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문학/시와 수필

금동이 2020. 5. 26. 08:30

새벽 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의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사평역(沙平驛)에서

-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 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바람이 좋은 저녁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라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소나기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마음

 

아침 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쌏인 구석구석이며
흙 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군데입니다


작은 창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움켜진 걸레 위에
내 가장 순결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 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꽉차 있는 빛나는 자리입니다.

 

 

 

희망을 위하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도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울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걸어오는

한 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복종

 

밥을 먹다가

바로 앞 당신 생각으로

밥알 몇 개를 흘렸답니다

왜 흘려요?

당신이 내게 물었지요

난 속으로 가만히 대답했답니다

당신이 주워 먹으라 하신다면 얼른

주워 먹으려구요

 

 

 

그리운 폭우

 

어젠 참 많은 비가 왔습니다
강물이 불어 강폭이 두 배로 더 넓어졌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금세라도 줄이 끊길 듯 흔들렸지요
그런데도 난 나룻배에 올라탔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흙탕물 속으로 달렸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빠트린 게 있습니다
내 나룻배의 뱃머리는 지금 온통 칡꽃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종일 꽃장식을 했답니다
날이 새면 내 낡은 나룻배는 어딘가에 닿아 있겠지요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의 지름길은 얼마나 멀고 또
험한지........
사랑하는 이여.
어느 河上엔가 칡꽃으로 뒤덮인 한 나룻배가 얹혀 있거든
한 그리움의 폭우가 이 지상 어딘가에 있었노라
가만히 눈감아줘요.

 

 

 

 

또다른 사랑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꽃이피고

보다
자유스러워지기
위하여
밥을 먹는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 가득한데
또 다른 무슨 사랑이 필요있으리
문득 별 하나 뽑아 하늘에 던지면
쨍 하고 가을이 운다

 

기다림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가거도 편지

 

한 바다가 있었네
햇살은 한없이 맑고 투명하여
천길 바다의 속살을 드리우고
달디단 바람 삼백예순 날 불어
나무들의 춤은 더없이 포근했네

그 바다 한가운데
삶이 그리운 사람들 모여 살았네
더러는 후박나무 숲그늘 새
순금빛 새 울음소리를 엮기도 하고
더러는 먼 바다에 나가
멸치잡이 노래로 한세상 시름을 달래기도 하다가
밤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 한 몸 되어
눈부신 바다의 아이를 낳았네

수평선 멀리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 같은 건 몰라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골프장 주인이 되고
누가 벤츠 자동차를 타고
그런 신기루 같은 이야기는 정녕 몰라

지아비는 지어미의
물질 휘파람소리에 가슴이 더워지고
지어미는 지아비의
고기그물 끌어올리는 튼튼한 근육을
일곱물 달빛 하나하나에
새길 수 있다네

길 떠난 세상의 새들
한 번은 머물러 새끼를 치고 싶은 곳
자유보다 소중한 사랑을 꿈꾸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네
수수 천년 옛이야기처럼 철썩철썩 살아간다네.

 

 

 

 

따뜻한 편지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 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은
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 데
버리지 못한 지상의 꿈들로
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
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첫눈 오는 날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긴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 꽃 한 송이
방싯 꽂아 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또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 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두 사람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꽃길을 지나갑니다
바퀴살에 걸린 꽃향기들이 길 위에
떨어져 반짝입니다

나 그들을 가만히 불러 세웠습니다
내가 아는 하늘의 길 하나
그들에게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불러놓고 그들의 눈빛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그들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아서
불러서 세워놓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천 일이 지나면

 

오늘 내가 한 편의 시를 쓰고
내일 두 편 모레 세 편 쓴다면
천 일 후엔 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때 나는 말하리라
이 아름다운 땅에 태어나
시간이 흐른다고 써야 할 시들을 쓰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시간이 흐른다고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잖겠는가
써야 할 시들은 많은데
바람들은 맑은 햇살을 뿌리며
응달의 강기슭을 돌아가는데
울먹인 가슴 녹이며
이제는 고요하게 지켜보아야 할
두려움 모를 그리움만 들판 가득 쌓였는데
천 일이 지나면 혹시 몰라
이 아름다운 나라에 태어나
내가 하루 천 편의 시를 쓰지 못해 쓰러질 때
그때 말 못할 그리움은 밀려와서
내 대신 쓰지 못한 그리움의 시들
가을바람으로나 흔들려
내 사랑하는 사람들 귓속에
불어넣어주고 있을지.

 

 

 

겨울의 춤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텐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 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 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벌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나무

 

숲속에는
내가 잘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言語(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깡통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받들어 꽃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 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미사일 받아라 끝내는 좋다 원자폭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싸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안 아름을 골라 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 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 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