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고대.르네상스미술

금동이 2019. 7. 29. 09:00

조르조네

Giorgione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로 주요 작품은 <폭풍>과 <잠자는 비너스>. 초기 생에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으며 청년 시절 베네치아에서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로 공부하면서 스승 벨리니의 후기 양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대표작 <폭풍>은 르네상스기의 '자연주의'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서양 미술에서 자연을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풍경화로 평가받는다. 풍경화뿐만 아니라 르네상스기의 인간상을 매우 섬세하게 그린 조르조네의 초상화는 이후 티치아노, 팔마 베키오, 로렌초 로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 미술에서 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처음 시작했다(베네치아 화파).

전기작가이자 마니에리스모미술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화가·조각가들의 생애 Vite de'piú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 italiani……〉(1550, 1568)에서 기록한 전설들을 제외하고 실제로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 조르조네의 이름은 현재 남아 있는 1507, 1508년의 두 자료에 초르치 다 카스텔프랑코(베네치아의 방언), 즉 카스텔프랑코의 조르조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조르조네(또는 초르촌)라는 이름은 1528년 그리마니 컬렉션의 작품 목록에 처음 나온다. 이 이름은 '키가 큰 조르조' 또는 '몸집이 큰 조르조'라는 뜻으로 그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미남이고 호색적이었다.

르네상스기의 유명한 미술 후원자인 만토바의 이사벨라 데스테와 그녀의 대리인인 베네치아의 타데오 알바노 사이에 오고 간 1510년 10월 25일 편지에는 조르조네가 그무렵 베네치아에 널리 퍼져 있던 흑사병에 걸려 바로 얼마 전에 죽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를 다룬 기록 중 가장 최초의 것은 바사리가 쓴 전기이다. 그것은 조르조네의 평범한 태생, 고상한 정신,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특징은 바사리가 조르조네의 그림들이 가지고 있는 시적인 특성을 기초로 나름대로 상상한 결과임이 확실하다.

청년 조르조네가 1490년경 베네치아에 가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대가인 조반니 벨리니 밑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르조네의 그림에 나타나는 기법과 색채, 분위기는 확실히 벨리니의 후기 양식과 비슷하다. 1507년 베네치아에 있는 두칼레 궁의 접견실에 걸기 위해 주문받은 그림은 그후 더이상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완성되지 못한 것 같다. 조르조네의 주요한 공공 작품으로는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독일 대사관)의 외벽에 그린 프레스코가 있는데, 그는 운하를 향하고 있는 이 건물의 정면에 인물상들을 그렸다.

거리쪽의 프레스코들은 젊은 티치아노가 그렸는데 아마 조르조네의 감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508년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 작품들은 부분적으로 흐릿한 인물 윤곽선만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소실되었다.

몇 가지 특별한 자료에 기록된 작품들을 제외하고, 1520~43년 베네치아의 귀족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 쓴 베네치아의 미술 컬렉션에 대한 기록에 조르조네의 그림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기록은 조르조네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성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믿을 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12점의 그림과 1점의 소묘 중 5점이 남아 있는데, 〈폭풍〉·〈3명의 철학자 The Three Philosophers〉·〈잠자는 비너스 Sleeping Venus〉·〈화살을 든 소년 Boy with an Arrow〉·〈피리를 가진 양치기 Shepherd with a Flute〉 등이 그것이다. 〈폭풍〉은 르네상스기 풍경화에서 하나의 이정표로서 폭풍우가 막 몰아치기 직전의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르네상스의 저술가 피에트로 벰보와 자코포 산나차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또한 르네상스기의 중요한 철학자인 피에트로 폼포나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베네치아와 파도바의 동시대 인문주의자들의 '자연주의'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폭풍〉의 전경(前景)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나타내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왔지만 정확한 것은 하나도 없다. 미키엘은 그들을 군인과 집시로 해석했다. 르네상스 미술가라면 의미 없이 2명의 모호한 인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이들은 낭만적이고 아르카디아적인 자연을 묘사한 문학 작품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와 똑같은 문학적 주제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전원의 합주 Pastoral Concert〉(1510경)가 있는데 그 제작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잠자는 비너스〉(1510경)는 조르조네가 죽을 때 미완성으로 남았다. 미키엘은 이 풍경화의 배경을 티치아노가 덧붙였다고 전하고 있다. 오른쪽 원경에 건물들이 있는 풍경은 티치아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으므로 그림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해준다.

〈잠자는 비너스〉를 시작으로 베네치아의 미술에서는 사랑의 여신을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특히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유명하다. 그러나 장엄하고 이상적인 이 그림만큼 한적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표현한 작품도 없다. 〈유딧 Judith〉(1505경)은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와 똑같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녀는 자기 민족의 복수자라기보다 일종의 여신으로 표현되어 있다.

초기 자료들에는 종교화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모세의 시련 Trial of Moses〉·〈솔로몬의 재판 Judgment of Solomon〉을 묘사하고 있는 패널들은 보통 조르조네의 초기 작품(1495~1500경)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인물들은 약간 고풍스럽게 보이지만 차분하고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원경의 풍경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명백히 〈폭풍〉를 그린 화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종교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모와 아기예수와 성 프란체스코와 성 리베랄레 Madonna and Child with SS. Francis and Liberale〉(1504경, 카스텔프랑코)이다.

이 그림의 구도는 르네상스기의 특징인 기하학 양식에 따라 이등변3각형을 이루고 있다. 풍경과 종교적인 환상에 빠져 있는 듯한 인물들의 환상적인 분위기는 완전히 조르조네의 성향을 보여준다. 〈성가족 The Holy Family〉(1508경)·〈양치기들의 경배 Adoration of the Shepherds〉(1508경)도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후자의 작품은 특히 색채의 완벽한 조화로 유명하다.

〈3명의 철학자〉(1510경)는 미키엘이 특별히 조르조네의 것으로 단정한 작품으로서 미키엘은 조르조네가 죽은 뒤 베네치아의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것을 완성했다고 진술했다. 이 그림의 구도와 색채는 완전히 조르조네의 화풍으로서 세바스티아노는 다만 약간의 끝마무리를 했을 뿐인 것 같다. 게다가 청년·장년·노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세 남자의 꿈꾸는 듯한 우울한 분위기는 조르조네의 전형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이 그림이 인간의 세 연령기를 나타내고 있음이 확실하지만, 그 인물들이 실제로 3명의 동방박사나 3명의 철학자, 또는 고대 로마의 전설에 나오는 문학적 인물들을 의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평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Christ Carrying the Cross〉(베네치아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로코)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쟁이 일고 있다.

그러나 바사리는 1568년에 이 그림의 화가가 티치아노라고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그가 1550년 판에서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진술한 것을 정정했다. 상당부분이 복구되고 다시 그려졌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가치만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 20세기의 많은 비평가들이 티치아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의심하는 그림으로는 〈그리스도 앞에 선 간통한 여자 The Adulteress Brought Before Christ〉(1500경)·〈풍경 속의 성모와 아기예수 Madonna and Child in a Landscape〉(1504경)·〈성모와 아기예수와 파도바의 성 로크와 성 안토니우스 Madonna and Child with SS. Roch and Anthony of Padua〉(1505경) 등이 있다.

초상화 분야에서 조르조네는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티치아노, 팔마 베키오, 로렌초 로토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은 16세기초에 조르조네를 흡사하게 모방했기 때문에 때때로 그들의 그림을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청년 Youth〉(1504경)은 대체로 그가 그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작품은 뚜렷한 윤곽선과 입체적인 효과와 더불어 평온한 분위기와 정적인 얼굴 표정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르네상스기의 인간상을 매우 인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시인 〈안토니오 브로카르도 Antonio Broccardo〉의 초상화(1506경)도 이와 마찬가지로 정교한 세련미와 섬세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모든 비평가들이 한결같이 그가 그린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작품은 이른바 〈라우라 Laura〉의 초상화로, 그 뒷면에는 1506년 6월 1일이란 날짜와 이것을 그린 화가가 카스텔프랑코의 초르치라는 글이 적혀 있다. 독일의 유명한 동판화가인 벤첼 홀라르가 1650년에 인그레이빙으로 기록한 조르조네의 〈다윗으로 분장한 자화상 Self-Portrait as David〉(1510경)은 크게 손상되긴 했지만 크기를 아주 축소한 원작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르조네는 이 자화상에서 눈살을 찌푸린 채 몸을 난간 안쪽으로 기울게 그림으로써 좀더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티치아노는 푸른 옷을 입은 남자의 초상화(1512경,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이와 똑같은 구도를 택했는데, 여기에 씌어 있는 머리글자 'TV'(Tiziano Vecellio)는 이 그림의 제작자는 조르조네가 아니라 티치아노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상당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카스텔프랑코 출신의 이 단명한 대가는 여전히 르네상스 화가들 중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이 지니고 있는 특질과 매력으로 인해 그는 당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상적인 형태와 색채, 밝기를 통해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베네치아의 대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