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고대.르네상스미술

금동이 2019. 6. 3. 09:00

판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





플랑드르(Flandre)의 화가.

문헌에는 구스의 고향이 한 곳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플랑드르파(派)(Flemish School)의 본거지인 동(東)플랑드르(East Flandre) 주의 주도(州都) 겐트[Gent, 플라망 어(語)(Flamand language)로는 헨트(Ghent)]·벨기에 북부 안트베르펜(Antwerpen) 주의 주도 안트베르펜[영어로는 앤트워프(Antwerp), 프랑스 어로는 앙베르(Anvers)]·북서부 서(西)플랑드르(West Flandre) 주의 주도 브뤼헤[Brugge, 또는 브뤼주(Bruges)라고도 한다.]·네덜란드 남서부 조이트홀란트(Zuid Holland) 주의 대학 도시 레이던(Leiden) 등 여러 곳으로 언급되어 있다.

1467년(27세) 겐트 화가 조합(Guild of St. Luke in Gent)에 등록하기 전까지는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1468년(28세) 브뤼헤에서 열린 샤를 공작[Charles the Bold, 1433~1477,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의 절대 체제에 대항하였던 무인(武人). 호담공(豪膽公)]과 영국 요크 가(家) (House of York, 1461~1485)의 에드워드 4세(Edward Ⅳ, 1442~1483, 잉글랜드의 왕. 재위 1461~1483)의 누이동생 마거릿(Margaret of York, 1446~1503)과의 결혼식, 1473년(33세) 부르고뉴 공국(公國)(Duchy of Burgundy, 1032~1477)의 선량공(善良公) 필리프(Philip the Good, 1396~1467, Philip Ⅲ, Duke of Burgundy, 재위 1419 ~1467)의 유해(遺骸)를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지방 코트도르(Cote-d’Or) 주의 주도 디종(Dijon)으로 옮기는 의식(儀式) 등과 같은 대규모 행사에 장식품(문장이 그려진 방패, 행렬에서 쓸 깃대 등)을 제공하였다.

1475년(35세)까지 겐트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시 정부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았고, 그 뒤에는 주로 브뤼헤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렸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북방과의 교량 역할을 다하였다.

1474년(34세)에는 조합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듬해 화가로서 절정에 올랐을 때 우울증에 걸려 있었던 듯하며, 1478년(38세) 브뤼셀(Brussel) 근처에 있는 로데 클로스테르 수도원(修道院)(Priory of Roode Kloster)에 들어간 뒤 정신병의 발작에 시달리면서도 제작을 계속하였다. 기이하면서도 우울한 자신의 천재성을 심오하지만 정신적으로 불안한 경향이 엿보이는 종교화에서 잘 발휘하였다.

1481년(41세)에는 우울증이 신경 쇠약으로 발전하여 자살을 꾀하였다. 수사(修士) 오퓌이스(Gaspar Ofhuys, 그는 구스가 누린 몇 가지 특권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던 듯하다.)가 로데 클로스테르 수도원에서 보낸 구스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을 기록하여 둔 자료가 지금도 남아 있다.

<원죄(原罪, Original Sin)>(1475년 이후) 등의 걸작을 남겼지만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끝내 발광하여 죽었다.

초기의 실험적인 그림 양식을 보면 그가 15세기 전반에 활동한 네덜란드의 주요 대가(大家)들을 깊이 연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타락(Fall of Man)>(2폭, 1467년쯤 착수, 빈 미술사 박물관)에는 에이크(764)가 1432년에 그린 <겐트 제단화(Ghent Altarpiece)>의 영향이 나타나 있으며, <비탄(悲嘆, Lamentation)>은 플랑드르파의 거장(巨匠) 바이덴(452)을 연상시킨다. <그리스도의 탄생(Nativity)>(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박물관)과 <동방 박사들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삼왕 예배(三王禮拜)>라고도 번역한다. 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박물관]를 비교해 보면 후기 작품이 발전해 간 방향을 알 수 있다.

기묘할 만큼 길쭉한 패널에 그린 후기 작품 <그리스도의 탄생>은 패널의 형태까지도 보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며, 커튼 사이로 드러나 있는 불안정하게 낮은 무대 위에서 흥분으로 가득 찬 초자연적인 연극이 펼쳐지고 있다. 합리적인 효과보다 감정의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하여 공간과 색채를 이런 식으로 이용한 것이 후기 작품의 특징이다. <동방 박사들의 경배>는 공간 배열이 합리적이고 구도가 차분하며, 색채가 은은한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특징은 <스코틀랜드 왕가(王家)(Royal Family of Scotland)>(1478~1479,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이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에서 빌려 와 전시하고 있다.)와 오르간 덮개용으로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에드워드 본킬의 경배를 받는 성 삼위 일체(Holy Trinity adored by Sir Edward Bonkil)>에도 나타나 있고, 죽기 직전에 그린 <성모(聖母)의 죽음(Death of the Virgin)>(브뤼헤 시립 미술관)에서 그 절정을 보여 준다. <성모의 죽음>의 초자연적인 색채는 보는 사람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며, 불합리하게 설정된 공간에 자리잡은 사도(使徒)의 얼굴에 나타난 억눌린 슬픔이 이 작품의 통렬함을 더욱 강화해 준다. 마니에리스모(manierismo)에 가까운 그의 예술과 고뇌에 찬 개성은 20세기에 특히 공감을 얻었다.

그의 작품으로 확실하게 입증된 유일한 대표작으로 흔히 <포르티나리 제단화(祭壇?)(Portinari Altarpiece)> (1474쯤~1476,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라고 부르는 3폭 제단화, 중앙 패널에는 <양치기들의 경배(Adoration of the Shepherds)>(브뤼헤 그뢰닝게 미술관)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브뤼헤에 있던 메디치 가(Medici family,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귀족 집안)의 은행 대리인(代理人) 톰마소 포르티나리(Tommaso Portinari, 1424?~1501)가 주문하여 그린 그리스도 탄생도(誕生圖)인데, 작품의 양쪽에 포르티나리 가족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전경(前景)의 화초에 대한 자연 관찰과 양치기의 소박한 정감이 뛰어났다. 이 작품은 북유럽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의 초기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나지만, 이러한 특질보다 정신적 내용을 더 중요하게 다루었고 세부적인 정물(靜物)을 상징적 의도로 사용하였다. 특히 외경심(畏敬心)이 드러나 있는 양치기의 얼굴과 포르티나리의 아이들은 인물 묘사에서 유례 없는 심리적 통찰을 보여 준다. 플랑드르 회화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이 그림은 완성되자마자 피렌체(Firenze)로 옮겨졌으며, 풍부한 색채와 주의 깊은 세부 묘사로 많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플랑드르 회화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받으면서도 형태감·율동감·빛과 색채의 생기 있는 처리에 새로운 면모를 보였고, 날카로운 관찰과 사실(寫實) 묘사의 관점에서 15세기 최대의 강렬한 주관적 표현의 화가이다.

바이덴·보우츠(522)·에이크 형제(763, 764)의 계열에 속하는 섬세한 선묘 예술(線描藝術)이며, 독일의 화가이며 판화가(版?家)·미술 이론가인 뒤러(160)는 ‘구스와 바이덴이야말로 거장’이라고 격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