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짓기/책과 생각

두스두스 2014. 6. 5. 15:41

일본의 굴레 야스쿠니 신사

노길호 (2001)

 

1장 야스쿠니 신사의 건립

 

일본은 과거 도쿠가와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군사 정부)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다. 당시 천황은 막부의 권력을 인정하는 권위만을 대표하는 허수아비였다. 그러나 근대가 시작되면서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메이지[明治]천황)을 옹립하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로 바뀌게 되는데, 이 사이에 신(新)정부와 구(舊)막부 사이의 전쟁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죽은 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초혼사라는 사당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야스쿠니 신사(神社)의 전신이다. 이후 신정부가 탄생하지만 신정부 내부에서 갈등이 생겨 전쟁이 발발하고 전사한 정부군을 위한 신사인 초혼사는 야스쿠니 신사로 승격되게 된다.

 

6세기에 불교가 백제를 통해 일본에 들어오기 전에 일본에는 전통신앙으로 신도(神道)가 있었다. 불교의 유입이후, 신도와 불교는 공존하였으나 메이지 천황 시대(1867년~ 1912년)에는 아마테라스를 조상신으로 하는 황실 신도를 중심으로 계열화되어 국가신도(國家神道)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국가 신도는 모든 종교위에 군림하는 초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천황은 국가신도의 제주(祭主)로서 일본인을 정신적으로 지배했다. 이러한 국가신도는 천황제 이데올로기 형성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국가신도는 천황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를 제신(祭神)으로 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정점으로 전국의 신사가 계열화되었다.

 

청일전쟁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침략전쟁에 따라 전사자들이 증가했다. 그런데 메이지 정부는 사망자의 종교와 유족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전사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시고 모든 제사 의식은 신도식으로 실시했다. 따라서, 전쟁을 할 때마다 야스쿠니 신사의 신은 증가한다. 이것이 야스쿠니 신사가 다른 신사와 성격이 다른 이유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는 대상자의 내역은 대동아 전쟁(태평양전쟁)의 전몰자 2,131,747명, 중일전쟁의 전몰자 191,039명, 러일전쟁의 전몰자 88,429명 등 총 2,464,151명이며 이 중 민간인(문관, 여성 등)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몰자만 있다는 오명을 벗기 위해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어 참배해도 거북스러울 것이 없다는 주장은 침소봉대(針小棒大)와 같다. 게다가 야스쿠니 신사의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은 일본의 육․해군이 관할하므로 그야말로 오롯한 전쟁신사인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지는 경우는 전쟁 중 부상이나 사고, 포로가 되어 사망한 경우뿐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경우, 질병으로 죽은 자가 전체 사망자의 86%에 달하자 육해군 측에서는 앞으로의 전쟁에서 군의 사기 문제를 고려해 이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시게 된다. 원래라면 야스쿠니 신사에 모실 수 없으나 천황 폐하의‘특별한 은혜(?)’로 신사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2장 전전(戰前) 야스쿠니 신사의 역할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자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천황 편에 서 있다 죽은 자들이다.

대표적으로, 막부 말기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학자였는데 막부가 아닌 천황을 중심으로 서양을 물리치자는 주장을 펼치다 막부에 의해 처형당한 인물임에도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다. 그러므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고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을 천황에 두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메이지 천황이 이름 붙인 야스쿠니(靖國:정국)라는 뜻은 ‘국가를 평안하게’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야스쿠니 신사가 마치 ‘평화의 전당’이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이 메이지천황이 일본헌법상 군통수권자로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수많은 민초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은 경악스러운 아이러니이다. 뒤로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을 지속적으로 일으켜 수많은 자국의 전몰자 신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천황을 위해 국가를 위해 몸 바친’ 야스쿠니 신사의 신들이 245만 명이나 만들어지기 위해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어야만 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는 침략전쟁 수행 및 전쟁 승리 결의 대회 장소 또는 침략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시키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형성의 장(場)으로 이용되었다.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매월 전승 기원제가 열렸으며, 전쟁 중 사망자를 신으로 모시는 제사에는 학생들을 집단적으로 참배시켰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후 1942년 2월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국민 궐기 대회를 열어 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 동원 체제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3장 전후의 야스쿠니 신사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을 선언하고 연합국 군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GHQ는 일본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일본 정부에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간접 통치 방식을 택했다. GHQ는 국민들 사이에 천황제와 군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갖도록 하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된 국가신도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1945년 12월 15일 GHQ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요구하는 지시 즉, 국가신도를 해체하라는 일본 정부에 내렸다. 이어 일본 정부가 신도 및 신사에 재정적 지원이나 공적요소를 투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GHQ는 국가신도의 해체를 주장했으나, 전국의 10만여 개 신사의 대부분은 전통적 신앙인 신도의 종교시설로 인정하였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 메이지신궁, 노기신사 등 군국주의적․초국가주의적 성격이 짙은 국가신사는 강제적으로 폐쇄하기보다 국가신도에서 벗어나게 하여 일반적 종교시설로 탈바꿈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야스쿠니 신사는 1946년 9월 7일 하나의 종교 법인으로 등기함으로써 종교시설로 남게 되었다.

한편, GHQ의 지시에 따라 일본 정부(문부성)은 학생의 이세신궁에 대한 배례와 학교 인솔하의 신사참배를 금지시켰다. 게다가 천황은 조서(‘인간선언’이라 불리는)를 발표하여 천황의 신격성을 스스로 부정하였다. 이런 방법을 통해 GHQ는 국가신도 체제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GHQ의 종교정책은 그대로 일본의 평화 헌법에 반영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였고 국가 또는 그 기관은 종교 활동, 종교 교육 및 종교에의 재정적 지원을 금지하였다. 이 조항이 후에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의 위헌 여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찬성 논리

일본 유족회 등은 야스쿠니 참배를 목표로 1976년 ‘영령에 보답하는 모임’을 결성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평화를 지키려고 했던 전몰자를 경의와 감사의 뜻으로 기리는 행위이므로 국가적으로 적절한 의례를 갖추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뿐만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용기를 내어 행동해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일본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자민당은 국가를 대표하는 총리가 총리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내걸었다. 이에 1985년, 일본정부는 사회통념상 헌법이 금지하고 있는 종교적 활동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해당되지 않으므로 신도의식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가운데 참배를 할 것임을 결국 밝혔다. 이상의 찬성 논리는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전몰자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야스쿠니 신사가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미화시키고, 전사자를 신으로 모시는 군사적 종교시설이었음을 간과하고 있는 주장이며 전몰자들이 아시아 민족에게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외면한 주장이다.

 

◯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반대 논리

일본 유족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유족들 중,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또한 크리스트교 유족회(1969년 발족), 아사히가와 평화 유족회(1982년 발족)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일본 헌법의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은 공무원이나 국가기관이 종교와 결부되어 어떠한 방법에 의하든 종교를 원조, 지지 또는 권위를 부여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참배란 종교행위 그 자체이며 어떠한 종교, 종파에 의하든 공무원이 공식 참배하는 것, 즉 공적자격으로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육해군이 관리하고 헌병이 수위소를 지켰던 야스쿠니 신사는 전사하면 신(神)인 천황이 참배해 준다고 하는 ‘영예’에 의해 전사(戰死)의 권유를 교육하는 군국주의 시설이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하나의 민간 종교 단체로서 A급 전범자를 비밀리에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제멋대로 모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할 수 없게 했고, 한국 대만 등 외국인이나 기독교 신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는 것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해도 결코 응하지 않는 특수한 신사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몰자를 신으로 모시는 의식을 통해 가족을 빼앗긴 유족의 원한을 다른 곳으로 돌려 천황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유발시켜 새로운 전쟁 수행 에너지로 전환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미국의 알링턴 묘지나 무명용사의 묘지에 해당하는 것은 신으로 받들어지는 야스쿠니 신사가 아니라 치도리가후치(千鳥ヶ淵)전몰자 묘지이다. 이와 같이 누구나 추도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에 공식 참배하는 것은 전범자 들을 칭송하는 것이며,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전전의 군국주의․파시즘의 면죄를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전몰자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당시 정부의 잘못된 전쟁 정책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된 희생자들이다. 이 사실을 감추고 전사자들을 미화해 ‘조국과 동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전의 정부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자민당 정부가 과거의 전쟁 책임을 감추려는 것’이다. 패전을 맞을 때까지 일본은 아시아 국가에서 몇 십 년에 걸쳐 많은 민중을 괴롭혔다. 정규적 전투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피해자가 된 아시아 민중의 입장에서는 전몰자 또한 명백한 침략군의 병사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침략 전쟁의 가장 큰 책임은 근대 천황제 국가 체제 속에서 전쟁을 계획하고 수행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군국주의 지도자들이었다. 이 군국주의의 정신적 뿌리가 국가신도이며,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전사하면 야스쿠니 신사의 신이 된다.’,‘천황을 위해 국가를 위해 흔쾌히 죽을 것’을 세뇌하는 곳이 야스쿠니 신사였다. 야스쿠니 신사는 현재도 전사자를 유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신으로 모시고 있는 종교 법인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1985.08.15 나카소네 총리 공식 참배)에 대한 일본 사회의 여론을 살펴보면, 연령별로 차이는 있으나 모든 연령층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경제 대국이 되면서 민족적 자부심이 높아지고, 메이지 시대 이후 아시아 민족에 대해 가해자였다는 의식이 엷어져 가고 있는 일본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더욱이 일부 일본의 학자들은 과거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의 경제 발전을 과거 일본의 식민정책과 관련짓거나,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에 대하여 독일 나치스와 비교하며, 나치스는 법을 어기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면서 일본은 법을 준수하며 동아시아 신질서 형성에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은 지지 쪽으로 기울었지만 일제에 의한 침탈을 당한 아시아 국가의 큰 반발을 가져왔다. 특히 중국 정부에서는 ‘군국주의가 야기한 침략전쟁의 성질을 부정하고 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며 비난했다. 이에 따라 당시 일본 나카소네 총리는 참배를 보류하게 된다. 그러자 일본 우익 압력 단체는 참배 보류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어 일본 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어 결국 총리의 신사 참배는 한동안 보류(1986~1995)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머지 각료들의 참배는 계속되었다.

 

전전 야스쿠니 신사는 육․해군 관할이었지만 전후 육․해군은 해체되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7만5천명의 경찰예비대(자위대의 모체)가 조직되면서 야스쿠니와 자위대는 별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야스쿠니와 자위대는 전몰자 추도 시설과 국가 방위 조직이라는 면에서 애국정신 함양 형성 장소로서의 공통점이 있다. 이에 각 지역의 호국신사는 자위대 대원이 순직한 경우 순직자를 호국신사의 신으로 모시는 운동이 전개되던 가운데, 교통사고로 사망한 자위대원을 호국신사에 모시려 하자 크리스트교인 미망인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자위대 출신으로 구성된 사단법인인 대우회(隊友會)에서 호국신사에 모셔버리게 된다. 그러자 미망인은 소송을 제기하였다. 1심과 2심에서는 미망인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대법원은 3심에서 미망인은 패소하게 된다. 종교적 인격권에 대해 타인에게 강제나 불이익이 수반되지 않는 종교상의 행위이므로 미망인의 법적 이익이 침해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또한 지방 자치 단체에서 공공비용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헌금 등으로 지급한 것에 대해 여러 지방에서 소송을 제기했고, 이에 대한 판결도 헌금 지급에 대해 합헌 또는 위헌으로 양분되어 있다. 한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위헌 소송도 각지에서 제기되었지만 이 소송들은 모두 원고 측 패소 판결이 났다.

 

 

4장 전후 야스쿠니 신사, 당국자의 역사 의식

 

야스쿠니 신사 내에는 유취관(遊就館)이라는 전시관이 있다. 유취라는 단어는 고결한 인물을 찾아 어울리며 배운다는 뜻이다. 이 전시관은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는 사람들의 유품과 메이지 시대와 더불어 일어났던 전쟁들과 관련된 유물이나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들 자료를 살펴보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청일전쟁을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극동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발생한 전쟁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러일전쟁을 한국을 일본의 보호 하에 두는 것을 러시아가 거부해서 발생한 전쟁으로 보고 있으며,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본은 극동의 안전과 권익을 유지하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여 국제적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고 썼다. 이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한일합방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게 되는 아픔은 그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다. 야스쿠니 신사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던 전범들과 같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전범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이처럼 현재 야스쿠니 신사측이 갖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역사의식은 메이지 정부 지도자와 전전 군국주의자들이 가졌던 침략 주의적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으로써 패전을 맞이했다.

이에 연합국은 1946년 5월 3일 전범재판(극동 국제 군사 재판, 도쿄재판)을 진행시켰다. A급 전범은 세계 평화에 위협을 준 죄로 침략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행한 자이며, B급 전범은 침략전쟁의 감독, 명령을 내린 자이며, C급 전범은 명령을 받고 침략 전쟁을 직접 수행한 자이다. 전범재판은 1948년 11월 12일 판결을 내렸다. 태평양 전쟁 시작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 등 7명이 교수형, 16명 종신형, 1명이 20년형, 1명이 7년형이었다. 연합국 중에는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원활한 일본 통치를 위해 불기소하기로 한다. 1948년 12월 23일 7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일본은 1951년 9월 8일 48개 조약을 연합국과 맺으면서(샌프란시스코 조약) 전범재판의 결과를 수락하였다.

일본은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점령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회복하였다. 이때 일본은 도쿄재판과 아시아 각지에서 행해진 B․C급 전범 재판 이외에 일본 스스로 전쟁 범죄에 대한 재판은 하지 않았다. 재판은커녕 도쿄재판이 ‘승자에 의한 일방적 복수’라는 주장으로 펴는가 하면, 마치 일본이 아시아 민족, 황색 인종을 대표하여 유럽민족, 백색 인종과 당당히 싸우다가 패배했다는 인식마저 보이고 있다. 이에 일본 사회의 보수화가 두드러지고, 보수세력이 도쿄재판은 부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던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 14명을 유족에게 사전 통고하지 않은 채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셨다. 이것은 A급 전범이라는 것은 점령군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강행한 군사행동으로 도쿄재판의 희생자이며 일본 국민의 눈에는 조국을 위한 순국자이자 전범은 아니라는 논리이다. 이처럼 도쿄재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천황의 전쟁책임에서는 그 반대논리를 편다.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도쿄재판에서 기소하지 않았으므로 천황에게는 전쟁 책임이 없다는 논리이다. 참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목에 걸면 목걸이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