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문학/작가이야기

금동이 2020. 7. 1. 00:42

출생 - 사망 1916년 1월 16일 ~ 1983년 1월 29일
출생지 경기도 안성
명동시대
1974년 어느 날, ‘명동 백작’이라는 애칭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 1916~1983)가 고혈압으로 쓰러진다. 서울 명동의 오래된 문화적 또는 예술적 상징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증권 회사들이 들어서던 무렵이다. 갑자기 이봉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문화 예술인들의 명동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린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필하모니며, 크로이체, 티롤, 전원 등의 음악감상실이 곳곳에 건재하고, 예술극장, 카페 떼아뜨르, 창고극장 등에서는 연극이 공연되었다. 한두 해 전까지 티롤 등에는 아직 새파랗게 젊었던 황석영, 송영, 조해일 등이 진을 치고 있다가 빠져나가고, 뒤를 이어 서울대학교의 불문과 학생이던 이인성 등 《언어탐구》 동인들이 가끔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명동은 이제 더 이상 문화예술인들의 것일 수 없었다. 개화기 이후 신문화의 활착지로서 문화 예술인들의 메카이자 주요 활동 무대이던 명동은 신흥 개발도상국의 야심 찬 젊은 금융인들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아들일 채비를 서둘렀다.

정치라곤 이승만 대통령밖에 없고, 구호물자, 양갈보, 화랑훈장, 검은 상처의 블루스, 바라크, 꿀꿀이죽뿐이던 시대, 1950년대의 명동은 폐허의 비극적 교회였다. 피난지에서 돌아온 문인들은 구호물자 속에서 건진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초저녁부터 “술 취한 실존주의로 절규하고 떠들고 왁자지껄해지는” 밤의 명동을 연출한다. 그들은 “명동의 무너진 건물 사이의 길을 끼고 노천 주점에서 무겁게 취해”갔다고 고은의 『1950년대』는 증언한다. 이즈음 명동에서는 일본인 아내와 헤어진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화가 이중섭, 불교에 귀의해 무소유의 사상을 실천하며 주로 다방을 무대로 문학 활동을 펼치던 반속반승(半俗半僧) 시인 오상순, 특유의 독설과 배짱으로 서울 문단을 진압해버린 동양고전을 두루 꿰뚫은 괴물청년 김관식, 누추한 외모 속에 천재를 감추고 떠돌던 보헤미안 시인 천상병 등이 함께 어울린다.

그 시절 ‘은성’이라는 대폿집에 들르면 손님도 거의 없는 이른 시각부터 카운터 앞 지정석에 언제나 비품처럼 단정하게 앉아 혼자 술을 마시는 이봉구를 볼 수 있었다. 명동 어귀에 자리 잡고 있던 은성은 훗날 탤런트로 이름을 얻는 최불암의 어머니가 경영하던 술집이다. 은성은 문인·화가·연극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술집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가난한 문화 예술인들의 사랑을 받던 명소였다. 독일 유학에서 막 돌아온 전혜린이 명륜동의 성균관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검정 머플러를 두른 채 명동으로 나오자마자 들르던 집도 은성이다. <연합신문> 문화부에 재직하고 있던 이봉구와 전혜린은 일찍부터 친교가 있었고, 두 사람은 따로 약속 없이도 거기서 자주 만난다. 전혜린이 수면제를 잔뜩 삼키고 세상을 떠나던 날 밤에도 그들은 은성에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자리가 두 사람만의 영결의 자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만.

“그 옛날 모나리자다방으로 돌체다방으로 혜린은 나를 찾아 나왔고, 나를 따라 대폿집에서 술을 마시고 그 큰 눈동자를 굴려가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계속했다. 무심코 나오는 말 한마디에도 센스가 빛났고 그의 말은 하나의 음악이요, 한 편의 시였다.”고 이봉구는 뒷날 전혜린을 회고했다.

환도 뒤 오갈 데 없던 문화 예술인들은 너나없이 폐허의 명동 거리로 몰려나온 것은 그곳에 가면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고, 소주나 막걸리를 공짜로 얻어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봉구는 명동에서 ‘사슴’의 시인 노천명과 마주친다. 두 사람은 <조선중앙일보>에 함께 몸담은 적이 있어서 오래 전부터 꽤 각별한 사이였다.

“노 여사,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이봉구 씨가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노천명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봉구를 쏘아보며 대뜸 따져 묻는다. 시인의 말투에 적대시하는 태도가 잔뜩 묻어났다.
“뭘 말입니까?”
“<조선일보>에 쓴 글 말이에요. 「6·25와 부역 문화인」 말이에요.”
“그건 꼭 노 여사를 겨냥하고 쓴 글은 아닙니다.”
“이봉구 씨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앞으로 당신과는 절교예요. 어떤 자리에서도 날 아는 척하지 마세요.”
찬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노천명은 어느새 뒷모습을 보이며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노천명은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인공 치하의 서울에 남아 있던 이른바 ‘잔류파’의 일원으로, ‘조선문학가동맹’에 협력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정부 환도 뒤 중형을 받고 감옥에 있다가 풀려난 처지였다. 워낙 사교성이 모자란 탓에 남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던 노천명은 그 일을 겪으며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이즈음 노천명은 평론가 조연현과도 한바탕 싸워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조연현은 부역 혐의로 실형을 살고 나온 노천명에게 원고 집필을 권유했고, 그것을 자신이 관여하고 있던 문예지에 싣는다. 재기의 실마리로 삼으라는 뜻에서 원고 청탁을 한 것인데, 그 글이 나가자 조용히 처신해야 할 사람이 설친다는 비난이 노천명에게 쏟아진다. 오해가 생긴 노천명은 조연현을 보자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만나기도 싫어요.”하고 쌀쌀맞게 외면하는데, 그 며칠 뒤 한 출판기념회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조연현이 “노 여사가 무슨 일 때문에 나하고 토라진 거요?” 하고 농담처럼 물으니, 노천명은 대뜸 “너 같은 새끼하고는 말하기도 싫어.”하며 정색을 하고 돌아선다. 며칠 뒤 어떤 신문사 앞에서 그들은 다시 우연히 만나는데, 이때도 노천명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고, 참다못한 조연현은 노천명의 따귀를 갈겨버린다. 당시 《현대공론》이라는 잡지에 한국전쟁 때 부역한 문인들을 비난하는 익명의 글이 실렸는데, 노천명은 그것을 조연현이 쓴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 글이 실렸다는 사실조차 몰랐어. 현대공론사로 함께 갑시다. 가서 누가 그 글을 썼는지 알아봅시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조연현은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그만두자는 노천명을 끌고 현대공론사로가 편집 책임자에게 그 글의 필자가 자신이 아님을 확인시킨다. 따귀를 얻어맞은 노천명은 조연현을 폭행 혐의로 고소까지 하지만, 얼마 뒤 두 사람은 서로 오해를 풀고 고소도 취하한다. 익명으로 실은 그 글은 알고 보면 이봉구가 쓴 것이었다. 결국 이봉구와 노천명은 그 일로 크게 사이가 틀어진다. 두 사람은 공공장소에서 만나도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외면하며 지낸다.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중학을 중퇴하고 낙향해 농촌 계몽운동을 벌이던 이봉구가 소설가로 이름을 내미는 것은 1934년 <중앙일보>에 단편 「출발」을 선보이면서부터이다. 얼마 뒤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대학 청강생이 되는데, 그는 이때 비로소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는다. 1938년 귀국한 뒤 김광균, 오장환, 서정주 등과 《자오선》 동인으로 시를 쓰며 일제 말기를 묵묵히 견디던 이봉구는 이윽고 소설로 전향해 「광풍객(狂風客)」, 「밤차」 같은 단편들을 발표한다. 해방 뒤 그는 주로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한다. 그의 소설들은 문단과 그 주변 인물들이 실명으로 나오는 사소설(私小說) 형식을 취한 것이 많은데, “보헤미안적 인생관과 생활 감정”을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봉구는 전쟁 뒤 김수영, 김광주, 이진섭, 김광균, 박인환 등과 거의 날마다 명동에서 어울리는데, 그토록 자주 술을 마셔도 취해 흐트러진 모양새는 보인 적이 없었다. ‘명동 백작’이라는 애칭도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깨끗하고 단아한 태도 때문에 붙게 된 것이다. 전후의 과장된 허무와 절망감에 젖은 문인들의 술자리는 광태나 추태로 얼룩지는 일이 흔했다. 다만 이봉구가 끼인 술자리는 으레 깨끗하게 끝났다. 그는 술 마시는 동안 세 가지 철칙을 준수하도록 동료 문인들에게 요구했다. 첫째,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꺼내지 말 것, 둘째, 술자리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험담을 하지 말 것, 셋째, 술자리에서 돈 꿔달라는 말을 하지 말 것 등이다. 그는 술을 마시되 한 자리에서 석 잔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이봉구는 생전에 다섯 권의 창작집을 내는데, 『명동 20년』, 『명동』, 『명동 비 내리다』가 그 가운데 세 권의 제목이다. 전후 폐허의 명동을 무대로 문인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을 주로 수록한 이 창작집들은 문학적 평가와는 상관없이 한 시대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담아내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1974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이봉구의 모습은 명동에서 사라진다. 은성도 문을 닫고, 문인들이 모이곤 하던 다방이며 살롱들도 하나둘씩 자취를 감춘다. 명동은 이미 문화 예술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작가며 화가며 연극인들이 하나둘씩 그곳에서 밀려나 자취를 감추며 명동은 이내 유행의 발상지, 소비의 중심지로 바뀌어간다. 명동이 이처럼 빠르게 변모하는 동안 ‘명동 백작’은 수유리 집에서 조용히 투병 생활을 한다. 1983년 1월 29일 이른 11시, 이봉구는 예순일곱의 나이로 삶을 마친다. 그날 명동에는 그의 한 창작집의 제목처럼 스산하게 겨울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