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불법과 동행을/卍-불교자료실

혜명(해인)스님 2019. 7. 22. 12:22


오성론(悟性論)

      1. 불승( 佛乘 )
      도(道)의 본질은 집착을 벗어남에 있다.
      그리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겉모습으로부터 자유에 있다.

      경에 이르기를 "무 집착이 곧 깨달음이다.
      그것은 겉모습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삼계는 욕심과 성냄과 망상의 세계다.
      삼계를 떠나는 것은 곧 욕심과 성냄과 망상으로부터 떠나서 계(戒), 정(定), 혜(慧)로 돌아감을 뜻한다.

      경에 일렀으되
      "부처들은 세 가지 독(毒)과 함께 살면서 순수한 다르마로 자신을 키워나감으로 부처가 되었다."라고 했다.

      세 가지 독이란 욕심과 성냄과 망상이다.
      대승(大乘)은 모든 수레 중에 가장 위대하다.
      그것은 보살들이 타고 가는 수레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사용함이 없이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행함이 없이 하루 종일 여행한다.
      그러한 것이 바로 부처들의 수레이다.

      경에 이르기를
      "수레 없음이 바로 부처의 수레〔佛乘〕이다."라고 했다.
      또 경에 이르기를
      "오대(五大)의 동굴이 선(禪)의 마당이며. 내면의 눈을 뜨는 것이 대승의 문이다." 라고 했다.

      무엇이 이것보다 더 명료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음이 곧 선이다.
      한번 그대가 이것을 알면 걷고 서고 앉고 눕는, 그대가 행하는 모든 것이 선이다.
      마음이 비어 있음을 아는 것이 곧 붓다를 보는 것이다.
      시방(十方)의 부처들이 어떤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무심을 보는 것이 곧 붓다를 보는 것이다.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선이다.
      움직임과고요함을 모두 초월하는 것이 가장 지고한 명상이다.
      중생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아라한은 고요히 머문다.
      그러나 지고한 명상은 이들 중생과 아라한들 다를 뛰어넘는다.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노력을 하지 않고도 모든 겉모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치료하지 않고도 모든 병을 낫게 한다. 그러한 것이 위대한 선의능력이다.

      2. 중도( 中道 )
      마음을 사용해 실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마음을 사용하지 않고 실체를 찾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이다.
      말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해탈이다.
      감각의 먼지에 때 묻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이 다르마를 지키는 일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존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도(道)에 이르는 것이다.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다.
      무지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피안(彼岸)이다.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의 관점에서 보면 중생은 성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는 중생도 꿰뚫을 수 없고 성자 도행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치우치지 않은 다르마는 오직 위대한 보살들과 부처들만이 행할 수 있다.
      삶을 죽음과 다르게 보거나, 동(動)을 정(靜)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을 열반과 다르게 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 둘의 본질이 본래 텅 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고통에 종지부를 찍었다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고 상상함으로써 아라한들은 결국 열반이라는 덫에 걸리고 만다.

      그러나 보살들은 고통이 본래 텅 빈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텅 빔에 머물기에 그들은 열반에 머문다.
      열반은 탄생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탄생과 죽음을 초월하며 열반이라는 것 자체도 초월한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에 들어간다. 열반은 텅 빈 마음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과 같으니 욕심도 성냄도 망상도 없다.
      마음이 하나의 허구이며 전혀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안다.

      중생들은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만들어 낸다.
      아라한들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을 부정한다.
      그러나 보살들과 부처들은 마음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 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을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그대의 내면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바깥에서 세계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깥 세계와 마음이 둘 다 투명해질 때의 것이 진정한 통찰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진정한 이해이다.

      3 .실체( 實體 )
      경에 이르기를 "지혜를 놓아 주지 않는 것이 어리석음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진실이다.
      마음이존재할 때,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둘 다 거짓이다.
      그대가 알 때,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한다. 그대가 알지 못할 때는 그대가 실체에 의존한다.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할 때,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된다.
      그대가 실체에 의존할 때, 실재하는 것이 거짓이 된다.
      그대가 실체에 의존할 때, 모든 것이 거짓이다.
      실체가 그대에게 의존할 때, 모든 것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실체를 찾기 위해서 그의 마음을 사용하거나,
      또는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거나,
      또는 그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사용하거나,
      또는 실체를 찾기 위해서 실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은 실체를 지어내지 않는다.
      그리고 실체는 그의 마음을 지어내지 않는다.

      그의 마음과 실체가 둘 다 고요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삼매 속에 있다.
      경전에 이르기를 "아무 것도 제 본성을 가진 것은 없다."라고 했다.
      행동하라. 질문하지 말라. 질문 할 때 그대는 틀린 것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힐 때, 여섯 가지 감각과 다섯 가지 원소가 고통과 죽음의 구조물이다.

      그대가 깨어날 때, 여섯 가지 감각과 다섯 가지 원소는 열반과 불멸의구조물이다.
      도를 구하는 자는 자신을 벗어난 곳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마음이 도인 것을 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발견할 때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도를 발견할 때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사용해서 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힐 때 불성이 존재한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불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 있음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미워하지도 말며, 삶과 죽음을 사랑하지도 말라.
      그대의 모든 생각이 망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는 삶 속에서 열반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형태에 물들지 않고 형태를 보며, 소리에 물들지 않고 소리를 듣는 것이 해탈이다.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 눈이 선(禪)의 문이다.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귀 역시 선의 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무 집착에 머무는 자는 해탈에 이른 것이다.
      망상에 사로잡힘이 없을 때 마음은 불국토가 된다. 망상에 사로잡힘이 있을 때 마음은 지옥이다.

      4.불 종자( 佛種子 )
      진리를 따르는 자는 도 위에 있다.
      그것은 아라한들과 중생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다.
      마음이 열반에 이르면 그대는 열반을 보지 못한다.
      마음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마음 밖 어디 선가 열반을 본다면 그대는 스스로를 망상에 빠뜨린 것이다.
      모든 고통이 부처의 씨앗이다. 고통이 있음으로 해서 지혜를 찾아 나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고통이 불성을 일으킨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고통이 바로 불성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그대의 몸과 마음은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그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열매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있을 때 그대는 예토(穢土)에 사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속에 세 가지 독이 없을 때 그대는 정토(淨土)에 사는 것이다.
      다르마가 아닌 언어는 없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하루 종일 말하는 것이 도(道)이다.
      하루 종일 침묵하며 앉아 있어도 무엇인가를 떠든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은 침묵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의 침묵은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말은 그의 침묵과 떨어져 있지 않다.
      말과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은 삼매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하면 그대의 말은 자유롭다.
      만약 그대가 알지 못하면 그대가 침묵을 지킨다고 해도 그 침묵은 구속되어 있다.
      언어란 본래 자유롭다.
      그것은 어떤 집착과도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집착 역시 언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5 .중생( 衆生 )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부처를 보기 원한다면 부처를 보기 전에 먼저 마음을 보라.
      한번그대가 부처를 보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마음이 그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중생심과 불성은 물과 얼음의 관계이다.
      세 가지 독으로 고통 받으면 그것은 중생심이고,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순수해지면 그것은 불성이다.

      겨울이 되어 얼었던 얼음은 여름이 되면 녹아서 물이 된다.
      얼음을 없애고 나면 더 이상 거기에 물이 남아 있지 않다.
      중생심을 제거하면 거기에 더 이상 불성은 없다.
      분명 얼음의 본성이 곧 물의 본성이다.
      중생은 부처를 해탈 시키고 부처는 중생을 해탈 시킨다.
      공평함의 의미가 바로이것이다.

      중생이 부처를 해탈 시키는 것은 고통이 깨어 있음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가 중생을 해탈 시키는 것은 깨어 있음이 고통을부정하기 때문이다.
      거기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 깨어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통이 없다면 깨어 있음을 탄생시킬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깨어 있음이 없다면 고통을 부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부처가 중생을 해탈 시킨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중생이 부처를 해탈 시킨다.

      모든 부처들은 망상을 아버지로 삼고 욕심을 어머니로 삼는다.
      망상과 욕심은 중생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대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는 이쪽 언덕에 있다.
      그대가 깨어있을 때 그대는 저쪽 언덕에 있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이 비어있는 것을 알고 어떤 겉모습에도 눈길을 주지 않을 때, 그대는 망상과 깨어 있음 모두를 초월한다. 그리고 그대가 한번 망상과 깨어 있음을 초월할 때 저쪽 언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이쪽 언덕에도 없고, 저쪽 언덕에도 없다.
      그리고 강물의 중간에도 없다. 아라한은 강물 중간에 있다.
      그리고 중생은 이쪽 언덕에 있다. 저쪽 언덕에는 불성이 있다.

      6.삼신( 三身 )
      부처들은 세 가지 몸〔身〕을 갖고 있다.
      그 세 가지는 응신(應身), 보신(報身), 법신(法身)이다.
      응신은 현신(現身) 이라고도 부른다.
      현신은 중생이 선행을 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
      보신은 중생이 지혜를 쌓을 때, 그리고 법신은 중생이 숭고한 것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들은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몸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의 몸이란 말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이해력은 얕을 수도 있고, 중간일 수도 있고, 깊을 수도 있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자기가 복을 쌓는다고 상상하면서 현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중간 정도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고통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상상하면서 보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그리고 이해력이 깊은 사람은 자신이 불성을 체험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법신을 부처로 착각한다. 그러나 가장 깊은 이해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부처를 이해한다.
      각 개인이 업을 만든다.
      업이 각 개인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직 완전한사람만이 이 생에서 어떤 업도 짓지 않고 또 그것의 보상도 받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업을 짓지 않는 사람은 다르마를 성취한다."고 했다.
      그대가 업을 지을 때 그대는 그 업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그대가 업을 짓지 않을 때 그대는 업과 함께 사라진다.

      출처:- 월천사 카페에서
오성론(悟性論).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