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해찬솔 2020. 7. 4. 07:51

 

다시 남명이다!(2) 남명 조식, 처가살이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한 김해 산해정을 찾아

 

겉보리 서 말이 없어도 처가살이하자. 남명처럼~!

 

성인 남녀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꾼다. 처가(시댁) 덕을 보고 사는 꿈을.

퇴계 이황이 끊임없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반복하고도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던 까닭은 부유한 외가와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은 까닭이다. 더구나 2차례 결혼 과정에서 전처와 후처 처가에서 가져온 토지 덕분에 가산을 크게 늘렸다. 퇴계 이황의 재산 증식만이 특별하지도 않다. 점필재 김종직,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등 ‘도학 정치’를 내건 사림은 지역에 물질적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안정적으로 학문과 정치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 17세기 이전까지 조선 시대는 남녀 재산권이 평등했다. 아들과 딸, 장자와 차자는 재산 상속에서 차별받지 않았다. 17세기 이후 장자상속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자녀 균등 상속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런 까닭에 처가살이는 어쩌면 재산 증식은 물론이고 학문과 정치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좋은 경제적 기반일 수 있었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도 장가를 잘 갔다. 남명은 스물두 살 때 남평 조씨 조수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처가는 김해에서 넉넉하게 살아가는 지역 지식 계층(在地士族)이었다. 의령 자굴산에서 공부하던 남명은 서른 살(1530년)에 처가인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炭洞)으로 이사를 했다. 처가살이하는 동안 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선비로서 칼을 품었다. 남명의 처가살이한 김해 산해정(山海亭)을 찾았다.

 

남해고속도로 서김해 나들목을 빠져나오자 거북이 형상의 조형물이 먼저 반긴다. 옆으로 가야 왕도(王都) 김해에 온 것을 환영하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가락국의 수도에 들어왔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수로왕릉이다.

김해 민속박물관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수로왕릉이 바로 옆에 있다. 왕의 정원이라는 수릉원이 박물관 앞에 있고 수로왕비인 허황옥 동상이 입구에서 앉은 모습으로 있다.

허황옥 동상 옆으로 <‘수로왕을 위하여>라는 팻말이 눈길과 발길을 이끈다. 야트막한 언덕에 수로왕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만든 숲이다. 수릉원 주위로 가야의 역사 흔적이 많다.

왕릉으로 걸음을 옮기자 2층 한옥 건물과 한옥 여러 채로 이루어진 한옥체험관이 눈길을 끈다.

담장을 따라 난 길을 걸었다. ‘가야사 누리길이라는 안내가 아니더라도 주위에는 왕릉과 왕비릉,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군, 봉황동 유적지, 가야의 거리 등이 가까이에 있다.

정문인 종화문(宗化門)을 지나면 조선 시대 왕릉이 박석(薄石)이라는 납작한 돌로 길게 놓여 있는 참도(參道)가 놓여있는 데 반해 여기는 잘 다듬어진 돌들로 시원하게 가락루(駕洛樓) 앞까지 놓여 있다. 중간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좌우로 거북이 두 마리가 고개를 들고 오가는 이들을 반긴다.

가락루를 지나면 왕릉이다. 평지에 부드럽게 솟은 봉분이 햇살에 자글자글 익어가고 있다. 왕릉 옆으로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과 역대 가락국 왕을 모신 숭안전이 있다. 이 전각들을 돌아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앞에 섰다.

왕릉 주위로 쌓은 나지막한 담장인 곡장(曲墻) 뒤로 향하는 문이 나온다. 문을 지나면 초록빛이 넘실거리는 딴 세상이다. 수로왕의 영혼이 쉬어가는 듯 숲은 깊고 느리다. 덕분에 초록빛으로 샤워하듯 거닐자 몸과 마음이 정갈해진다.

왕릉 후원을 나오자 먼발치에서 분성산성이 보인다.

김해 도심 속에서 아늑한 공간을 제공하는 왕릉이지만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고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도굴을 당하기도 했다. 왜적들이 왕릉을 도굴했다는 소식을 피란 중에 알게 된 스무 살 죽암 허경윤(竹巖 許景胤·1572~1646)은 비분강개했다. 김해 허씨의 후손인 허경윤은 피란지 함양에서 10여 명의 장정을 조직하고 김해로 돌아왔다. 적들의 눈을 피해 한밤에 파헤쳐진 봉분을 복구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죽암 허경윤

 

목숨을 내걸고 파헤쳐진 수로왕릉을 복구한 죽암 허경윤의 위패를 봉안한 구천서원이 왕릉에서 승용차로 30여 분 거리인 상동면 우계리에 있다. 구천서원은 1822(순조 22)에 외동外洞)에 창건했다가 습지로 다음 해 왕후릉 동편(王后陵 東便)에 옮겼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려서 사라졌다. 1996년에 현재의 위치에 서원을 복원했다.

입구 표지석 뒤로 서원 외삼문인 준도문(遵道門)이 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경의(敬義)’라고 적힌 서원 복원기념비가 있다.

경의(敬義) 두 글자는 남명이 평생에 걸쳐 한 말이다. 남명은 옳고 그름을 아는 자기 수양 방법인 경()과 그것을 실천하는 의()를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허경윤은 남명의 제자다. 남명의 제자 중에 임진왜란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장으로는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 죽유 오운, 대소헌 조종도, 송암 이로, 모촌 이정 등이 있다. 불의에 항거했던 허경윤은 스승 남명 조식을 닮았다. 배운 바를 실천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스승 남명처럼 허경윤은 과거에 합격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제자를 양성했다. 나이 예순을 넘긴 1636(인조 14), 청나라 20만 대군이 침략한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자 전 재산을 팔아 군량미를 모으고 의병을 모집했다. 비록 나이가 많아 직접 나설 수 없었던 허경윤은 효도가 충성이라며 아들과 조카를 남한산성으로 보내며 늙은 아비를 걱정하지 말고 싸우라고 독려했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한 뒤였다.

허경윤은 임진왜란 때 불탄 산해정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구천서원에서 서낙동강을 따라 승용차로 30여 분 가면 대동면 주동리에 산해정이 있다. 산해정은 남명이 처가살이하며 공부에 증진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대중초등학교 옆 삼거리에서 북쪽 복호산으로 향하면 동쪽으로 까치산, 서쪽으로는 돗대산이 둘러싸고 있는 원동마을이 나온다.

 

높은 산에 올라가 바다를 보자 - 산해정

 

마을 입구에서 산해정으로 가는 길은 좁다. 가까워질수록 길은 좁다. 차 하나 다닐 정도의 마을 골목길 끄트머리에 산해정이 나온다. 산해정으로 가는 길에 수령 300년 넘은 모과나무가 먼저 쉬어가라 유혹이다. 당산나무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산해정은 서른 살의 남명이 마흔여덟에 모친상을 당해 3년 시묘살이를 마치고 김해에서 합천 삼가 토동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18년 동안 공부하고 제자를 양성했던 곳이다.

산해정 진덕문(進德門) 왼쪽에는 산해정에 대를 심으며(種竹山海亭)’라는 남명의 시가 새겨져 있다. ‘대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 (此君孤不孤)/ 소나무가 이웃이 되어 있는데(髥未則爲隣)/ 바람 불고 서리치는 때 아니더라도(莫待風霜看)/ 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 볼 수 있네(倚倚這見眞).’

남명을 모신 사당인 숭도사(崇道祠)로 곧장 걸음을 옮겨 예를 올리고 강당으로 물러 나왔다.

강당에는 신산서원(新山書院)이라는 편액이 내걸렸고 뒤로 산해정(山海亭) 편액 붙어 있다.

신산서원은 남명이 세상을 떠나고 6년 뒤 지역 사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살았던 산해정 동편에 건립했다가 임진왜란 중에 불타 없어졌다가 1608년 중건했다.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지고 1890년 산해정만 중건해 오다가 1999년 서원을 복원, 현재에 이른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본다.’라는 산해(山海)처럼 공부해서 높은 식견을 갖추고 멀리 정확하게 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남명은 산해정에서 세상을 향한 고민을 진지하게 했다. 어머니 권유와 당부로 출사에 대한 꿈도 포기하지 않았던 남명은 산해정에서 벼슬길을 포기하고 처사의 삶을 살기로 했다.

산해정으로 대곡 성운, 청향당 이원, 송계 신계성, 황강 이희안 등이 찾아와 토론했다. 서른여섯 살에 삼가현 서간에 살던 서암 정지린이 맨 먼저 찾아와 배웠다. 남명이 이때부터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위로 명성이 퍼져나가자 도구 이제신, 입재 노흠, 원당 권문임, 청강 이제신 등이 배우러 오기도 했다. 배우려고 모여든 제자들을 늘 격려하며 스스로 분발하며 공부하도록 이끌었다. 남명은 “공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배를 저어 올라가는 것과 같다. 한 치를 놓아두면 한 길이나 미끄러져 내려간다<남명 조식(지식산업사/허권수 지음)>”며 공부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서른여덟에 회재 이언적과 이림의 천거로 헌릉 참봉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마흔셋에 경상 감사로 부임한 이언적이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했으나 거절했다.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이언적을 만나는 게 아첨하는 듯 보여 싫었기 때문이다.

산해정 머무르는 동안 남명은 바닷가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을 여러 번 보았다. 이런 경험은 제자들에게 왜적을 대비책을 생각하게 했다. “묻는다. ~ 임금이 벌컥 성을 내어서 위엄을 조금 더하려 하면 “괜스레 변경의 오랑캐를 자극해서 말썽을 일으킨다”라 하고, 뇌물을 받은 역사(驛使) 한 놈을 목 베어서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는 이을 엄히 단속하려 하면 “겸손한 말로 온순하게 대하는 것이 낫다”라고 한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과연 적을 제압할 말이 없는 것이고 또한 적의 침략을 막아낼 계책이 없다는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한 계책을 듣고자 한다(<남명집(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옮김)> ‘대책 문제(策問題)’ 중에서)”. 이처럼 국방 의식을 고취하고 유사시 대비할 수 있도록 힘쓴 까닭에 수많은 의병장이 배출되었다.

남명은 배운 바를 실천하며 살아가고자 몸에 방울을 달고 칼을 품었다. 스스로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칼까지 품은 셈이다. 남명은 처가살이하며 삶의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하고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이제 겉보리 서 말이 없어도 처가살이하자. 남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