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해문 칼럼

고래 2010. 7. 8. 09:00

고래가그랬어 57호  편해문 칼럼 |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안전한 놀이터 만들기 

운동을 제안하며



흙과 모래는 무엇이든지 쉽게 만들 수 있어 아이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놀이 재료이다. 이러한 아이들의 흙과 모래 사랑은 오늘날에도 식을 줄 몰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놀이터에서도 흙이나 모래를 부어놓기만 하면 아이들이 모여든다.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흙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참 놀랍고도 희망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아이들은 흙이나 모래만 있으면 한두 시간은 거뜬하게 파고, 옮기고, 덮고, 뚫고, 길을 만들고, 물을 붓는 온갖 놀이를 하며 논다.

이런 모래나 흙 놀이를 보고 있자면, 나이 어린 아이들이 30분 이상 한 놀이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맞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주장은 아이들이 놀이에 쏟아 부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줄여, 그 남은 시간에 다른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시간 확보에 기여하려는 듯하다. 아이들은 푹 빠질 만한 놀이를 만나기만 한다면 아주 오랫동안 놀이에 몰입할 수 있는데, 이런 기본적인 생각들이 교육 현장에서 외면되고 있다.

모래 놀이를 하기에 제일 좋은 곳은 모름지기 바닷가다. 언젠가 바닷가 어촌 마을에 갔을 때,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다닐 만한 나이의 아이들이 뱃머리 그늘 아래 앉아 모래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참 한가로우면서도 진지한 태도였는데, 오랜 시간을 그 놀이에 몰두해 있었다. 조그만 아이들이 참 깊고 넓게도 파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놀고 있었는데, 그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자연이 주는 놀이터에서 멀어진 도시 아이들의 모래 놀이가 떠올랐다.

어촌 아이들의 모래 놀이를 지켜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지나가는 어른이나 다른 친구들, 동네 동생이나 누나나 형들이 끊임없이 놀이에 영향을 주어, 모래 놀이가 극놀이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모래 놀이터는 모래 놀이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모름지기 놀이가 제대로 되려면 이름 붙여진 그 놀이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무엇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모래 놀이터가 모래 놀이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시간이 덧보태지기만 하면 된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또는 동네 놀이터의 작은 모래밭이라도 신이 나서 파헤치는 아이들을 보면, 그 모습이 어여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편치 못한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 사실 도시 한가운데 있는 놀이터의 모래나 흙의 오염 정도는 몹시 심각하다. 다른 나라의 경우, 마을 주민들이 아이들 놀이터 관리를 자발적으로 맡아 정기적으로 모래와 흙을 갈아주고, 망가져서 위험한 놀이기구는 손질하고, 우범지대가 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해 차례를 정해 돌아가며 살펴 '안전한 놀이터 문화 만들기'를 하고 있는 것을 배웠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지식'을 만나게 해야 하는 것처럼 '놀이'도 만날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최근 서울 성미산을 비롯한 몇몇 동네에서 아이들의 골목 문화를 되살리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반갑다. 이처럼 놀려면 가장 먼저 놀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전한 놀이터 만들기'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 편해문 삼촌은 놀이와 노래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있습니다.


 고래가 그랬어 57호



 
 
 

편해문 칼럼

고래 2009. 4. 3. 13:31

 

학교와 이런 저런 학원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을 본다. 오늘 아이들에게 학교와 학원과 집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이 세 곳의 이름은 다르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것을 강요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여기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아이들도 사람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할 수는 없다. 무엇인가 새롭고 재미있는 일을 꾸미며 아이들도 놀고 싶다. 어른들은 이 세 곳 어디에도 자신들만의 놀이터를 만들지 못하고 겨우 쉬는 시간에 복도나 뛰어다니며 답답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아이들을 외면한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런 삶을 어느새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학교, 학원, 집을 맴돌이 하는 아이들의 기운 없는 뒷모습이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많은 부모들은 지금 이 시간에 당신들의 아이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 그냥 어디서 동무들하고 놀고 있겠지,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학원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아이들을 멀리서도 볼 수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이렇듯 아이들에게 허락된 빈틈이란 게 없는 것이 오늘 아이들의 현실이다. 아이를 돌봐야 할 부모와 교사는 어느새 서로 다른 감옥의 충실한 간수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셈이다.

 

놀이라면 마땅히 온몸으로 노는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생각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안다. 게임을 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시들고 있다는 것을, 무언가 상쾌하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도 느낀다. 그러나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주변에 많지 않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놀이터를 부수고 큰 건물과 큰 도로를 내고 놀이시간을 이런 저런 지식과 공부와 학습이라는 상품으로 꽁꽁 틀어막는 일에 잠 안 자고 헌신했다. 양심이 있는 어른들이라면 학교와 학원과 집에서 시달린 몸과 머리를 피시방으로 잠시 끌고 들어가 쉬는 오늘 우리 아이들을 나무랄 수 없다. 왜 우리는 이렇게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것일까.  

 

나는 옛날 아이들이 했던 놀이가 좋으니 그런 놀이를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틈과 터,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과 또래를 먼저 보고 가장 뒤에 놀이를 보아야 한다. 놀이거리가 없어도 놀 틈과 놀 터와 놀 또래만 있으면 아이들은 잘 논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 놀지 않는 까닭은 놀이거리가 없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아이들은 오히려 놀 것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놀아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자본이 큰 돈을 쏟아 부어 만든 놀이라는 것이 결국 게임인데, 모두 실내에다 아이들을 몰아넣고 점점 더 수동적으로 만드는 놀이들이라는 데 있다. 지금 당장 아이들에게 놀 수 있는 틈과 터를 마련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가장 시급한 우리 사회의 의제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실내에서 나올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오늘 하늘을 한 번 볼 겨를이 있었는지 물어본다면 아이들은 뭐라고 대답을 할까. 하기 싫은 공부와 매일 하는 게임으로 마음은 메말랐는데 하늘은 웬 하늘이고, 틈과 터가 없는데 놀이를 어디다가 쓰겠는가. 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을 때 아이들은 옛날 놀이와 요즘 놀이에 갇히지 않는 자신들만의 놀이문화를 스스로 만들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할 놀이가 없고 놀 방법을 모르는 것에 가슴 아파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가슴 아파하는 것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틈과 터를 없애버리고 이 아이들을 모두 다 학원으로 실어 보내는 우리 모두의 가엾은 모습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편해문, 삼촌은 놀이로 세상과 만나고 있어.

 

고래가그랬어 56호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편해문이라는 석자. 깊게 들어옵니다.

 
 
 

편해문 칼럼

고래 2009. 3. 27. 17:16

 

아이들 놀이가 가장 신명나게 뿜어져 나오는 환경은 어떤 것일까? 당혹스럽게도 그것은 전쟁 직후의 폐허 속이다. 전쟁 직후 폐허로 바뀐 환경은 어른들을 절망 속으로 깊게 빠뜨릴 테지만 아이들은 폐허에 물들지 않는다. 폐허로 변한 환경은 최고의 놀이터와 놀잇감이 가득 찬 세계로 아이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삶의 가장 힘든 시기야말로 희망이라는 씨앗을 뿌리기에 가장 좋은 때가 아니던가.


이런 내 생각에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으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오늘 아이들이 이 정돈되고 반듯한 시공간에서 무슨 놀이를 할 수 있는지. 위험하니까, 더러우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니까……. 놀이를 금지하는 이유는 왜 이렇게 늘어만 가는지. 세상과 어른들은 왜 갖은 구속과 핑계로 아이들을 얼어붙게 하는지. 무릎이 까지고 넘어지고 구르지 않고 어떻게 놀이와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은 자신들이 놓여 있는 현실과 처지와 질곡에 파묻히지 않을 힘이 있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 꿈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가장 척박한 땅에 가장 아름다운 놀이의 꽃은 핀다는 아이들 놀이의 대명제를 기억할 일이다. 아이들로부터 놀이를 빼앗은 것은 다름 아닌 ‘풍요’라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이 풍요라는 것이 아이들에게 가져다준 변화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했던 것처럼 아이들을 울타리 안에 가두는 일이다. 지금 아이들은 울타리 바깥의 세계를 모른다. 울타리 바깥세상에는 눈 돌리지 못하게 게임과 텔레비전은 아이들 눈과 귀와 손가락을 묶는 데 꽤 성공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이 생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더러 만나보면 무엇인가를 어려워하고 말끝마다 “힘들어요.”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이들이 힘들다니! 힘들다는 말은 어른들 입에 붙은 말이 아닌가. 왜 어른들은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쪽으로만 머리를 쓰는 것일까. 마지막 세 번째는 마음뿐 아니라 몸도 망가져 간다는 것이다. 병원을 밥 먹듯이 가고 몸에는 온갖 오염된 음식과 환경에 노출되어 독성 물질과 온갖 내분비계를 교란시키는 환경호르몬이 쌓여 있고, 신경계통에 치명적인 중금속의 양도 상당하다. 이것이 풍요가 아이들에게 가져다준 결과이다. 이들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고 건강한 아이로 키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이들을 놀도록 더욱 힘껏 도와야 한다. 노는 아이는 울타리를 뛰어넘고, 숨이 차지 않고, 지독한 환경에도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들을 구원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놀이다.  

 

편해문, 삼촌은 놀이로 세상과 만나고 있어.

 

 

고래가그랬어 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