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고대.르네상스미술

금동이 2019. 7. 25. 09:00

매너리즘 미술





 오늘에는 매너리즘이라는 말은 후기 르네상스의 예술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인다. 이 말의 뜻은 매혹적이고, 우아한, 이라는 뜻이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자리로서 ‘미켈란젤로 양식’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르네상스를 규정짓는 규정된 미의 개념이 아니고, 미 그 자체로 아름다음을 뜻하게 되었다.


 1520년대가 되면 르네상스 미술은 한결 더 원숙하게 무르익는다. 그 정점에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이 우뚝 서 있었다.

로마와 피렌체에서 활동하는 젊은 화가들이 이들의 명성에 사로잡혀서 양식(style)을 타성적으로 이어받으므로 그림은 기교적으로 흘렀다. 그림에 형식주의에 매몰되다보니 좀 매마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주관적이고, 환상적인 면도 지니게 되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매너리즘보다 바로크 미술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문학에서 중세이후의 양식으로 “사회적 신분에 따른 교양있는 행동”이라고 하듯이, 매너리즘은 바자리의 “우미론”이 중심 이론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인 후기 바로크 와 신고젖주의 시대가 오면 매너리즘은 다시 비난을 받는다. 꾸미고, 과장된 뜻이 되고, 심지어는 기괴한, 이상한 이르는 뜻으로 쓰였다.


 19세기가 되면 매너리즘에 대한 시각을 재정립하였다. 1520~1600년 사이에 최성기의 르네상스가 쇠퇴한다. 이 시기를 매너리즘이라 말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의 이념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사상의 흐름이 매너리즘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이들의 작품에는 화가의 내적 통찰력이 지녔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면서 미술사에서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졌다. 이제는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을 시발점으로 삼기도 한다.

이 시대의 미술의 중심지였던 베니스와 피렌체가 매너리즘의 미술 중심지 역할을 한다. 베니스는 무역도시로서 무역상이 중심인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종교적 세계주의를 부르짖고 있는 로마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들은 진보적이고, 세속적이고, 활동적이었다. 따라서 유화를 도입하여 화려한 색채로 표현했다.(기후상 습기가 많아서 프레스코화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도 그려지고 있었지만 세속적인 주제의 그림도 유행하였다. 단지 시각적 즐거움만 주기 위한 그림인 풍경화가 하나의 장르로 독립한 것도 베니스에서 였다. 유화의 사용은 화면이 화려해지면서 광채를 나게 하는 특징을 만들어 내었다. 이 특징이 베니스 회화의 특징이 되면서 매너리즘으로 기지개를 켰다.


매너리즘 양식의 미술 표현을 요약해보면

1) 세련되고, 우아하고, 기묘함이 우러난다.

2) 공식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서 뒤틀리고, 변형된 표현 방법이다.

3) 비합리적인 공간과, 비례에 맞지 않는 인체 표현. 과장된 자셍, 이상한 모습을 한다.


1)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1520~1600) 과도기에 유행했던 미술양식이다.

2) 일반적으로 형식주의, 기교주의에 틀에 박힌 자세와 경향을 말하면, 신성미나 독창성이

떨어진다.

3) 사자져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이다. 즉 절정기의 라팔엘이나 미켈란젤로를 모방한다.

이것은 퇴화를 의미한다.

4) 최근에는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고딕 양식으로 되돌아 간 것이라고 한다.

5) 엘 그레코를 정점에 두고 표현주의와 접속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6) 바사리 이론에 근거하여 제작한 동 시대의 미술에 한정하려는 주장도 있다.


대표적인 화가들


베네치아

1) 지오바니 벨리니(베니스 화파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화가이다.)

2) 지오르지오네

3) 티치아노

4) 틴토레토

5) 로렌죠 로토


피렌체

1) 로 피오렌치노

2) 폰토르모

3) 파르미지아니도

4) 브론치노

5) 귀리오 로마노

6) 프리마티치오

7) 코렛지오

8) 바사리

1400~1600


1403 후스의 종교 개혁 운동(프라하)

1434 메디치가의 피렌체 지배

1453 동로마 제국의 멸망

1479 스페인왕국의 통일

1492 콜롬브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1494 프랑스군(샤를8세)의 이태리 침입

1517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

1519 레오나르드의 죽음

1527 레오10세 속죄부. 피렌체서 메디치가 추방

1532 칼빈의 종교개혁운동(청교주의, 자본주의)

1534 로욜라의 예수회 창립

1545(~60) 트렌트 종교회의(3회)

1550~ 왕권의 강화. -- 절대왕정의 태동

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 스페인의 필리페 2세, 영국 에리자베스 1세

1568 네델란드의 독립운동

1595 영국 동인도 회사

1600 네델란드의 동인도 회사.

---> 절대왕정 확립, 부르주아지 계급의 등장

 

           이 시대의 특징

1) 과학 혁명 --- 새로운 연구로 우월한 방법이 개발된다.

2) 예술가 --- 새로운 방법으로 새 이론을 주장한다.(저술을 통해서)

            알베르티, 바사리-- 자연을 모방할 책무가 있다고 주장

3) 구매자의 변화

          교회 --> 왕궁 --> 귀족 --> 부르주아지(시민)

4) 재료의 변화 ---유화

          인물화, 풍경화를 그리기가 좋다. (수정이 싶다.)

          이동성이 좋다.(캔버스에 소형 그림)--> 가정으로 파고들기 싶다.

5) 그림의 주제

            종교적 인물(성인, 성녀) ---> 세속적 인물 (누드화, 초상화, 일상 생활화)

          매너리즘의 사회 배경(아놀드 하우저 요약)

 

 1520년이 지나면 이태리에서 미술의 양식이 고전주의를 이탈하는 경향을 보인다. 고전주의에는 ‘안정, 이상’을 추구하는 심리가 깔려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안정을 추구하는 고전주의가 유행을 하였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그 이유로는

 

1)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대양의 항로가 개발되므로 이태리는 경제적 쇠퇴를 맞이한다.

2) 종교개혁으로 교회의 권위가 동요하므로 미술의 패트론으로

     새로운 간섭을 하게 된다.

3) 프랑스와 스페인이 침입하므로 이태리는 새로운 위험에 직면

4) 1527년에 교황권에 도전하여 칼5세는 로마에서 대약탈을 자

         행한다. 로마시민들은 종말적인 분위기를 체험한다.

--> 따라서 안정이 바탕이 고전주의 미술은 종말론적인 신비주의로 흘러간다.


 르네상스에 일어난 과학혁명이 원근법과 비례를 따지는 외면적인 것이라면, 신비주의는 내면적인 정신세계를 추구한다. 따라서 외면의 양식을 따지는 원근법이나 비례는 무시한다. 따라서 매너리즘 양식의 그림은 오늘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이상한 모습을 띄게 된다.


 이 시대는 근대자본주의가 형성된 시기이다. 대규모 자본을 소유한 자본주가 등장하고, 산업의 과학화가 일어나면서 도시화가 빠르게 일어난다. 농촌은 쇠퇴하고, 농민은 도시로 모여들면서 농민들이 불만이 고조되어 농민전쟁이 일어난다,(특히 독일엣서) 더욱이 종교개혁운동과 겹쳐지면서 사회는 심한 혼란으로 빠져든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카톨릭은 자체의 정화운동을 하면서 보수화되어간다. 트렌트 종교회의로 카톨릭의 보수화는 마무리된다.


 미술에서는 성당을 화려하게 꾸며서 신자들에게 매력적인 전당으로 보이게 한다. 반면에 신교에서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므로 고객을 잃은 미술가는 새로운 패트런으로 자본가, 관리, 귀족을 찾아나서서 그에 적합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구교에서는 교회예술을 성직자들이 감독하면서 종교적으로 불결한 나체화와 이교의 내용을 문제삼아 화가와 마찰을 일으킨다.(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르네상스가 자연의 모방을 못토로 삼았다면 매너리즘은 정신성이라는 명목으로 새로운 창조를 주장하였다.


 이 시대의 또 하나 배경이라면 아카데미즘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예술가들이 학문에 관여하므로 신분상승을 노리고 길드의 장인 신분에서 벗어나려 하였다.(장인은 단순한 기능공이다.)

아카데미가 길드의 도제 제도를 떠맡아서 교육기관이 되면서 엄격한 규율과 규정화된 교육 방법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규범과 규격화는 오히려 반진보적인 경향을 띄게 되어 미술가의 창작의욕을 꺾어버리는 역할도 하였다.


 1561년에 바자리가 피렌체에서 설립한 아카데미아 델 디제요가 최초의 상설 아카데미이다. 1593년 로마에서 설립한 루까 아카데미는 일정한 장소에서 정해진 교과를 가르치는 최초의 아카데미이다. 이것은 이후에 설립되는 미술학교이 기본이 되었다.


 파리 아카데미의 교육방법은 회원이 강연한 내용을 인쇄를 하여 일반인에게도 배포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파리 아카데미의 강연회(conference)로서 이후 강연회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아카데미즘의 규범화된 교육과정이 오히려 예술을 경직하게 하여 창의력을 방해한 폐단도 있었다.

 

          1) 지오르지오네(Giorgione 1478?~1510)

화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일 것이라고 한다. 티치아노가 그의 밑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그림에는 유사성이 많다. 지오르지오네가 죽고 난 뒤에 미완성 작품을 티치아노가 완성한 것도 많다고 한다. (드레스텐의 잠자는 비너스) 그의 작품이래야 모두 5점 정도라고 한다. 그 중에 태풍이 대표작이다.


    태풍(템페스트)

1) 그리스 고전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나 그림의 의미는 모른다.

2) 군인, 누드의 여인, 풍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3) 그림의 중심이 인물 --> 풍경으로 옮겨져 있다.

     * 이 사실은 서양 미술사에서 원근법의 발견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한다.

4) 풍경화에서 환상적인 표현을 하였다. (레오나르드의 영향이 아닐까?)

    자연적인 모습이거나, 종교적인 상징을 띈 풍경도 아니다. 화가의 눈에 비친 것을

    환상적인 풍경으로 표현하였다.

===> 객관적인 미이론에서 주관적인 미이론으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다.

5)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풍경도 아니다.(이것은 티치아노가 완성했다.)


          성 조지와 성 로흐

풍경으로 배경으로 부상을 당한 성 로흐는 앉아있고, 성 조지는 뒤편에서 말을 타고 용

과 싸우고 있다.

이 그림은 로맨틱한 모험을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들은 모두 레오나르드, 미켈란젤로, 라파엘의 영향을 받았다.

 

             티치아노 ---1487~1576

1) 베니스의 북쪽 알프스 산록의 작은 마을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티어났다.

2) 10세 때 베니스로 오다.

3)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이고, 조르즈지오네에게도 배웠다.

4) 베니스 화풍인 빛과 색채에 매료되어 습득하였다.

5) 유화물감을 선호--캔버스에 유화로 그리는 작은 그림은 티치아노가 확립했다.

    작은 방에 걸기가 좋다. --- 주문자의 취향에 맞추었다.

6) 그림의 주제가 세속적인 것을 많이 그렸다.(조르즈지오네의 영향)

     드레스텐의 잠자는 비너스 등

7) 우아하고 멋진 모습보다. 역동적이고, 강건하고, 극적인 장면의 묘사를 좋아하였다.

8) 풍경화 -- 조르즈지오네의 영향으로 환상적이고,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을 하였다.

9) 출세작 -- 성모승천(1516~18)

      탁월한 색채감, 율동감, 광채로 명성을 얻었다. 당시의 평론가는 미켈란젤로의 장대

      함, 라파엘의 고요한 즐거움, 자연의 진정한 색채를 아주 잘 이용한 작품이다. 라고 함

* 하느님, 성모, 성자 삼 단으로 그렸다.

--> 성모 승천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다.

10) 친구이고 시인인 아리오스트가 적극적으로 선전글을 써 주어서 명성이 알려짐

11)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적극 후원하였다.

12) 후기로 접어들면서 붓이 거칠어지고, 표현이 정밀하지 않고 느슨해진다. 윤곽선도

     희미해진다. 미켈란젤로의 조각같은 그림에서 이탈하므로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이

    라는 회화사 이론에 맞아들어간다.

==> 그래서 미완성 작품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13) 말년에는 후원자인 카를5세의 죽음, 시인인 친구의 죽음, 동생과 딸의 죽음으로 고뇌하

     면서 우울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14) 1576년 흑사병으로 사망

     대표적인 그림 --- 박카스와 아드리아네

사실적인 묘사를 한 그림으로, 선명하고, 밝고, 화려한 색상과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그러나 전체의 분위기는 상상에 의한 것이다. 쇼맨십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림으로서, 고객의 입맛에 맞도록 그려서 팔리는 그림을 그렸다.

----> 후대의 화가들이 상투적으로 모방을 많이 했다. 푸생도 모방작을 그렸다.

===> 밑그림은 조금 그리고 물감으로 붓질을 여러번 하여 그림을 완성했으므로 선으로 형상을 맞추고 색상으로 형상에 딱 어울리게 표현하는 피렌체 화가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 바너스와 아도니스, 다나에=== 필리페 2세를 위해서 그려준 그림으로 아주 관능적이다.

** 만년에는 빛을 적극적으로 빛으로 형태와 색상을 결정하게 하였다. --> 결과적으로 형태도, 선도 불분명해졌다. 이런 형태의 그림은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 그의 그림을 결정한 것은 "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하면 고객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아 낼 수 있을까 하는 방법으로 그렸다. 이것도 후대 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목자와 성가족---목자가 애기에게 경배를 드린다. 왼편의 소와 말로서 마굿간을 나타낸다. 먼 곳에 아

침 햇살이 비치므로 빛과 어둠을 대비하였다.

성처녀와 애기 예수--- 거친 붓질로 형상화 했고, 빛이 애기의 얼굴에 비치도록 하였다.

찰스 5세(칼5세)가 말을 타고 있는 상--- 하나의 전형이 되어서 나폴레옹시대까지 이어진다. 

 

               틴토렛토(1518-1594)

1) 미천한 집안(염색공)의 출신으로 틴토레토는 염색공의 아들이라는 별명이다.

2)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3) 짧은 기간 티치아노에게 배웠다. --육감적인 표현은 티치아노의 영향이다.

    그러나 그만의 독특한 색채 표현을 하였다.

4) 프레스테차 기법---붓질을 여러번 함으로 대상을 자세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인상을 표현한다.

    구도, 명암도 질서정연하기 보다는 법도에서 벗어나 북유럽적이 된다. (성격이 급해서 꼼꼼하게

    그리는 것을 싫어하였다고 한다.)

5) 붓질이 거칠어서 그의 그림은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당시의 사람은 멀리서 보고 난 후에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림을 살펴보았다. -- 미완성 작품이라는 평을 하기도 하였다.(바자리)

    ===> 고객이 외면하였다.

6) 미완성의 그림이라는 바자리의 평이 오히려 후배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특히 엘 그레꼬)

     ---> 동 시대의 화가인 베로네제가 많은 돈을 남기고 죽은 반면에 틴토렛토의 미망인은 국가 보호

      기관에서 살았다고 한다.

 

    성 죠지와 공주 --- 가정용 제단화인 것 같다.(그림이 작다)

  성 죠지가 그림의 주인이 아니고, 공주가 주인공이다.(중앙에 크게 그렸다.)

화려한 색상, 거친 붓질

 은하수와 기원-- 화려하다.(17세기 모사품)

 쥬피터와 시멜레-- 거친 붓질. 인체비례가 맞지 않다.

 최후의 만찬 -- 빛, 인체의 비례 등을 선배화가에게 배우기도 하고, 특징도 보인다.

 

7) 그림을 팔기 위해서 덤핑도 하고, 고객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팔기 위해서 물 불을 안 가렸다고 한다.

좀 dirty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돈은 못 벌고 죽었다고 한다.

로렌죠 로또(1480-1556)

 

베네치아의 화가로서, 지오르지오네,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아서 빛을 이용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

하였다.

* 풍성하고, 감각적이며, 화려한 모습의 반신상을 주로 그렸다. - 베니스의 중류층에 대인기가 있었다.

* 시중의 여인을 모델로 성모, 성녀를 그렸다.

* 초상화에 베네치아의 화려한 색상을 사용하여 감정까지 표현해내므로 초상화는 티치아노를 능가한

다는 평도 들었다.

 

 지오바니와 그의 가족 --- 상징적이고, 우의적인 그림이다. (이 시대에 유행했다.)

포도를 쥐고 있는 아이는 인생과 쾌락은 짧다는 것을 나타내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울하게

나타내었다. 그러나 결혼의 달콤함과 분위기를 그려내었다.

의사의 초상화, 등

 

 1520년대에 레오나르드가 죽으면서 르네상스 미술도 꼭지점을 짓고 하강한다. 이후에는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선배 대가들의 그림을 본받아서 그리기에 바쁘다.(레오나르드, 미켈란젤로, 라파엘, 티치아노 등) 특히 피렌체에서는 색채보다는 형상에 집착하므로 미켈란젤로, 라파엘 류의 그림이 유행한다. 그러나 레오나르드는 "선생을 넘어서지 못한 볼쌍한 제자."라고 평했듯이 본받기만 하면 미술은 퇴보하기 마련이다.

 넘어설려는 자는 (틴토렛토, 엘 그레코 등) 새로운 도약을 한다.

 

      매너리즘의 태동(피렌체)

1) 고전주의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바자리. 브론치노)

2) 우아하고, 감미롭고, 일부러 꾸민 듯이 하여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3) 자연모방이론(바자리)

    미술의 최고 평 -- 너무 자연스러워서 살아있는 듯이 보인다.

    * 즉 미술은 자연을 능가할 수 있다. -- 멋진 경치를 그림 같다.

4) 초상화 --- 자연주의적 사실성 + 우아함을 표현해야 한다.

5) 미의 판단은 “규정”이 아니라, 판단에 따른 선택이다.

    즉 개인의 취향에 중점을 둔다.-- 피렌체 매너리즘의 특징이다.

6) 미슬은 지적 추구가 아니고, 재간에 의한 기교의 유희이다.

7) 누드는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미켈란젤로-- 정신의 아름다움을 육체를 통해서 표현하였다.

8) 바자리 이론 -- 매너리즘의 바탕이다.

    섬세함, 세련됨을 최고의 우아함으로 단정한 바자리 미학은 “우미”의 미학이다.

레오나르드가 미의 규칙에 의하여 합리적인 성질을 가지는 반면에

“우미”는 판단에 의하는, 즉 눈의 감각에 의존하여 쾌를 느끼는 것이다.(라파엘)

 

로소 피에렌티노( Rosso Fiorentineo)(1494~1540)

우아하다. 초현실주의적 그림이다.

 

폰트르모(Pontormo)

라파엘과 프라 바르톨레메오에게 배웠으나. 규범에는 반기를 들었다.

작중 인물은 부드러우면서도 동적이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이다.

모델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상상력을 가미하여 우아하고, 조용하게 그렸다.

* 요셉을 이집트에 판 후에 일어난 일들 -- 서사 구조를 하고 있다.

그림의 서사구조는 고대 그림의 일반적인 구조이다.

야할 정도로 색채가 사치스럽다. 그러나 색채가 엷다.

* 레오나르드는 아주 순한 색부터 칠해나간다. 그 위에 덧칠을 하여 그림을 완성해간다. 그리다가

미완성으로 둔 것도 많다.

---> 이 그림은 색채가 엷기 때문에 바자리가 비난을 했다. --그러나 이 그림도 시선을 끌어야 할

곳은 진하게 칠하였다.

 

파르미지아노(

바자리의 이론에 우아, 우미의 표현 방식에 몸은 길게, 얼굴은 적게 하라고 했다.

목이 긴 성모는 그 이론을 아주 충실하게 따랐다.

*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의 이상성을 본따서 작품을 제작했다.

* 성 처녀와 세례 요한, 성 제롬(의사이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보인다.(세례 요한)

* 성녀 카트리느의 결혼

빛과 검은 색을 대비하여 주제를 드러냈다.

 

브론치노(Bronzino) (1503-1573)

* 폰트르모의 제자이다.

* 메디치가의 상류 사회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 인간의 피부색이 맑고, 차갑게 그렸다. (그의 그림의 특징이다.)

* 귀족이나 상류 사회의 의상을 입고, 표정은 차거움이 돌도록 냉정하게, 무언가 거만함이 묻어있다.

----> 이런 스타일을 귀족들이 좋아하였다.

* 비너스와 큐피드의 우화 -- 그림 우화로서 프랑스 왕 프랑소와즈 1세에게 보낸 그림

이런 그림을 보므로 당시의 왕궁에서 어떤 양상의 그림을 선호하였는지 알 수 있다.

비너스와 큐피드의 키스 ---- 사랑

그녀의 옆에 있는 다른 애인 ----- 거짓, 질투, 열정

왼쪽 ----- 질투

뒤쪽 (얼굴-여자, 발은 사자.) ----- 기만

노인 ------------- 시간

고함을 지르는 남자 --- 매독

Giulido Romano 쥬피터의 어린 아이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아서 색채가 화려하다.

합스부르그 가의 궁정에서 일하다.

 

베로네제(Veronese 1528~ 1588)

* 틴토레토와는 반대로 고객이 원하는 대로 그려 주었다.

* 그의 그림은 견고함과 3차원적인 느낌이 느껴진다.(피렌체의 전통회화적이다.)

* 그림의 주제는 부자들의 생활이고, 오페라식의 표현이 많다.

* 베로네제는 피렌체의 상류 사회를 전통방식으로 그리면서도, 매너리즘 양식이 돋보이는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다. (틴토레토가 가난하게 죽어서 그의 부인은 구제소에서 살앗)

** 베네치아 미술은 틴토레토와 베로네제에 의해서 마무리 된다고 한다.

 

코렛지오(Correggio

1) 레오나르드, 미켈란젤로, 라파엘, 티치아노와 더불어서 르네상스 5대 화가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평가가 달라진다.(특히 라파엘과 코렛지오의 평가가 변한다.)

2)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3) 만테냐 기법과, 수프마토 기법을 받아들였고, 빛의 이용을 잘 하였다.(레오나르드 영향)

4) "이오" -- 신화를 이용하여 황홀판 표정을 그리므로 감상자에게 상상의 폭을 넓혀준다.

    그외에도 신화를 이용한 관능적 표현이 많다.

5) 빛의 이용 -- "목자들의 경배"--빛이 외부에서 비추이기 보다는 아기 예수의 얼굴에서 빛이 나

    온다.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다.

16세기가 되면 프랑스, 스페인, 신성 로마제국에서 강력한 왕권이 등장하면서 바로크 미술이

태동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형성된다.

 


엘 그레꼬

1) 1541년 그리스의 크레타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도제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베네치아의 영향이 강한 곳이다.

2) 크레타에서는 큰 화가의 대우를 받았으나 만족하지 못하였다.

3) 1566-67, 베네치아로 갔다. 티치아노 화실에 잠시 머물었다고 하나 의문?

    그가 남긴 기록 -- 색이 뎃생보다 중요하다.

5) 틴토레토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다.

    빛의 강조, 극적 표현을 위해서 전통적인 원근법 등을 무시하였다.

6) 트렌트 종교 회의 후에 카톨릭 개혁운동이 일어남(로욜아의 제수이트 회)

   --> 그림을 교회의 선전에 이용하였다.(신교는 아예 우상으로 취급)

   ==> 미적 표현보다는 교리의 선전이 우선이어야 한다.

7) 1570년 로마로 떠났다. -- 로마의 매너리즘을 만났다.

   로마에서 생활은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다.

   (미켈란젤로의 세르펜티나(Serpentinata)--인물을 뱀처럼 구불구불 뒤틀리게 표현

  하여 불꾳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로마에서는 주문을 많이 받지 못하였다. -- 그러나 오만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함

8) 1576-로마를 떠나서 톨레도로 갔다. -- 톨레도는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겨가자 쇠퇴의

   길을 걸었다.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서 합수부르그 왕가와 카톨릭의 지원을 받고 정착한다.

   필리페2세는 절대 군주이다. 네델란드 독립전쟁 등 전쟁도 많고, 카톨릭을 적극 옹호

    1577 -- 톨레도에서 “그리스도의 탈의”를 주문받아 그렸다.

   그리스도는 이음새가 없는 옷을 입고 있다. 처벌을 받기 위해 옷을 벗긴다.

1) 화려한 색상의 옷(붉을 색) -- 시선을 모우기 위해서 색을 극적으로

2) 인체의 구성 비율 --길게하여 전통과 맞지 않다. --매너리즘의 영향이다.

3) 인물을 빽빽하게 배치 -- 사실 표현이 아니고, 상상이고, 추상적이다.

4) 극적 구성을 하고 있다.--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서다.

     * 아직 장인 대접을 하는 스페인에서 화가의 신분상승을 위하여 법적 투쟁을 하고, 항의

도 하면서 벌어들인 돈을 많이 낭비하였다. 돈이 없으면서도 아주 호화롭게 살았다.

결혼은 안했으나 동거하면서 아들까지 두었다.

    1580-- 필리페2세의 후원을 받았으나 그림의 내용과 표현 기법을 두고 카톨릭과 자주 마

찰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에는 쇠퇴하는 톨레도만큼이나 우울한 시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우울한 분위기를 담기 위해 전통 기법을 벗어나서 극적인 표현도 많이 하고 있다.

전통 미술에서는 비난도 많이 하였다.

1614년 -- 그는 조용히 죽었다. 이후 300년 동안 스페인 회화사에서 잊혀진 화가로 지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독일에서 모더니즘 회화가 나타나면서 재조명을 받았다.

 

 브뢰겔

1) 1524~30 년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일생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이럴 경우는 대부분 그의 신

    분이 미천한 집안의 출신임을 말한다.

2) 1551 -- 화가 조합에 화가로 가입한다.

3) 1552 -- 프랑스, 이태리로 여행하여 선진 미술을 맛본다.

4) 1555 -- 네델란드 안트와프로 귀환하여 정착한다.

5) 1556 --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제작한다.

      환상적인 표현을 한다.

     즉 그는 북구의 전통적인 회화로 복귀하여 신기한 풍경과 농민의 생

    활을 소재로 그렸다.

6) 1563 -- 브뤼셀(그가 미술을 처음 배운 곳이다.)로 옮겨서 스승의 딸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즐긴다.

    두 아들을 낳고,(모두 화가이다.) 그가 남긴 40여점의 작품 중에 여

       기서 30여점의 작품을 그렸다.

7) 1569 -- 사망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절의 네델란드는 유럽 무역의 중심지로서 중상주의-자본

주의가 발달하였다. 신교가 우세한 지역으로서 구교의 수호자이면서 네

델란드를 식민통치하던 스페인과 마찰이 심하였다.


최근에 와서 브뢰겔은 다음과 같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1) 농민화가이다.

그의 그림의 주 소재가 농민이고, 농민의 삶이다. 네델란드는 신교 우세지역이므로 우상 파괴 사상이 널려 퍼져 있었다. 화가들은 새로운 고객을 찾아 나서면서 플랑드로 전통회화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때의 그림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고 서사가 있는 읽는 그림을 그렸다.(플랑드로 회화 전통임)

(* 아놀드 하우저는 농민화가가 아니라고 하였다. 부르주아지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에 피로하여 상상적으로 그리워하는 농민의 생활을 그림으로 그려서 팔았을 뿐이다. 오히려 자본주의 화가이다 라고 함)

2)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화가이다.

* 당시의 일상 생활을 소재로 그리면서 도덕적 의미를 부여 하였다.

* 그림에 속담, 우화, 진지한 교훈을 담은 실험적인 그림을 그렸다.

* 근본 목적은 그림을 통한 “설교”이다.

3)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영향

상상력이 풍부한 그림을 그렸다.(죽음의 승리는 지옥도를 연상시킨다.)

4) 자본주의, 중상주의 문화의 화가이다.

일상의 생활에 감정과 드라마를 불어 넣어서 연극을 연출하듯이 그리므로 부르주아지 고객의 취향에 영합하였다.


  이카로스의 추락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이카루스가 추락하고 있어도 (오른쪽 아래 바다에) 농민, 어부, 목동들은 아무 관심도 없이 자기 일이나 한다.

경쟁이 심한 자본주의 부르주아지가 농민들의 삶을 부러워하는--

 

‘죽음의 승리’

히에로니무스 보스(지옥도)의 영향이 나타난다. 상상적이고, 환상적으로 그렸다.

 

‘네델란드 속담’

100개의 속담을 90cm* 150cm 크기의 그림에 표현하였다. 그림에 속담이나 여러 상징을 담는 것은 플랑드로 회화의 전통이기도 하다.

 

‘눈속의 사냥군“

사냥군의 귀환을 소재로 하여 겨울 풍경을 배경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풍경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고 풍경화가 핵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계절의 풍경을 그린 여섯 개의 연작 중의 하나로서 세계 10대 그림 중의 하나이다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동적인 분위기 속에 겨울 풍경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혼인 잔치’

플랑드로 농민들의 삶과 모습이 잘 담겨져 있다.

‘장님의 우화’

장님이 장님을 인도해간다는 마태복음의 내용을 그렸다. 앞의 장님이 넘어지자 뒤따라 오는 장님도 넘어진다는---

성경의 설교를 담은 그림이다.


브뢰겔의 그림

1) 읽는 그림이다.

2) 색채는 다채롭다.

3) 선은 우아하다.

4) 구성은 깔끔하고, 무게감이 있다.

5) 빛의 사용을 적절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