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해찬솔 2014. 9. 29. 04:07

한국의 피카소가 그린 명성황후는 “뻘게요~”

- 경남 진주문화연구소 문화기행 ‘그대로 박생광’ 화백의 발자취를 따라

 

20일 새벽 5시부터 잠을 깼다.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나는 이미 전날부터 들떠 있었다.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배달된 신문을 읽고도 시간은 6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아내를 깨웠다. 시간을 확인한 아내는 “너무 일찍이다” 라는 심드렁한 말과 함께 이불 속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가방에 음료수며 카메라를 챙겨 넣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불을 켜서 된장찌개를 끓였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냉동실에 있는 군만두 10여 개를 꺼내 구웠다. 만두가 다 익어갈 무렵 그때야 아내가 일어났다. 샤워를 마친 아내와 된장찌개와 밥을 먹었다.

 

집을 나서며 아직 잠든 아이들에게 익힌 군만두와 된장찌개를 챙겨 먹으라고 당부했다. 아이들은 “알았어요, 알았어요” 짜증 섞인 말로 대꾸했다.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바람이 시원하다. 버스 환승을 잘못해 중간에 내려 다시 탔다. 경남 진주시 남강과 촉석루가 아주 잘 보이는 망경동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벌써 사람들은 회비를 내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경남 진주 남강과 촉석루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망경동 중앙광장 부근에 한국적인 소재와 채색화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었다는 찬사를 받는 박생광 화백의 생가터가 있다.

 

이날은 진주문화연구소에서 주최하는 ‘저자와 함께 떠나는 진주문화의 자취를 찾아서 그대로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화백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문화기행’이 열린 날이다. <그대로 박생광>의 저자인 경상대학교 미술교육학과 김수현 교수가 40여 명의 모인 사람들에게 간단히 박생광 화백의 삶과 그림을 먼저 설명했다. 망경동 중앙광장 앞에는 바로 박생광 화백의 생가터가 남아 있었다. 생가터에서 불과 50m 거리에 진주 남강과 촉석루가 보인다.

 

촉석루 사진 찍기 좋은 곳 아래에서 김 교수의 첫 질문을 줬다. 논개는 의암바위에서 왼쪽으로 떨어졌는지 아니면 정면 또는 오른쪽으로 떨어졌는지 퀴즈를 냈다. 관광버스 안에서 정답을 공개하겠다는 말을 뒤로 하고 진주 옛 도심인 대안동으로 갔다.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생계수단을 마련했고 진주개천예술제의 태동을 논의했던 문화사랑방 <청동다방> 터로 향했다.

 

 

 

경남 진주 예술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던 ‘청동다방’ 터.

 

동행한 당시 일찍부터 다방 출입을 했던 어르신 한 분이 이곳이 아니라 옛 진주의료원 옆으로 고증했다. 김명서산부인과 자리가 <청동다방> 터였단다. 김두태 어르신은 다방을 일찍 출입한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라며 여러 번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르신이 중학생 때부터 커피 맛을 출입한 것은 오로지 친구 집이 다방을 했기 때문이란다. 덕분에 일찍부터 커피 맛을 알아서 시내에 있던 마돈나 다방이며, 녹지다방으로 음악감상 등을 하며 즐겼다고 한다. 오랜 역사의 이름이 나오자 함께한 회원들과 아내도 녹지다방의 추억을 떠올렸다.

 

 

 

버스 안에서 퀴즈와 함께 ‘그대로 박생광’ 화백의 살아온 이력, 그림 등을 <그대로 박생광>의 저자인 경상대학교 미술교육학과 김수현 교수가 들려주었다.

 

청동다방 터를 둘러보고 우리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원래 기행은 박 화백에게 특별한 색채 감각과 채색화의 근원을 발견하게 한 비봉산 의곡사, 촉석루와 그가 불교 정신에 깊이 매료되어 승려가 되길 꿈꾸며 찾았던 고성 옥천사도 탐방할 예정이었다. 아쉽게도 멀리 떨어진 경기도 용인 이영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기는 까닭에 둘러보지 못했다. 용인에 있는 이영미술관은 선생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란다.

 

관광버스에 오르기 무섭게 김 교수는 퀴즈에 응분의 상품이 있다며 정답을 말해보라고 말했다. 정답은 박생광 화백이 그린 <의랑 순국지도>를 참조하면 되었다. 여러 정답자 중에서도 상품을 받은 이는 따로 있었다. ‘전생이 논개였기에 의암바위에서 뛰어내린 과거’를 정확하게 기억한다는 꽃 중년 아주머니가 동행한 이들의 큰 박수 속에 상품을 받았다.

 

 

그대로 박생광(朴生光, 1904~1985)화백.

 

버스 안에서 퀴즈는 이어졌다. 퀴즈와 함께 ‘그대로 박생광’ 화백의 살아온 이력, 그림 등을 김 교수는 들려주었다. ‘내고(乃故)’ ‘그대로’라는 호를 스스로 사용한 박생광 화백은 인생 그대로, 자연 그대로 예술 그대로라는 본연의 삶을 체험하며 살고자 한 선생의 다짐인 듯하다. 실제 선생은 불교의 가치 지향점에 공감하며 그에 따라 살기 바라며 한때 불가에 귀의하기도 했으나 환속했다. 오히려 자신을 불교 신자로 규범을 지키는 것이 싫고 그 그릇 안에 담겨 오히려 구속 당하는 것은 질색이라고 하셨단다.

 

그의 호 ‘그대로’처럼 자유롭게, 뜻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을 생활원리로 삼았다. 오늘날 한국화단의 정상에 오른 거목으로 꼽히는 박생광이지만, 그렇게 인정받게 된 것은 1980년대 죽음을 불과 5년 앞두고부터였단다. 선생은 17살 때 1920년 일본 유학을 떠나 그림을 시작, 해방 때까지 일본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생활을 부인에게만 의존했고 가세가 어려워 집 앞부분을 수리해 다방을 경영했다. 그러나 생활은 점차 어려워 1967년 상경해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7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나름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70대 중반을 넘긴 노년의 나이에 1977년 귀국, 서울 진화랑의 초대로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왜색풍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 교수는 이렇게 된 이유를 오랫동안 고향 경남 진주를 지키며 서울을 멀리했기 때문이며, 선생의 작품 채색 기법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단다. 진채 기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본격적인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 1981년에는 주류 미술가가 아님에도 중앙미술대상을 받았고, 1985년 파리 그랑팔레르 살롱전에 특별 초대되었다. 대표 작품으로 '월벽', '무당', '무속', ‘명성황후’, ‘전봉준’ 등이 있다. 50여 년의 화력 속에서도 말년 5년에 그린 작품들은 완성도가 가장 높은 ‘그대로 풍’이라는 한국적인 소재와 채색화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이영미술관.

 

김 교수의 퀴즈와 박생광 선생의 삶과 예술혼에 관한 구성진 이야기를 듣는 3시간여 버스 속 강의 끝에 경기도 용인도 이르렀다. 점심을 먹고 드디어 이영미술관에 도착했다. 푸른 잔디와 소나무, 한옥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한국의 색과 형태와 질감을 화폭에 흠씬 풀어놓아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이 없음을 그림으로 보여준 박생광과 전혁림(1916~2010). 한국 화단에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거장 두 사람. 이 두 사람을 살뜰히 뒷바라지해 화려한 예술혼을 꽃 피우게 한 김이환, 신영숙 부부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미술관이다.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은 김 관장은 미술관 내 교육관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乃故 박생광 탄생 100주년 기념자료집> 한 권씩을 우리 일행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미술작품에 관한 설명을 먼저 들려주었다.

 

 

박생광 화백을 살뜰히 뒷바라지해 화려한 예술혼을 꽃 피우게 한 김이환 관장이 선생의 초상 사진 앞에서 그림 설명하고 있다. 만날 당시 선생 나이 72세, 김 관장은 42세였다. 두 분의 인연에 문득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이르는 지음(知音)이 떠올랐다.

 

김 관장은 박생광 선생과의 인연을 묻는 말에 “어쩌다가···”라고 말문을 먼저 열었다. “동창회(진주농고, 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총무를 맡았을 때 모란꽃 그림 한 점을 박생광 선배에게 받기 위해 정종 한 병과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조기 몇 마리 사 들고 선생이 사는 서울 수유리를 찾았다가 ‘김 선생 내가 인자 기리고 싶은 기림이 있는데 도와주겠나?’라는 말씀에 제 형편껏 해 보겠습니다”라고 한 말에 인연이 되어 선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다고 한다. 선생이 도와달라는 그림물감은 비싼 아교 단청이라 김 관장은 허리가 몇 번 휘청했다며 웃어넘겼다.

 

당시 선생 나이 72세, 김 관장은 42세였다. 두 분의 인연에 문득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이르는 지음(知音)이 떠올랐다. 지음은 옛날 중국고사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잘 이해해 준 종자기(鐘子期)가 죽은 후, 그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 하여 거문고의 줄을 끊어 버렸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비록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선생의 그림을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런 명작을 편안하게 구경하는 셈이다. 김이환·신영숙 부부는 또한, 차로 네다섯 시간을 걸리는 경남 통영 전혁림 작업실도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오르내렸다. 미술관에는 전통 목기에 채색 한 전혁림 화백의 유작 ‘새만다라’가 걸려 있었다. ‘새만다라’를 지나자 박생광 화백의 걸작들이 전시된 공간이 나왔다. 김 관장의 설명을 하나 들으며 선생의 작품을 구경했다.

 

 

 

박생광 화백이 안고 죽고 싶다고 할 만큼 좋아했던 작품 ‘명성황후’.

 

먼저 우리에게 안내한 선생의 작품은 1984년 500호의 대작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를 그린 선생은 자신이 안고 죽고 싶다고 할 만큼 좋아했던 작품이다. ‘명성황후는 연꽃을 보듬어 안았다. 거꾸러진 집은 경복궁 향원정으로 경천동지할 참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그 주위에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는 연꽃이 만개해 있다. 순결한 흰옷을 입은 명성황후가 가슴에 안고 있는 분홍빛 연꽃 봉오리는 재생과 부활의 상징이다. 화가 스스로 이 작품을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견주었듯이 상단의 흰옷 입은 두 여인은 ‘게르니카’ 속의 울부짖은 여인의 형상과 흡사하다. 그렇지만 온통 뻘겋게 칠해진 이 그림 속의 불붙는 듯한 정열은 ‘게르니카’보다 훨씬 뜨겁다.‘ (<그대로 박생광>)

 

 

 ‘명성황후’ 그림 왼쪽 위의 울부짖는 두 명의 여인 아래 명성황후는 너무도 평온했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속의 성모 마리아를 보는 느낌이었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표정보다 더 숭고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

그림 전체가 뻘겠다. 청·적·황·백·흑색의 다섯 가지 색(오방색)을 기본으로 사용해 목조 건축물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놓은 단청이 그림으로 재현된 느낌이다. 그럼에도 전체 그림은 붉은 기운이 많다. 마치 ‘붉은 악마’의 힘찬 응원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다. 그림 중앙 아래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광화문을 지키다 순국한 홍계훈이 비통한 얼굴로 울고 있다. 왼쪽 위의 울부짖는 두 명의 여인을 마주 보는 오른쪽은 날카로운 눈매의 사무라이가 칼을 번뜩이는 게 보인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너무도 평온했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속의 성모 마리아를 보는 느낌이었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표정보다 더 숭고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범과 모란’ 중 왼편에 개구쟁이처럼 해맑게 웃는 아빠 호랑이는 더 재미나고 멋있다.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은 어찌나 맑고 천진한지 보고 또 보았다.

 

‘범과 모란’은 십장생화다. 일반적인 8곡 병풍과 달리 여섯 폭이다. 소나무와 대나무 대신 모란이 화면 가득 크게 그려졌고 좌우에 호랑이들이 떡하니 그려져 있다. 아내는 그 그림을 특히 좋아했다. 아내는 신선 같은 할아버지께서 호랑이 두 마리를 데려다 준 꿈을 꾼 뒤 연년생의 아들을 낳았다. 오른편의 작은 호랑이 새끼와 어미 호랑이도 정겹지만, 왼편에 개구쟁이처럼 해맑게 웃는 아빠 호랑이는 더 재미나고 멋있다.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은 어찌나 맑고 천진한지 보고 또 보았다.

 

‘그대로 박생광’ 선생의 그림은 친근한 듯 강렬한 색채의 마술사가 하얀 도화지를 우리의 단청으로 단장한 느낌이다. 미술관을 나와 진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 본 그림과 선생의 삶이 지나가는 차창 너머에 슬라이드처럼 비친다. ‘가장 세계적인 것이 우리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웠다. 색으로 여는 세상을 몰래 구경한 하루였다.

 

선생은 1985년 7월 18일 영원히 잠들기 직전 자신이 늘 쓰던 화첩에다 이런 글을 남겼다.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

모든 민족 예술은 그 민족 전통 위에 있다.“

 

선생은 고향인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에 묻혔다. 그곳은 올해 초 운석이 떨어진 동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