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해찬솔 2020. 5. 28. 06:30

온 우주의 기운이 이곳으로 몰려와 소원을 이루어줄 것만 같은 통영 서피랑 99계단

 

 

햇살이 자글자글 익어가는 요즘입니다. 덩달아 시원한 아이스크림콘을 떠올리기 좋을 때입니다. 이름만으로도 시원하고 달콤함이 떠올라 침이 먼저 고이는 곳이 통영 서피랑 구구 계단입니다.

서피랑 주차장에 차를 세웠습니다. 얕은수를 쓴 셈입니다. 아래에서 올라오기보다 내려가는 게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꼼수입니다. 주차장에서 서피랑 공원으로 가는 길은 싱그럽습니다. 통영 바다의 시원한 바람이 햇살에 익어가는 뺨을 어루만지고 지납니다.

박경리 선생의 생가가 인근에 있어 그런지 문화 배수지 담벼락에 쓰여 있는 선생의 어록들이 더욱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정표가 길 잃을까 너무도 친절하게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오가는 바람과 인사를 나누며 잠시 벤치에 앉습니다. 너머의 집들이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서포루 아래 나무테크 산책로가 걸음을 이끕니다. 통영항을 안으며 걷는 기분입니다.

마을 속으로 가는 계단이 나옵니다, 입구에는 개구쟁이들의 말뚝박기 조형물이 걸음 세웁니다.

 

개구쟁이 조형물을 지나자 박경리 선생의 사진과 함께 어록들이 새겨진 담벼락이 나옵니다. 담벼락에서 계단을 내려봅니다.

서피랑길이라는 이정표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아래로 그림 같은 계단이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내려가면서도 담장 한쪽에 쓰인 글자 하나하나가 던지는 메시지에 눈길은 자꾸 머뭅니다.

<서피랑 공작소>라 적힌 간판 아래 익살스럽게 환하게 웃는 그림 덕분에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집니다.

 

어느새 계단의 끝, 아니 시작에 이릅니다. 동네 마실 다니듯 주위를 천천히 거닙니다.

 

날씬한 체형을 가진 건물이 가로수와 키 재기를 하고 앞에는 <서피랑 이야기>라는 조형물이 눈길과 발길을 이끕니다.

옆으로 작은 구멍가게들이 괜스레 안쪽으로 귀 기울이게 합니다. 여유롭게 걷다가 <명정골의 세 공주 거리>라는 안내판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새터 시장과 충렬사, 서문고개에 이르는 거리를 말하는 데 옛날부터 명정골에 세 공주의 탄생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다고 합니다. 첫 번째 공주가 박경리 선생이고 두 번째 공주가 윤보선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랍니다. 세 번째 공주는 아직 태어나지 않아 모두가 손꼽아 기다린다고 합니다. 설렘을 안고 왔던 길로 걷습니다.

왔던 길이지만 아기자기한 그림과 조형물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서피랑 쉼터라는 담벼락 글 옆으로 쉬어가기 좋은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담장에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적은 글이 있습니다.

“오대 독자 영감 만내가 고생도 말도 몬해”

마치 옆에서 지나온 세월을 들려주는 듯 할머니의 이야기가 담긴 안내판 하나하나가 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길 건너 서울슈퍼와 이름 없는 선술집이 정겹습니다. 차를 두고 그냥 왔다면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싶은 풍경입니다.

길모퉁이 <서피랑 음악상자>에서 숨을 고르고 지나온 구구 계단으로 향했습니다. 내려올 때는 힘이 덜 들었지만, 다시 올라가려니 힘겹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을 닮은 계단입니다.

소설가 박경리 문학 벽화 계단길은 올라가는 힘겨움을 잊게 합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박경리 선생의 말씀이 힘이 솟게 합니다. 일상의 묵은 찌꺼기를 날려버립니다.

계단 한가운데 쉬어가기 좋은 의자에 앉아 계단 속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계단 하나하나를 밟아 올라가면서 속으로 소원 하나하나를 빌었습니다.

온 우주의 기운이 이곳으로 몰려와 소원을 이루어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