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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 강 게오르기 바실리비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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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현지 뉴스

2018. 10. 22.



  

"81년 전, 딱 이맘때(10월 초순) 고려인을 태운 기차가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이미지: 사람 1명, 앉아 있는 중

 <항일독립운동가 황운정 선생의 차남이자 최초의 소련체육훈장 수상자이기도 한 황마이선생이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한 후 묘비에 입을 맞추고 있다>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을 앞두고 있고 있는 크즐오르다의 홍범도장군 묘역.  우리 정부는 작년에 묘역내 보도블록을 교체하고 철제울타리페인트 공사를 했으나 여전히 일부 깨진 기와장과 공사 당시 인부들이 버린 빈 페인트통이 묘역내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가 하면 가시 엉컹키가 돋아나 있어서 참배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2018. 10.08 >


  삼일운동 100주년을 약 5개월 앞둔 시점에서 본지와 KBS 특별다큐팀은 '항일독립운동군의 후예,고려인' 이라는 주제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한 이후의 항일독립군들과 그 후예들의 삶,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나섰다.  

  이 작업은 내년 삼일절을 즈음하여 KBS를 통해 방영될 예정인데 이 지면에서는 그 중에서 일부 인 고려인 강제이주의 원인과 당시 국제정세 그리고 고려인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 받아야 하는 이유 등에 대해 강 게오르기 교수에게  알아보았다. <편집자 주>


ㅇ. 안녕하세요?  바쁜시간을 내주셔서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1937년에 고려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한 이유는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오늘날 강제이주에 관한 문서와 깊이 있는 연구에 따르면 1937년 고려인이 극동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즉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이유는 고려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국제 정치의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다. 왜냐하면 1930년대는, 제 2 차 세계 대전이 거의 시작되고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치르며 소련은 이미 파시즘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권좌에 앉았습니다. 소련은 중국과의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중국은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입니다. 

  1937 년도에 2 건의 서류가 서명되었습니다. 첫 번째 문서는 중국과의 동맹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문서는 극동에서 중앙 아시아로의 모든 고려인의 강제이주에 대한 문서이었습니다. 고려인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전 상대와 조약에 서명하면, 하나는 동맹국이 되고, 전쟁 상대방은 적성국이 됩니다.  이것이 강제이주의 이유다.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모든 극동지역의 정치변동에서도 활용되어 집니다.  아시다시피, 북한정권 수립과 한국전쟁에서도 고려인들이 소련의 극동정책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고려인들은 사할린과 극동지역에 매우 잘 적응했습니다.

  특히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사할린에도 소비에트 연방의 위대한 정책의 수단으로  고려인들이 그곳으로 이주되었습니다.


ㅇ. 강제이주가 일어났던 1937년 일본과의 관계나 국제정세는 어떻했습니까?  그리고, 그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내부 상황는 어떻했습니까?  

  "그때는 2차 세계 대전이 이미 시작할 때였습니다. 세계에서 이미 두 개의 큰 이데올로기가 분명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인데, 이탈리아와 독일에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고 소련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이미 전쟁 수준까지 모순이 가중되기 시작했으며, 전쟁이 준비 중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이 1937년에 이주되었을 때 나는 당시 국제연맹의 문서들을 신중하게 연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유엔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지만 유엔의 전임 기구라고 할수있었던 국제연맹이 이미 있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타슈켄트까지 거의 1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여자, 아이와 노인이 포함된 강제이주가 진행되었지만 국제연맹에서 고려인을 옹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게 무슨 말이냐면?  고려이니들은 세계 강대국간의 관계에서 외교 정책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ㅇ. 그런데 왜 고려인들은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었습니까?

  "카자흐스탄은 땅 크기로 세계에서 9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밀도면에서 세계에서 거의 마지막입니다. 고려인들은 무엇보다도 농업 분야에서 탁월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농업개발을 위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이것은 국제정세에 대한 질문과 고려인들이 중앙 아시아로 이주된 이유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ㅇ. 1937년에 고려인들이 이 곳으로 이주된 후 항일독립운동가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요?  

  "특히 러시아의 위대한 10월 사회주의 혁명과 러시아에서 시작된 내전이 끝난 후의 극동 지역의 고려인들의 역사는 생생하고 극적인 역사입니다. 고려인들이 소비에트 권력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극동 지역의 고려인들에게, 소비에트 권력 투쟁은 조선독립을 위한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극동에 군대를 보낸  일본제국주의와의 투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전 시대에 극동 지역의 항일 영웅들이, 사실 한국의 국가적 독립투사들입니다. 그들은 한 가지 생각을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전설적인 홍범도, 이동휘 같은 분들....    3월 1일에 한국의 독립 선언이 선포된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 이동휘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937년 이 모든 영웅과 그들의 자손들이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었습니다. 당시 명령서에는  "아무도 남겨 두지 마십시오. 여자도 아이들도 영웅도..." 라고 명확히 적혀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카자흐스탄에 이주되었고 독립투사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이주 후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홍범도, 모두 아시다시피, 1943년까지 크즐오르다에서 살았습니다. 즉, 이주 후 6 년 동안 그는 여전히 크즐오르다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계 봉우, 이 동휘 선생의 자손들이 여전히 우리 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년 순국선열의 날 행사와 3.1절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그들이 영웅의 자손이며 영웅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1991년까지 즉, 카자흐스탄 독립 때까지는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습니다. 아흐멧 바이투르스노브와 알리한 보케이하노브같은 카자흐스탄의 영웅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90 년대 초까지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물론, 카자흐스탄이 독립을 획득한 후 우리는 공개적으로 독립운동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크즐오르다에는 홍범도와 계봉우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이 두 분의 이름을 가진 거리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독립투사들을 잘 알고있고, 그들을 존경하며,  우리는 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빚진 것을 갚을 것입니다.


ㅇ. 카자흐스탄에 있는 우리의 독립운동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는 홍범도 기념물이 있습니다. 그것에 홍범도 흉상과 , 계봉우의 흉상이 있습니다. 사람은 거기에 가서 꽃을 두고, 그들을 기억해 내고, 그들의 이름으로 거리는 불립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곧 뛰어난 국가 영웅인 홍범도의 탄생 150 주년을 맞이합니다. 홍범도에 대한 책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학생들에게 홍범도에 대해서 읽어볼려고 해도, 인터넷에도 정보는 너무 부족합니다.

  일반적으로 책, 영화가 필요합니다. 홍범도에 대한 영화를 왜 보지 않았을까? 고려극장에  "홍범도" 공연이 있지만…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다는 것을 알죠. 하지만 중앙 아시아 각 지역에서 그 공연을 보러 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우즈베키스탄에는 그런 공연을 할 극장이 없습니다. 러시아에도도… 그러므로 장편 영화가 필요합니다. 1919년 3월에 최초의 망명 정부가 블라디보스톡에 세워졌는데  이에 대한 책도, 영화도 없습니다. 이동휘에 대해서도…  즉, 기념물이 있고, 거리 이름이 있지만, 교과서나 문학서를 통해서 또는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좋은 책을 쓰고,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ㅇ.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937년 이주되었을 때 고려극장은 그 당시 고려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요? 

  "우리가 고려극장의 현재 위치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고려인의 삶에서 고려극장이 매우 역사적인 역할을수행한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1932년에 결성되었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인이 우리말 교육을 금지하는 등 거의 모든 것을 폐쇄하고, 일본어를 배워야한다고 강요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고려극장은 우리 문화의 보존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춘양전», «심청전» 같은 한국 고전을 모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7년에는 고려의 극장이 크즐오르다로 이전해 와서 고려말과 고려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정확히 보존했습니다.  50 년 이상 우리는 한국과 접촉하지 못했습니다만 언어와 전통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모국과 50년이 넘는 단절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 고려극장을 유네스코 문화인류유산으로 포함시키기 위해 서류를 작성 중에 있습니다. 홍범도는 이미 노인이었을 때도 고려극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귀중한 보물입니다.  또한 고려극장은 한반도 외에 유일한 우리민족의 극장입니다.

인터뷰이 : 강게오르기

인터뷰어 :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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