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별 분류/바로크음악

금동이 2019. 3. 1. 04:00



Guillaume Dufay,Busnois,Alexander Agricola



GUILLAUME DUFAY

00:00 Veni Sancte Spiritus

03:53 Salve flos Tuscae gentis

09:07 Mirandas parit

12:42 La belle se siet

16:05 Gloria in excelsis



ANTOINE BUSNOIS

21:45 Anima mea liquefacta est

26:10 Amours nous traitte honnestement

  27:58 Anthoni usque limina



GILLES BINCHOIS

  34:00 Triste plaisir et douloureuse joye

36:15 Amours merchi

  38:34 Asperges me



ALEXANDER AGRICOLA

41:47 Manificat

51:54 Ave domina sancta Maria



Someone continue it






기욤 뒤파이, Guillaume Dufay (5 August, 1397 – 27 November, 1474)




초기 르네상스 프랑코-플레미쉬(Franco-Flemish)의 음악이론가이자 작곡가.

뒤파이는 15세기 부르고뉴악파의 최대 작곡가였다.

다른 동시대 음악가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선 대부분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뒤파이의 생애에 대해선 비교적 자세하게 자료가 남아있다.

마쇼, 란디니 등 아르스 노바의 거장이 잇따라 죽은 후, 유럽 대륙에는 천재부재로 인한 공백시대가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부르고뉴의 예술가들이었다.

미술사에서의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와 같은 역할을 뒤파이가 음악에서 눈부시게 펼쳐 보인 것이다. 

 

뒤파이는 1400년경에 오늘날 벨기에 국경에 가까운 북 프랑스의 캉브레이(Cambrai)에서 멀지 않은 시메에서 출생했다.
1409-1413년 시기에 그는 당시 안트워프까지 확대되어 있던 대사교구의 캉브레이 대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이 되었으며, 1413-1418년 사이에 성당의 음악 책임자였던 리챠드 록크빌(Richard Loqueville)에게 작곡을 사사받아 음악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스콜라 칸토룸은 리에즈의 그것과 함께 유명하였으며, 단지 사교구내뿐만 아니라 멀리 외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많은 음악인과 접하여 음악적으로 성장한 그는, 1420년경 파리를 거쳐 이탈리아로 향하였으며 1420-1426년 아드리아해 연안의 고도 페사로(Pesaro)를 지배하였던 귀족 말라테스타(Malatesta)가(家) 밑에서 일했다.

이탈리아 아르스 노바 음악에 접한 것은 이 즈음부터이다.
그 뒤 1422년까지 학위를 따기 위해 대학의 도시 볼로냐(Bologna)에서 살게 되었다.

수년간 근무한 후, 영국과의 교류가 성하게 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 즈음의 작품(예컨데,<야곱 미사곡>)에는 영국인이 즐겨 사용한 6의 화음이 연속적으로 쓰여져 있어,형성기의 그름 더듬어볼 수 있다.
1427년 학위를 따고 1428년에는 정식으로 신부의 자격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청의 멤버에 들어갔으며, 1433년까지 로마 교황청 성당의 가수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교황을 따라 로마, 피렌체, 볼로냐에서 전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알찬 음악생활을 가지게 되었다.
휴가 동안과 교황청을 물러난 후는 이탈리아, 스위스 국경에 접한 알프스를 우러러보는 아름다운 산마을 사브와 지방, 교황청의 그것을 본딴 장려한 예배당을 가진 최성기의 부르고뉴 궁전, 고향인 캉브레이 지방을 두루 여행하였고, 원숙한 기교를 구사하여 창작에 힘썼다.
1434년, 선량한 필립 공(Philip the Good)의 유명하고도 훌륭한 성가대와 그 악장으로 명성이 높은 질 뱅수아 (Gilles Binchois)를 만나기도 하였다.

1444-1455년경 까지 부르고뉴 궁정예배당의 일원이 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1452년부터 1458년까지 6년에 걸쳐 루이 사브와를 섬기게 되었으며 그는 공을 따라 프랑스를 방문하는 경험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의 음악이 프랑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세속곡의 태반이 프랑스어의 시에 의한 것임을 볼 때, 프랑스와의 관계를 간과할 수가 없다.

분명히 그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
그러나 당시의 프랑스는 부르고뉴 공국과 대립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의 백년전쟁으로 피폐해 있어 문화적으로는 볼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상태였었다,.
잔다르크가 나타니긴 하였으나 지난날의 황금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한편 부르고뉴 공국에서는 북쪽 끝에 자리잡은 안트워프가 유럽 최대의 무역항으로 발전하고, 반다이크 등에 의한 <신비의 새끼양>(완성은 1432년)과 같은 미술상의 걸작이 속속 창작되고 있었으므로 뒤파이가 부르고뉴를 활동무대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음악에 대한 영국의 깊은 관심은 샤를르공 자신이 <모테토>나 <샹송>을 남긴 것으로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뒤파이는 유명한 피렌체 대성당의 헌당식을 위해 장대한 <모테토>를 바치기도 하고, 음악논쟁의 조정자로서 초빙되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후진을 지도하면서 만년을 고향 캉브레이에서 보낸 것이었다.
뒤파이는 1458년에 고향에 다시 돌아온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고향을 떠나는 일은 없었다. 
캉브레이의 사교좌 성당 및 참사회원이 되었고, 또 많은 후진을 지도하여 내외의 존경을 받으면서 1474년 11월7일, 그곳에서 눈감았다.


그런데 그의 세속곡의 태반이 프랑스어의 시에 의한 것임을 볼 때, 프랑스와의 관계를 간과할 수가 없다.

분명히 그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
그러나 당시의 프랑스는 부르고뉴 공국과 대립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의 백년전쟁으로 피폐해 있어 문화적으로는 볼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상태였었다,.
잔다르크가 나타니긴 하였으나 지난날의 황금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한편 부르고뉴 공국에서는 북쪽 끝에 자리잡은 안트워프가 유럽 최대의 무역항으로 발전하고, 반다이크 등에 의한 <신비의 새끼양>(완성은 1432년)과 같은 미술상의 걸작이 속속 창작되고 있었으므로 뒤파이가 부르고뉴를 활동무대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음악에 대한 영국의 깊은 관심은 샤를르공 자신이 <모테토>나 <샹송>을 남신 것으로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뒤파이는 유명한 피렌체 대성당의 헌당식을 위해 장대한 <모테토>를 바치기도 하고, 음악논쟁의 조정자로서 초빙되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후진을 지도하면서 만년을 고향 캉브레이에서 보낸 것이었다.
뒤파이는 1458년에 고향에 다시 돌아온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고향을 떠나는 일은 없었다. 
캉브레이의 사교좌 성당 및 참사회원이 되었고, 또 많은 후진을 지도하여 내외의 존경을 받으면서 1474년 11월7일, 그곳에서 눈감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그가 만든 음악의 유서일 것이다.
죽음의 시기가 가까워졌음을 깨달은 뒤파이는 가장 사랑하는 성가 <아베 레지나 첼로룸, Ave Regina Coelorum>(환호하라! 하늘의 여왕이여)을 바탕으로 "죽음에 임한 당신의 뒤파이를 긍휼히 여기소서"의 가사를 붙여 4성의 <모테토>를 작곡(유서 날짜는 1474년 7월 8일), 임종 때 불러줄 것을 희망하였는데, 그해 11월 27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해가 철향(撤香)한 후 연주되었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이튿날에는 뒤파이 자신의 작품이 되는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 연주된 것도 알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만약에 남아 있다면 음악사상 최초의 <레퀴엠>이 될 정도로서 그 소실은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거장의 죽음을 애도하여 앙트안 뷔스누아, 요하네스 오케겜이 애가를 작곡한 것도 알려져 있으나 모두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작품은 마쇼처럼 1백 50여곡 정도인데, 종교곡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의 작품은 미사곡과 모테트, 프랑스어 가사를 갖는 세속노래로 분류된다.
그의 세속 노래와 찬미가는 대부분이 성부를 위한 곡이며, 큰 규모의 미사곡과 모테트는 4성부로 작곡되어 있다.
장대하고도 위엄이 가득찬 미사곡은 그의 수법이 가장 다양하게 발휘되어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8곡의 미사 중 5곡은 이른바 정선율 미사곡이다. 

세속곡의 선율을 정선율로 사용하여 정선율 미사를 작곡한 것은 아마 뒤파이가 최초로 생각된다.
즉, 미사곡은 현존하는 8곡 중 초기의 3곡은 영국의 음악을 대륙풍으로 받아드린 포부르동 기법으로 씌어진 것이지만, 후기 5곡에서는 그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그는 여기서 성가 혹은 속요의 선율을 테너에다 두고, 미사 각 장에 동일주제를 안배함으로써 전체적인 통일을 꾀하는 정선율 순환미사를 완성한 것이다.
미사곡 가운데는 뒤파이의 최대 걸작으로 여겨지는 <환호하라! 하늘의 여왕이여, Missa Ave Regina Coelorum>와 <얼굴이 창백하게 보이면, Missa Se La Face Ay Pale s>, <무장한 사람, Missa L'hommearm>, <Missa caput>, <바다의 별, Missa Ave maris Stella> 등이 특히 유명하다.
성부의 선율도 가요 식으로 아름답다.

변화에 뛰어나고 화려한 음의 향연이 펼쳐지는 그의 모테트는 종교적인 것, 귀족 저택의 축제 및 각종 행사를 위한 것 등 종류가 많으며 동형리듬 수법, 단성과 다성의 교대, 정선율, 모방 등의 수법이 쓰여져 매우 기교적이다.
이중 유명한 작품은<이제 장미꽃이 피었네, Nuper rosaum flores>는 피렌체 성당의 축성을 위한 것이었으며,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Alma Redemptoris Mater>,뒤파이가 죽을때 듣고 싶어 했다는<하늘의 여왕이여, Ave Regina Caleorum>가 있다.

그의 모테토는 그때까지 각성부가 서로 다른 가사로 불려졌던 모테투스를 단일적인 가사로 하고, 또 제재도 종교적인 것에서 많이 얻으려 하였다.
이소 리듬, 정선율법, 선다 울림의 추구 등 온갖 수법이 구사되어 있는데, 그중에도<아르마 레덴프트리스>는 널리 알려져 있다.

뒤파이는 약 90곡의 샹송을 남겼는데, 이중 2/3가 론도이다.

샹송에는 그의 기지와 매력이 넘치고 있다.
유명한 곡으로는 <나의 얼굴이 창백해지면, Se la face ay pale>이 있다.
종교곡은 조스캥 등의 선구를 이루고 있는데 대해 세속곡은 보수적이다.
어쨌든 섬세한 아름다움,고 귀한 서정을 느끼게 한다.  

 

뒤파이의 음악은 낙천적이고 친숙하기 쉬운 음악양식을 썼으며 때때로“15세기의 모차르트”로 일컫어지고 있다.
중세의 대륙 및 영국의 음악기법을 종합하여, 그 위에 새 시대의 방향을 결정짓고 있어, 이러한 의미에서 음악사상 뒤파이의 위치는 약 300년 후의 J.S 바하의 그것에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뒤파이가 음악사에 끼친 최대의 공적은 모테트 양식을 발전시켜 본격적인 폴리포니를 싹트게 한데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뒤파이의 수많은 샹송은 프랑스 중세, 르네상스 음악 연구에 있어 귀중한 음악 자료로 평가받는다.

음악학자 베셀러(Heinrich Besseler,1900-)는 음악사상 중요한 전환기에 서는 3대작곡가로서 페로티누스, 바하와 더불어 뒤파이를 손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