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연주가 이야기/바이올린 연주가

금동이 2020. 7. 18. 08:10


요약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20세기의 거장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누르고 1935년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의 우승을 거머쥔 전도유망한 음악가였으나 1949년 비행기 사고로 일찍 생을 마감했다.

비행기 사고로 생을 마감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1919년 8월 11일 파리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지네트 느뵈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었던 느뵈는 1926년 파리에서 일곱 살의 나이로 가브리엘 피에르네(Gabriel Pierne)가 지휘하는 콜론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며 바이올린 신동의 탄생을 알렸다. 느뵈는 이후 파리 음악원에서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뒤 당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제오르제 에네스쿠(George Enescu)와 칼 플레시(Carl Flesch)를 사사했다.

바이올린 신동이 성숙한 음악가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1935년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 우승이었다. 이때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의 거장으로 성장하게 될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는 2위에 머물렀다.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우승 이후 느뵈는 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이어갔다. 2차 대전 발발로 연주 활동을 중단하기 전까지 느뵈는 미국, 캐나다, 소비에트 연방, 독일, 폴란드 등지를 순회하며 연주를 했다. 중단했던 연주 활동을 재개한 것은 종전 후인 1945년이었다. 런던에서의 첫 연주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느뵈는 세계를 누비며 연주를 했고 어디에서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1949년 10월 20일에도 여느 때와 같이 성공적인 무대를 마친 그녀는 10월 28일에 파리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너무나 가혹하게도 촉망받는 젊은 음악가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조레스 군도의 산 미구엘 섬 비행장에 착륙하려던 비행기가 두 번의 착륙 시도 끝에 산에 추락해버린 것이다. 비행기에 탑승했던 48명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적 사고였다. 이 비행기에는 지네트 느뵈의 오빠인 피아니스트 장-폴 느뵈(Jean-Paul Neveu)도 함께 타고 있었다. 여동생의 반주를 해주기 위해 함께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남매는 이렇게 느뵈의 소중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과 함께 영원히 세상을 떠났다. 이때 느뵈의 나이는 고작 서른 살이었다. 세계적인 연주자로 승승장구하리라 믿었던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의 사망 소식에 전 세계 음악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느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작곡가 프랑시스 풀랑크는 느뵈를 위해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을 수정했다.


목숨을 앗아간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느뵈가 프랑스의 복서 마르셀 세르당과 대화하고 있다. 가운데는 느뵈의 오빠 장-폴 느뵈이다.

ⓒ Bettmann / CORBIS | All rights reserved

느뵈는 열정적이면서도 정교하고 세련된 연주를 했고, 특히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소나타〉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연주가 탁월했다. 젊은 나이였지만 그녀의 연주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해버린 느뵈의 연주는 소수의 음반으로만 남아있다. 느뵈는 1946년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브람스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다. 지휘는 각각 이사이 도브로벤(Issay Dobrowen)과 발터 쥐스퀸트(Walter Susskind)가 맡았다. 이밖에도 드뷔시의 〈바이올린 소나타〉, 쇼송 〈시곡〉, 라벨의 〈치간느〉, 파야의 〈스페인 무곡〉, 슈트라우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요제프 수크의 〈네 개의 소품〉 등을 녹음했다.

참고
ⓒ 음악세계 & 음악사연구회(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음악세계와 음악사연구회가 공동 개발한 것으로,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