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문학/시와 수필

금동이 2020. 3. 31. 04:17

 

 

 

나의 노래 - 오장환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아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단 한 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나의 노래'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 조선의 3대 천재시인으로 일컬어지던 오장환(吳章煥)의 시다. 이 시는 1939년에 남만서방에서 출판된 시집 '헌사(獻詞)'에 실려 있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세상을 떠나는 날이다. 죽을 때까지 노래를 부르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죽을 때까지 시를 쓰겠다는 단호한 각오다. 일제(日帝)에게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대에 시인으로서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은 오직 저항시를 쓰는 일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시인이 시의 전사(戰士)가 될 수밖에 없음은 어쩌면 숙명이었다.

 

시인은 시의 전사가 되어 저항시를 쓰다가 죽더라도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는 예언적 선언을 한다. 이는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 동시대의 시인들에게 저항의지를 북돋워주는 선언이다.

 

시인이 묻힌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워 단 한 번도 '울지도 않았다.'고 고백한다. 새는 자유를 상징하고, 종달새는 새벽을 상징한다. 종달새에게 '화살같이 날아가거라'라고 한 것은 새벽(해방, 광복)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염원의 의미가 있다.

 

 

'나의 슬픔'과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만 있고, 단 한 번 기쁜 적도 없었다. 그 '님'은 조국 광복이다. 그 '님'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에 시인의 마음은 슬프다. 그래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꼈노라고 선언한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고.....

 

 

 

은박지화 '추모' - 이중섭

 

1931년 오장환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두 살 위인 청록파 시인 박두진과 같은 학년에서 공부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 휘문고보를 중퇴한 오장환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문예과에서 공부했다. 1936년 '낭만', '시인부락' 동인과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기 도쿄(東京)에서 체류하며 최하층 노동생활을 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습작시들을 썼다.

 

 

1938년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오장환은 남만서점을 운영하면서 임화, 김기림, 김광균 등 당시 쟁쟁한 시인들과 사귀었다. 8·15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해 좌익 시인으로 활동했다. 해방 정국에서 미군정이 실시되고 친일민족반역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자 절망한 오장환은 1948년에 월북했다. 김광균의 회고에 따르면 6·25전쟁 때 문화공작대로 서울에 내려와 시집 '붉은 깃발'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오장환은 화가 이중섭과도 절친이었다. 1950년 12월 월남한 이후 부산과 제주도 등지를 전전하던 이중섭은 오장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은박지를 꺼내 한 점의 그림을 그렸다. 1951년에 그렸다고 추정되는 이중섭의 은박지화 '추모'다. 화면 위쪽에는 죽은 사람의 시신이 놓여 있고, 아래에는 아이들이 꽃을 바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주검이 되어 누운 이가 바로 오장환 시인이다. 이중섭은 그림으로써 절친의 죽음을 애도했다.

 

8·15 해방 직후 오장환이 낸 시집이 '병든 서울'이다. 이 시집 때문에 1982년 경찰이 이광웅, 박정석, 전성원, 황윤태, 이옥렬 등 군산제일고 전현직 교사 9명을 이적단체 조직과 간첩행위 등으로 구속한 오송회(五松會) 사건이 일어났다. 5(五)명이 소나무(松) 밑에서 만났다고 오송회 사건이다. 경찰이 압수한 증거물이 바로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 필사본이었다. 오송회 사건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벌어진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이었다.

 

 

이광웅 시인은 '대밭', '피어라 수선화'라는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첫 시집은 감옥에서 나와 빛을 보았고, 두번 째 시집은 유고시집이 되었다. 이 광웅 시인은 용공조작사건 재심 재판에서 승소하여 보상을 받게 되었고, 민주화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오장환은 일제 강점기에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시인으로 일컬어지던 시인이다. 서정주는 그를 두고 정지용을 이은 '문단의 새로운 왕'이라고 불렀다. 오장환, 이용악 두 천재시인은 월북했고, 친일민족반역자의 길을 걸어간 서정주는 남한에 남아 문단 권력을 장악했다. 독재정권 시절 오장환과 이용악은 남한에서 지워졌고, 서정주는 독재자를 찬양하고 옹호하면서 문단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시인의 고향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는 오장환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오장환문학관에 있는 시비에는 그의 시 '나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글씨는 김성장이 신영복 민체로 쓴 것이다. 민체는 민중체를 말한다. 민중을 지향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