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명화감상

금동이 2020. 3. 29. 09:00

작품에 내면을 드러낸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질병과 불안, 죽음에 대한 형상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아래에는 피오르가 있었다. 피곤하고 지친 느낌이 들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고, 구름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그 절규는 마치 실제처럼 들렸다.”

마치 소설의 한 구절 같은 이 문장은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가 작품 〈절규〉를 작업하게 된 계기에 대해 토로한 것이다. 〈절규〉는 요동치는 선과 거친 붓질, 왜곡된 형상으로 현대인이 지닌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표현한 작품으로, 실존에 대한 고통을 형상화하며 독일 표현주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수많은 상품들로 복제되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근대 회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절규

오슬로 뭉크 미술관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 뢰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의관 출신 의사인 크리스티안 뭉크이며, 다섯 남매 중 둘째였다. 뭉크가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근원에 자리한 고독과 불안 등을 주로 표현한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태생적으로 병약했고, 그가 5세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14세 때에는 그가 잘 따랐던 누나 소피에가 결핵으로 사망했다. 어린 시절은 그에게 늘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와 누이동생은 불안장애와 강박, 공황장애를 앓기까지 했다.

“질병과 정신 착란, 죽음의 검은 천사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요람 위에서 나를 굽어보았다.”라는 말은 뭉크의 작품들이 지닌 절망적인 분위기와 고립에서 오는 불안감의 근원을 설명해 준다. 〈병든 아이〉, 〈죽음의 방〉, 〈죽음의 침상 곁에서〉와 같은 초기작에서 드러나는 질병에 대한 불안과 죽음에 대한 응시는 뭉크 작풍의 기저가 된다.

병약하여 주로 방 안에서 지냈던 뭉크는 종종 침대나 바닥에 누워 집 안 모습이나 약병 따위를 그렸다. 정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고, 16세 때 아버지의 바람대로 공업기술학교에 들어가지만 잦은 병치레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8세 때 오슬로의 미술공예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에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료 여섯 명과 함께 작업실을 빌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때 노르웨이의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로크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로부터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처음 접했다.

무엇보다 그의 작풍에 영향을 끼친 것은 극단적 자유주의자 그룹인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이다. 1886년에 열린 화가들의 축제에서 뭉크는 소설가 한스 예게르를 만났고, 같은 그룹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 등과 교류했다. 인습과 윤리, 예술에 있어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은 뭉크에게 감정의 해방을 맛보게 했고, 이는 그가 표현주의적 화풍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85년, 뭉크는 〈병든 아이〉, 〈그날 이후〉, 〈사춘기〉 등을 완성했고, 이듬해 〈병든 아이〉를 오슬로 가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 작품은 거칠고 암울한 묘사 방식으로 비평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들로부터 물감을 터무니없이 많이 칠한 데다 형태도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럼에도 뭉크는 이 작업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뭉크는 1889년에 개인전을 열었고, 이 덕분에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로 유학 갈 기회를 얻었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뭉크는 레옹 보나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그림 수업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몇 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2년간 파리에 체류하며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 등에게 매료되면서 화가로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뭉크는 이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두려움에 마주하는 도구로 그림을 대하게 되었고, 개인적 경험과 감정을 그림에 투영하여 현대인의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화풍을 발전시켰다.

1892년, 뭉크는 베를린 예술가협회의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약 55점의 작품을 출품한 이 전시회는 열리자마자 독일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으며 1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인습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회화적 형상들은 “대충 얼버무린 듯 그려 더러는 이게 사람을 그린 건지조차 분간이 안 된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소란은 오히려 독일 예술가들이 뭉크를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된다. 뭉크는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4년간의 독일 체류를 거쳐 1908년 신경쇠약에 걸릴 때까지 뭉크는 화가로서 가장 중요한 나날을 보냈다.

독일에서 그는 그래픽 아트의 영향을 받아 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에칭, 석판화, 목판화 등을 제작했으며, 그의 판화는 회화 작품들처럼 솔직하고 단순한 형상, 강한 주관성을 띠고 있다. 또한 그는 주요 작품 중 일부를 에칭과 석판화 등으로 다시 제작하기도 했는데, 그중 한 작품이 〈마돈나〉이다.

1893년, 뭉크는 〈생의 프리즈-삶, 사랑, 죽음에 관한 시〉의 연작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랑의 깨달음, 사랑의 개화와 죽음, 생의 불안, 죽음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이루어졌으며, 인간 존재의 다양한 면모를 담으려 한 이 시도를 통해 뭉크는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려 한 듯하다. 〈목소리〉, 〈사춘기〉, 〈키스〉, 〈남과 여〉, 〈폭풍우 치는 밤에〉, 〈재〉, 〈멜랑콜리〉, 〈병실에서의 임종〉 등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1893년 작 〈절규〉와 1894년 작 〈마돈나〉로 유명하다.

〈마돈나〉는 뭉크가 지닌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의미가 표현된 작품이다. 그는 1885년 프란츠 탈로의 형수인 밀리 탈로에게 빠져 그녀에게 온 마음을 바쳤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그녀와의 연애는 뭉크를 질투로 인한 신경쇠약과 정신착란 지경으로 몰고 갔고, 그 결과 그는 여성혐오증에 걸렸다. 뭉크에게 ‘마돈나’란 성스러운 마리아이자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몰아가는 팜므 파탈이었고, 유혹적인 동시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섹슈얼리티와 죽음이 순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하는 이 작품을 그는 시로 표현했다.



지구상의 온갖 아름다움이 당신의 얼굴 위에 머문다
당신의 입술은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열매를 맺는 과일처럼 붉은색이다
시체의 웃음
이제 삶이 죽음과 손을 잡는다



1899년, 뭉크의 여성혐오증을 심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해 그는 상류 계층의 여성인 툴라 라르센을 알게 되는데, 그녀의 집착과 집요한 결혼 요구로 뭉크는 그녀와 얼마 안 가 헤어지고 만다. 그녀는 뭉크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소동을 부리다 뭉크의 손가락에 총알을 관통시켰다. 뭉크는 이때의 경험을 후일 〈살인녀〉와 〈마라의 죽음〉 등으로 표현했다.

뭉크는 평소 조울증과 알코올 중독, 불안과 환각 증세를 지속적으로 겪었고, 1908년 결국 신경쇠약으로 코펜하겐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듬해 요양을 마친 그는 노르웨이로 돌아갔는데, 이후 그의 작품은 좀 더 낙천적으로 변화했다. 자신의 고독과 불안을 묘사하는 데서 벗어나 직접 자연으로 나가 보고 느낀 풍경을 풍요롭고 힘차게 그렸다. 색채는 화려하고 풍부해졌으며 밝아졌다.

뭉크는 오슬로에 정착한 이후에도 베를린, 파리, 프랑크푸르트, 런던 등지를 여행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고, 베를린과 오슬로, 뮌헨, 코펜하겐, 취리히, 런던, 미국 등지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다. 1933년에는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성 올라브 대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화가로서의 경력이 시작된 독일에서도 큰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1937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그의 작품이 ‘퇴폐 미술’로 규정되면서 수난을 겪기도 했다.

말년에 뭉크는 오슬로 근처 에켈리에 마련한 저택에서 홀로 지내면서 그림을 계속 그렸다. 눈병을 앓고 실명 위기에 처했으나 그에게는 어떤 장애도 되지 않았다. 1944년 1월 23일, 뭉크는 자신의 모든 작품과 재산을 오슬로 시에 기증하고 고독과 평화 속에 눈을 감았다. 80번째 생일이 지난 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1963년에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슬로 시에 뭉크 미술관이 개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