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문학/작가이야기

금동이 2020. 3. 30. 20:01

 

오장환시인

 

서정주와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가담했던 오장환시인은 백석, 이용악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오장환은 말이 없고 조요한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이나 대신 귀염성 있고 진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회인 공립보통학교 입학, 안성 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졸업했다 1951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오장환시인은 휘문고등학교를 다닐 때 정지용시인에게서 시를 배웠다. 휘문고등학교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교지 휘문에 아침,화염과 같은 시를 발표하고,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어려서 박두진시인과는 안성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일본 지산중학에 유학하고 온 뒤부터는 서정주, 김광균, 이육사시인 등과 가깝게 지냈다.

 

 

1937년에 첫 번째 시집 성벽, 1939년에 두 번째 시집 헌사를 내고 난 뒤에는 “문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서정주 시인은 전한다. 일제말기 단 한 편의 친일시를 쓰지 않으면서 그 어둡고 궁핍한 시기를 견딘 오장환시인은 신장병을 앓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의 감격과 혼란,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꿈과 열정, 부끄러운 심정 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시집 병든서울을 발간하였다. 이 시집은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최종후보작에 오르는 등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절정의 노래」는 중학교 5,6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일제말기 단 한 편의 친일시를 쓰지 않으면서 그 어둡고 궁핍한 시기를 견딘 오장환 시인은 신장병을 앓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오장환시인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나 통일에 관한 문제를 잘 해결해 주길 바라며 지방으로 문화선전활동을 다니며 시낭송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테러를 당해 치료할 곳을 찾아 남포로 갔고 거기서도 치료를 할 수 없어 모스크바 볼킨병원으로 후송을 갔다. 그리고 6.25전쟁의 와중에 치료를 받지 못한 채 34살의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떴다.

 

 

그의 시가 1930년대 시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은 생명파류의 시나 모더니즘 계열의 시라기보다 이용악, 백석 등과 함께 당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리얼리즘 시를 통해서이다. 오장환 시의 현실인식은 생명파에 속하면서도 생명파와 구분되는 독자성을 보여주며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에 속하면서도 모더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 점이 오장환을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3천재”로 불리게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오장환의 이러한 현실인식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어, 이후 그의 시편에 고스란히 녹아 예술적 성취의 밑거름이 되었다.

 

오장환 시의 현실인식

 

 

1. 오장환의 문학

 

오장환은 1930년대부터 1951년까지 문단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이다. 그는 해방 전에 성벽(1937) 헌사(1939) 등 두권의 시집을 냈고, 해방 후에도 병든서울(1946) 나사는곳(1947) 붉은기(1950) 등 3권의 시집과 번역 시집인 에써닌 시집, 산문집 남조선의 문학예술을 출간했다. 그 외에도 장시 전쟁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도 44편이나 되는 동시와 조선 시에 있어서의 상징, 소월시의 특성과 같은 주목할 만한 평론을 포함한 22편의 산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성벽(1937) 헌사(1939)는 오장환의 이름을 1930년대 우리 시문학사에 확실하게 새개놓은 시집이었다. 해방 후 에 펴낸 병든서울(1946) 나사는곳(1947) 은 오장환 시의 새로운 개성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병든서울은 해방 직후의 사회상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으로 우리 문학사에 남아 있다.

 

김동석은 해방 후 시가 쏟아져 나왔지만 이 시만치 시대를 잘 읊은 시는 없으리라고 했다. 병든 서울이 당시 주목받았던 이유는 도식적 구호를 앞세워 무조건적으로 인민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계몽하는 창원이 아니라, 자기비판을 통한 진정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있다.

 

 

비판적 리얼리즘 시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로 변모해간 해방 후의 그의 시는 1947년 후반 테러를 피해 북으로 도피하면서 분단 이후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북에서는 1953년 박헌영 간첩사건의 일환으로 임화, 김남천 등 월북 문인들이 부르주아 미학 잔재에 대한 비판을 받으며 숙청되었는데 오장환은 이 논쟁 전인 1951년 전쟁 직후에 병사하였지만 임화 계열의 문인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인지 그 이후 북한묵학사에서는 단한 줄도 언급 되지 않는 문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남과 북의 문학사 모두에서 오장환의 문학은 지워지고 매몰되었다.

 

 

2. 반제 반봉건의식 및 식민지 근대도시 비판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는 오장환 시가 첫 시집 성벽에서 전통 부정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장환의 시는 전통 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오장환은 전통 부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를 쓰기 이전에 동시를 썼고, 현대적 감각의 아포리즘 시를 썼으며, 전쟁을 반대하는 장시를 썼다. 오장환의 시는 리얼리즘 시가 많다. 오장환의 시에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관심은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장시 전쟁에서 발견되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전쟁은 어렵고 난해한 작품이다. 그러나 아무 과녁도 없는 이미지들을 순서없이 나열한 작품이 아니다. 전쟁은 반전, 반제국주의, 인간존중, 생명존중을 주제로 하는 시이다. 식민지 지배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전쟁에 대해 직접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반전의식을 드러내는 시를 쓰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오장환은 전쟁 반대에 대한 자기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시를 썼다.

 

戰爭

 

-銃이 웃는 것은, 自身이 詩人이기 때문이다.

 

(중략)... ...

 

輕氣球를 높이 0中에 꼬지라.

 

薇(微)笑는 歷史를 모르고,

 

눈물은 고인 적이 없다.

 

戰爭이란 動物은 反芻하는 재조를 가젓다.

 

 

두 번째는 이런 시들을 쓰면서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성벽, 성씨보, 정문, 종가 등이 시를 썼다. 유교 이데올로기로 지탱하는 봉건적 사회 질서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가 정문이다. 오장환의 시는 단순히 전통 부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반전 반제국주의, 식민지 근대도시 비판과 봉건주의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다. 성씨보를 시작으로 성벽, 정문, 종가 등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 반봉건의식이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 온 일청인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지는 진실 오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서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라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 오장환, 성씨보, 조선일보(1934)

 

이 시에서 화자는 족보나 성씨 가계보에 대해 전면적인 부정을 한다. 이런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나 불만은 작가 자신이 서자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정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꼭 거기에 한정되어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 번째는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이다. 장시 수부는 자본주의화 하는 식민지 근대도시 서울에 대한 비판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는 시다. 첫 시집 성벽이 출간되기 전인 1936년 11월에 발표한 장시 수부는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시의 전반부는 민중들의 비참한 현실을 주로 비판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상층계급의 가식적이고 부패한 삶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1930년대 수도 서울이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근대성의 비극이 집약된 곳임을 파헤치려고 하였다.

 

 

수부(首 府)

 

-수부는 비만하였다.신사와 같이

 

1.

 

수부의 화장터는 번성하였다.

 

산마루턱에 드높은 굴뚝을 세우고

 

자그르르 기름이 튀는 소리

 

시체가 타오르는 타오르는 끄름은 맑은 하늘을 어지러놓는다.

 

시민들은 기계와 무감각을 가장 즐기어한다.

 

금빛 금빛 금빛 금빛 교착(交錯)되는 영구차.

 

호화로운 울음소리에 영구차는 몰리어오고 쫓겨간다.

 

번잡을 존숭(尊崇)하는 수부의 생명

 

화장장이 앉은 황천고개와 같은 언덕 밑으로 시가도(市街圖)는

 

나래를 펼쳤다.

 

(중략)... ...

 

11.

 

수부는 지도 속에 한낱 화농된 오점이었다

 

숙란하여가는 수부-

 

수부의 대확장- 인근 읍의 편입

 

― 오장환, 수부

 

'강렬한 이미지의 게릴라식 몽타주로 그대 조선의 자본주의 일상을 누와르 필름처럼 펼쳐놓은 오장환의 수부는 야생의 직관으로 번뜩인다. 생것의 감각인 직관의 통찰이다. 이는 오장환이 아방가르드와 통한다면 관습과 규율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언어사용방식과 직관의 감각 때문이다.

 

 

3. 농촌현실에 대한 연민

 

당대 농촌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모촌과 북방의 길은 오장환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문학사에서 1930년대 식민지 지배하의 농촌현실과 농민들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추레한 지붕 썩어가는 추녀 위엔 박 한 통이 쇠었다.

 

밤서리 차게 내려앉는 밤 싱싱하던 넝쿨이 사그라불던 밤. 지붕 밑 양주는 밤새워 싸웠다.

 

박이 딴딴히 굳고 나뭇잎새 우수수 떨어지던 날, 양주는 새 바가지 뀌어 들고 추레한 지붕, 썩어가는 추녀가 덮인 움막을 작별하였다.

 

― 오장환, 모촌

 

모촌의 썩어가는 추녀는 당대 조선 농민의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모촌은 저물어가는 농촌이면서 기울고 있는 민족 현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저물어간 뒤에 곧 어둠이 올 것임을 암시한다.

 

 

4. 오장환 시의 귀향의식과 모성지향성

 

오장환 시에 나타나는 귀향의식과 모성지향성은 고향을 떠나온 탈향과 방황의 시기에만 나타나는 특징이 아니라 오장환 시 전반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오장환 문학의 밑바탕이 된 것이 인간을 위한 문학이라는 그의 문학관이다. 인간을 위한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오장환의 삶과 문학에는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장환은 자기가 처한 현실이 인간적인가 질문하였다. 인간을 위한 제도이며 체제로 존재하는가 물어보았다. 아니다 싶으면 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고 그것을 새로운 문학으로 표현하였다.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찾아 떠나던 모색의 길이 그의 삶의 행로가 되었고 문학적 여정이 되었다. 고향에서 시작하여 고향을 떠났다 다시 귀향을 선택하는 시적 행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근대도시를 떠나 항구와 바다를 찾아갔고 방황하였지만 끝내 그 바다와 동화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다는 것은 곧 어머니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어머니와 같이 늙고 힘없고 쇠약한 동네사람들의 팍팍한 생존의 터전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공간적 도피이거나 전원생활을 예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땀 흘리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오장환 시에 나타나는 향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이 시기만의 특징이 아니다. 이런 시는 동시에부터 붉은 기를 포한하여 다섯 권의 시집 모두에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루루루

 

두루루루

 

가는 맷돌은

 

빈대떡 부치려고 가는 매.

 

내일은 내 생일.

 

두루루루

 

두루루루

 

엄마는 한나절 맷돌을 간다.

 

― 오장환 내생일

 

 

오장환이 십 대 후반에 TMs 이 동시에는 내일이 자기 생일이라서 오늘 한나절 맷돌을 갈며 빈대떡 부칠 준비를 하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의 들뜨고 기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미 십 대에 동시를 쓸 때부터 시의 한가운데에 어머니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월북 이후 북한에서 쓴 시 남포병원과 붉은 기에 수록된 연가에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 있다.

 

 

5.중도적 주인공과 비판적 리얼리즘 시

 

해방 후에 그가 쓴 시들은 모두 사회주의에 경도된 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 아니다. 병든 서울에 수록된 많은 시의 화자는 이른바 중도적 주인공이다. 비판적의식을 지니면서도 그것을 실천적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인물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울음뿐이다.

 

몇 사람 귀 기울이는 데에 팔리어

 

나는 울음을 일삼아왔다.

 

그리하여 나는 또 늦었다.

 

나의 갈 길,

 

우리들의 가는 길,

 

그것이 무엇인 줄도 안다.

 

그러나 어떻게?하는 물음에 나의 대답은 또 늦었다.

 

― 오장환 나의길

 

 

나의 갈길, 우리들의 가는 길이 무엇인 줄은 안다. 이미 반제 반봉건 반자본주의의 길이요 인민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는 길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서 주저한다. 그러다 또 대답이 늦어지고 실천이 늦어진다. 그래서 자학적인 울음을 운다.

 

병든 서울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적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어 움직이는 시가 아니라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라는 뜻이된다. 병든 서울에 실린 대부분의 시, 1946년까지 쓴 많은 시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중략)... ...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눈

 

아 그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 오장환 병든서울

 

 

해방기 현실을 바라보는 창작 주체의 주관적 심경이 이처럼 강렬하게 표출된 시는 드물다. 지나친 주관성의 함몰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진솔하게 자신의 내면 심리를 표출해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는 중도적 주인공이나 문제적 개인보다는 적극적 인식과 실천력을 갖춘 긍정적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이러한 긍정적 주인공은 개인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집단전 인물의 움직임 속에서 나타난다. 오장환의 시는 1946년 9월 철도총파없과 10월 항쟁을 기점으로 하여 1947년으로 가면서 서서히 비판적 리얼리즘 시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로 변모되어간다.

 

 

6. 오장환 시의 현실인식

 

오장환은 식민지 사회에 대한 분명한 현실인식을 갖고 있던 시인이다. 현실에 대한 그의 문학적 관심은 대략 다섯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 식민지 근대도시에 대한 비판 봉건적 인습에 대한 비판 농촌현실에 대한 연민 귀향의식, 비판적 리얼리즘이다. 그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생명파 시인으로 분류되면서도 생명파와 구분되는 독자성을 보여주며,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에 속하면서도 모더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것 또한 오장환의 현실인식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시집에 따라 변모하기도 하지만 변하지 않는 일관성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작품이든 그것이 인간을 위한 문학이어야 한다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시로 표현한 반전, 반제국주의 반봉건의식, 인간존중 사상과 근대 도시비판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고향과 어머니를 노래한 시나 해방 이후의 리얼리즘 시도 인간을 위한 문학이었다.

 

오장환 시의 밑바탕이 된 시대정신은 반제국주의 반봉건, 반식민지 근대화 사상이었다. 개인적인 콤플렉스나 가정적인 이유 때문에 시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시이 밑바탕이 되어 변화해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한 편의 친일시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피지배자인 농민에 대한 관심과 식민지에서도 주변부에 속하는 농촌에서 쫓겨나고 힘겹게 살아가는 고향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시로 표현하였으며, 문학을 통해 고향 사람들 편에 서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