겨울로 무사히 들어갔을까? 


버스 종접에서만큼은

커피 자판기가 달빛보다 더 환하면 좋겠다

동전을 넣고 손을 넣었을 때

산 짐승의 뱃속에서 꺼낸 심장처럼

뜨끈한 것이 손에 잡히면 좋겠다 


어떤 나라에서는 발이 시렵지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목적 없이 버스를 탄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는 한없이 걸어야 한다 


피로는 크나큰 피로로만 해결할 수 있다

사랑이 특히 그러했다 그래서 


바깥에 사는 사람은

갈 수 있는 한 더 먼 곳으로 가려 한다




흑백다방 

김승강 


그 다방은 이전에도 다방이었고

지금도 다방이다.

정겨운 이름, 다방

티켓다방 말고 아직도 다방이라니,

오래 산 것이 자랑이 아니듯

다방이 오래되었다고 자랑할 일은 아니다.

오래된 것으로 치면

그 다방이 있는 건물이 더 오래되었다.

그 다방은 일본식 이층건물 일층에 있다.

그래도 자랑할 만한 것은

다방 양옆으로 지금은 인쇄소와 갈비집이 있는데

그 인쇄소와 갈비집이

우리가 오래된 사진을 꺼내볼 때

양옆으로 선 사람이 사진마다 다르듯

여러 번 주인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 다방에서 만난 내 친구 중에는

둘이나 벌써 저 세상에 가 있다.

사람들은 집에서도 커피를 끓여마시고

자판기에서도 커피를 빼 마신다.

그런 동안에도 여전히 그 다방은 커피를 끓여내오고

오래된 음반으로 고전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 다방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수 없었는지

얼마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매일아침 삐걱거리는 관절의 목제 계단을 올라가

이층에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던 화가 주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피아노를 치는 둘째딸을 새 주인으로 맞았다.

늙은 화가 주인이 떠난 뒤로

머리위에서 무겁게 발 끄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목제 건물의 관절마다 박힌 못이

녹슬어 스러지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듯했고

그때마다 그 다방은 치통을 앓듯, 관절염을 앓듯

신음소리를 내었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골다공증을 앓고 있을

정겨운 이름 흑백다방




茶神이 필 때

김승희 


비오는 날의

눈동자는 너무 무거워

장마를 따라 한없이 떠 내려가는

찻잔 속의 외로움,

누가 나의 찻잔 속에 들어앉아

저토록 질질 끌리는 독가스같은

음악을 켜고 있나?


 한 잔의 커피…… 열 잔의, 스무 잔의, 삼천 잔의 커피로……

촉루처럼  반짝이는 순결한 흰 뼈에 드디어 지옥같은 카페인이 질 때까지…… 끈질기게 마셔보는 고요한 광기의 물…… 친구도 없이


 하나의 섬, 아니 혼자인 인간, 그리고 여러 개의 찻잔, 스무 개의, 삼천 개의 빈 찻잔들…… 그 만큼의 섬들, 혹은 사람들, 만일 아직도 외로움이 있거든 네 외로움의 손발을 잘라버려라…… 아니 아직도 그리움이 남았거든 네 그리움의 골통을 부셔버리고 그 골통의 잔해를 찻잔삼아 마지막 한 잔의 차를 마셔 보거라……


비오는 날의

눈동자는 너무 무거워

장마를 따라 한없이 고여가는

찻잔 속의 그리움,

누가 나의 찻잔 속에

머리를 풀고 외치며 누워있나?


누구…… 나의 찻물 끓이는 풍로 속에다……

고요히 제 머리를

처박고 쓰러지고 있나……




나는 가끔 장미꽃과 충돌한다

김영남


맑은 날 나는 창가의 장미꽃과 충돌했다. 제일 크고 예쁘게 핀 것과 여러 번 충돌했다. 갑자기 부딪히니 아팠다. 눈이 아팠고, 생각이 아팠고, 옛날이 아팠다.


날씨가 너무 맑아 난 장미꽃과 다시 한 번 충돌했다. 난 아픈 부위를 문지르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는 내게 멋진 장소에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장미꽃이 날 때렸다고 그녀에게 일렀다. 손톱으로 꼬집고 침으로 찔렀다고...... 그랬더니 험하게 할퀴지 않은 것은 장미꽃이 아니라고, 진짜 장미꽃은 따귀를 때려오는 것이라고, 그래서 집에선 기를 수 없는 게 장미꽃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이 나는 너무나 공허해 가져온 보리차를 엎질러버렸다. 그녀는 날 때린 장미꽃을 탁자 위에 놔두고 찻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장미와, 아니 장미가 아닌 것과 충돌했다. 돌아와 그 꽃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랬더니 그 꽃이 나를 걱정스런 모습으로 쳐다보았다. 걱정 속에서 난 처음으로 향기로운 명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꿈도 오래도록 꾸게 되었다. 날마다 새로운 장미꽃 친구들도 내 창가를 찾아왔고 나는 더 이상 장미꽃과 충돌하지 않았다




관계 1 ― 김수영을 읽다가

김영섭


그는 없었다. 런닝구 바람으로 불려나간, 골목을 채 벗어나지 못한 그 공허에 미스 김이 다섯 잔도 넘는 커피를 따라놓고 앉아 있었다.

사실 이 부분에서 미칠 노릇이었다. 목구멍까지 타 들어간 담뱃불을 모질게 비벼 끄며 그냥 돌아가면 시간당 2만원을 물어야 한다며 티켓을 내 가슴패기에 구겨 넣는다.

그 페이지는 아주 단순한, 본능적인 구조로 짜여 있었다. 그것을 하는 동안 돌아오지 않는 그가 구세주 같았다 진땀을 흘린 흔적들은 그의 광기였다라고 우기자. 마음 내키는 대로 느껴야 하는 내내 허기가 몰려 왔다.


그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구겨진 석간신문이 겹으로 깔려 있다. 깊은 구멍을 가진 그의 어휘가 심호흡처럼 묻어 있다.

먹다만 짬뽕 그릇, 팅팅 부어오른 오징어다리가, 먼 길을 돌아온 그 지친 의미가 아직도 생생하다. 기름이 엉긴 국물을 눈으로 불어내고 있다. 징집 같은 얼룩무늬만 득실거린다. 그 통에 바늘집 같은 이력서를 들고 나간 그가 위험하다.

부어오른 다리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벌건 국물을 휘젓는다. 바닥에서 수시뭉텅이 같은 그의 머리가 나왔다.


나를 먹어라 나는 너의 아버지다. 그는 몇 번이고 나를 다그쳤다. 그의 분개는 또 다른 자기모멸로 다가왔다. 도저히 개관 같았던 섹스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 배설로 얼룩진 페이지를 찢는다.

티켓을 팔고 간 미스 김이 너의 어머니다. 네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또 지껄인다. 죽이고 싶었다.

순간 그가 내 뺨을 후려갈긴다. 그가 국물 속으로 다시 가라앉는다. 그를 느낀 뒤에 더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면……




한여름밤의 꿈은 한컷

김영승


나사렛국제병원 앞 공원은

둥그런 공원

느티나무 숲의 이 저녁엔

환자복 입은 여자 환자들이

죄다 나와 산책을 하는데

흐린 장마철인데도 해설피

죽음의 미소가

삶의 찬가가

슬리퍼마다

휠체어마다

그리고 夏服 입은 소녀들

하얀 블라우스마다

란도셀마다

老人들, 처녀들

步行과 律動마다

빠드뒤처럼

돈 걱정과

장래의 희망처럼


그 가운데

지붕 낮은 팔각정처럼

칼레의 市民처럼


나는

삼성 플라자에 가서 아들 MP3 A/S 수리 맡긴 것

찾고

국민은행 현금인출기에 가 10만 원 찾고

750원 짜리 生水 한 통 사서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에 꽂고

자판기에 가 커피 한 잔 뽑아

벤치에 앉아 있다


지겨운가?

이 작은 공원은

건물로 둘러싸인

완전 盆地


北美 인디언들은

南美 잉카인들은

나를 찾기

어려우리

“어딨냐?”

외치다가

해가 저문다.




해바라기가 있는 풍경

김영식


8월이었다 뚝뚝 노란 선혈을 흘리며 해바라기가 지고 있었다 잘린 귀들 들고 들녘을 뛰어가는 사내 노장을 불구의 시간 그럴 때 내 오랜 지병은 부질없음의 부질없음을 사랑하는 것 쓸쓸함의 잔해로 별들은 어두워지고 허공에 누가 검은 원반을 던진다 빛의 속도로 상실은 날아간다 영원이란 순간의 다른 이름등 뒤에서 너는 비수를 꽂는다 짓뭉개진 얼굴의 비련 나는 눈물을 흘리다가 웃음을 흘리다가 가끔씩 아무 슬픔도 없이 꽃은 피는 것이 단 하나의 표정도 없이 커피를 마시던 계절처럼 뙤약볕 아래서 사이클로프스* 들은 오늘도 제 눈을 후벼판다 바람의 관자놀이를 겨냥하는 플라타너스의 이별 타인이란 음반위에 재생되는 지나간 미래의 낡은 연민 같은 것 그럴 때 모든 노래들은 불면의 골짜기를 배회하는 걸까 구름이 부고를 전하는 빗방울들이 공중을 버리는 낙화 패랭이 꽃들은 담장 아래 시들고 눈부신 맹세들은 망각의 무덤에 깃털같은 순장을 눕힌다 아무도 자신을 추억하지 않는 몸짓으로 하나의 기억이 하나의 기억을 배반하는 8월 정오의 단두대 위로 해바라기들이 목을 매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그림자들의 야유회

김점용


뒤풀이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누가 불러 잠시 다녀왔더니 커피가 다 식어 리필을 부탁했을 뿐인데 종업원은 한참 뒤에 딸기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가져와서는 자기는 모리는 일이라고 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지만 딸기는 잘 먹는 편이라 맛을 조금 보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혼자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는다 눈치를 주고


누가 불러 잠시 다녀온 것도 모두가 야유회를 간다고 하니 누군가 한 명은 당번으로 남아야 하니까 공으로 남 때리는 피구도 싫고 헛발질 잘하는 족구도 못해서 내가 남겠다고 했을 뿐인데 남아서 텅 빈 사무실의 텅 빈 의자에 한 번씩 앉아가면서 그들과 수건돌리기를 하며 놀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혼자 데이트를 즐겼다 수군거리고


끼리끼리 모여 앉아 비닐을 둘러쓰고 말풍선을 부풀리고 고기를 뒤집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손뼉을 치는 사이 내가 그들 뒤에 석유 냄새나는 기념수건을 번걸아 놓아가며 차례차례 술래로 만들었다는 걸 모르고 손을 뻗어 뒤를 더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혼자서 빙빙 돌다가 지쳐 쓰러졌다는 걸 모르고 사람들은 꾀병을 부린다 야유를 하고 야유회를 즐기고



<2011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커피포트

김종영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비등점의 포말들

음이탈 모르는 척 파열음 쏟아낸다

적막을 들었다 놓았다

하오가 일렁인다

선잠을 걷어내어 베란다에 내다건다

구절초 활짝 핀 손때 묻은 찻잔 곁에

식었던 무딘 내 서정

여치처럼 머리 든다

설핏한 햇살마저 다시 올려 끓이면

단풍물 젖고 있는 시린 이마 위에도

따가운 볕살이 내려

끓는점에 이를까




안녕하세요! 물고기

김형술


물고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른 아침

거리마다 퍼덕이는 물고기들로 가득 찼다


춤추는 물고기들을 우산 끝에 매달고 사람들이 집을 떠나자

가지마다 꽃처럼 반짝이는 물고기들을 매달고

나무들이 집 쪽으로 걸어왔다


호주머니에서 물고기를 꺼내 꽃을 사고

물고기로 신문을 사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물고기를 가득 실은 비행기가

지붕 위를 천천히 날아갔다


사람들이 눈웃음으로 물고기를 주고받는 동안

입을 벌려 물고기를 삼킨 아이들은

싱싱한 비린내를 풍기고

머리 위에 물고기집을 지은 노인들은

흔들릴세라 조심스런 걸음으로

처마 밑을 걸었다


어두운 벽들마다 물고기가 피었다

비늘인 양 물고기를 매단 채

아가미를 단 듯 부드럽게 벽들이 숨을 쉬었다.

어슬렁어슬렁 뒷짐을 진 채

건널목을 건너오던 저녁이

오래 벽을 마주보며 서 있다가

눈을 반짝이며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물, 고, 기.

 



류인서


눈이 온다

와서

먹어치운다 


기둥 아래 남자를 먹어치운다

벤치뿐인 벤치를, 거기 붙은 빈자리를 먹어치운다

공터의 이글루 같은 자동차들을 먹어치운다


먹어치운다

엘니뇨와 라니냐의 소란한 탁자를 먹어치운다

던킨도너츠 가게 커피 한잔을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담벼락과 포장마차의 낡은 연애를

돌아와 쓰러져 눕는 반 토막 그림자를 먹어치운다


전화선 너머 국경 너머

둥지 밖 새들의 잔고를 먹어치운다

발 묶인 봄, 세상으로 가는 이정목을 먹어치운다

저의 근원, 북풍의 침대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


다 먹어 텅 빈 눈의 식탁, 눈의 위장

소화불량

폭설이 온다




옥상

마경덕 


도시의 옥상은 매력적이다

평수에 없는 땅을 배로 늘려 덤으로 준다

14평에 살아도 사실은 28평인 셈

하늘에 등기를 마친 건물의 꼭대기는

별도로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많은 옥상을 거느린 하늘은

비와 햇빛과 바람으로 옥상이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한다


집들의 정수리에서 상추와 고추가 자라는 것은

지붕을 싫어하는 옥상의 버릇 때문

오래된 이 습관 탓에

스티로폼 상자에 붉은 고추가 달리고 항아리에서 간장이 익는다


가끔은 쓰레기더미나 폐품을 방치하고 물탱크에

시신을 감추기도 했지만 그것은 옥상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닥다닥 달린 창문을 빠져나와

넥타이를 풀고 잠시 숨을 돌리는 곳, 도시의 숨구멍은

결국 이 옥상이다

사내들은 이곳에 와서 생사를 결정하고

하루를 충전한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한잔을 들고

머리 위를 날아가는 새들이나 흘러가는 구름 따위를

생각의 갈피에 눌러두어도 좋을 것이다


드물게 추락사도 있었지만

그들은 깔끔한 옥상의 성격을 몰랐기 때문

제 평수만 고집하는 옥상은 한 뼘의 허공도 탐내지 않는다

한 발이라도 제 품을 벗어나면 결코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평수에도 없는 땅에 옥탑방을 들이고

꼬박꼬박 월세를 챙기는 주인도 가져갈 수 없는 건

아무도 그 평수를 모르는 탁 트인 하늘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문성해


한때 아들의 적이었던 그 여자를

숙모는 아직도 욕을 한다

아들 밥은 차려줄 생각도 않고

초콜릿만 먹더라고

애당초 살림하곤 먼 계집이라고


언젠가 그들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를 때

그 여자는 폐르시안 여자처럼 갸르릉거렸지

머리카락이 목구멍에서도 나와요

당신 그거 너무 지나친 비약 아냐?

사람들이 자신의 정수리를 보여주는

이 직업을 당신은 사랑한다고 했잖아

드라이기를 권총처럼 허리에 찬 사촌동생의 말에도

그 여자는 거기에 없는 듯 웃었다


그 여자가 있다던

보세 옷가게 앞을 지날 때도

그 여자는 거기에 없었다

그 여자가 마네킹의 팔을 들어 구겨진 옷을 입힐 때도

빨간 입술에서 천 원짜리 김밥을 쑤셔 넣을 때도

새벽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에도

없던 그 여자


어느 날 사라진 옷가게 자리에 커피집이 들어서고

그 여자를 닮은 마네킹 대신

우아하게 카푸치노를 든 여배우 그림이 서 있을 때야

나는 비로소 보게 되었다

완벽하게 사라진 뒤에야 보이는 여자를

나는 비로소 한 여자를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쓸쓸

문정희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글씨로 써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이윽고 옷을 벗고 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사람이 산다는 것은 - 청난 선생에게

문충성


사람이 산다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도 아니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자그만 권력 모으기 위해서도 아니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헛된 명예 높이기 위해서도 아니요


아들 낳고 딸 낳고

아들 키우듯 딸 키우고

조금씩 나를 돕듯 조금씩 이웃도 돕고

세상 사는 재미는 그저 그런 것이지

세상이 컬컬하면 커피 한잔 마시고


목소리 높여 떠들어봤댔자 별거 없지

이 세상은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조용조용 걷고

조용조용 생각하고

조용조용 말하고

조용조용 예술을 일구면서

조용조용 웃으면서


그러나 적당히 예술가가 되지 말게

적당히 예술 공부는 아예 하지 말게

농부가 밭을 갈 듯 땀 흘려 농사짓듯

예술도 적당히 해서는 되는 게 아니지

예술가 되는 것이 그래 쉬운 일이 아니야


이제 우리 곁을 떠나신 선생님

더 이상 우리 곁을 떠나실 수 없는 선생님

아니 항상 우리 곁에 계신 선생님

제주섬에 인정과 예술의 씨 뿌리셨으니

언젠가 빈손으로 뿌린 씨 거두러 오실 선생님

훌쩍 여윈 몸에 안경 쓰시고

홀홀 아 저기 오시는구나 새하얀 여울 소리로




이불 속의 마적단

박 강


오오, 돌진하자꾸나, 우리에겐 방패도 투석도 없어, 국경을 무너뜨리라는데, 무한한 전리품을 획득하라는데, 전사여, 달려보자꾸나, 상사의 심부름으로 무기처럼 커피를 들고


제발 가르쳐 주세요, 적진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손이 정말 시장을 지배합니까, 발 닳도록 커피 나르며, 책상 밑 유령 같은 손으로 토익 책을 훔쳐보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없습니까, 사막에 플랜트를 세우겠습니다, 제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뽑아만 주신다면


사무실 곳곳에 왈칵 쏟겠습니다, 저의 패기를, 열정을, 오오, 뜨거운 커피를, 상사의 바지가 젖었습니다, 이제 집에서 눈물 젖은 사전을 베고 잠들어야 하나요


이불 뒤집어쓰고 사막을 펌프질 하는 꿈, 탁 탁 타 타 탁, 원자재값 상승에 맞춰 내 몸값 올릴 때까지, 이제 난 웅크린 자세로 화석이 되렵니다, 성기에서 석유가 뿜어져 나올 때까지




심야의 커피

박목월


사록사록 

설탕이 녹는다

그 정결한 투신

그 고독한 용해

아아

심야의 커피

암갈색의 사연을

혼자

마신다

늦은 밤이다




자동판매기가 전하는 말

박상봉 


입춘 지나도 바람은 여전히 맵다

몸을 녹이려고 자동판매기 앞에서

커피를 뽑고 있는데

조사연구실 민과장이

왜 사무실 커피 타 먹지 않고

돈 들여 뽑아서 먹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정말 시가 쓰고 싶어진다

자동판매기는 말을 하지 않지만

손 내밀면 따뜻한 커피 한잔 내어놓을 줄 안다

긴 겨울 찬바람에 떨고 서 있을 때

따뜻하게 손 잡아주는 사람 있던가

피곤하고 기분 상하여 일하기 싫어질 때

말 못하는 기계도 그윽한 커피 향기로

마음 달래줄 줄 아는데

내민 손 부끄럽지 않게 잡아주면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주는

따뜻한 사람이 곁에 있는가

함부로 손 내밀지 말아라

다가와서 손 잡아주기는커녕

뒤통수 맞지 않으면 다행인 줄 알아라

다만 조용히 귀 기울이고

삐걱대는 마른 나뭇가지 목소리 같은

자동판매기가 전하는 말 가만 들어보아라




김종삼 약국 

박세현


잊을 만하면

빗방울 같은 두통이

머릿속 후미진

주소불명의 동네를 찾아온다

커피집과 꽃집 사이에 끼어 있는

음반가게와 족발집 건너편에 있는

약국은 항상 미로 끝에 있다

벙거지 쓴 약사 선생은

손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당신이 찾아올 줄 알았다는 눈길로

진단하고 건성으로 처방했다

당신의 영혼도 뻥 뚫렸군요!

두통 사이에 낀 음악과

음악 사이를 적시는 빗방울

몇 봉지 받아들고 돌아서는

처음 가보는 낯선 동네의 저녁이다




<2004, 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얼음을 주세요

박연준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 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커피를 마시며

박이도

 

막 어둠이 도망쳐 나간 듯

불빛이 조용히 모여드는 실내


꽃무늬의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내광처럼 귀에 쟁쟁하다


코끝에 스쳐가는 입김처럼

그윽한 향기

현악기의 흐름 위에

서로를 놓치지 않는

눈빛이여


나직이 이어지는 너의 음성이

희미한 추억의 끄나풀을 매만진다


향기를 맡으며

맛으로 느끼며

오관을 풀어가는 갈색 바이타민


소탈한 미소와 의연한 시선

조슴스레 더듬는 손놀림

스치는 입술의 촉감

자연스런 공간의 희미한 입상




약속해줘, 구름아

박정대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피운다, 삶이라는 직업


커피나무가 자라고 담배 연기가 퍼지고 수염이 자란다, 흘러가는 구름 나는 그대의 숨결을 채집해 공책 갈피에 넣어둔다, 삶이라는 직업


이렇게 피가 순해진 날이면 바르셀로나로 가고 싶어, 바르셀로나의 공기 속에는 소량의 헤로인이 포함되어 있다는데, 그걸 마시면 나는 7분 6초의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삶이라는 직업


약속해줘 부주키 연주자여, 내가 지중해의 푸른 물결로 출렁일 때까지, 약속해줘 레베티카 가수여, 내가 커피를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고 한 장의 구름으로 저 허공에 가볍게 흐를 때까지는 내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내가 어떡하든 삶이라는 작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내 삶의 유리창을 떼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구름아, 그대 심장에서 흘러나온 구름들아, 밤새도록 태풍에 펄럭이는 하늘의 커튼아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

박정원


남편을 잃은 여자와 아내를 버린 남자가 커피 볶는 집에서 백석을 읽는다


소나무부부가 손을 꼬옥 잡고 드센 바람도 좋아라 유리창 밖에서 응앙응앙 울고


가는 눈이 간간이 뿌려지는 전봇대에 앉아 갓볶은 커피 향을 기웃거리는 직박구리 한 마리


강 건너 저편엔 천국행열차가 산그림자를 끌어내려 굼벵이처럼 지나가고


서서히 지워지는 마을들

하나 둘씩 불이 켜지는 만주벌판의 집들


여자는 말없이 백석과 동침하려 이불을 펴고

마침내 도착한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연신 스마트폰에 담아내는 남자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세상한테 지는 길이라네 내가 좋아서 버리는 거라네

눈도 푹푹 나리지 않는데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않는다




강남역 

박주택 


그리하여 시간이란 계급을 재편성하는 과정이란 느낌이 들 때

햄버거는 입 속에서 혈관을 터트리고 커피는 저녁처럼 어두워졌다

순환하는 인간들, 청춘은 중년이 되고 또 다른 청춘은

이곳을 가득 메우며 노년에 이르게 됨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십 년 전에도 그랬다, 포장마차가 즐비하던 자리는

고층으로 새를 부르고 검게 그을린 유리창에 잎사귀를 부르지만

저 싱싱한 다리는 아주 기분 나쁜 팔자를 만나

저녁의 숙명에 흘러가는 것을


화장품 상점에서 환한 빛으로 나오는 여자가 남자 속에서

둥글어지는 여름이다, 땀내 무럭무럭 자라 보잘것없음이

나의 나라라는 것임을 마침내 떠가며 알아 갈 것이니

여름이란 이곳을 차지하던 그 누군가들이 부푼 육체 속에

청춘의 찜통을 채우는 일이다, 편성된 계급에 기대어

유리창 너머로 들리는 꿈의 찰칵거리는 소리에

혹독한 운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평화가, 평화가, 나의 국가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라고

저 시간은 벽 속에 도는 피에 빗대 저녁을 침묵시킨다




도서관

박현웅 


몇 권의 구름을 대출한 나무들

한낮의 졸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우수수 문장들을 쏟아내고

한쪽 공중을 허무는 구름

잎들의 필사는 늘 바람의 일,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벌레 먹은 낱장들의 바스락대는 그림자

반짝거리는 햇볕들이 모여 있는

몇 그루 나무도서관들.


수천 권의 문들이 빼곡히 꽂혀있는 도서관

서 있는 제목들,

눕지 못하는 고단한 碑文 같다

바람을 불러들여 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줄거리들

쏟아지지 않는 잠의 저편이 엎드려 있다


나무들은 흔들리며 풍경을 복사한다. 대출이 뜸한 스피노자 영감은 구석의 칩거에 든 지 오래. 안경 깊숙이 밀도를 더하는 소용돌이가 잠깐씩 쉬고 있다


새들의 낭독, 소란스러운 창문 밖

자판기 커피 메뉴들이 뜨겁게 끓고 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문득

삐걱거리는 경첩의 소리 같다는 생각.




<제4회 오늘의 시조시인상 수상작>

진행형이다

박희정


12그람 커피믹스와 무의식이 녹는다


일상의 군더더기

순식간에 풀어지고


혀끝에 달착지근하게 스민 오랜 소통의 密書


입가심의 뒷맛처럼 우러나는 향의 깊이


건조된 분말에도

비밀의 물기 있어


찻잔이 다 식어가도 약속은 진행형이다




커피를 뽑는 사이

서효인


그녀는 바그다드 카페의 거대한 바리스타, 열무지에 밥을 비비며 맥주나 소다수를 건네듯 새참을 돌렸다 실한 허벅지를 빛내며 다도해 사이를 싸돌다가 오후 새참 전에 끄응, 일을 보면 작은 섬들에 졸졸졸 물이 찼다는데 그런 날, 물 찬 섬으로 배의 콧날에 닿아 여물듯 풀어진 애꿎고 설된 다섯


한 번쯤은 향심, 이번에는 맹심, 속상해서 상심이, 혹시라도 경심, 별수 없이 딸막이, 병원 침대에 누운 섬 하나가 바짝 마른 커피콩이 되었다 칼칼한 다섯 유전자가 실한 허벅지 사이로 오줌을 눈다 시골의 다방처럼 상냥한 음악이 들리고


혹시 키가 큰 이모 다섯을 보았는가 그 우렁찬 유전자가 우는 소리, 바그다드 카페에 피고 지고, 자판기가 놓인 복도 사이로 바닷물이 고인다 서로가 여물듯 풀어져 닮은 이모들이 새참을 돌리는 밤, 그녀를 부르는 노래 Calling you, 아아아, 커피를 뽑는 사이에




찻잔

성혜린 


두어 철 넘도록 생각을 풀어주던


둥글고 푸른 잔은 뜨거운 여름을 식혀주는 동구 밖 느티나무 같았다. 때마침 반절 넘게 남은 커피를 3분 데우기 하는데, "찌직 찌지직" 마른 연기 내품으며 비틀어졌다. 조금 빠를 거라던 것이 때로는 더디고 쉬울 거 같던 것이 간혹 어렵기도 하다며


틀어진 찻잔의 굽이 샐쭉하니 바라본다




겨울 이사

송수권 


추적 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

이삿짐을 나르며 변두리 전셋방으로 몰리면서도

기죽지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오늘은 그들의 뒤퉁수를 유난히 쓰다듣고 싶은 하루였다.

돌아 보매 사십 평생 고통과 비굴 속에 흔적 없고

좋은 시절 다 넘기고 우리는 뒤늦게 이 도시에 쳐들어와

말뚝 하나 박을 곳이 없다

차 한 잔 값에도 찔리고 수화기를 들어도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지 않았나 몸을 사린다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때로 의문을 제기 해도

삶의 공식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거치는 무슨 유사다 회비다

서투른 몸짓에 뒤늦게 코 깨지는 걸 알고 발을 뺐더니

또 누구는 자페증 환자라 꾸짖는다

애경사를 당해 봐라 또 누구는 겁준다

며칠 전은 불우 문인 돕기 만원을 빼 내려고

아내와 치고받다 나도 이 말을 멋있게 써 먹었다

그것도 정작 가야 할 곳에 가지 못 하고 홀짝

커피 값으로 축이 났다

정말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내 오늘 친구 말대로 이 바닥 일만 평 적막을 흩뿌릴까 보다

정말 다들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회색빛 하늘 속에 이삿짐 따라 가며

기죽지 않고 까부는 아이들이 대견스럽다

아내여, 결코 거러지 같은 바닥 이 세기의 문 앞에서

그대 눈물을 보이지 말아라

우리 모두 죽어서는 평등 하리라




진눈깨비 속을 가다

신경림


불빛 환한 방안에는 커피 향내 짙겠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요정처럼 춤추겠지

진눈깨비 치는 어두운 밤길을

다리 절면서 사람들은 가고

젊은 부부 연속극 앞에 넋잃고 앉아 있을 거야

달콤한 대사에 눈시울들이 붉었을 거야

옷속으로 파고드는 매운 칼바람

여미는 손은 나무껍질처럼 갈라졌다

내일 모레가 설 선물 꾸러미도 챙겨야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끝도 한도 없어

진창과 허방 끝없이 이어져

빠지고 고꾸라지면서 사람들은 절망하고

밤 이슥하면 사내들은 허풍을 칠 거야

짐짓 속아주면서 아내들은 즐거울 거야

천둥과 번개가 귀와 눈을 찢는

밤길은 갈수록 험하고 어두워

차도 바꾸고 집도 늘려야지

내년에는 괌으로 바캉스를 가야지

새벽은 언제 오느냐 좌절 속에

지쳐서 주저앉는 사람들 쓰러지는 사람들

불 꺼진 방안에는 숨소리들이 거칠겠지

사랑은 속될수록 즐거운 거니까

온몸에 감긴 시퍼런 멍

놀래대듯 그 위에 진눈깨비는 퍼붓고

평화롭겠지 이윽고 저 고른 숨소리들

모를 거야 밤길도 진눈깨비도 모를 거야




커피를 마시며

신달자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 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번째

커피 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커녕

몇 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死藥처럼 

커피를 마신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신준수 


너무 진하지 않은

커피 한 잔

조여진 마음을 풀어준다


연탄 난로 모퉁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파아란 하늘

고개 들어 보니

땀으로 얼룩진 황토빛 얼굴

어느 새

우리들 삶에 한 부분이 되어버린

진하지 않은 커피 한 잔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하나

아름다움 영근다.




流氷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비 오는 날의 커피 한 잔

신현림


비가 오는군요.

제 손이 좀 더 길다면

그대 있는 곳까지 뻗어

커피를 타 드리고 싶군요.


제가 차리진 않았지만

바지락 대 여섯 개 얹어

조미료를 안 넣고 끓인

순수한 손 주제비도

사 드리면 더욱 좋구요.


비가 오니 마음까지 젖어

따듯한 불을 때야겠습니다.

인간은 나약해서

이런 날 불이라도 때지 않고

커피라도 마시지 않으면

마음이 더욱 쓸쓸해 집니다.


바람이 일어

고인 물이 찰랑찰랑 흔들댑니다

지금 오는 비에 정이 들 듯이

그대와도 정들면 좋겠어요.




의문들

심보선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누군가를 정성 들여 쓰다듬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

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몸은 마음을 산 채로 염(殮)한 상태를 뜻할까

내 몸이 자주 아픈 것은 내 마음이 원하기 때문일까

누군가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내면

사람은 토하는 기분이 들까

내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누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봐줄까

층계를 오를 때마다 층계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까

숨이 차오를 때마다 왜 숨을 멎고 싶은 생각이 들까

오늘이 왔다

내일이 올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여 광포해져라

하면 바람은 아니어도 누군가 광포해질까

말하자면 혁명은 아니어도

혁명적인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을까

어떤 의문들이 이 세계를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하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기에

아이들의 붉은 입술은 아직도 어리둥절하고 끝없이 옹알댈까

  



레몬향의 김여사 이력서

심은섭 


한 잔을 마셔도 블랙커피만 마시던 여자

발등에 개미 한 마리 지나가도 소리치는 여자

초미니스커트를 맹신하는 여자

한 정거장을 가도 꼭 택시만 타고 가는 여자 


여자가 아닌 여자, 헤라클레스가 된 그 여자

만삭의 몸을 여덟 번 풀어낸 그 날부터 


손바닥으로 바퀴벌레를 단숨에 때려잡는 여자

노점에서 찬밥 덩어리 달게 먹는 여자

고열을 내는 아이 업고, 30리 길을 달리던 여자

다방 커피도 맛있게 먹는 여자 


내가 그렇게 만든 여자, 내가 훔친 여자

시간이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그 여자 


오래도록 입덧을 하던 곳간의 문을 닫은 여자

두 다리가 하얗게 홀수가 된 여자

날마다 두 귀가 개기월식 하는 여자

시간의 박물관에서 박제가 되어가는 여자




희망 

양애경 


당신이 나를 자꾸 시험한다

또 당했군 아침에 깨어나 앉아

쓴웃음을 짓는다

가슴이 쓴 소금으로 가득 차고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진다

하늘이 여전히 어둡고

나는 천천히 설탕을 타지 않은 커피를 마신다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늘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희망이여 언제나와 같이

당신이 쓴 아침을 보낼 것이다

또 당했군 소금물이 상처를 씻어 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문을 열고

거울같이 현관을 닦는다

화분에 새로 물을 준다.




출구

여태천


사전을 들고 가기엔 어울리지 않는 곳

자꾸만 빨간 코트에 눈이 가는 날

한 알의 소마*가 필요한 날


구급차가 크게 달려오다

천천히 사라질 때

나는 12월 31일처럼 납작해지고

심장의 소리는 일정하다


커피에서 지난여름의 햇빛을 뽑아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한 뼘 정도의 입구가 생기겠지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곳

아니라면

빠르게 되감기는 자막 없는 영상 속으로


시간은 점점 가늘어져

이제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가장 가까이 간다




엄마 까페테리아에 가다

오   은


엄마

에스프레소, 라고 발음해 봐요

인스턴트 커피에 설탕 두 스푼은 잠시 잊어버려요

우리가 가는 곳은 다방이 아니에요

꽃무늬 원피스는 제발,

시장에 가는 것이 아니래두요

엄마

검은 정장에 마름모 브로치를 달아요

오늘은 귀해 보여야 해요

싸구려 가루분은 집어치우고

대신 겐조 향수를 약간만 뿌려요

우리는 지금 까페테리아에 가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엄마

에스프레소, 하고 발음해 봐요

기억하지 못해 에수프리마, 라고 말해버린다면

나는 뛰쳐나올 지도 몰라요

흰 가죽신이 아니래두요

블랙 앤 화이트는 좀 천해보여요

갈색이나 검은 구두를 신어요

차라리 엄마,

가는 길에 고급 구두 한 켤레 사기로 해요

오늘은 달라야 해요

우리는 토스트에 에스프레소를 마실 거예요

블루스를 들으면서요

엄마

하춘화 얘기는 잠시 지워두세요

에스프레소, 잊지는 않으셨죠?

아이 엄마

핀에 박힌 큐빅이 한 개 빠졌잖아요

이러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엄마, 자 내 말을 들어요

귀찮은 건 힘든 게 아니래두요

오늘을 위해서 주름살은 좀 가려주세요

에스프레소 발음 연습은 이제 그만 하라구요


엄마 날 사랑하지 않나요?




한 잎의 女子 3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오규원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 같은 女子, 그레뉼 같은 女子, 모카골드 같은 女子, 창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가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女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女子, 줄거리가 복잡한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버 같은 女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女子.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창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女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양은 밤에 자란다

오명선


비둘기 한 마리 날아올랐을 뿐인데,

내가 누운 천장으로 양들이 몰려온다

구름떼처럼 불어난 양들로 방이 소란하다


양들이 헛배 부른 나를 뒤적이다가

뼈대 없는 모자를 뜯어먹는다, 부러진 책상 바닥을 친 달력 알람시계의 마른 눈물을 자근자근

결국, 생각의 꼬리에 붙잡힌 나를 먹어치울지도 모른다

이 쓰디쓴 생각마저 뜯어먹고

언제나 떠날 궁리만 하는 나를 툭 뱉는다


말랑말랑 늙지도 않는 양들 틈으로 손과 발을 밀어 넣어 보지만,

이미 내 일기장은 검은 낙서이고 리모컨이 뎅강 잘라버린 채널이고 달빛에 젖은 커튼이고 연거푸 마신 쓴 커피이고

내 밤은 줄어들지 않는다


비둘기 한 마리 푸드득 날아올라,

내 밤에 균열이 간다




커피 

오세영


사랑한다고 쓸까,

미워한다고 쓸까,

채울 말이 없는 빈 원고지 앞에서

바르르 떠는 펜,

바르르 떠는 손으로

한 잔의 커피를 든다.

달지도 않다,

쓰지도 않다,

단맛과 쓴맛이 한 가지로 어우러내는

그 향기,

커피는 설탕을 적당히 쳐야만

제 맛이다.

블랙커피는 싫다.


커피 잔에 녹아드는 설탕처럼

이성의 그릇에 녹아드는 감성,

그 원고지의 빈 칸 앞에서

밤에 홀로 커피를 드는 것은

나를 바라다보는 일이다.




<시조>

찻잔  

오종문


두어 철 넘게 조석으로 생각을 풀어준 둥근 잔은

뜨거운 여름을 식혀주던 동구 밖 느티나무 같았다


푸른 잔에 반절 넘게 남은 커피를 3분 데우기 하는데

찌직 찌지직, 마른 연기 내 품으며 비틀어진 허리-


조금 빠를 거라던 것이 때로는 더디고

쉬울 거 같던 것이 간혹 어렵기도 하다며

틀어진 찻잔의 굽이 샐쭉하니 바라보았다




연어떼가 돌아온다는 강에서

오채운


모든 것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그때 나는 강물 한가운데 서 있었다

허리까지 잠기는 물 한가운데서

물을 잡고 싶어 안달했다

움켜쥔 손에 힘을 줄수록

물은 더 멀리 달아나버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내가 타던 자전거가 서 있다

그와 나는 딴 길을 걷고 있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연어떼를 한꺼번에 놓쳐버린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바다로 떠났다던 연어떼가 돌아오고

슬픈 맛으로 내 입에 씹히는 강물

지금 이 물을 움켜잡는 손은

떨리는 마음으로 커피 잔을 움켜잡고

얘기를 나누던 그 손이 아니다

내가 타던 자전거에 죽은 연어를 싣고

힘겹게 물 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

지금 내가 건져낼 수 있는 건 물이 아니라

자물쇠로 굳게 잠긴 판도라의 상자이다




별다방

오탁번


시골 장터 골목이나

역전 거리에 있는

간판도 다 떨어진

호젓한 별다방을 보면

그냥 쑥 들어가고 싶다

대덕산 임야도 보여주며

한 오천평쯤

희떱게 뚝 떼어주면

낙낙한 마담은

자늑자늑 내 품에 안겨올까

살별처럼 흘러간

옛사랑 다시 만난 듯

‘그냥커피’ 홀짝 마시면서

눈흘레나 하고 싶다




이별, 그 사소함

위승희


우리의 사랑보다 우리의 이별은 너무나 사소했네

늘 만나던 까페의 익숙함이

신선하지 않을 인사를 나누며

그대는 창가에서 두 번째 테이블의 덮개가 삼 센티쯤

밀려나간 것을 바라보고

나는 절망으로 자라난 손톱을 자르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그대 눈빛에서 꽃 피고 꽃 지는 소리 사라짐은

꽃가게의 꽃들이 너무 많아서였다고

잇몸을 다 드러내고 웃는 그대 입안으로

바람 움트는 지루함

그대 돌아서는 뒷모습에서 쟈켓 한 귀퉁이 조금씩 구겨 올라간 것을

또는

그대가 떠난 자리에 의자 쿠션이 조금 옴폭 가라앉은 것을

일일이 기억해야 하는 권태의 바지,

드라이크리닝된 그대의 허무가 세탁소 그늘에 내걸릴 쯤

그대 기억할까

마지막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던 사람을

마지막 커피값을 지불한 사람을

그렇게 이별은 사소했네

이제 정갈한 뒷모습의 한 사람이 그리워지네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유인숙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저마다 허물이 있을지라도

변함없는 눈빛으로

묵묵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애써 말하지 않아도

그 뒷모습 속에서 느껴오는 쓸쓸함조차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서로에게 싹트는 찰나의 열정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슴 밑바닥에 흐르는 정을

쌓아간다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저 원하기보다

먼저 주고 싶다는 배려가

마음속에서 퐁퐁퐁 샘솟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향긋한 커피 한 잔에,

감미로운 음악으로도

세상을 몽땅 소유한 것 마냥 행복해 하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서로에게 항상 좋은 벗이 되어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허브의 저녁

유현숙


1

야자수 이파리로 엮은 처마그늘 아래서 여자들은 밀떡을 빚는다 해거름인데도 여전히 바다는 뜨겁다

등껍질이 너덜너덜 하다

해변 마을 초록나무 아래는 꽃무늬 치마만 두른 젖가슴이 큰 여자가 야자수 이파리로 나른한 羑里*의 은유를 부치고 있다, 깊고 깊은 물길이다

사냥한 들짐승을 어깨에 멘 남자들은 휘파람을 부르며 여자들 곁으로 돌아온다

팔뚝의 상처가 붉고 비리다

서커서단처럼 바다로 뛰어들던 차모르의 아이들도 밀떡을 먹기 위해 처마 밑으로 돌아가는

땅과 하늘에는 자연의 음원만이 다이나믹하다


저거, 고요 아니던가


2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초겨울 창가에서 더운 밀크를 마신다

창틀에 놓여있는 허브를 손바닥으로 흔들어본다 손 안에 담겨오는 이 향기는 누구의 것인지

점심을 마친 샐러리맨들이 무리지어 몰려오는 영풍문고 3층, 커피숍의 커튼에는 목단꽃이 사실처럼 피었다

나는 처방 받은 알약들을 털어 넣고 남은 밀크를 마시고

차모르의 풍속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쓰다만 잎상추 같은 시들을 꺼내 읽는다


3

저녁이면 여자들은 누구의 붉은 허브가 되어 향기를 열까

   *노태맹의 시「羑里에 가서 불탄다」에서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유홍준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 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 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느 날의 오후 / 윤동주


창가에 햇살이 깊숙이 파고드는 오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창 박을 바라본다

하늘에 구름 한 점

그림처럼 떠 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살아가면 갈수록

손에 잡히는 것보다

놓아주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한가로운 하루

마음의 여유로움보다

삶을 살아온 만큼 외로움이 몰려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동행 

윤미라 


그에게서 소포가 왔다

갓 건져 푸른 비늘 파닥거리는

서투른 어투로


커피가 있고 그가 있는

이 아침

빛으로 날아온 마음 일곱 색깔 모아져

여덟 평 거실 가득하다


민유리창 너머 한 점

하얀 조각구름에 멈춘 짧은 기억

전해오는


커피향도 진하다.




오늘의 커피

윤성택


갓 내린 어둠이 진해지는 경우란

추억의 온도에서뿐이다

커피 향처럼 저녁놀이 번지는 건

모든 길을 이끌고 온 오후가

한때 내가 음미한 예감이었기 때문이다

식은 그늘 속으로 어느덧 생각이 쌓이고

다 지난 일이다 싶은 별이

자꾸만 쓴맛처럼 밤하늘을 맴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각자의 깊이에서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되어

그 길에 번져 있을 것이다

공중에서 말라가는 낙엽 곁으로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분다

솨르르 솨르르 흩어져 내리는 잎들

가을은 커피 잔 둘레로 퍼지는 거품처럼

도로턱에 낙엽을 밀어보낸다

차 한 대 지나칠 때마다

매번 인연이 그러하였으니

한 잔 하늘이 깊고 쓸쓸하다




협연

윤의섭


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달은 혼자 노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건 노을을 타고 흐르는 바람의 플롯과 나무들의 피아노 연주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혼자서는 뭔가 부족했다는 거

독주로는 비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거


혈점을 짚듯 가로등이 켜진다 저렇게 몰두하지 않으면 저녁은 완성되지 않는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묵언수행과 온종일 불 켜진 편의점의 고행에는 신의 가호가 스며있다

그런 거다 혼자가 아니고 싶으면 완벽하게 혼자여야 한다 별은 별로 달은 달로 바람과 나무 사이를 넘나들며 제 갈 길을 운행해야 한다 이 지구에선 쉽게 고독할 수 없다 인간은 좀 더 떨어져 있어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며 이별은 얼마나 가까운 간극이었단 말인가


그러니 나와 취향이 같으면 좋겠어 그건 함께 고독해지는 일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마시고 산책길 나무는 꼭 고개 들어 올려보고 절판된 책과 담배와 듣지도 않는 레코드를 수집하고 달력에는 절대 메모하지 않고

그건 서로 쓸쓸해지는 일


저녁의 교향곡을 같이 듣는 일

듣다가 차례가 되면 너를 연주하고 너는

나를 지휘하는 일




눈 오는 날

윤준경   


마침내 기다린 눈이 내리고

산들은 멀리서부터 지워지고 있다


멧새 한 마리 푸드득 날개를 터는 한낮

해는 는개 속에서 세상을 관조하는지


사륵사륵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눈이 눈물이 되는 까닭을 생각하고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슬픈 거란다

슬픔에 발을 헛 딛지 마라


창문에 몸을 부딪히며 눈은

수도승처럼 속삭이고


어디서도 소식이 올 기미는 없고

다시 한 잔의 커피에 물을 부으며

안타깝게 눈이 내린다




사람아, 사람아,

이경림


넋 놓고 가다가 문득 돌아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나무 한 그루 서 있고

낯 모르는 바람이 툭 어깨를 치고 간다


저 자욱한 이파리들 사이 어디

죽은 피붙이들 돌아와 쓰름쓰름 울고


어느 생에선가 본 듯한 오후가 자자한데

사방에서 발자국 소리 들린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

여기가……

도무지 모를 것 같은

모르고 싶은 날들이여


때 절은 마분지 같은 빵조각을

식은 커피에 찍어 먹는 시간이여


짐짓 등뼈를 곧추세우고

밑도 끝도 없이 컴컴한 신발 속으로

부은 발을 집어넣는 시간이여




월남전 커피- 영월통신1

이동재


60년대말 강원도 영월 어디쯤에서 있었던 일로 해둡시다. 어느 날 엄씨넨 월남에 간 아들이 편지와 함께 보내온 요상한 물건을 받겠되었지요. 그 시커먼 가루를 끓는 물에 풀어서 마시면 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엄씨는 자랑도 할 겸 그놈을 가마솥의 펄펄 끓는 물에 잔뜩 풀어 넣은 다음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한 바가지씩 퍼먹였던 거죠. 그리고 나선 온 동네 사람들이 밤을 꼬박 밝혔다는 얘기죠. 월남에서 잠 못드는 엄씨네 아들과 함께요.




자판기 앞에서

이명수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

오줌 누고 커피 한 잔 빼먹고 싶다

천 원짜리 한 장 집어넣고

버튼을 눌렀다

커피가 설탕과 프림과 몸을 섞으며

컵 속으로 녹아든디

등 뒤에서

선생님, 저도 한 잔 빼주세요

서둘러 종이컵을 뺐다

선생님, 빼지 마세요

아직 물이 나와요

물 물, 왜 그리 물이 부끄러울까

봄밤의 몽정처럼

먼 산 저 꽃들 질펀하게

터져 나온다

물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눈물 한 국자

이사랑


황학동 시장에서 봄을 기다리며

자판기 커피 한잔으로 마음 데우는데

노인이 가지런히 늘어놓은 물건 중에

오랜 세월 나를 기다렸다는 듯 낡은 박달나무 국자 하나가

내 품에 뛰어듭니다

온기가 느껴집니다

수백 년 전 그 나무 스치던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우묵한 몸

얼마나 많은 것들을 퍼 주었나

뜨겁고 차가운 것에 트고 갈라진 입술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누가 별국자를

저 하늘에 걸어 놓았을까요?

물음표 닮은 국자는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한평생 자식들에게 남김없이 퍼주고 담아주고

빈 국자로 남은

김국자 내 어머니,

간장종지만한 내 그릇 너무 작아서

늘 넘쳐흘렀을 눈물 한 국자

늦은 밤 부엌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시조>

커피믹스 타임

이상야


태곳적 흘러내리는 용암의 홧홧한 분출

사르르 새벽안개 피어오르는 분화구에

밤샘의 깊은 깨우침 고즈넉이 보고 있다.


숙연한 연못 속에 조약돌 던져 놓고

소용돌이 거푸 치는 아수라 천형의 일탈

살며시 입술 적시며 온몸으로 느껴본다.


가슴팍을 타고내리는 따스한 봄의 향기

두 손 모아 절절이 비손하듯 맞이하면,


환하다,

세상이 열린다,

한 스푼의 따스함이.




우체국 아가씨

이생진


우체국 가면서 생각했다

꼭 연인네 가는 것 같다고

가다가 개울을 건너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꺼내 마시며 생각했다

꼭 연인네 집 앞에 온 것 같다고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난롯가에 앉았던 아가씨가 일어서서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냐고 묻지도 않고

일부인을 꽝꽝 내리친다

봉투가 으스러져 속살이 멍드는 줄도 모르고

꽉꽉 내리칠 때

내 손가락이 바르르 떨었다




<시조>

아메리카노와 가을밤

이승엽


달밤이여 붉은 밤이여

금오산 커피집이여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울리지 않는 잔이여

가을밤 아메리카노

물든잎 호수요


그러나 떠나는

동동동 둥둥둥

붙잡지 못하는

11월의 안개 같은

작은배 아메리카노

당신의 가을이여




인 연

이시영


한 번 맺은 인연을 끊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는가를 문구 형님을 통해서 배웠다. 가령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1979년 여름 데모하다 잡혀 성동서 유치장에서 구류 살 때 그곳 정보과장으로 이성춘이란 분이 있었다. 하루에 한 차례씩 우리를 자기 방으로 불러 커피를 대접해주고 담배를 나눠주던 각별히 깨끗한 신사였는데 그곳을 나오자마자 나는 즉각 그를 잊어버렸다. 그런데 문구 형님은 그후로 그가 강동서, 구로서, 은평서를 거쳐 마지막에 종로서로 옮길 때까지 그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지켜왔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편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머리가 하얗게 센 그가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있었던 문구 형님의 영결식에 조용히 참석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안녕, 후두둑 씨

이용한


후두둑 씨에게 늦은 소포가 온다

나는 잘 있다고 포장된 외로운 책이다

갈피마다 부엌에서 침대까지 걸어간

발자국이 적혀 있다

후두둑 씨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외투를 걸치고 식탁에 앉는다

지난봄에 들여놓은 아들 녀석이 잠깐

불가사의한 안녕을 묻는다

낡은 커피라도 드릴까요?

후두둑 씨에게 인생은 앉아 있는 것이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가

매일같이 삐걱이는 후두둑 씨를 기다린다

사뿐히― 갈라진 여백을 중얼거리며

아들아 거의 다 왔다,

문이 닫힌 아내가

지붕 위에서 성큼성큼 쏟아져 내린다.




살아 있다, 난

이윤택


살아 있다, 난 아침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살아 있다, 난 공복의 담배를 깊숙이 들이마시면서

살아 있다, 난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오늘이란 시간이 할애해 줄 좋은 일을 생각한다

그래, 살아 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산책을 나간다, 긴 장마 사이 얼핏 비치는 한 평 반 푸름을 위안 삼고

아파트 옆 개천 위로 둥둥 떠 밀려가는 저 찌꺼기들까지 아름답게 느끼려 한다

을 열고 젖은 이불을 널어 말리는 사람들

모두 용케 살아 있다. 유리창을 닦고 전구를 갈아 끼우면서

이런 식으로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매일 조금씩 불투명해지는일지라도

매일 화분에 물을 주는 사람들

살아 있다는 것이 즐거운 건지 쓸쓸한 건지

한때의 반짝임인지

어느 순간 맥없이 부서지는 오르간인지

잘 모른다. 알고 보면 가혹한 시간, 그러나

이 가혹함을 견디면서

살아있다, 난




삼베빛 저녁볕

이은봉


삼베빛 저녁볕, 자꾸 뒷덜미 잡아당긴다

어지럽다 아랫도리 갑자기 후들거린다

종아리에 힘 모으고 겨우겨우 버티고 선 채

흐르는 강물, 물끄러미 바라본다

산언덕을 덮고 있는 조팝꽃처럼

마음 몽롱해진다 낡은 철다리조차

꽃무더기 함부로 토해 놓는 곳

간이매점 대나무 평상 위 철썩 주저앉는다

싸구려 비스킷 조각조각 떼어먹으며

따스한 캔 커피 질금질금 잘라 마신다

초록 잎새들, 팔랑대는 저 아기 손바닥들

바람 데려와 코끝 문질러댄다

쿨룩쿨룩 삼베빛 저녁볕 잔기침하는 사이

강마을 가득 들뜬 발자국들 일어선다

싸하게 몸 흔들며 피어오르는 철쭉꽃들

벌써 물속의 제 그림자 까맣게 지우고 있다.




커피를 쏟다

이재현


보리식빵 한 조각으로 저녁 끼니를 때우고 하늘을 쳐다봅니다 눈두덩이가 붉은 별 하나가 뚝 떨어져 은사시나무 숲을 덮습니다 별은 풀잎에서 잠들고 부리를 채 다독이지 못한 새가 동공이 팽창되어 몇 번인가 날개를 파닥거립니다 내게서 좋게 떨어진 숲은 이방인에 대하여 경계를 세우는지 자꾸 몸을 삭여 어둠을 풀어놓습니다

파랗게 물들어 가는 숲을 조용히 끌어당겨 봅니다 숲 끝자락에서 호수가 출렁거립니다 가끔 어족의 은빛 비늘이 어둠을 베는지 풀벌레 울음소리가 의식의 가지를 흔들어 댑니다


호수 끝 쪽에서 나의 잠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작은 찻잔 속에 많이도 모여 삽니다

 



슬픈 年代

이종식


한 사내가 내 방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나보다 몇 살 아래인 그 사내.

신문을 보며 나의 아내를 불러 커피를 시키고, 아내는 상냥한 대답으로 시중을 든다. 내가 방에 있는데도 아내나 그 사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한다.

나는 들키지 않으려고 방구석 피아노 뒤에 숨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만 보고 있다.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와 그 사내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나는 지금 이 방에 있으되 나의 不在에 대하여 고민을 한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사내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TV를 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아내가 깎아 놓은 사과를 깨물며 TV를 곁눈으로 보고 있다. 아이들이 각각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그 사내는 아내와 깊은 섹스를 한다.


다시 나의 방에서 나의 不在를 알리는 쾌종시계가 바쁘게 타종을 한다. 꽈아앙, 꽝꽝. 이제 나는 내 방의 한 구석에 나를 버려둔 채, 중년의 슬픈 연대를 쓰기 시작한다. 운다고 옛사랑이 다시 오련만 뭐, 이렇게 시작하는.




깊이에 대하여

이하석


자판기 커피 뽑는 것도 시비꺼리가 될 수 있는지, 종이컵 속 커피 위에 뜬 거품을 걷어내면 "왜 거품을 걷어내느냐?" 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커피의 깊이를 보기 위하여" 라고 대답한다. 마음에 없는 말 일수 있다. 인스턴트 커피에 무슨 근사한 깊이가 있느냐고 물으면, 대단치 않는 깊이에도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해준다. 모두 얕다. 기실 따뜻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단찮은 깊이까지 사랑한다 해도, 커피는 어두워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실 어둠의 깊이를 얕볼 수 없다. 싸고 만만한 커피지만, 내 손이 받쳐 든 보이지 않는 그 깊이를 은밀하게 캐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걸 누가 쉬이 들여다볼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날의 커피

이해인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 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 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읽어 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이고

마시는 뜨거운 한 잔의 커피

아!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터미널

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 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 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슬픈 커피

임찬일


헤어진 사람하고도 그때 좋았을 당시에는

가슴에 프림처럼 감미로운 이야기를 풀어 저으며

따뜻한 눈빛 아래 한 잔의 커피가 있었다


추억은 이제 벽에 걸린 찻잔 모양 물기가 마르고

오이씨처럼 풋풋한 눈물로

슬픔도 푸르게 자라던 그 시절을 혼자 빠져 나와

또 한 잔의 커피 앞에 앉는다 갔다,


내가 붙들지 못한 사랑의 발목 냉커피처럼

내 가슴을 식혀 놓고 흘러간 그 사람

우리 사이에 남은 쓴맛을 낮추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설탕을 듬뿍 떠 넣는다


이제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옛 시간은 블랙커피처럼 쓰다

오래 전 턱을 괴고 앉아 그를 기다릴 때

나는 무슨 느낌으로 커피에게 내 입을 빼앗겼을까

돌려받을 수 없는 시간을 그 사람은 갖고 떠났다


그와 나눈 한 잔의 커피

이 세상의 가장 진한 이야기가 되어

지금 내 가슴을 휘휘 저어대고 있다


함부로 커피를 마실 일이 아니다

보낼 사람이라면

갈색 이마와 그윽한 눈빛을 한잔씩 마시면서

사랑이 얼마나 슬픈 약속인가를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뜨겁게 물들이던

슬픈 커피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이 비운 자리를 혼자 지키고 있다

아마도 그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부엌

장석남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 만한 곳은 역시 부엌일밖에 달리 없지.

커피를 마시자고 조용조용히 덜그럭대는 그 소리는 방금 내가 생각하다 놔둔 시 같고,(오 시 같고)

쪽창문에 몇 방울의 흔적을 보이며 막 지나치는 빗발은 나에게만 다가와 몸을 보이고 저만큼 멀어가는 허공의 유혹 같아 마음 달뜨고,(오 시 같고)


매일매일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고요의 이 반질반질한 빛들을 나는 사진으로라도 찍어볼까? 가스레인지 위의 파란 불꽃은 어디에 꽃아두고 싶도록 어여쁘기도 하여라.

내가 빠져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엌의 공기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도 시 같고, 공기 속의 그릇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고요히 명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다가 먼데 보는 오 얄팍한 은색 시집 같고




다시 무성해지는 어둠

장석원


인간과, 그림자

사이에,

아름다운 저녁이 시작되는데,


도로는 조금 더, 어두워진 것일까

식물들이, 무한을 향해

뒤틀리는 순간 번뜩이는 것.


두부, 식빵, 커피 믹스를

비닐봉지에 넣고,

같은 티셔츠를, 같은 현실을,

복제된 거리를,

걸어가는, 한 사람의 발자국을,

천천히 밟아가는 중,


그대는 왜, 나이 졸음 속으로

어떻게, 이 시간이 횡단보도에,

나타났는가 나를 기다렸는가.


유진상가 네거리

하품하는 저, 그림자에,

달라붙는, 불빛 불빛

2초마다 깜박거린, 불빛,


그대는 누구를 , 찾아왔는가

빨리 도착한, 사랑을

모두가 알고 있는, 공포를

정지,

시키기 위해, 나는 정지하기 위해.




꽃이 피겠다

장호걸


한겨울 날씨답지 않게

햇살 따사롭던 날

오랜만에 커피 한 잔하잡니다

가족건강이나 일상이나

염려하는 아내가

커피 향처럼

칭찬을 합니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오늘은 우리 부부가

찻집에 피운 꽃 같습니다

겨울에도 저리 꽃이 핍니다

꽃이 참 예쁩니다




단 한번, 영원히

전동균


내 팔은 소용돌이치는 마젤란 성운 끝에서 왔다

내 눈은 노랑초파리 눈물샘에서

내 입술은 물에 젖으면 날개가 돋는 돌의 가슴에서

내 머리칼은 순교하듯 펄펄 끓는 커피포트, 그 수증기의 고독을 타고 왔다


이제는 말해다오, 하늘로 몸을 감는 덩굴잎들아

푸른 눈으로 감시하는 파로호의 찌불들아

울어도 울어도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이 밤을

이 밤의 장막 너머

잘린 말대가리들이 쏟아지는 허공의

또 다른 밤을


한 때 여기에도 사람이 살았어, 단검처럼

옆구리를 찌르는 물결들, 숨 내뱉는 순간

얼어붙는 바람을 삼키는

바람의 입들, 끝내


울지 않는 새들아, 말해다오, 이 밤의 장막 너머

잘린 말대가리들을 싣고

트럭이 질주하는

사막, 안개바다, 처녀의 피,

그곳의 오직 하나인 밤을


물고기들이 강의 고통을 기억하듯, 우리가

우리의 죄를 껴안아야 하는

재의 수요일이 오기 전에, 내 얼굴을 찢고

기린의 혓바닥이 튀어나오기 전에




방울토마토

정미정


난데없이 굵은 빗방울 하나 창을 후려쳤다

긴 사선으로 남은 흔적

갑자기 네가  내 뺨을 후려쳤다

아득한 별 하나 광속으로 달려왔다

왼쪽 귀를 지나 오른쪽 외이도로 빠져 나가는

그 알알한 아픔은

기억의 촉촉한 겨드랑이 사이

동그란 알을 슬어놓았다가

간혹 이렇게 부화하는 거였다

곧 햇살이 비치고

커피 반 잔의 시간만큼

따뜻해질 때

언뜻 날개를 반짝이며 사라지고 마는


네가 떠올랐다

비 오는 밖, 빨간 우산 하나

길 위로 떠올랐다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던가

하얀 손수건을 내밀며 흔들리던 네 눈동자

불그스름 번지던 후회

방울방울 속울음에 숨었던

말간 핏빛의 알들 또 다시 부화하고 있다

젖은 날개를 파닥이고 있다

비릿한 공기를 거슬러 도착한

짙푸른 삶의 잎사귀 아래

깨물면,

아직도 물컹하게 터져 나오고야 마는




<시조>

뜨거워라, 국이라도

정수자


밥 한 술 뜨다 말고 물 한 모금 마실 때

김빠진 반찬이 푸슬푸슬 쳐다보네

즐거운 모차르트를 꾹, 꾹, 말아 삼키다

씹다 말고 다시 멍한 그늘진 등을 보며

한참 혀를 차다 주저앉는 벽시계

그 또한 혼자 가는 길, 밥을 꾹, 꾹, 먹이다

식은 커피같이 밍밍키만 한 봄날에

단벌 은수저 녹이 퍼런 봄밤에

혼자서 밥 먹는 이들, 뜨거워라, 국이라도




좌우명

정숙자


차 잎사귀 하나 커피 한 알갱이 넣지 않고

맑은 물 끓여 마시고 싶은 날 있다

향 맛 색깔도 없는

씹을 것 녹일 것도 없는

맹물, 따끈히 마시고 싶은 증후군 때때로 높다

새로 1시 45분, 지금 밖에는 눈이 쌓인다

우주의 숨결 탓일까

술도 차도 국물도 아닌

맹물, 맹하니 마시는 이 밤

물의 뼈 우려낸

‘맑고 따뜻하게’가 맑고 따뜻하게

핏줄로 뇌로 전방위로 꽂힌다

물렁물렁 맹물 되는 법 눈 끔벅이는 법

맹물, 마시며 솎는다 다듬는다 맹물 대낄이!!




식은 커피를 마시며

정의홍 


한때는

가장 감미로운 뜨거움으로

열정적 향기로

내 혀끝에 오래 머물다

내 속을 모두 태워버린

첫 사랑의 추억과도 같은

오랜 아픔과도 같은


어느 겨울날 오후가

창 밖에서 비에 젖을 때

흘러간 옛 노래처럼

문득 생각난 옛 친구처럼

우울해지고 싶은 마음'

한 잔 커피로 끓이면

마음 가득 번지던

그리움 같은

너무 보고 싶음 같은

이제

뜨거움도

향기도

사랑도

꽃 한 송이 시들어

찬 비에 떨고 있을 뿐




사월, 진해만

정일근


바다는 푸른 접시에 담겨

신의 아침 식탁 위에 놓여 있다

신은 아페리티프를 주문해 놓고

노래하듯 시를 읽거나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듣는다

세일러복을 입은 갈매기들이

거수경례를 하며 지나간다

커피 한 잔이 뜨거워지는 사이

바다의 표정은 세룰리안블루에서

색스블루로 변해 가고

사월 바람에 꽃잎 몇 장 날아와

접시 속의 가벼운 섬으로 앉는다

후, 하고 꽃잎들을 불어본다

자욱한 꽃향기 바다를 덮는다




누에의 꿈

정철훈


어느 날부터 나는 커피향이 스멀거리는 마포의

옥외 커피점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실내와 실외를 구분 짓는

그 어중간한 경계에는 아무 선도 없지만

내 몸이 그 선에 얹혀 있다는 게

커피 향과 더불어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기차 레일을 밟고 한없이 걸어 보던 어린 날의 발자국들이

그 보이지 않는 선에서 저벅거리고

기차가 달려와 나를 냅다 치받아도

아무 생채기 없이 다시 살아나는 그런 선이다


그 선에 걸려 푸드득거리다가 겨우 빠져나온

저 허공의 새떼들이나 알까

그렇다고 안과 밖을 통합하자는 야욕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하나의 점으로서

오가는 행인들의 이동을 내 몸에 묶어 본다

그들의 슬픔과 기쁨, 만남과 헤어짐, 열정과 냉정 같은 것들


그러면 내 몸을 당기는 무한한 선들이 생겨나

나는 그 선을 당겼다 늦췄다, 묶었다 풀었다 하면서

하루 같지 않은 하루를 그냥 보내는 것이다


나는 그 무수한 선을 뽑는 한 마리 누에가 되어

꿈틀대면서 환희의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무심코 선 하나를 내 쪽으로 당겨 보기도 한다

선이 선을 달고 딸려 오다가 뒤엉킨다


선들이 엉키면 엉키는 대로

아침은 아침대로 좋지만 오후의 때가 되면

커피 향의 질감이 조금은 무거워지고

내 몸에 묶인 선들도 조금은 낭창낭창 헐거워져 좋은

오후의 한때를 즐겨 보는 것이다


영혼 같은 게 있다면

영혼은 밝으면 별반 쓸모없는 게 되고 말 것이기에

나는 영혼이란 놈이 좀 어두컴컴하게 숙성되기를

그 옥외 커피점에 앉아 기다려 보는 것이다




옥산휴게소 

정호승


아침 일찍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장의차 한 대 주차장에 멈춰선다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실나비 같은 喪章핀을 꽂은 젊은 여자들

우르르 차에서 내려 급히 화장실로 향한다

하늘은 푸르고 날은 따스하다

장의차 꽁무니에 타고 있던 관 속의 시신과 나는

차에서 내려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먼 산을 바라본다

산에는 진달래가 한창이다

꽃도 피면 다 부처님인가

누구를 믿어야 사람은 죽어도 살까

재빨리 우동 한 그릇을 먹고 나와 장의차 운전사가 시신에게 담배를 건넨다

인생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고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가지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고

시신의 어머니가 담배를 피우는 시신의 손을 가만히 잡아끈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시신은 장지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고 지루하다

화장실을 다녀온 시신의 아들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급히 문자메씨지를 보낸다

시신은 담배를 끄고 어머니를 따라 다시 장의차를 향해 흐느적흐느적 걸어간다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려 병아리 떼처럼 화장실로 뛰어간다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가는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더 이상 울지도 않고 장의차가 급히 주차장을 떠난다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

조 정


눈이 수평선을 지우고

바다가마우지 떼를 지우고 온다

소나무 숲을 지나 송림 슈퍼에서 뜨거운 커피를 산다

알루미늄캔 속에 출렁이는 바다

낡은 목도리를 두른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끊어진 길을 위해

낡은 자전거를 불태운다

딛고 올라가기에 인생만큼 부실한 사다리도 없다

많은 침묵을 풀어 물위에 내려놓은 사람들이 바다를 빠져나간다

굳이 떠나야만 했던 길을 되짚어 가는 동안

눈은 한정 없이 쏟아지고

출항을 포기한 집들은 문을 깊게 닫고 잠이 들 것이다

빈 탈의실이 문도 없이 떨고 서 있다

푸른 비치파라솔을 그려 넣은 옆구리에 한 사내가 오줌을 눈다

내가 그만 바다와 저 비굴한 기다림과

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다

빈 캔을 주머니에 넣고 

운동화를 벗어 털면

병든 시계바늘이 쏟아진다

엇갈린 바늘처럼 비명을 지르는 시계가 내 발바닥에 고인다

제 때 제 곳으로 가지 못하는 발을 위해 나는 발목을 불태워 버린다

거대한 냉기가 모래를 헤치고 엎드려

손을 내민다

조금 더 내리고 말 눈이 아니다

바다가마우지가 바다를 통째로 삼키고 올라온다

올라오지 않는다

바다가 큰손으로 나를 구겨서 쥔다




그 의자는 죄가 없다

조현석


흰 봉투를 받던 그날 의자의 다리 부러뜨린 건 나였다

졸면서 철야근무를 하던 나를 갑자기 의자가 거부했다

책상 위 볼펜과 포스트잇 메모지, 종이컵 속의 커피

비딱하게 꽂힌 책꽂이의 책들마저 외면했으며

불안이 흘린 책상 위 커피자국이 점점 가슴에 돋았다

정녕, 의자가 나를 혹 떼듯 떨쳐버릴 것이라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나는 비난하지 않았다

늘 이른 새벽, 다른 사람보다 먼저 출근해

땀띠 나도록 붙박혀 일하던 나를

측은하게 여기던 둥근 시간들, 허벅지는 고인 물처럼 짓물고

나이 들면서 늘어난 신경질과 그 속에 그 만큼 숨은 고민들

급격히 불어난 몸무게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일요일에도 출근해 머리박고 일했고

주말에도 퇴근하지 않았던 오피스 코쿤족*인

나에게 이젠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는다

그날도 의자에 앉아 한눈조차 팔지 않았던 나,

아닌 나를 두고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고 돌다 지쳐서

슬그머니 사무실을 나와버렸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가 본 내 모습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고, 먼 길은

숨 가쁘게 굽이굽이 꺾여 있었다


새벽달 지는 지금

형광등 껌벅이는 어둠 속에서

기우뚱, 혼자 남아 일하는 의자는 죄가 없다

   * 오피스 코쿤족 : 사무실을 뜻하는 오피스(Office)와 누에고치를 의미하는 코쿤(Cocoon)의 합성어. 회사 사무실을 자기 집처럼 여기는 직장인을 뜻한다.




나의 가난은

천상병 


오늘 아침은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건.

최 옥


세상의 문 하나를 닫는 것

끝도 없이 가을이 길어지는 것


잊는다는 건 세상의 문 하나를 여는 것

끝없는 상실감에 비로소 내가 보이는 것


사랑은 허공이며 그 허공에

모든 것을 얹을 수도 있는 것


까닭 없이 혼자 울게 되는 것

단풍보다 진한 빛깔로

낙엽보다 쓸쓸하게 떨어지던 눈물

그 눈물에 젖는 건 내가 아니라 그대였다


바람 같은 목소리로 노래 불러주던 사람이여

결코 내 사람일 수 없는 그대와 나...

정녕 어떤 인연으로 세상에 왔을까


그대가 건네주던 커피 한 잔에

나의 가을 송두리째 가두었으니

아아, 언제까지나 무채색으로 남을 이 가을




비 오는 날의 커피

최란주


오후, 비는 내리고 쓸쓸히 커피를 탄다

커피 한 스푼 반에 설탕 세 스푼

(난, 단것이 좋아!)

크림 한 스푼 반까지 마저 넣고 젓는다

왼쪽으로 두 번 오른쪽으로 두 번

(습관이란 참 지겨운 스토커야, 정말!)

순간 어디서 본 듯한 사내가 잔 속으로 뛰어 들어와

맞은 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눈동자가 젖어 있다

에이스 크래커도 좀 부탁해.

사내는 주머니에서 尸甕 꺼내 불을 붙이더니

입으로 도넛 모양의 연기를 뿜어댄다

세상의 중심은 늘 비어 있어,

거기에 뛰어들려고 한사코 몸부림치지 마.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변두리야.

사내는 꼰 다리를 풀고 꾹 눌러 담배를 끄고는

황급히 잔 밖으로 사라진다

저 사내를 어느 소읍에서 보았더라?

삼거리 다방 이었던가, 애지 다방 이었던가

비 오는 날 오후의 커피는 쓰다, 아니 달다

추억의 중심에라도 좀 가까워져볼까?

조금씩 조금씩 더 안쪽으로 스푼을 돌린다




<시조>

불면 6

최상호


낮에 마신 커피 한 잔 탓이려니 달래가며

고쳐 앉아 바라보는 어둠 내린 창틀 위로

낯익은 그림자 하나 흔들리는 이름아.


입술 위에 맺혀 있는 이름 석 자 굴려보고

가슴깊이 묻어 놓은 불씨 하나 지펴보면

어느새 지귀의 혼불 영혼까지 태운다.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최승자


식은 사랑 한 짐 부려놓고

그는 세상 꿈을 폭파하기 위해

나를 잠가 놓고 떠났다

나는 도로 닫혀졌다.


비인 집에서 나는

정신이 아프고

인생이 아프다.

배고픈 저녁마다

아픈 정신은

문간에 나가 앉아,

세상 꿈이 남아 있는 한

결코 돌아오지 않을 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이 기다림을 벗고 싶어

돈 많은 애인을 얻고 싶어

따뜻한 무덤을 마련하고 싶어


천천히 취해 가는 술을 마시다

천천히 깨어 가는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 잘 닦여진 거울로 보면 내 얼굴이

죽음 이상으로

투명해 보인다.




사랑의 힘

최영미


커피를 끓여 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밤도 밤이 아니다


술잔은 향기를 모으지 못하고

종소리는 퍼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림자

나무는 나무

바람은 영원한 바람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겨울은 뿌리채 겨울

꽃은 시들 새도 없이 말라죽고

아이들은 옷을 벗지 못한다.


머리칼이 자라나고

초생달을 부풀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처녀는 창가에 앉지 않고

태양은 솜이불을 말리지 못한다.


석양이 문밖에서 서성이고

베갯머리 노래를 못 잊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미인은 늙지 않으리

여름은 감탄도 없이 시들고

아카시아는 독을 뿜는다.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녕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주지 않으리


책장의 먼지를 털어내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사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커피를 끓여 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커피 한 잔에 잠 못 든 하얀 밤

최영숙(梅善) 


회색 빛 구름이 몇 방울 눈물을 흘릴 때는 캐스팅 브랜드 커피

미세한 실바람이 혜란 사이에 순회할 때는 모카골드커피

묵향이 꽃처럼 피어나 한 점 그림이 태여 날 때는 디 카페인커피

목마른 추억이 그리움을 밀어 올릴 때는 아이스 커피

한가로운 오후 밀려온 오수가 눈꺼풀과 씨름할 때 카페오래 커피

노을의 깃털이 강물 위에 눕고

몇 마리 철새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는 비엔나 커피

노닐던 오리가 가족을 챙기고

참새들의 수다 가 잠시 숨을 고를 때는 블루 마운틴 커피

고향을 들고 온 친구 손목을 잡고

향수의 무게를 어깨에서 덜어낼 때는 카프치노 커피

어둠이 포근히 대지를 덮고 고독이 숨쉬는 거실

초침만이 근면한 고요의 시간엔 에이즐럿 커피

별빛마저 잠이든 적막이 창가에 머물고

남겨진 사랑이 식도를 타고 스며들 때는 아이리쉬 커피

지옥처럼 뜨겁고 첫 사랑처럼 달콤하며

그믐밤처럼 어두워야 한다던 한 잔의 커피

나의 잠을 쫓아내고 손을 잡는다




모카 커피를 마시며

최하림 


이마 넓은 가을이 찾아오면 

우리 마음은 둥글어진다

거년에 입다 둔 무명으로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보이지 않게 먼지들이 국화문 벽지에 쌓인다


아내가 모카 커피를 타가지고 오는 소리 들린다

모카 향내는 색다르다

아내는 향내를 조금 쓰게 타올 때도 있고

조금 달게 타올 때도 있다

내 기분에 알맞게는 하지 못한다.

아내는 내가 아니므로 그렇다


아내는 내가 아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산다

우리의 개성인 모서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부서지고

모서리들이 닳아지고 모서리들이 정다워지면서

죽음 가까이 죽음처럼 둥글게 감정이 고인다

감정이 가을잎 같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커피 맛은 쓰다


아내는 사과를 쟁반에 받쳐들고 올 때도 있다

홍옥이 가을에는 향기롭다

나는 부사가 좋을 때도 있고 배가 좋을 때도 있으련만

말을 않고 홍옥을 먹는다

홍옥 냄새가 입 안을 감돌고

붉은 빛은 혀를 감칠나게 한다 향내는 감정이 된다.



자판기

최호일 


만 원짜리 지폐를 밀어 넣으니 이른 아침이 튀어나왔다

국밥이 튀어나오고 악어가 튀어나왔다

도망을 다니는데

뚱뚱한 사랑이 튀어나왔으므로 갑자기 왼쪽이 없어졌다

서른 살 이후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고

시계가 먹통이 됐으며 핸드폰이 울렸다

가끔 감기에 걸렸지만 노란 모과를 물에 끓여 먹었다

공원의 별처럼 들국화를 오래 바라보기도 했는데

보라색 국화꽃이 잘 보이지 않는 밤이면

누군가 호주머니를 털어갔다

어제는 오백 원짜리 달빛이 드나들었다

인류에게 끝없는 사랑을 실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쇠로 된 갑옷을 입고 깊은 바다에 홀로 들어가

커피를 쏟는 꿈을 꾸기도 했다

울고 있는 것도 아닌데, 땅땅 누가 몸을 자꾸 친다

참 재미있겠다

죽음의 저 너머를 들여다보는 맛이




끝이라는 말

한명희 


더 이상은 넘겨볼 페이지가 없다는 것

아무리 동전을 쑤셔 넣어도

커피가 쏟아지지 않는다는 것

나도 모르게 세 가지 소원을

다 말해버리고 말았다는 것

그래, 그래서

등불도 없이 밤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

끝이라는 것

막 배가 떠나버린 선착장에서

오래도록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서 있다는 것

오래도록 시간표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




시간 증후군

한창옥        


꺼칠한 수염에 마음 쏠린 건 

서부영화에서 석양 등지고 후후 사라지는

찰스 브론슨의 우수 깃든 7시30분 때문이지


쉬크면도기, 하이모칫솔, 내셔날드라이기,

허브비누 향에 감전된 사각공간의 7시30분 때문이지


‘넘 추워요’ 한적한 신호등에 찍힌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로맨스가 있는 7시30분 때문이지


허한 자정 식빵 뜯어 삼키고 식은 커피 같은 침묵도

뜨겁고 때론 그늘진 황야의 무법자

휘파람소리 들리는 7시30분이 있기 때문이지


에니 콜에 이니셜 뜨는 새벽 7시30분은 전설이야


웨스턴 방랑자 말 발급 소리에 적막감이 뭉쳐오는 건

필연처럼 내게 온 7시30분 때문이지




한밤에 끓이는 커피

한혜영 


물이 끓어오르면서 주전자

늑대울음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도 저렇게 울었던 것 같습니다

갈 데 없어 서러운 늑대처럼

사랑을 잃은 그도 저렇듯

우~ 우우 소리를 냈었지요


못질해 두었던 시간의 가슴을

열어봅니다 푸르디푸른 별빛!

천 개의 얼음발로 벼랑을 타고 있습니다

아슬아슬 놓였던 발자국마다

일어서는 은빛! 비틀거리는

늑대 가슴엔 아직도 한 개의 달이

우~ 우우 핏빛입니다


미친 바람이었을 테지요

그 원통한 울림대

밑바닥까지 쑤~욱 손을 집어넣고

응고직전의 슬픔 휘휘 저어댔던


회한이 나의 五臟에서 그의 울음을

꾸역꾸역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검푸른 늑대울음과 합성된

그의 울음, 하늘도 덩달아

울컥울컥 달빛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시조>

낮달

함세린


나른한 오후 세 시 마시는 커피 한 잔


하이얀 찻잔 속에 퍼지는 님의 향기


낮달로  

뜨는 당신은  

내 전생의 님인가




아직도 나는 졸면서

허수경


철물점 모퉁이에 자귀나무 연자꽃이 붉어갑니다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를 동쳐맨 라디오에서

운다고 옛사랑이 흘러나오면 꾸깃꾸깃한 치마를

뒤뚱이며 역전다방 미스 김이 커피 배달 가는,

길을 가로질러 어느 문으로 사라지는 미스 김

마치 꿈의 문을 통과해서 당도하는 거대한 무의식의 아가리 같은

저 문

자귀나무 연자꽃이 봉긋한 반달의 옆구리를 털어

수염꽃을 피우고, 라디오는 제 몸보다 더 큰 동력으로

운다고 옛사랑이, 과격해진다고 옛사랑이

머리칼을 쥐어뜯고 앞가슴을 풀어헤치며, 그러나

졸면서 한낮의 햇살 아지랑이를 피워내는

철물점의 쇠사슬, 대못, 가시 철망 그러나

풀붓이며 대싸리 빗자루며

가두려는 억센 것이 풀려는 순한 것 사이에서 고대로 정돈되어 있는 저 무의식의 무심함!

미스 김은 나올 줄 모르고 채권 가방을 든

한 사내가 지나갑니다


전화 채권이나 수도 채권 사압니다

사압니다

운다고 옛사랑이 미친다고

옛사랑의 그림자가......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허영둘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겨울 비둘기

홍신선


이 겨울 露宿한 날개 죽지 밑에 홀쭉한 허기들을 감추고

막 뿌려준 급식 앞에 모여든 비둘기들 같다

무료급식차 배식줄에 선 결식노인들

몇몇은 벌써 둥근 간이식탁에 뿔뿔이 그러나 둘러앉아 국밥들을 먹고

몇몇은 더운 입김 내뿜으며 후식용 종이컵커피를 마신다. 


저 퇴화한 침묵의 새들이 빙 둘러와 내린

신관 주민센터 뒤쪽 구석진 하늘에는

웬 무덤처럼 구덩이 구덩이 구름들이 패여 있다.

마침내 구청 사회복지관 밥차가 떠나고

스텐그릇 쇠비린내도 국밥도 아예 없는

이번엔 저 구름구덩이 속으로 또 몇몇 비둘기 편안히 스며들까

그렇게 무의탁 구인류들 떠난 빈 식탁과 의자들에

이번엔 거기

수많은 내가 대신 둘러앉아 그러나 뿔뿔이

몇 숟갈 생각을 뒤적이다보면

아버지의 죽기 전 단지 미안하다던 외마디 귀엣말이

먹다 흘린 국밥알처럼 흩어져 으깨졌다.  


지난날 책가방에 넣고 다니던 무거운 현실을

몇 권째 벗어던진 홀가분한

나의 어깨가 이즘 척추측만으로 비스듬 자꾸 기울어져 간다,

한 쪽 치올라간 어깨엔

아직도 마지막 숙제처럼 생활이 가볍게 얹히곤 하는데.




너무 작은 처녀들

황병승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던 그 해 여름

처음으로 커피라는 검은 물을 마시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삐뚤빼뚤 엽서를 쓴다


누이가 셋이었지만 다정함을 배우지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아름다운 치마가 빨랫줄을 흔들던 시절


거울 속의 작은 발자국들을 따라 걷다보면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놓아둔 흰 자루들

자루 속의 얼굴 없는 친구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스무 살의 나에게 손가락 글씨를 쓴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새들은 무거운 음악을 만드느라 늙지도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젖은 치마가 빨랫줄을 늘어뜨리던 시절


쥐가 되지는 않았다 늘 그 모양이었을 뿐.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었고

처음으로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쥐가 되고 싶었다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 게 싫어


자루 속의 친구들을 속인 적도 상처를 준적도 없지만

부끄럼 많은 얼굴의 아이는 거울 속에서 점점 뚱뚱해지고


작은 발자국들을 지나 어느새 거울의 뒤쪽을 향해 걷다보면

계절은 겨울이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시간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둠속에서

조금 울었고 손을 씻었다




양촌다방 

황진성


난로 위 주전자 뚜껑이

속내를 감춘 욕망만큼 달그락거리고

친절한 금자 씨가

빈 잔마다 커피를 리필 해 준다

여기가 바로 양지바른 촌 동네,

양촌이라고.

양은 주전자속 물처럼

언젠가 나도

저리 들끓었던 한 때를 추억한다

코를 맞대고 탁자 아래

소곤거리는 낡은 구두들 

곰팡이 얼룩진 벽지에

쥐 오줌으로 지도를 그린 천장

깨진 유리창에

추억을 가리듯 붙여 놓은

철 지난 달력을 떼어 내니

양지 바른 한 시절

그렇게 가 버렸다고

눈발에 갇혀 버린 양촌다방

깨진 유리창 사이로

성긴 눈보라 꽃이 핀다




가랑잎 다방

황학주


그녀가 허리를 굽히자

스쿠터가 시장 쪽 길을 낸다


장날 사람들은 벌써 흩어지고

구름이 길을 쓸고 있다


늦은 시간 문 따주는 손바닥 만한 가랑잎

커피포트 하나 기술 좋게 함께 타고 간다


시골 장터 돌며 커피 파는 가랑잎 스쿠터

올해 쉰이라는 물기 가신 여자가

곰취며 산마늘 파는 조글조글한 할머님들과

자매처럼 깔깔댄다

바스락거린다


가랑잎 다방에 불 켜진다

*찻집의 고독 노래 : 김추자


좋은 시 많은 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