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연주가 이야기/바이올린 연주가

금동이 2007. 5. 2. 19:17




얀 쿠벨릭, Jan Kubelik (July 5, 1880 – December 5, 1940)




체코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체코와 그밖의 동구권에서도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것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였던 오타카르 세프치크(Otakar Ševčík, 1852-1934)의 체계적인 테크닉 훈련법에 힘입은 바 크다.

세프치크의 교수법은 손과 활의 민첩성을 기르기 위해 단계적인 훈련을 유도하는 것으로, 이 훈련법을 계승한 세프치크의 제자 얀 쿠벨릭은 ‘파가니니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기술적 완벽성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세프치크의 기계적인 훈련법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윤기없는 연주를 들려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전설의 거장과 황금시대의 명연주자>로 칭해지는 세대의 음악적 명인들의 연주는 어쿠스틱 녹음만으로 접할 수 있다.

얀 쿠벨릭(1880-1940)은 체코의 명교수 오타카르 셰브치크의 최고 제자중의 한 사람으로 1902년에 이미 영국의 그라모폰사의 카다로그에 등장하였다.

얀 쿠벨릭의 음악으로서의 생애란 그야말로 경탄과 질시의 명백한 이중구조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이 위대한 기교주의자가 카네기 홀에 오르면서 미국 데뷔를 선언했을 때,우선 사람들은 그가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와 너무나 다른 연주를 하는데 놀랐다.
'호리호리하고 어꺠는 좁았으며, 그래서 더욱 노인처럼 보였다'.
스물 한 살의 체코 바이올리니스트를 향한 당시의 보도기사는 그러했다.

그러나 그가 기묘하게 보이는 것과 청중들을 매혹시키는 능력은 완전히 별개였다.

파가니니의 재래를 보는듯 했던 대중은 그의 기교적인 정교함에 헤어날줄 몰랐고,그의 미국연주 여행은 그 당시 50만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개런티를 받으며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크라이슬러가 뉴욕 필하모닉의 협연자로 하루에 400달러를 받을때였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빨리 커튼뒤로 숨을수 밖에 없었던것은 불안한 시대정서를 반영이라도한 듯 세계는 새롭고 따뜻한 톤을 가진 연주자들을 원했던 것이다.

 

얀 쿠벨릭은 1880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으며,뛰어난 기교주의파 연주자였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신동으로 주목받았고,8세 되던 해 앙리 비외탕(Henry Vieuxtemps,1820~1881)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연주하면서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1892년 프라하음악원에 들어가,19세기 후반의 체코 바이올린계를 이끌었던 오타카르 세프치크(Otakar Sevick)로부터 하루 12시간 이상 연습하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세프치크는 프란츠 온드리체크와 더불어 19세기 후반의 체코 바이올린 계를 이끌었던 대부였다.

특히 그는 스스로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는 일에 실패한 후,제자들을 보다 혹독하게 단련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연습의 결과로 얀 쿠벨릭의 연주는 거의 기계적인 정교함으로 다듬어졌으며,가는 곳마다 칭송받았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1901년에는 영국을 연주여행했는데,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체코필하모니관현악단은 얀 쿠벨릭 덕분에 재정난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1902년에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미국 데뷔연주를 가졌고,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제2의 파가니니라 불리면서 파가니니의 작품을 즐겨 연주했으며, 또한 6곡 이상의 협주곡을 작곡했고,프란티셰크 드르들라(František Drdla)의 <쿠벨릭 세레나데, Kubelik Serenade> 같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작품을 많이 헌정받았다.

아들 예리님 라파엘 쿠벨릭(Jerinym Rafael Kubelik)은 체코필하모니관현악단, 시카고교향악단 등에서 활약한 지휘자였고, 딸 아니타(Anita)도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1940년 프라하에서 눈을 감았다.

 

티보의 말대로 쿠벨릭이 세프치크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불행이었다.
..."만약 그가 다른 스승의 지도를 받았더라면 그는 거장이 되었을 것이다.

쿠벨릭은 세프치크의 희생물이었다"...라고 아쉬워 했다.

쿠벨릭이 하루에 12시간씩 기를 쓰고 연습한 것은(손가락의 감각이 다 없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19세기 말엽이 파가니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거의 기계적인 정교함으로 무장한 쿠벨릭의 연주가 청중들에게 먹혀 들어간 것은,적어도 1910년경 까지는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등 새로운 톤 컬러 중심의 바이올린 주법과 구시대의 주법이 양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1915년이 되자 쿠벨릭은 은퇴를 선언했다.

더 이상 시대가 그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파가니니'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그의 왼손, 그러니까 파가니니 스타일이라 불렸던 놀라운 장식악구 처리와 플래절랫(Flageolet)의 기교는 하이페츠(Jascha Heifetz)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20세기 대가의 반열에 기꺼이 합류시켜야 한다.

파가니니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가장 짧은 시간에 폭죽처럼 천지를 밝혔던 그런 바이올리니스트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Sarasate - Zigeunerweisen / Jan Kubelik - Fonotipia in 1913

 



 *.Wieniawaski - Scherzo-Tarantelle / Jan Kubelik - Recorded in 1906

 

*.Mozart - Romance / Jan Kubelik - Recorded in 1912

 



*.Nicolò Paganini - Caprice No. 6 / Jan Kubelik - Recording Fonotipia Milano 1910


 *.Bach-Gounod - Ave Maria / Nellie Melba-soprano, Jan Kubelík-violin -  recorded in 1913, 10 / 2



*.Schumann - “Träumerei” from "Kinderszenen" No. 7" / Jan Kubelí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