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별 분류/바로크음악

금동이 2019. 10. 31. 00:53

 

1.개요[편집]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연주자. 음악사적으로 바로크에서 고전기로 옮겨가는 과도기 시기의 작곡가이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가 대표적인 요절한 작곡가로 꼽히는데 페르골레지는 이들보다 더 일찍 죽었다. 향년 26세. 그래서 '요절한 천재'로 잘 알려져 있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마나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와 종교음악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등의 명작을 남겼으며, 그 덕분에 단순히 과도기 시절을 풍미했던 작곡가를 넘어 음악사적으로도 나름 중요한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1710년 당시 교황령이었던 이탈리아 중부 안코나(Ancona) 지역의 예시(Jesi)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드라기(Giovanni Battista Draghi)였는데 조상들이 살았던 지역 이름 '페르골라'에서 유래한 페르골레지(Pergolesi)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에게는 3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4형제 가운데 어린 시절을 넘긴 사람은 페르골레지가 유일했다. 그의 집안은 모두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그의 3형제가 모두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페르골레지는 다행히 살아남아서 유년기를 넘겼지만 척수까지 감염된 결핵의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를 절었고 결국 결핵 때문에 요절했다.

 

그는 어린 시절 예시의 지역 음악인들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여기서 재능을 인정받아 1725년 예시 영주의 도움으로 좀더 큰 도시인 나폴리로 일종의 음악유학을 가게 된다. 나폴리의 음악원에서 가에타노 그레코(Gaetano Greco)나 프란체스코 포(Francesco Feo)와 같은 당대의 유명 음악가들 밑에서 수학했으며 어린 나이였지만 바이올린 연주능력과 작곡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귀족들의 후원도 얻을 수 있었다. 21세때인 1731년 음악원을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나폴리에서 작곡가과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1731년 그의 첫 오페라 성 굴리엘모의 회심과 죽음(La conversione e morte di San Guglielmo)를 비롯하여 사랑에 빠진 오빠(Lo frate 'nnamorato, 1732), 거만한 죄수(The Proud Prisoner, 1733), 올림피아데(L'Olimpiade, 1735), 일 플라미니오(Il Flaminio,1735) 등을 상연했다.[1]

 

그런데 페르골레지를 지금까지 유명하게 만든 오페라는 전술한 대형 오페라들이 아니라 막간극(intermezzo)이었던 마나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이다. 오페라 부파(opera buffa)라는 장르가 유럽 전역에 퍼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작품은 정가극(opera seria) '오만한 죄수(Il prigionier superbo)'의 상연 도중 쉬는 시간에 막간으로 상연된 40분 내외의 짧은 소극(笑劇)이었는데, 이 작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본작인 거만한 죄수는 묻혀버리고 이 마나님이 된 하녀가 단독으로 널리 상연되었다.

 

페르골레지는 오페라 외에도 종교음악에서도 중요한 작품을 남겼는데 현존하는 작품으로 미사 F장조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마리아 찬양 전례가), 그리고 현재까지도 자주 연주되는 걸작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 성모의 눈물, 1736) 등이 있다.

 

1734년 24살의 젊은 나이로 페르골레지는 나폴리 성당의 악장 대리로 부임한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건강에 문제가 생겼으며 1735년 말 의사의 권유로 포추올리(Pozzuoli)로 요양을 떠났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736년 3월 16일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페르골레지의 시신은 다음날 바로 근처의 묘지에 묻혔는데, 전염병 전파에 대한 위험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한편 나폴리 성당에 취직할 무렵 그의 후원자였던 카리아티(Cariati)가문의 영주의 부인인 마리아 스피넬리(Maria Spinelli)와 염문을 뿌렸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런 유형의 연애가 언제나 그렇듯이 두 사람은 결국 맺어지지 못하고 헤어졌는데, 그가 요절한 후 이 로맨스는 작곡가의 유명세를 타고 각양각색으로 각색되어 퍼져나갔다.

 

3. 페르골레지의 음악

페르골레지는 음악인생 거의 전부를 나폴리에서 보냈으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오페라와 종교음악, 기압 협주곡과 합주곡을 작곡했다. 그의 오페라는 후술될 '마나님이 된 하녀'를 제외하고는 거의 잊혀져 있었으나 최근에 고전 오페라의 재발굴 분위기에 힘입어 종종 연주되고 있다.

 

페르골레지는 바로크 시기에서 고전파 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활동했던 음악가이며, 그의 음악양식도 시기에 걸맞게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페르골레지의 음악에서는 바로크 음악의 특징인 통주저음이 사용되고 있으며 기악합주의 경우 빠름-느림-빠름 으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콘체르토 그로소(Concerto Grosso, 합주협주곡)의 양식을 준수하고 있으며 고전기 특유의 교향악적(Ochestral)인 특징은 아직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협화음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고 바로크 협주곡에 비해 각 악장이 좀더 다채로운 전개부를 가지고 있으며 즉흥 능력과 기교가 뛰어난 연주자답게 독주악기의 활약이 좀더 두드러지는 등, 고전기 음악의 특징도 많이 보여주고 있다.

 

페르골레지 바이올린 협주곡(1730년경

 

3.1. 마나님이 된 하녀

 

마나님이 된 하녀(1733년)

 

페르골레지가 활동했던 바로크 후기 - 고전기 초기의 오페라의 대세는 소위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정가극)였다. 이 오페라 세리아는 주로 영웅의 일대기나 고대 신화를 주제로 한 심각한 내용을 지니고 있었는데,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계는 매너리즘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공연되는 오페라들은 하나같이 진부하고 천편일률적인 스토리 일색이었으며, 게다가 가창력을 무기로 하는 카스트라토 가수들이 득세하면서 오페라는 무대극으로서의 극적인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화려한 가창 묘기의 경연장으로 전락해 버렸다(페르골레지의 오페라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관객들 입장에서 이런 오페라를 장시간 감상하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관객들의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오페라 세리아 휴식시간 사이에 짧은 막간극(Intermezzo)을 공연하는 풍습이 생겨나게 된다. 이 막간극의 내용은 세리아와 정 반대로 상당히 우스꽝스럽고 풍자적인 소극(笑劇)이었다.

 

페르골레지의 대표작인 '마나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도 원래는 막간극이었다. 1733년 나폴리의 통치자 카를로 6세의 왕비 엘리자베타 크리스티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페라 세리아 '오만한 죄수(Il prigionier superbo)'를 공연하였는데, 이 '마나님이 된 하녀'는 막간극으로 상연되었다. 그런데, 정작 본작인 '오만한 죄수는'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반면 '마나님이 된 하녀'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마나님이 된 하녀는 처음에는 다른 오페라 세리아의 막간극으로 공연되다가 나중에는 단독 상연용으로 손질하여 독립적으로 공연된다.

 

한편 이 작품은 오페라 부파의 전성기를 이끈 것 이외에도 프랑스에서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의 오페라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두자릿수의 공연횟수도 채우기 힘들었는데, 이 마나님이 된 하녀는 점점 인기가 높아져서 페르골레지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공연되었으며 급기야는 1753년에 이탈리아를 넘어 프랑스에서도 초연되었다. 프랑스 초연은 단독 공연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륄리의 오페라 아치스와 갈라테아(Acis and Galatea)가 먼저 상연된 이후 저녁 때 상연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음악가와 지식인들은 같은 날 상연된 이 두 오페라를 비교하면서 어떤 오페라가 음악적, 예술적으로 우월한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이게 바로 유명한 부퐁 논쟁(Querelle des Buffons)의 발단이 된다(자세한 것은 링크 참조). 대중적으로 철학자로 잘 알려진 장 자크 루소 및 장 필리프 라모 등이 이 논쟁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막간극 답게 오페라의 공연시간은 40분 내외로 짧으며 내용도 단순하다. 나폴리의 부호이자 돌싱인 우베르트는 하녀인 세르피나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벙어리 시종인 베스포네를 시켜 자신의 재혼 상대를 구해오라고 하면서 세르피나를 내보낼 생각을 한다. 쫓겨날 위기에 처한 세르피나는 베스포네를 설득하여 그녀에 대한 구혼자로 꾸미게 한다. 베스포네는 변장하여 탐페트라는 이름의 장교로 행세하며 우베르토에게 협박하는데, 우베르토에게 세르피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거액의 지참금을 요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이에 우베르토는 결혼을 승낙한다. 스토리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면 지는 거다

 

이 작품은 그간 오페라 부파(opera buffa)의 효시로 잘못 알려져 있었는데, 원래 오페라 부파는 이미 1700년대 초부터 나폴리에 그 원형에 해당되는 작품들이 탄생하기 시작했으며 막간극과는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페라 부파라는 장르가 유럽 전역에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마나님이 된 하녀' 덕분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오페라 부파가 하나의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만든 원조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페르골레지는 이 '마나님이 된 하녀'를 작곡하기 전 해(1732)에 이미 '사랑에 빠진 오빠(Lo frate 'nnamorato)'이라는 희극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도 꽤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됐으나 하필 이 시기에 나폴리에 지진이 발생해서 극장이 파괴되는 바람에 공연이 중단되어 버렸다. 페르골레지는 2년 후 이 '사랑에 빠진 오빠'을 개작하여 나폴리 축제때 다시 상연했다. '마나님이 된 하녀'의 인기에 묻혀 있기는 하지만 이 '사랑에 빠진 오빠'도 나름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3.2. 스타바트 마테르[편집]

이 곡을 듣고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면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요한 아담 힐러(Johann Adam Hiller)

 

이 작품은 1736년 페르골레지가 죽기 직전에 발표된 작품으로 소프라노, 알토 2중창과 통주저음이 있는 현악 합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간 이 스타바트 마테르는 페르골레지가 죽기 직전 단 며칠만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2] 하지만 연구결과 페르골레지는 이 작품을 죽기 2년 전에 착수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꼼꼼하게 손질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게 공을 들인 덕분인지 이 작품은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죽음을 앞두고 쓴 작품답게 선율이 아름다우면서도 매우 비통하고 애절한 느낌을 주고 있다.[3]

 

이 스타바트 마테르도 당시부터 큰 인기를 얻었으며 뛰어난 작품성에다 요절한 작곡가의 최후 작품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져서 더더욱 유명세를 탔다. 바흐는 이 스타바트 마테르를 바탕으로 시편 51편(독일어) 가사를 적용한 칸타타 '하나님 나의 죄를 없애 주소서(Tilge, Höchster, meine Sünden, BWV 1083)'를 작곡하기도 했다.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테르

 

4. 트리비아

20세기 중반까지 페르골레지는 겨우 26세의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수백곡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잠재능력을 가졌던 작곡가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채 6년이 되지 않는 음악 경력에 비해 지나치게 작품 수가 많고 스타일이나 수준도 제각각이었던 탓에 그의 작품으로 사칭한 위작이 많을 것이라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었다. 20세기 이후에 진행된 면밀한 연구결과, 페르골레지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던 작품 다수가 당대의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확인되면서 이 의혹이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중 상당수는 페르골레지의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해 그의 작품으로 사칭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심지어 도메니코 갈로(Domenico Gallo, 1730경~1780)와 같은 작곡가의 경우 한때 그의 작품 절반 이상이 페르골레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경향의 발레음악 '풀치넬라(Pulcinella)'는 페르골레지의 기악음악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스트라빈스키 사후 이 풀치넬라에서 차용한 음악들 중 상당수가 도메니코 갈로의 것으로 밝혀졌다.

 

[1] 올림피아데는 로마에서 초연됐으며 다른 오페라는 모두 나폴리에서 초연됐다.

[2] 페르골레지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이 그리 많지 않은 관계로 후대에 그의 행적이나 작품에 각종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각색되었는데, 이 스타바트 마테르 속작설도 그 중 하나이다.

[3] 다만 곡 전체에 나타나는 슬픈 분위기는 스타바트 마테르 자체가 일종의 애가(哀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