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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도 전주 남고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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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2020. 5. 30.

천년 고도 전주 남고산성

고덕산 자락을 따라 쌓은 이 산성은 고덕산성으로도 부르며,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인 전주의 방어를 위해, 쌓았다 하여

견훤성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때 왜군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인데, 그 뒤 조선 순조 13(1813)에 고쳐 쌓고 남고산성이라 했다. 남고산성 안에는 많은 주민이 살았으며, ·서에 성문을 두고,관아 · 창고 · 화약고 · 군기고 등 각종 건물이 즐비했다. 산성 방어의 지휘소로 남장대(南將臺)와 북장대(北將臺)를 두고 ,남고사의 승려들을 산성 수호에 활용했다. 남고산성은 성벽이많이 허물어졌는데, 현재 성의 둘레는 약 3km이다. 현재 성안에는 남고사와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모신 관성묘(關聖廟)그리고 산성의 시설 및 규모와 그 연혁을 기록한 남고진(南固鎭)사적비가 있다.

남고산성 안내도

서문지(西門址)남고산성의 서쪽 성문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통로는 길이 6.0m, 2.9m로서, 좌우측의 벽은 화강암 절석을 짜맞추어 쌓아 올렸던것으로 파악된다. 동쪽 벽은 무너졌지만 내외의 우주석(隅柱石)남아있고, 서쪽 벽은 상부가 결실되었으나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다. 서문은 석축으로 된 성벽 통로 위에 문루(門樓)를 설치하였는데남고진사례(南固鎭事例)에 의하면 홍예문으로 6이었다고 전해진다.

남고진 사적비 

이 비석은 남고산성의 축성 경위와 남고진 설치에 관한 기록으로1846(헌종 12)에 세워졌다. 비신의 높이는 132cm, 폭은 54cm,두께는 26cm이며 비석의 글씨는 창암 이삼만이 썼다고 전해진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고산성은 견훤의 옛 성터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고사(召募使) 이정란이 수성하여 왜적을물리쳤다. 이후 1734(영조 10)에 관찰사 조현명성을 복구하려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11(순조 11) 관찰사 이상황이 부노(府老)들과 더불어 성을다시 수축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1812년에 남고산성이 완성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보덕(普德)의 제자 명덕(明德)668(신라 문무왕8)에 창건하며 남고연국자(南高燕國寺)라 이름 지었. 오늘날의 이름인 남고사(南固寺)라 칭하게 된 것은 조선 성종이후였다고 한다. 주변에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의 삼봉(三峰)있어 경치가 빼어나서, 예로부터 해질녘에 들리는 남고사의 저녁종소리를 남고모종(南固暮鐘)'이라 하여 전주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남고사

 

억경대에서 본 전주 시내 전경

 

 

 동포루지

동포루지는 남고산성의 동벽과 남벽이 만나는 모서리에 위치하여 침입하는 적을 감시하기위해 조성된 곳이다. 성벽을 구성하는 성돌의 형태와 기법 등으로 보아 두 차례에 걸쳐 동포루지 일대에 쌓았고, 성벽 외측에서는 누각 형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동포루지의 성벽과 건물지 조사에서 발견된 유물과 축조기법을 고려하면 고려~조선시대의 것으로판단된다.

 

천경대에서 본 전주 시내

 

천경대 오르는 돌 계단길을 나무 계단으로 6월 까지 설치 공사 중입니다

서암문지

암문은 성의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리한 곳에 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꾸민 작은 성문이다. 남고진사례에는암문이 2곳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지지 (大東地志)에는 3곳이었다고 전해진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서암문의 높이는 2.1m이고, 통로 폭은 2.1m이다.길이는 4.7m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바깥면에서 안으로 1m 들어선중앙에는 길이 39cm, 높이 18cm의 문 빗장석이 박혀있고 그 양쪽통로 벽면에는 문설주석이 남아있다.

 

충경사

충경사는 임진왜란 의병장 이정란의 공적을 기려 세운 사당이다. 이정란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모았다. 64세의 나이로 말을 타고 전쟁에 나아가 300여 명의 왜군을 무찔렀고 그 공훈으로 전주부성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공의 용기와 충정을 가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순조때 충경공의 시호를 나라에서 내렸다. 오늘날 전주시를 동서로 가로지른 도로를 충경로로 명명한것은 충경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충경사

산성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