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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속 진주 이야기, 에나 진주이야기꾼 해찬솔입니다.
기분 전환과 함께 나를 돌아볼 기회를 위해 찾은 의령향교 하늘이 푸릅니다. 어디로 좋을 싱그러운 하늘은 엉덩이를 들썩이게 합니다. 경치도 좋을 때입니다. 기분 전환도 하며 나름 나를 돌아볼 기회를 위해 의령향교를 찾았습니다. 읍내 의령군청 앞을 지나 의령초등학교를 지났습니다. 골목을 지나자 먼발치에서도 우뚝 솟은 솟을 2층 누각이 보입니다. 4단의 돌 위에 우뚝 서 있는 외삼문에 수인루(數仞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스승을 높인 자공의 인품을 대비시킨 논어 자장 편에 나오는 ‘夫子之數仞(부자지수인), 不得其門而入(부득기문이입), 不見宗廟之美(불견종묘지미), 百官之富(백관지부).’에서 취한 듯합니다. “담장으로 비유하면 내 집의 담장은 단지 어깨높이지만, 스승님 집의 담장은 매우 높아 ..
다시 남명이다7-남명 조식의 애제자, 덕계 오건과 수우당 최영경 ‘in 서울’ 떠나 천릿길 진주로 내려온 제자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유배 중이던 1810년 초가을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당쟁의 희생자 대부분이 시골에서 은둔을 선택한 것과 달리 다산은 서울 사수를 주장했다. 정보와 네트워크의 중요성 때문에 다산은 자녀들의 서울 생활을 고집했다. 이와 달리 오히려 ‘in 서울’을 탈출, 천릿길 진주로 향한 사람도 있었다.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이 그렇다. 수우당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을 이어온 집안으로 아쉬운 것이 없던 문벌 출신의 서울 사람이었다. 1565년 오직 스승인 ..
지리산 별이 된 조선 선비 지리산으로 가는 길, 남명 만나러 가는 길 이름만 떠올려도 설레는 지리산. 마침내 지리산에서 별이 된 조선 선비가 있다. 바로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년)이다. 지리산을 수십번을 다녀온 남명은 나이 61세가 된 1561년(명종 6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진주 덕천동 (산청군 덕산면)으로 이사를 했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1572년 2월 8일 72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남명을 만나러 가는 길은 지리산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지리산 자락은 뙤약볕이 무자비하게 내리쬐던 여름날에도 차 안 에어컨을 끄게 한다. 차창을 내리자 싱그러운 기운이 깊고 느리게 밀려온다. 계곡을 따라가다 길가 주차장에서 잠시 시동을 껐다. 지리산 중..
다시 남명이다3- 남명이 찾은 지리산 기행 지리산을 닮고자 떠난 조선 선비를 찾아서 지리산을 닮고 싶어 말년에 지리산이 보이는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눈을 감은 이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다. 1558년(명종 13년) 58세에 남명은 12번째 지리산 산행 후 '유두류록((流頭流錄)'이라는 지리산 기행문을 남겼다. 남명 일행은 음력 4월 11일 합천 삼가 계부당을 떠나 진주를 거쳐 사천에서 배를 타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14박 15일 일정이었다. 주요 일정은 사천 장암 쾌재정-사천만-곤양 앞바다-하동포구-삽암-도탄-화개에서 하선(下船)-쌍계석문-쌍계사-불일암-지장암-쌍계사-신응사-화개-악양현-횡포-청수역-칠송정-귀가이다. 지리산으로 떠나는 길은 진주목사 김홍, 전 고령 현감 황강 ..
다시 남명이다!- 남명 조식 생가지와 뇌룡정, 용암서원을 찾아서 고리타분한 꼰대! 조선을 망가트린 성리학자…. 왜 다시 남명(南冥) 조식(曺植)인가? 역사의 고비마다 불의에 항거했던 우리 경남인 기질 속에는 남명 사상은 온전히 이어져 온다. 여느 성리학자나 조선 시대 선비와 달리 남명은 상무(尙武) 사상을 가졌다.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국방을 걱정한 학자 남명의 제자들은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이 분연히 의를 위해 떨쳐 일어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다. 남명은 철저한 자기 수양인 경(敬)과 실천하는 의(義)를 행동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살여탈권을 쥔 임금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은 현실 비판자다.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 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