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고대.르네상스미술

금동이 2019. 5. 27. 09:00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


생몰년 : 1420?~1492
- 국    가 : 이탈리아


Piero della Francesca 1420?~1492. 10. 12.

이탈리아의 토스카나파(派)(Toscana Scuola) 화가.

제혁업자 겸 구두 제조업자 베네데토 데이 프란체스카(Benedetto dei Francesca)의 아들로,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주 보르고 산세폴크로(Borgo Sansepolcro)에서 태어났으며, 이 곳에서 죽었다.

생애에 관한 기록은 얼마 안 되지만, 그것으로 그의 생각과 활동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남아 있는 그림의 정확한 제작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재정적으로 부유하였기 때문에 라틴어에 정통한 교양 있는 인물로 교육받았다.

토스카나주 시에나(Siena)의 미술에 영향을 받은 그 지방의 화가에게 그림을 배운 뒤, 1435년 무렵(또는 1439년 무렵) 초기 르네상스 양식이 번성하기 시작하던 토스카나주의 주도(州都) 피렌체(Firenze)로 나왔으며, 이 곳에서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Hospital of Santa Maria Nuova)의 프레스코(fresco, 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물기가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그림)를 그리고 있었던 베네치아노(476)의 조수(助手)로 있으면서 그림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초기 교육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에서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 이탈리아의 조각가)와 루카 델라 로비아(Luca Della Robbia, 1399/1400~1482, 이탈리아의 조각가)의 조상(彫像)과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이탈리아의 건축가이며 조각가)가 설계한 건물 및 마사초(348)와 프라 안젤리코(1070)의 그림을 연구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인문주의자(人文主義者, humanist)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 이탈리아의 건축가⋅시인⋅철학자이며, 근세 건축 양식의 창시자)가 쓴 회화에 관한 논문을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베네치아노의 지도를 받아 이 대가(大家)들을 연구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베네치아노 자신도 르네상스 양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회화의 구성 요소로서 색채와 빛을 강조하는 그림을 그렸다.

두 사람의 그림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초기 작품들, 이를테면 1451년 이전에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洗禮)(Baptism of Christ)](1448~1450년, 116×168㎝, 런던 국립 미술관)⋅[성(聖) 히에로니무스(St. Jerome)](베를린 달렘 미술관)⋅[회개하고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in Penitence)](1449~1451년, 38×51㎝, 베를린 국립 미술관)⋅[성 히에로니무스와 봉헌자(奉獻者)(St. Jerome and a Donor)](1451년, 42×40㎝,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마사초의 영향도 나타나 있다.

프란체스카가 자신의 독특한 양식의 기초를 세우게 된 것은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미술과 접촉하면서부터였다.

1442년쯤 고향 산세폴크로로 돌아와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3년 뒤인 1445년 미제리코르디아 교회(Church of the Misericordia)의 제단 장식을 맡았다. 이 다폭 제단화(祭壇畫) [미제리코르디아의 성모(聖母) 마리아(Madonna della Misericordia)](273×330㎝)는 도나텔로와 마사초의 영향과 기하학적인 형태를 선호하는 특징 및 천천히 신중하게 그리는 그의 습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제단화는 1462년에 완성되었다.

외딴 시골 지방인 산세폴크로에 가끔씩 와서 머물렀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 활동에 필요불가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은 생애 동안 산세폴크로의 조용한 생활과 페라라(Ferrara)⋅우르비노(Urbino)⋅리미니(Rimini)⋅아레초(Arezzo)⋅로마 등과 같은 예술과 지성(知性)의 중심지에서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적인 생활을 누리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448년쯤 페라라에서 마르케세 레오넬로 데스테 밑에서 일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리미니에서 알베르티의 건축 설계도에 따라 지은 기념 교회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Tempio Malatestiano)에 화려하며 디자인이 문장(紋章)과 비슷한 프레스코 [성 시기스문두스 앞에서 기도하는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Sigismondo Pandolfo Malatesta Praying in Front of St. Sigismund)](1451년)와 [시기스문두스 말라테스타의 초상(Portrait of Sigismondo Pandolfo Malatesta)](1451년, 34.5×44.5㎝, 파리 루브르 미술관)을 그렸다.

아레초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성당(Basilica of San Francesco) 내실의 성가대석(聖歌隊席)에 그린 프레스코에는 그의 성숙한 양식이 나타나 있다. 바치가(家)(Bacci family)의 위촉을 받은 이 장식은 1447년에 나이가 지긋한 비치 디 로렌초(Bicci di Lorenzo, 1373~1452,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조각가)가 시작하였으나, 그가 1452년에 죽고 난 뒤 프란체스카가 곧 이 작업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성십자가(聖十字架)의 전설(Legend of the True Cross)](1452~1466년)을 이야기체로 묘사하고 있는 이 연작(聯作)은 1455년에 완성되었다.

[성십자가의 발견과 증명(Discovery and Proof of the True Cross)](747×356㎝)⋅[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만남(The Meeting of Solomon and the Queen of Sheba)](747×336㎝)⋅[숲에서 경배하는 시바 여왕(The Queen of Sheba in Adoration of the Wood)](747×336㎝)⋅[십자가의 찬미(Exaltation of the Cross)](747×390㎝)⋅[아담의 죽음(Death of Adam)](747×390㎝)⋅[콘스탄티누스 대왕의 꿈(Constantine’s Dream)](190×329㎝)⋅[헤라클레스와 호스로의 전투(Battle between Heraclius and Khosrau)](747×329㎝) 등 12장면으로 구성된 [성십자가의 전설]은 높고 큰 벽의 벽면을 3단으로 나누어, 가로를 길게 하고, 거기에 황금 전설에 의한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15세기 이탈리아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하고 명쾌한 구도와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의 절제된 사용, 차분한 분위기 등은 모두 그의 전성기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아레초의 연작과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프레스코 [출산 중의 성모(Madonna del Parto)](1457년 이후, 203×260㎝, 몬테르키 묘지 예배당<Chapel of the cemetery, Monterchi>)⋅[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 of Christ)](1460년쯤, 200×225㎝, 보르고 산세폴크로 시립 미술관)⋅[성 아우구스투스의 폴립티크(Polyptych of Saint Augustine)](1460~1470년)⋅[성녀(聖女) 막달라 마리아(St. Mary Magdalene)](아레초 성당) 등이 있다.

1454년 산세폴크로의 시민인 아뇰로 디 조반니 디 시모네 단젤로가 프란체스카에게 산아고스티노 교회(Church of Sant’Agostino)의 제단 장식을 맡겼는데, 이것은 1459년에 완성하였다. 이 제단화 가운데 남아 있는 패널은 선(線)과 빛을 사용하여 조각처럼 웅장한 인물을 창조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450년대 후반에는 우르비노 성당의 성구(聖具) 보관실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책형(磔刑)(Flagellation of Christ)](1455~1460년, 82×59.5㎝, 우르비노 마르케 국립 미술관)을 그렸는데, 이 작품의 명쾌한 원근법 구도는 그리스도를 원경(遠景)에 그리고, 세 명의 알 수 없는 인물을 전경(前景)에 부각시킨 주제의 처리와 대조적이다. 이 그림의 내용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우르비노의 산베르나르디노 교회(Church of San Bernardino)에 그린 [성모자(聖母子)와 성자들:몬테펠트로 제단화(Madonna and Child with Saints:Montefeltro Altarpiece)](1472~1474년, 170×248㎝,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서 그 백작은 무릎을 꿇은 봉헌자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이 제단화에는 백작과 성모, 아기 예수, 동행한 성자들이 웅장한 교회의 앱스(apse, 반원형의 성가대석) 앞에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아기를 낳다가 죽은 바티스타 백작 부인을 추모하여 그린 것으로 생각되며, 공간 속의 형태를 가장 세련되게 표현한 르네상스 양식의 제품 중 하나로서 북이탈리아와 베네치아의 미술에서 웅장한 종교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459년 피우스 2세(Pius Ⅱ, 1405~1464, 제249대 교황. 재위 1458~1464)의 요청에 따라 바티칸 궁전(Vatican Palace)에 프레스코(지금은 파괴되었다.)를 그리기 위하여 로마에 갔다. 그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성 루가(St. Luke)](베르가모 산타마리아 마조레 교회)는 로마에 차린 작업실의 조수들이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보다 더 큰 결실은 우르비노 공국(公國)[Duchy of Urbino, 1213~1625, 지금의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Marche) 지방 페사로에우르비노(Pesaro e Urbino)주]의 대공(大公)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1422~1482, 재위 1444~1482)와 그의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Battista Sforza)를 그린 2폭 초상화([Federico da Montefeltro], [Portraif of Battista Sforza, Duchess of Urbino], 1465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가 있다. 이 초상화는 1465년에 이루어진 그들의 결혼을 기념하여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그림은 대공의 평범한 얼굴 생김과 배경의 매혹적인 풍경을 그릴 때 시각적 사실을 중시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또한 이미 네덜란드의 회화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뒷면은 역천사(力天使, Vortues)들과 함께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는 대공 부부를 묘사하고 있다.

대공과는 오랫동안 친분을 맺었는데, 대공의 대저택은 교양 있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의 등대’로 여겨졌다.

생애의 마지막 20년을 산세폴크로에서 보냈는데, 1474~1478년에 그 지방 교회의 주문으로 그린 그림들은 없어졌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그 가운데는 조화로운 구도의 [그리스도의 탄생(Nativity)](1470년쯤, 123×124.5㎝, 런던 국립 미술관)과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주 페루자(Perugia)에 있는 서투른 구도의 제단 장식 [성자(聖者)들과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Madonna with Child and Saints)](1470년쯤, 230×338㎝, 페루자 움브리아 국립 미술관), 원래는 세니갈리아(Senigallia) 근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Church and Dominican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에 있던 [세니갈리아의 성모(Madonna di Senigallia)](1474년쯤, 53.5×67㎝, 우르비노 마르케 국립 미술관) 등이 남아 있다. [성자들과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에 들어 있는 [수태 고지(受胎告知, Ecce Ancilla Domini<Annunciation>)]는 여전히 원근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1480년 산바르톨로메오(San Bartolommeo) 자선 단체의 원장이 되었다.

노년기에는 좀더 심오함 문제를 추구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만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474~1482년 회화에 관한 논문 [회화에서의 원근법에 관하여(De prospectiva pingendi)]를 써서 후원자 우르비노 공작에게 헌정(獻呈)하였다. 주제의 범위와 체계화의 방법에서 이 책은 알베르티와 유클리드(Euclid, ?~?, B.C.300년쯤에 활약한 그리스의 수학자)를 따르고 있다. 현재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주 파르마(Parma)의 팔라티나 도서관(Bibliotheca Palatina)에 있는 이 논문은 그가 직접 손으로 쓴 것으로 그가 그린 기하학과 균형, 원근법의 문제에 관한 그림이 들어 있다.

1482년 이후에 쓴 또다른 논문 [5개의 정다면체에 관하여(De quinque corporibus regularibus)]는 완전한 비례에 대한 개념을 다루고 있는 점에서 플라톤(Plato, B.C.428/427~B.C.348/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과 피타고라스(Pythagoras, B.C.582?~B.C.497?, 고대 그리스의 종교가이며 철학자⋅수학자)를 따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가 삽화를 그린 이 논문의 원고는 바티칸 도서관(Vatican Library)에 있다.

[주판에 관하여(Del abaco)](피렌체 라우렌티아나 도서관)는 응용 수학에 관한 안내서이다. 기하학과 수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자신의 미술에서 연유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의 이론의 전개 방식은 스승 알베르티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보다 젊었던 동시대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230)의 방식과 비슷하지만, 논법의 엄밀함과 논리성은 프란체스카만의 독특한 것이다.

16세기의 자료에 따르면, 말년에 눈이 멀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1490년에 쓴 여러 편의 자필 원고가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그 뒤에 눈이 멀었을 것이다. 더욱이 1485년에 작성된 유서(遺書)에서,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몸과 마음이 건강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초기의 [미제리코르디아의 성모 마리아]에서 만년(晩年)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항상 독자적인 높은 풍격을 보였고, 원근법의 자유 자재한 구사(驅使), 맑은 색채, 명석한 빛의 처리, 위엄이 있고 당당해 보이는 인물의 표현 등으로 그 시기에 획기적인 양식을 초래하였다.

그의 문하(門下)에서는 멜로초 다 포를리(387)⋅시뇨렐리(683)⋅페루지노(1036) 등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되었지만, 그의 본보기를 따르지는 않았다.

1497년 ‘우리 시대의 회화와 건축에 관한 대가’로 평가되었으며, 화가이며 건축가⋅전기(傳記) 작가인 바사리(449)는 두 세대가 지난 뒤에 그를 높이 칭찬하였다.

그의 차분하고 질서 정연한 원근법과 절제된 미술은 동시대의 뛰어난 피렌체파(派)(Scuola Fiorentina) 화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과학적인 업적으로 말미암아 큰 명성을 누렸고, 다른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대(當代) 일류의 이론가로 알려졌는데, 이 밖에 지은 책으로 [투시화법(透視畫法)에 대하여] 등이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친교가 있던 파치올리(Luca Pacioli, 1445?~1510?, 이탈리아의 수학자이며 프란체스코회 수사)는 그 방면에서 그의 제자였다.

20세기에 들어와 그의 생애는 재조명되고 그의 위치는 재평가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인정받았고, 그의 미술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이면서도 시적(詩的)인 특질이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