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고대.르네상스미술

금동이 2019. 7. 2. 09:00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 -


- 생몰년 : 1399/1400?~1464
- 국    가 : 플랑드르


Rogier van der Weyden 1399/1400?~1464. 6. 18.

플랑드르(Flandre)의 화가.

칼 만드는 장인(匠人)의 아들로, 벨기에 남서부 에노(Hainaut)주 투르네(Tournai)에서 태어났으며, 수도(首都) 브뤼셀(Brussel)에서 죽었다.

신진 계급인 상인(商人)과 공인(工人) 계급의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26년 브뤼셀 태생의 엘리자베트 호파르트(Elizabeth Goffaert)와 결혼하였다.

대학 교육까지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1426년 투르네에서 ‘메스트르 로히르 드 라 파스튀르(Maistre Rogier de la Pasteur)’라는 선생 예우를 받았고, 그 이듬해 약간 늦은 나이인 27세로 화가 생활을 시작한 것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1427년 3월 5일 투르네 화가 조합(The Guild of St. Luke in Tournai)의 장로(長老)이며 화가인 캉팽(904)의 화실(畫室)에 도제(徒弟)로 등록하여 5년 동안 그의 화실에서 일하였으며, 여기에서 초기 그림의 특징인 장황하고 세밀한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를 배웠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의 화풍(畫風)은 너무 비슷하여 지금도 일부 작품에 대해서는 제작자를 놓고 미술품 감정가(鑑定家)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캉팽(그는 바이덴과 마찬가지로 그림에 서명하지 않았다.)의 것으로 알려진 모든 그림이 실제로는 바이덴의 젊은 시절에 그린 것이라는 새로운 이론은 타당성이 없다. 캉팽의 화실에서 함께 일한 동료 자크 다레(Jacques Daret, 1404?~1470?, 네덜란드의 화가)와 바이덴의 작품으로 확인된 그림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면, 캉팽의 기본적인 작품을 재확인할 수 있고 이런 작품의 화풍과 바이덴의 화풍을 구별할 수도 있다.

캉팽 이외에 벨기에 북서부 서(西)플랑드르주의 주도(州都) 브뤼헤[Brugge, 또는 브뤼주(Bruges)라고도 한다.] 출신의 화가 에이크(765)에게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동정녀(童貞女) 마리아를 그리는 성 루가(St. Luke Painting the Virgin)](1435년쯤, 보스턴 미술관)를 비롯한 초기 작품들은 구성 요소에서 대담한 캉팽의 화풍을 보여 주지만, 우아하고 섬세한 면에서는 에이크의 영향을 받았다.

캉팽의 도제살이를 하던 1427년 당시 투르네를 여행한 에이크를 만난 것이 분명하지만, 에이크의 화풍을 철저히 알게 된 것은 1432~1435년 브뤼헤에서 살던 때였을 가능성이 크다.

1432년 8월 1일에 투르네 화가 조합의 조합원으로서 독립된 장인이 되었고, 1435년 이후에는 브뤼셀에 정착하였다.

1436년 브뤼셀의 공식 화가로 임명되었는데, 이 때부터 1464년까지 브뤼셀 화가 조합(The Guild of St. Luke in Brussel)의 조합원으로 등록되어 있었고, 또한 이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플랑드르어로 번역하여 ‘반 데르 바이덴’이라고 썼다. 고향 투르네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지만, 평생 동안 브뤼셀에서 살았다.

브뤼셀 시청사(市廳舍)의 ‘황금의 방’에 정의로운 행정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건을 벽화로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아 [정의도(正義圖)]를 그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같은 무렵인 1435~1440년쯤 브라반트 공국(公國)[Duchy of Brabant, 959~1795, 지금의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브라반트(Noord Brabant)주와 벨기에 중부 브라반트주] 루뱅(Louvain)의 궁술가(弓術家) 조합 예배당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The Descent from the Cross)](1435~1440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를 완성하였다. 이 그림에서는 배경을 협소한 공감으로 축소하고 감정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종교적 성격은 1440년대에 그린 쌍둥이 제단화(祭壇畫) [그라나다의 제단화(Granada Altarpiece)](1435~1440년,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 미술관)⋅[미라플로레스의 제단화(Miraflores Altarpiece)](1435~144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와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코트도르(Côte–d’Or)주 본(Beaune)의 오텔 디외 병원(Hôtel–Dieu, 1443년에 건립)에 있는 [최후의 심판 제단화(Last Judgment Polyptych)](1450년쯤) 같은 작품에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이 그림들의 배경은 간소하고 인물은 섬세한 고딕풍으로, 행동은 조용하면서도 매우 표현적이다. 그의 예술이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중세의 관습으로 되돌아간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제적 명성을 얻고 부르고뉴 공국(公國)(Principality of Burgundy) 필리프공(Philippe公)과 공국의 마지막 재상(宰相)이었던 롤랭(Nicolas Rolin, 1376~1462) 같은 귀족들의 주문이 차츰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무렵인 1440년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신학자 켐피스(Thomas À Kempis, 1379/1380~1471, 독일의 신비 사상가이며 수도사)의 글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신학자의 ‘실제적 신비주의(practical mysticism)’는 그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성모(聖母) 마리아와 그리스도 및 성자(聖者)들의 인생에서 일어난 삽화적 사건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감정 이입적 반응을 강조하였다.

성스러운 안식년(安息年)인 1450년 로마를 여행하였는데, 어쩌면 본에 있는 오텔 디외 병원에 [최후의 심판 제단화]를 설치하러 갔던 길에 로마까지 들렀거나, 그의 4명의 자녀 중 딸 마르가레트(Margaret)가 그 해에 죽었기 때문에 딸의 죄를 사면(赦免)받으러 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환영을 받았는데, 인문주의자 바르톨로메오 파치오(Bartolomeo Fazio, 1410 이전~1457)와 쿠사(Cusa) 출신의 신학자 니콜라스(Nicholas, 1401~1464)가 그에게 바친 찬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페라라(Ferrara)의 유력한 에스테가(家)(House of Este)와 피렌체의 메디치가(家)(Medici family,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귀족 집안)에서 그에게 그림을 주문하였다.

프란체스코 데스테[Francesco d’Este, 1430~1475, 원래는 페라라의 영주 레오넬로 데스테(Leonello d’Este)로 추측된다.]의 초상화(1460년, 22.2×31.8㎝,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를 그렸고, [성모와 아기 예수(Virgin and Child)](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는 메디치가의 문장(紋章)과 수호 성인이 그려져 있다.

로마를 여행하는 동안 이탈리아 대가(大家)에게 유화(油畫)를 가르쳤는데, 유화는 당시 플랑드르 화가들이 특히 능숙하게 구사(驅使)하던 기법이었다. 또한 이탈리아 예술을 직접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주로 보수적인 화가이며 자기와 비슷한 중세적 화풍을 가진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832)와 프라 안젤리코(1070)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좀더 진보적인 경향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북유럽으로 돌아온 직후인 1451~1455년에 제작한 [칠품성사(七品聖事) 3폭 제단화(Seven Sacraments Triptych)](1451~1455년쯤,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관)⋅[성 요한 제단화(St. John Altarpiece)](1455년쯤, 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박물관)에서는 활기찬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으로 그 특유의 엄격함이 약간 완화되었고, 이들은 하나의 관점으로 통일되어 왔다. 그러나 표현 양식이 이처럼 풍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구상은 여전히 인습적이어서 인물을 그림의 전면에 배치하여 그들을 대상으로 주변 환경과 격리시켰다.

생애의 마지막 15년 동안 국제적인 화가이며 모범적인 시민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았다. 많은 그림 주문을 받았으며, 자신의 넓은 작업실에서 소속된 화가들의 도움으로 이 주문을 소화하였다. 아들 페테르(Peter)와 그의 후임으로 브뤼셀 공식 화가가 된 브랑크 반 데르 스토크트(Vrancke van der Stockt, ?~1495)도 이 작업실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죽기 전부터 자기와 직접 관련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쳤다. 표현력이 풍부하지만 덜 복잡한 기법을 지닌 그의 화풍이 끼친 영향은 캉팽과 에이크의 영향을 능가하였다.

다음 세대의 플랑드르 화가들, 즉 구스(47)⋅보우츠(523)⋅크리스투스(963), 그의 화실(畫室)에서 그림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는 멤링(388)은 모두 그의 방식에 의존하였다. 16세기에 마사이스(347)와 오를레이(782)는 바이덴의 개념을 약간 변형하여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였다.

그의 예술은 플랑드르 양식을 유럽 전역에 전달하는 매개 구실을 하였고, 15세기 후반에 그의 영향은 프랑스와 독일 및 에스파냐 회화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어떤 그림에도 서명(署名)하거나 제작 연도(年度)를 기록하지 않았다.

플랑드르의 바로크(Baroque) 화가 반 다이크(462)에 버금가는 화가로, 북유럽의 같은 시대의 예술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북방 고딕 회화는 그에 의하여 활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주제를 통하여 정신적⋅상징적인 내용을 집중적으로 추구한 점, 명석한 윤곽과 조각적 효과, 엄정한 콤퍼지션을 중시한 점에서 반 다이크와 다른 내면적 표현 세계에 도달하였다.

16세기 말의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화가이며 작가인 만데르(367)는 그의 저서 [화가의 생애(Het Schilderboek<Book of Painters>)](1603년)에서 바이덴을 두 명으로 잘못 기술하였고 19세기 중엽까지는 이미 그의 명성뿐 아니라 예술도 거의 잊혀져 있었다. 지난 세기 동안 학자들이 바이덴에 관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덕분에 그의 작품을 재구성하고 15세기 플랑드르의 중요한 대가로 그의 명성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작품은 대부분 종교화를 많이 그렸는데, 비종교적인 세속적인 제재(題材)의 회화도 그렸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없으며, 정감 넘치는 섬세한 초상화도 그렸다고 전한다.

이 밖의 작품으로 [니셰의 성모자(聖母子)(Madonna and Child in a Niche)](1432년쯤, 빈 미술사 박물관, 1435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성모 마리아의 방문(Visitation of the Virgin)](1435년쯤, 라이프치히 미술관)⋅[수태 고지(受胎告知, Ecce Ancilla Domini<Annunciation>)](1435년쯤, 파리 루브르 미술관)⋅[성모 마리아 제단화(The Altarpiece of the Virgin)](1435~1440년, 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박물관)⋅[무덤에서의 강하(降下)(Deposition in the Tomb)](1450년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브라크 3폭 제단화(Braque Triptych)](1450년쯤, 파리 루브르 미술관)⋅[성모자와 네 성자(聖者)(Madonna and Child with Four Saints)](1450년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슈테델 미술원 겸 시립 미술관)⋅[성녀(聖女) 막달라 마리아(St. Mary Magdalene)](1452년)⋅[블라들린의 제단화(Bladelin Altarpiece)](1455년쯤, 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박물관)⋅[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Crucifixion)](1455년쯤, 필라델피아 미술관)⋅[콜룸바의 제단화(Columba Altarpiece)](1460~1464년, 뮌헨 국립 고대 미술관)⋅[에노의 연대기(年代記)를 받는 필립](브뤼셀 왕립 미술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