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문학/작가이야기

금동이 2020. 7. 12. 21:50


50년대,60년대의 명동



오상순,김수영,전혜린,서정주,고은,김광균,김광주,화가 이중섭,천상병 등...



아련한 옛날로 돌아가서 그들의 낭만을 한번쯤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그리고 아래 전재하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의 싯귀처럼 두눈을 부릅뜨고 술 한잔을 걸치면서...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 명동 백작 이 봉구

소설가 이봉구는 전쟁 뒤 김수영·김광주·이진섭·김광균·박인환 등의 문인들과 거의 날마다 명동에서 어울렸는데, 그토록 자주 술을 마셔도 취해 흐트러진 모양새는 보인 적이 없었다. <명동 백작>이라는 애칭도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이런 깨끗하고 단아한 태도 때문에 붙게 된 것이다.



전후의 과장된 허무와 절망감에 젖은 문인들의 술자리는 광태나 추태로 얼룩지는 일이 흔했다. 다만 이봉구가 끼여 있는 술자리는 으례 깨끗하게 끝났다. 그는 술 마시는 동안 세 가지 철칙을 준수하도록 동료 문인들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첫째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꺼내지 말 것,

둘째 술자리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험담을 하지 말 것,

셋째 술자리에서 돈 꿔달라는 말을 하지 말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술을 마시되 한자리에서 석 잔 이상은 절대로 마시지 않았다.



이봉구는 생전에 다섯 권의 창작집을 냈는데,<명동 20년>,<명동>,<명동 비 내리다>가 그 가운데 세 권의 제목이다.온통 명동 얘기인 것이다.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명동이 빠르게 변모하는 동안 '명동 백작'은 수유리 집에서 조용히 투병 생활을 했다. 1983년 1월29일 이른 11시,이봉구는 예순 일곱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 이봉구와 술 >



당시 사람들은 소설가로 알려진 이봉구가 도대체 언제 글을 쓰는지 의아스럽게 여기곤 했다.허구헌날 술집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동의 증권 시장 골목께에 '은성'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매일같이 그 술집의 목로 앞에, 마치 한 도사가 정좌하여 도를 연마하고 있는 자세로, 앞에 놓인 대폿잔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 신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봉구였기 때문이었다. 대폿집에 도를 닦으러 왔을까. 아무도 그가 잔을 비우는 것을 목격한 적은 없는데, 어느 사이에 마셨는지 얼굴엔 술기가 올라와 불그스레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밤늦게도 그는 거기에 단좌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종 잡지에 그의 작품이 나와 있곤 해서 사람들이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고들 했다. 당시 명동에 출입하던 시인 박성룡은 이봉구의 주도(酒道)에 대해서 "나는 주도란 것이 있는지 잘 모른다."고 하면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선생은 독작(獨酌)을 좋아한다. 주도에 있어 이 독작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고 들었으므로 선생의 주력은 그만큼 오래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목적 의식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상주(商酒)라 하고, 그리고 폭주는 급수에도 들지 못한다고 하던가? 아무튼 술이란 아무 이유 없이 마시는 게 높은 단수에 속한다.



선생을 만나면 으례 그 분 앞에는 큰 대폿잔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대폿잔은 언제부터 거기 놓여 있는지, 또 언제 비워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바라보고만 앉아 있는 것 같은 것이 선생의 주법(酒法)인 모양이다……".



[ 명동의 은성 시대 ]



戰後 명동 시대, 출구도 없고 회로도 없고 통로도 없는,생에 대한 비극적 통찰과 포만감을 안겨주던 절망과 자의식 속에 들끓던 과잉의 부끄러움으로 모두들 의기소침해 있던 그 시절.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은 명동에서 보냈다.



명동의 필하모니,티롤,그리고 전원음악감상실은 그때 그 시절 그들의 밀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할머니집의 콩나물 국밥,말러의 교향곡,바하의 샤콘,파가니니의 바이올린협주곡,그리고 니체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등이 그 시절 추억의 목록들이었다.



그리고 1950년대의 명동은 "이승만 대통령밖에는 정치가 없고,유솜밖에는 경제도 없고 구호물자와 순이가 에레나가 된 양갈보와 몇 개의 화랑훈장과 검은 상처의 블루스,꿀꿀이죽"뿐이었던 시대,폐허의 현장이었다.



피난지에서 귀환한 문인들은 구호물자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명동으로 몰려나와 초저녁부터 "술 취한 실존주의로 절규하고 떠들고 왁자지껄해지는" 밤의 명동을 연출했다.그리고 그들은 "명동의 무너진 건물 사이의 길을 끼고 노천 주점에서 무겁게 취해"갔다고 高銀의 <1950년대>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 명동에는 일본인 아내와 헤어진 충격으로 失語症을 앓던 화가 李仲燮,불교로 반쯤 탈속한 吳相淳,독설로 유명한 청년 金冠植,누추한 외모 속에 천재를 감추고 있던 千祥炳 등이 함께 어울렸다. 그 시절 은성이란 대폿집을 들르면 손님도 없는 이른 시각에 카운터 앞 지정석에 비품처럼 단정하게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신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소설가 李鳳九였다.



명동입구에 자리잡고 있던 은성은 텔런트 최불암의 모친이 경영하던 대폿집으로 주로 문인,화가,연극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의 사랑을 받던 명소 중의 하나였다.



독일에서 막 귀국한 전혜린이 대학강의를 끝내고 검은 머플러를 쓰고 들르던 집도 은성이다. 연합신문사의 문화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봉구와 전혜린은 오래 전부터 친교가 있었고,그 둘은 약속 없이도 그곳에서 자주 만났다. 전혜린이 다량의 수면제를 삼키고 세상을 떠나던 날 밤도 그들은 은성에서 만났고,그곳에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나,그 자리가 영결의 자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옛날 모나리자 다방으로 돌체 다방으로 혜린은 나를 찾아 나왔고 나를 따라 대폿집에서 술을 마시고 그 큰 눈동자를 굴려가며 이야기를 쉴새없이 계속했다. 무심코 나오는 말 한마디에도 센스가 빛났고 그의 말은 하나의 음악이요 한편의 시였다"라고 이봉구는 나중에 전혜린에 대한 회고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 이봉구의 책, " 명동 20년" ]



거리도 젊고 사람도 젊고 예술 또한 젊었던 해방후 40년대 중반, 화가 사석원의 말처럼 "바람아, 사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 라고 명동 거리로 꾸역꾸역 모여들던 이들이 있었다. 이봉구가 쓴 책 <명동 20년>은 해방을 전후해 명동 일대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술집들이 70년대 들어 무교동으로 옮겨가기까지 작가, 연극인, 음악가 등 문화인이라 일컬어지던 사람들과 함께 술에 살고 사랑에 살았던 지난날의 이야기이다.



그 지난날 명동의 마지막 교두보였던 은성술집에서 있었던 저자 이봉구와 수주 변영로 선생의 일화를 잠깐 들어보자. "주량이 어느 급인가?""아직도 형편없습니다""그러면 애주?""그 급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그동안 그러면 뭘 했어?""죄송합니다" 이게 당시 그들의 대화였다.



<은성술집>이 <봉구술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술집에 살다시피 한 저자 이봉구는 그 시절 명동 술집에 나와 시를 쓰고 사랑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현장 통신원처럼 현장음을 살려 생생하게 들려준다. 드라마에서는 김수영, 박인환, 김관식, 서정주, 전혜린이 주인공이었지만 이 책 속에서는 그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들이 한 꼭지마다 돌아가며 주인공으로 불려나온다.



1945년 조국 광복 속에 명동 거리는 해방이 되었고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스산한 그 거리에 <봉선화>라는 이름의 다방이 첫 꽃을 피운 것을 계기로 하나 둘 떠났던 예술가들이 돌아온다. 1946년 봄부터 1949년 겨울까지 명동거리는 낭만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감격에 겨워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것도 잠시, 오장환을 비롯해 <오랑캐꽃>을 노래하던 이용악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어느새 이 책은 4,50년대 명동을 말하는 생생한 현장통신이 아니라 종군기자가 전하는 비극에 가깝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온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이 갈리는 순간부터 6.25 전쟁 발발까지 명동거리에서 수 많은 예술가들이 사라지고 행방불명이 되고 죽어가게 된 것이다.



"이번 25일은 일요일이니까 토요일에 월급 봉투가 나올 것이고, 덥기 전에 이번 일요일을 한번 근사하게 놀아야 할 텐데..." 그러나 6월 25일 어떻게 즐길 것인가를 떠들던 명동 거리는 빼앗긴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9월. 다시 명동이 손에 들어왔지만 김기림, 이시우, 최재덕, 남궁연 등이 사라지고 없었다.



단골술집 주인들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괘씸해하고 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이들이 그 소식을 궁금해한다. 친구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친구를 목놓아 찾아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폐허의 거리에도 꽃은 피고 다시 명동은 주객들로 불야성이 되었다.



명동장, 무궁원, 돌체, 피가로는 명동 순수파들로 매일밤 대성황. 공초선생 오상순, 서정주, 그리운 옛 이름들. "어디로 가세요. 모나리자 아니면 문예싸롱? 그러면 돌체?-술 하시러?- 그러면 명동장 아니면 무궁원? -아이 참, 새로 난 딱총이라는 술집?" 길에서 만나면 이런 인사가 오고갔다.



술집 <모나리자>는 밤이면 중태에 빠졌다가도 이튿날이면 용하게 깨어나고 하는 예술가들의 주정을 지겨워하는 마담은 "오늘 밤 주정은 어느 정도 어떤 스타일로 하실 심산이세요?'"고 먼저 묻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러다 보니 젊음을 믿고 독주를 즐기던 사람들이 하나 둘 아깝게 쓰러진다. "노란 스웨터와 멋진 양복과 넥타이에다 캡을 쓰고 그 크고도 검은 눈동자를 두리번거리며 심각한 얼굴빛으로 혼자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무슨 탐정 소설의 주인공 같아 유심스레 두세 번 그를 힐끗힐끗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시인 김수영.



알핀 바이올렛 전혜린도 빠질 수 없다. "선생님 저 색시 눈이 무서워요" "누구?"" 잘 아시는 대학생. 머리를 길게 늘이고 그 큰 눈을 두리번거리는 색시말이예요" "아, 저 색시. 법과대학을 다니고 있는 전혜린." 시시한 유행가 따위나 틀어주는 모나리자 말고 순 명곡 다방인 돌체에 가는 걸 좋아했던 천재소녀 전혜린, 어느날 은성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집으로 돌아간 이튿날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나 봐 맥주 좀 줘""또 외상이야?""사랑만 있으면 되지. 빨리 가져와""흥, 참, 내 별일 다 보겠네. 저래도 다짜고짜 정이 들게 하거든." 손님과 술집 마담의 대화였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 사이에서 '명동신사'이란 불리며 사랑받았던 박인환의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위스키를 마신다. 한 잔은 과거를 위해, 두 잔은 오늘을 위해서. 내일을 위해서는, 그까짓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노래했던 명동의 신사, 박인환. '박인환의 <선시집> 출판 기념회는 명동 거리의 청춘과 낭만이 최고조로 꽃 피었던 두 번 다시 없는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인환은 서른 한 살을 일기로 술을 마시고 돌아간 다음날 갑자기 숨을 거두어 버렸다. 친구들은 그 좋아했던 조니 워커 한 병을 죽은 박인환의 입에다 부어주고 자기들도 마시며 그리워했다. "유행가를 짓는 사람이라고 경멸한다면 명동 거리의 인사가 아니야" 라고 누가 말했던가.'명동신사'라고 불리우던 박인환은 불후의 명동샹송을 하나 남겼는데 바로 <세월이 가면>이 바로 그 노래였다.



박인환이 술에 취해 쓰러지고 동방싸롱 설립자 김동근이 뱃놀이로 빠져 죽고 김인수 또한 술잔을 손에 든 채 쓰러진다. 함대정이 죽고 조각가 차근호가 자살한다. 천재화가 이중섭도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아는 얼굴들이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궁금하다. 어디로 가야 그래도 아는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렇지,은성에 가면 더러 만나볼 수 있지."



명동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순정지대의 주막>같다는 은성으로 몰려들고 그 곳은 명동의 마지막 교두보가 된다. 예술가 아닌 손님들은 "개뿔도 없이 문화인들은 멋에만 산다"고 빈정되었고, 예술가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마음에 무슨 상처가 있는' 마음에 금이 간 사람들. 그러나 금이 갔다고 버릴 수 있어요? 모두 까닭이 있어 금이 간 것" 이라고 20년 은성술집 경영에 문화인이 다 된 마담이 쓸쓸히 대꾸한다.



"수주 가고, 또 공초가 가고!" 어느새 수주 변영로도 술병으로 세상을 뜨고 술은 못 마시는 대신 담배는 지독하게 피워대는 공초선생 오상순도 조계사에 늙고 병든 몸을 의탁했다 결국 세상을 뜨고 만다. 전혜린의 죽음 후 김흥수가, 그리고 윤용하가 여름날 굶주림에 허덕이다 산 밑 판잣집에서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박수근도 죽는다.



그런데 그 시절, 밥 사먹을 돈도 없었다는 가난한 그 시절, 왜 예술가라고 자처하던 이들은 그렇게 새벽같이 일어나 명동으로 몰려들어 하루종일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댔을까? 왜 하필이면 술을 마시고 죽어가야 했을까?



명동의 문화인이었던 연극인 이해랑이 수필 <애주>를 빌어 그 이유를 말한다. "친구도 술친구가 그 중 좋다. 술친구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들 하지만 내 경우는 그와는 다르다. 우선 술친구는 서로 흉허물이 없어서 더 구수한 정이 가기 때문이다."

시인 조병화는 이런 그들을 계보없는 가족이라고 불렀다.



이봉구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그래, 그들은 너무도 가난한 나라에 그마저 예술가가 할 일도 별로 없던 시절에 태어난 것이다. 할 일을 찾아 예술인들이 많은 명동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했고, 그 곳에서 시를 쓰고 원고를 청탁받고 원고료를 받으러 돌아다닌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술이었다"



전혜린의 얘기를 들어보자. "감옥, 자살, 알콜 이 세 가지 길에서 독일의 레지스탕스는 싸워왔어요. 지조를 지키고 방위하기 위하여 감옥으로 잡혀갔고,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고 가장 약한 방법으로는 어두운 술집에 숨어 앉아 알콜에 몸을 담그고, 알콜처럼 고마운 건 없어요. 선생님, 알콜에 중독은 절대 안 되지만 지조를 지키는 덴 필요한 음료수예요."



이봉구는 다음과 같이 <명동 20년>을 끝 맺는다.



"이제 다들 떠난 그 자리에 은성술집의 새로운 단골이 된 여대생이 이미 죽은 지 10년이 넘은 지금, 박인환의 명동 샹송 <세월이 가면>을 불러본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그리고 화려했던 명동시대는 끝이 나 무교동 시대로 이어지고..."



"내가 운명을 같이해 온 명동 20년! 그리운 그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 속에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잘 있거라 명동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