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해찬솔 2014. 12. 13. 06:30

 

교육도시 경남 진주의 시작을 찾다

 

 

경남 진주향교 전경.

 

홍살문이 푸른 하늘에 더욱 도드라지게 붉게 빛나던 126일 오후, 내가 찾은 곳은 진주향교다. 1000년이 넘는 도시의 역사를 가진 경남 진주를 두고 임진왜란의 진주성 대첩과 의기 논개를 떠오려 충절의 고장이라 한다. 교육의 도시라고도 한다. 인구 약 35만 명 중 학생이 20~30% 비중을 차지하고 경상대학교를 비롯해 대학만 6개가 있어 교육도시일 수 있다. 그것보다 교육에 관한 열정이 다른 지역보다 앞선 역사가 있다. 바로 진주향교다. 진주향교는 옥봉동에 있다. 진주 도심에서 멀지 않지만, 구릉에 가려져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 위치다.

 

 

진주향교 홍살문

 

정문을 드높게 짓고 앞에 홍살문까지 세운 뜻은 학생들 공부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하라는 말이다. 향교 오른편으로 대소인원하마비(大小人員下馬碑)가 서 있다. 그만큼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서라는 경고인 셈이다.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聖賢)을 받들고, 지역 사회 인재 양성과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지방 교육 기관이다. 지금의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한다. 여기서 공부해 과거에 급제하면 생원진사가 된 뒤 성균관을 거쳐 문과시에 합격하면 엘리트 관료가 되는 출셋길이 열려 있었다.

 

 

진주향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진주향교(晋州鄕校)는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799(신라 소성왕 원년)에 진주의 전신인 청주(菁州) 거로현(居老懸)을 국학(國學) 학생들을 위한 녹읍(祿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987(고려 성종6)에 지금의 의곡사 계곡에 향학당(鄕學堂)을 창건하고 중앙에서 교수(敎授)를 파견했다고 한다. 고려 말 1011년에는 사교당(四敎堂)으로 고쳐 지었다.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거란의 10만 대군을 무찌른 강민첨, 고려 후기 문신 정을보, 조선 태종의 최측근 하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398(조선 태조 7) 문묘를 지으면서 향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1558(명종 13) 현 위치로 옮겨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여러 차례 공사를 거치면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우리나라를 통틀어 이른 시기에 지어진 교육기관이다. 교육도시 진주의 명성도 오랜 전통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진주향교 풍화루에서 바라본 풍경.

 

하마비를 지나자 진주 향교의 정문 누각인 풍화루에 못미쳐 오른쪽에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시범학교 기념식수(植樹)’. 나무 앞 표지석에는 연도(年度)를 공기(孔紀)로 적어 놓았다. 공자 탄신 이후부터 헤아려 적은 셈이다. 표지석은 공기 2562년으로 적혀 있었다. 공기 2562년은 올해로 서기 2014년 단기 4347년이다.

 

향교의 정문은 삼 문이다. 가운데는 영혼이 드나들고 사람은 양쪽 문만 써야 한다. 오른쪽은 동문이고 왼쪽은 서문이다. 문루 이름은 백성들 풍속을 교화한다는 풍화루다. 평소 열려 있지 않은데 마침 청소하기 위해 들어간 아주머니가 열어놓은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생들의 휴식처였던 풍화루로 올라갔다. 햇살 가득 드리운 풍화루 앞은 가야시대 무덤인 옥봉 고분들이 보인다. 풍화루를 내려와 가운데에 섰다. 오른편에 명륜당(明倫堂), 왼편에 사교당이 있다. 동서방향의 급경사에 위치한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일직선으로 가운데 통로는 기다랗게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향교의 공간은 교육과 제례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풍화루에서 대성전을 향해 바라본 진주향교.

 

향교의 공간은 교육과 제례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진주향교도 앞 쪽에 교육 공간을 두고 제례 공간을 뒤쪽에 두는 건물 배치의 일반적 형태를 따르고 있다. 유생(儒生)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생활을 하는 동재(東齋), 서재(西齋)는 교육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과 동무(東廡), 서무(庶務)는 제례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 집인 명륜당은 앞면 4칸 규모다. 명륜당과 가운데 통로를 사이에 두고 대칭을 이룬 사교당은 사방이 열려 있다. 유교 경전을 읊조리던 유생들의 낭랑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시 가운데에 서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대성전으로 향하는 길은 가파른 계단의 연속이다. 향교 시작에서부터 계단은 모두 126개다. 그중 풍화루를 지나 본격적으로 올라가는 대성전 앞 계단만도 65개다. 오후 햇살이 등 밀어주는 기운을 받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랐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며 올라가라는 뜻이리라.

 

 

진주향교 대성전에서 바라본 향교와 진주 도심.

 

올라가는 틈틈이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진주의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드디어 대성전이다. 앞면 3·옆면 2칸의 규모의 대성전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 집이다. 맞배지붕 형태가 대부분인 다른 향교의 대성전과는 보기 드문 지붕모양새다.

 

 

진주향교 대성전.

 

대성전 뒤 담장 너머로 두릅나뭇과 엄나무가 있다. 봄이면 어린 새순을 살짝 데쳐 양념에 무쳐 먹으면 독특한 향과 맛이 난다. 또한, 관절염에 좋다는 엄나무를 보니 경사진 계단을 올라오느라 고생한 두 다리를 보전하라는 숨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닌지 즐거운 상상에 입 가득 침이 고였다.

 

 

진주향교에서 바라본 진주 옥봉.

 

대성전으로 올라오는 길은 공자처럼 살고자 다짐하는 길이다. 문득 고등학교 생활관 수료 후 받은 기념품의 문구가 떠오른다. 배움과 실천이 같다는 학행일여(學行一如)’. 시간을 잠시 멈춰 세웠다. 학교 졸업 후 아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는 지고 하늘도 주황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