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명화감상

금동이 2016. 11. 19. 09:00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


요약

미국 화가. 미국으로 이민 온 미술가로,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추상표현주의 화가이다. 초기에는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렸다. 어린 시절 겪었던 비극과 고난고난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출생과 사망

1904년 추정 8월 15일 ~ 1948년 7월 21일

터키 반 코르콤 - 미국 코네티컷 셔먼



예술양식

추상표현주의 화가, 초기에는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림, 곡선의 생명체 형태, 선명한 색채

아실 고르키의 삶은 고군분투하는 예술가의 전형적인 삶이었다. 자유분방한 예술가였던 그는 격변의 시대를 겪으며 가난으로 고통 받았고 결국에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아실 고르키의 미술가로서의 행보는 성공 스토리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 온 미술가로서, 미국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후안 미로와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밝은 색채의 떠다니는 유기체 형태가 캔버스를 가득 채웠던 고르키의 서정적인 추상화는 추상표현주의 운동 초기에 등장했다. 이 작품들은 윌렘 데 쿠닝, 리 크래스너,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필립 거스턴, 바넷 뉴먼 등을 포함하는 뉴욕 화파의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터키(당시는 아르메니아였음)에서 태어난 고르키의 아버지는 1910년, 군대에 징집 당하는 것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5년에 터키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고르키는 소수인종 학살을 피해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피난을 갔다. 1919년에 어머니는 굶어죽었고, 고르키는 1년 후 미국으로 갔다. 당시 그는 겨우 열여섯 살에 불과했다. 고르키가 어린 시절 겪었던 이와 같은 비극과 고난은 나중에 그의 작품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미술가와 그의 어머니>(1926경~1942경)는 앉아 있는 어머니와 그 옆에 서 있는 젊은 고르키의 모습을 목가적인 분위기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고르키가 기억하고 있는 실제의 모습이거나 아니면 그가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맨 처음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고르키는 보스턴에 있는 디자인 뉴 스쿨에 들어가 미술을 공부를 했다. 그후 1925년에 그는 뉴욕으로 가, 이름도 아실 고르키로 바꾸고 뉴욕의 그랜드센트럴 아트 스쿨에서 계속 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그는 시간이 날 때면 뉴욕의 유명한 미술관들을 자주 들르곤 했다. 그 덕분에 그는 폴 세잔파블로 피카소, 조지 브라크, 그리고 후안 미로 같은 현대 유럽 미술가들의 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이 미술가들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는 입체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작품 방향을 수정했으며, 그 결과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다소 고독하게 작업을 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던 고르키는 뉴욕의 아방가르드 화가들 특히 스튜어트 데이비스와 존 그레이엄, 윌렘 데 쿠닝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데 쿠닝과는 1930년대 말에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느리지만 확고하게
고르키는 종종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그때마다 자주 친구들과 후원자들이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부터 그는 서서히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4년에는 필라델피아의 멜런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1935년부터 1939년까지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사업계획에 참여해서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40년대에 미술가로서 본 궤도에 오른 고르키는 휘트니 미술관과 근대 미술관 같은 뉴욕의 주요 미술관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치 정원>(1941), <폭포>(1943), <밀크위드 일 년>(1944), <간은 볏이다>(1944)와 같은 대표작들을 제작했다. 그는 버지니아와 코네티컷의 한적한 시골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떠다니는 유기적 형태들이 서로서로 한데 섞인, 거의 추상적 전원시가 되었다.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고르키를 국제적 초현실주의 운동의 일원으로 환영했으며, 영향력 있는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고르키의 작품을 호평했다. 이렇게 그는 1945년에 들어 대외적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고르키는 미술가로서는 승승장구를 했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은 전혀 그렇지 못했으며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코네티컷 작업실에 화재가 나서 그의 작품들 가운데 약 30점이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장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악재들이 겹치면서 고르키는 우울증이 생겼다.

<고통>(1947)의 어두운 붉은색과 갈색의 색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는 그의 작업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48년 6월, 고르키는 자동차 사고를 당해 목이 부러져서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의 아내마저 두 아이를 데리고 그를 떠나버렸다. 그해 7월 고르키는 목을 매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실 또는 허구?
고르키는 진실을 미화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자신의 출생연도를 몇 년씩이나 마음대로 바꿀 정도로 엉뚱했으며 또 허풍이 심했다. 그는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자신의 아르메니아 이름을 러시아 이름처럼 들리는 것으로 바꾸며, 자신이 유명한 작가인 막심 고리키의 사촌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화가의 큰 희망과 절망스러운 상황은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 있는 프랜시스 멀홀 애킬리즈 도서관의 고리키 문서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는 서류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나는 것 같다. 그것은 고리키가 휘트니 미술관에서 주최한 '현대 미국회화 연례전'에 초정을 받아,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 1937년 가을에 작성한 것이다. 이 전시는 고리키에게 있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을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출생지에 관한 질문에 고리키는 "러시아, 그루지야, 티플리스"라고 대답했는데, 아마도 자신이 태어난 터키의 작은 마을의 진짜 이름을 대는 것보다는 티플리스(현재 트빌리시)를 대는 것이 더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어디서 공부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이 다녔던 교육기관들의 이름을 모조리 대고, 그에 더해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를 언급했다. 또한 고르키는 "뉴욕에서 열린 현대 미국과 유럽 미술의 모든 중요한 전시회에 작품들을 제출했고, 그랜드센트럴 미술학교에서 7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자화자찬의 언급은 어떤 상을 받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것은 바로 "아직 받은 것이 없다"였다.

"나는 미술을 통해 나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인식, 바로 나의 세계관과 소통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실 고르키 [ARSHILE GORKY]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마로니에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