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여신 '마고할망'

유기농 채소와 동양란을 가꾸며 살아 가는 마고 할망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1부: 청상(靑孀)은 말없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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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할망 이야기

2020. 3. 30.


한양 천 리 나그넷길 - 북간도를 마음에 담고

 

 

  사람들 눈에 띌까 백포양반은 동이 트자마자 백포댁이 꾸려준 괴나리봇짐을 매고 뚜드럭재를 넘어갔다. 백포댁은 만삭의 배를 하고서 부지런히 밤을 도와 주먹밥을 만들고 절구에 찰밥을 찧어 인절미를 만들어 한양 가는 길 행여 서방님 배고플까 봐 봇짐 한가득 구석구석 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콩을 볶고 쌀과 보리를 볶아서는 종일토록 절구에 빻아서는 미숫가루를 해서 담고 두툼하게 솜을 두어 누빈 새 두루마기를 두 벌 지어 한 벌은 입으시게 하고 한 벌은 따로 쌓아두었다. 이미 가세가 기울어 종들은 더 데리고 있을 수가 없기도 하였지만, 개명 세상에 진즉 노비들은 제 살길을 찾아 떠나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친동기간 이상으로 따르던 낙선이도 삼 년 전부터 읍내 비단 집에 가서 부지런히 장사 일을 배우더니만 제법 심부름꾼 노릇을 벗어 주인이 없는 날에는 주인을 대신하여 장사를 아주, 야물게 해대고 있었다. 천성이 밝고 정직하며 부지런한 아이라 주인의 신임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늙은 비단 장사 부부는 자식이 없는 탓에 낙선이를 친아들처럼 대해주더니 양자로 삼아 내년 봄엔 장가를 보내주겠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침이 마르게 낙선이 자랑에 장사는 젖혀둔 눈치다.

양반댁 서방님이 친동기맹이로 자알 가르쳐서 낙선이도 양반하고 다를 게 없어라우. 우리 낙선이가 셈도 잘하고 장사 수완도 훌륭하니 우리 늙은이들은 뒤늦게 무슨 복이 터져서 이리 좋은가 모르것소. 낙선이 들어오고 장사가 어떻게나 잘되는지 당목이며 옥양목 공단이며 주단을 고르고 보는 법이 사십 년 넘게 장사해 온 우리덜 보다 훨씬 낫당께 그라요.”

참말로 그라긴 하요. 이제 눈도 침침하고 자꾸만 감게서 비단 색깔이랑 올이 잘 뵈들 않은디 낙선이 쩌 것은 한 올이라도 끊어졌거나 빠진 것은 영락없이 잡아낸당께한 번 꼭 찾아오라던 백포 처남을 찾아 한양으로 떠나면서 백포양반은 낙선이를 찾아가서 백포댁과 직하를 부탁하였다.

 

내가 없는 동안 혹여 우리 식구 무슨 일이 없는지 짬이 나거든 한 번 가 보거라

무슨 일 있거든 송숙쟁이 처남한테도 이르고.”

샌님, 작은 아씨는 워낙 기가 세고 발라서 아무 일 없을 것이요. 걱정하지 말고 새로운 세상 어디 살만한 데 있는지, 잘 알아보고 오쑈잉, 직하 되렌님도 워낙이 야무지니 제 것 하나 남 주면 주었지 뺏기고 살진 않을 것이요.” 낙선이는 마고자 안주머니에서 차곡차곡 모아 둔 돈 삼십 환을 꺼내어 한사코 안 받겠다는 백포양반의 두루마기에 찔러 넣어주었다.

 

이제 너도 착한 짝을 만나 식구들 건사하고 살아야 할 것인데 나한테 이 많은 돈을 다 주어버리고 어찌 장가는 들겠느냐?”

샌님, 걱정 하 덜 마시요잉, 샌님이 나한테 윤가 성을 내어주었으니 지금 양반은 못되어도 호적은 맨들고 살으니 양반 족보 산 셈 치먼 될 것 아니요

허허, 자식도, 나는 한 번도 니가 천한 종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사람이 다 태어날 적에는 그 사람에게 쓰임이 있어서일 것이다. 너는 이 장삿길이 천성인 것 같으니,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며 남들 속이고 후려칠 생각 하지 않으면 언젠가 타고난 복으로 부자가 되지 않것느냐? 부디 석등 우리 식구들 잘 부탁한다.”

아니, 샌님은 결코 다시 못 돌아올 것맹키로 그라요? 새로 태어날 애기씨는 으짤라고요?”

 

어세 두세 한 세상 밖으로 발길을 내어 딛는 백포양반의 괴나리봇짐이 어린 처자식을 두고 떠나는 마음만큼 무겁다. 여기서 한양이 천 리 길이니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면 족히 한 달은 넘어야 당도할 것이다. 읍내를 나와 우슬재를 오르니 병풍처럼 두런두런 서 있는 바위산이 너른 옥천 들을 호위하고 서 있다. 그 모양새가 병풍산임이 틀림없구나. 가을걷이가 끝나고 빈 들판엔 몇 가닥씩 지푸라기가 군데군데 널려있고 참새들이 째째-잭 거리며 나락 알갱이를 주워 먹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포르르 날아 저 멀리 산으로 도망갔다. 맹진들에 이르니 벌써 개오리떼들이 철 따라 내려왔는지 논바닥에 시커멓게 내려앉아 있었다. ‘피죽도 못 먹어 환장하는 사람들이 나락 알갱이 한 톨이라도 주워 모아 논바닥이 깨끗할 터인데 뭐하나 먹을 것이나 있을랑가, 저리도 떼를 지어 있는지 원.’ 백호리 너른 들을 지나 송산리를 향해 걷다가 다리도 쉬어갈 겸 혹여 연락선이라도 때맞춰 뜬다면 목포로 바로 가볼까 하고 북창으로 향해 걸었다. 맹진 나루엔 흰옷 입은 사람들이 여럿, 목포로 가는 연락선을 기다리며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일일이 왜 놈 순사에게 짐 보따리를 내주고 죄도 없이 벌벌 떨고 서 있었다. 걸핏하면 불쌍한 시골 무지렁이들 보따리를 풀어 헤치고 뭐를 찾는 지 이 잡듯이 뒤지다가 내팽개치며 빠가야로라며 침을 뱉곤 하였다. 마치 독립군에게 대어줄 군자금이라도 숨겨서 들어온 독립군 끄나풀이라도 잡아낼 모양새로 빠가야로, 빠가야로를 외쳐대며 쇠방망이를 휘둘러보지만, 보리쌀 한 말 이고 가는 사람들이 없으니 괜한 트집이다. 한 아낙이 쌀 한 됫박을 보따리에 싸서 머리에 이고는 내어놓으라는 순사에게 시어머니 제사에 매를 올릴 깨끗한 쌀이니 제발 봐주십시오.”라며 애원을 하다가 사정없이 발로 걷어 채였다. 순사는 침을 퉤퉤 뱉고, “빠가야로!”라고 소리치며 매를 지어 올릴 쌀을 빼앗아 획 뿌리치니 쌀은 산지사방 모레 밭으로 흩어져 다시 쓸어 담을 수도 없었다. 아낙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고 다리를 팼다.

나라에 쌀이 없어 황군들이 굶어 부황이 들 지경인데 무슨 얼어 빠질 빽다구 제사여?”

무치노 닌게요, 아나타 와 신교타이 모 나이 노카? (이 무지막지한 인간아, 너는 부모 형제도 없느냐?)”

사각모에 검은 망토를 두른 동경 유학생인가 훤칠하게 크고 흰 얼굴에 빛이 나는 청년이 순사를 나무랐다. 순사는 청년을 쳐다보고는 당당한 외모에 기가 눌렸는지 센세이와 와다시 신바라꾸 미치게에타 카타치로. (선생, 내가 잠깐 실수를 한 모양이오. )”라고 얼버무리며 뱃전으로 올라서서는 쇠방망이를 이리저리 흔들고 험악한 인상을 쓰고서 다시 악다구니해댄다.

백포양반은 두루마기 깊숙이 넣어둔 삼십 환이 화근이 될 것 같아 연락선을 타고 목포로 건너갈 생각을 접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솜두루마기에 아주 작은 길을 터서 비상금으로 쓰라고 숨겨둔 속주머니 깊이 돈을 감춰두니 제아무리 귀신이라 할지라도 솜 속에 숨겨 놓은 것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여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송산리를 걸쳐 계곡면 별진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강진 성전으로 빠질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동짓달 해가 짧아 육십 리도 남짓 걸은 모양인데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종아리가 제법 무겁고 두꺼운 솜저고리에 솜을 넉넉히 두고 촘촘히 박음질하여 바람 한 점 파고들어 올 것 같지 않은 두루마기를 입었어도 해가 떨어지니 제법 으슬으슬 한기가 돈다. 주막에 들어 잠자리를 청하고 찰떡으로 요기를 대강하고는 하룻밤을 묵었다. 밤이 제법 늦었는데 봇짐장수 두 명이 방으로 들어와 익숙한 모양새로 잠에 곯아떨어져서는 서까래가 들썩일수록 코를 골아대어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마자 주모에게 따뜻한 물 한 그릇을 청해 미숫가루를 타서 요기하고는 하룻밤 방값에 엽전 두 닢을 더 얹어 주고는 영암으로 발길을 옮겨 놓았다. 근 십 리를 걸었을까 눈앞에 장대한 바위산이 턱 하니 버티고 서있는데 선녀바우, 장군바우, 곰바우, 사자바우가 하늘을 닿을 듯 가지가지 모양새로 막 떠오르는 해를 받아 금빛으로 변하더니 금방이라도 걸어 내려올 것 같이 살아 꿈틀대는 모양새라 고개를 숙여 절을 한 뒤, 여기가 선계인가! 한참을 넋을 놓아 머물다가 지나는 아낙에게 길을 물었다. 장촌 골짜기에서 삼십을 넘게 살면서 바깥세상은 나오느니 처음이라 기암괴석이 장관으로 솟은 산을 쳐다보며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시오, 저기 보이는 저 산 이름은 무엇이오? 영암읍을 걸쳐 영산포로 가려는데 저 산을 넘어가면 빨리 갈 수 있겠소?”

, 쩌그 저 산 말이어라우? 지나가는 선비님은 여그가 초행길인 갑네요잉, 쩌그 저 산은 월출산 남쪽 자락으로 월남이라는 곳인디 쩌 산을 바로 넘어가기는 솔찬이 심들것이요. 가시던 길로 곧장 가먼 불티재라는 재가 있는디 그짝으로 가먼 더 쉬울 것이요. 불티재를 꼴딱 넘어서면 진짜배기 월출산을 볼 수 있어라우. 거그 그 옛날에 왕 무시기 박사가 있었는디 왜국으로 건너가서 왜놈들에게 글을 갈쳐줬다 안하요? 망할 놈의 인간들, 은혜를 웬수로 갚는 값소, 오늘날 우리를 이 모냥 이 꼴로 맹글아 놓고 천벌을 받지 받어, 흥 퉤

괜스레 아낙은 월출산을 올려다보며 부아가 치미는지 울화통을 끓였다.

그럼, 저 산을 넘어갈 수는 없고 불티재를 넘어가 보겠습니다.”

거그 있잖어라우?, 저승에 가먼 명부전에서 죄를 낱낱이 묻고는 영암 도갑사는 가보았느냐?, 강진 백련사는 가보았느냐?, 그라먼 마지막으로 해남 대흥사는 가봤느냐? 묻는디 다 가보았다먼 저승 문을 쉽게 건너갈 수 있다고 안합디여, 선비님도 급한 일 아니거든 월출산 도갑사에 한 번 들렀다 가보시요잉.”

 

불티재를 오르니 산세가 더욱 험악하였다. 동쪽 건너편 산 중턱에 나 있는 길은 강진을 걸쳐 장흥으로 이어지는 과거 보려 한 양 가는 지름길이고 불티재를 구불구불 내려가면 영암 읍내가 올망졸망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여 제법 근 십여 리나 됨직한 마을과 너른 들판이 이어져 있었다. 남쪽으로는 험준한 바위산이 그 늠름한 위용을 자랑하듯 버티고 서있었다. 인간의 힘으로 저 산을 어찌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아낙이 알려준 도갑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에게 책잡히지 않으려면 한 번 도갑사를 들렀다 갈 수도 있겠다 싶어 사람들에게 물어 곧장 영산포로 향하려던 발길을 돌려 서남쪽 길을 택했다. 아낙이 일러준 대로 도갑사 오래된 절인 듯싶었다. 일주문까지 한없이 길게 아름드리나무들이 호위하듯 서 있고 해탈문은 천년을 갖은 풍상을 겪어낸 듯 단청이 다 지워져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고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고요하기만 한데 넓은 절 마당은 비질이 잘되어 절 식구들의 부지런함을 어림짐작할 만하였다. 도량을 죽 둘러보고는 마애여래좌상과 석조여래좌상 앞에 성심을 다하여 삼배를 올리고는 뒤 돌아 나오는데 사시불공 마지를 올리는지 늙은 공양주가 법당을 분주히 드나들고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슬퍼도 힘들어도 사노라면 그저 한세상 티 없이 사라질 거라고 청아한 소리로 염불을 시작했다. 무슨 원이 그리도 많은지 염불은 끝이 없고 산새만 무시로 울어 나그네 발길을 붙잡았다. 가난한 절에 가난한 나그네는 보시도 못 하고 사시 마지 밥 한술 얻어먹을 수도 있으련만 절의 주인은 나그네보다 더 굶주리고 있을 게 틀림없어 해탈문에 서서 공손히 합장하며 절을 올렸다.

가던 길을 돌아서서 바삐 걸음을 옮기며 영산포 어귀에 들어서니 강물에 일렁이는 노을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저 멀리서 풍선이 스르르 미끄러져 포구에 닻을 내리고 노 젓던 선부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며 옹기항아리를 어깨에 척척 둘러메고 주막으로 들어섰다.

주모, 여그 찐한 농주 한 말 갖고 오쑈잉!”

아이고, 금매 싸게 싸게 들어오시더라고잉, 그란디 홍애는 많이 싣고 왔지라우? 동지섣달이라 그란가 오메 뭔~ 겔혼식이랑 대소사 잔치가 그라고 많은디 흉년이라고 해도 홍애 없으먼 잔치 못 하는 가분지 찾는 사람이 문전성시요라우, 금매.”

, 그랑께 우리가 이렇게 한 이레 걸쳐서 여그까지 힘들게 찾아온 것 아니요잉?”

흥정은 선주님이랑 하고요잉, 싸게 농주한 말 갖고 오랑께라우, 구수한 실가리국에 밥 한 그릇 말아 먹으면 배곯아 죽었던 막둥이도 살아나것 구만이라우, 싸게 싸게 서두르시오.”

한바탕 떠들어 대는 흑산도 섬 놈들의 푸지막한 농지껄이에 주모는 우왕좌왕 바삐 걸으며 마당으로 들어서는 나그네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한참을 서서 기다리다가 겨우 장흥에서 왔다는 나그네와 한 방에 들어 저녁상을 받고 있는데 마당에서 홍어를 파는지 똥통 푸는 냄새가 진동하니 백포양반은 저절로 코를 싸맨다. 산중 사람으로 제아무리 잔치에 없어서 안 될 음식이라지만 뭔 썩은 생선을 다 먹고 좋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는 사람 파는 사람 한참을 흥정하며 실랑이를 펼치더니만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흥정이 끝이 났는지 밖은 조용해졌고 썩은 생선 냄새도 점차 옅어져서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내일부터는 걸음을 재촉해야 더 추워지기 전에 한양에 당도할 것이라 일찍 잠자리에 들고 장흥에서 온 선비에게 내일은 벗하며 걷기를 청했다.

나주 관아를 둘러보고는 다시 끝없이 펼쳐진 너른 들을 걷고 또 걷는다. 세상이 이리도 너른데 나는 장촌 골짜기에 처박혀 종이나 다름없이 궂은일을 다 해가면서도 옛날 책이나 읽으면서 양반입네 위안으로 삼고 있었으니 참으로 자신이 한심하였다. 이 넓은 땅을 보고 처음 보는 광경이라 적잖이 놀랐는데, 앞으로 더 가노라면 더 큰 평야 지대가 있을 것이라 차마 짐작이라도 하였으랴! 들판을 가로질러 시커먼 구렁이 마냥 커다란 쇠뭉치가 꽥 소리를 길게 지르며 철커덩 철커덩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저 괴물이 마치 자기를 향해 덮쳐오는 줄로 알고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앞서가던 장흥 선비는 태연하게 걸어가며 말을 했다.

윤 생원님, 저 물건을 난생처음 보는 것이지요? 저것은 기차라는 것인데 한 번에 수백 명을 싣고 목포에서 만주까지 끊임없이 달려가는 거라오. 수천 석씩 쌀도 왜놈들이 전라도 농군들에게 빼앗아 가서는 만주랑 러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황군들을 먹이려고 실어 나르는 것이요. 일본군이 중국 전 국토에서 전쟁을 벌이고 만주국을 세웠다고 합디다. 러시아도 야금야금 침략하면서 기세가 등등하여 바다 건너 저 먼데 어마어마하게 큰 미국도 잡아먹을 거라고 합디다.”

장흥 선비와 함께 걸으며 세상 돌아가는 속내를 조금씩이나마 알게 되었다. 해남을 떠나 꼬박 닷새를 걸어 끝없이 이어지던 지평선이 끝나고, 송정리역을 빠져나갔다. 장성의 갈재에 이르니 영암 불티재 만큼이나 구불구불 험준한 고갯길로 전라도 북쪽 땅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초행길이라 혼자라면 몹시도 힘들었을 것이다. 장흥 선비가 다시 한번 갈재에 얽힌 이야기 하면서 옛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갈재 고갯길이 사나워 전에는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백주에도 사람을 죽이고 괴나리봇짐을 빼앗아 무사히 넘어가는 과객이 드물었다지 않습니까? 혹시 압니까? 지금도 굶어 죽어 나가는 백성이 수두룩하니 도적들이 나타나 목숨처럼 매고 있는 윤 생원님 그 봇짐을 빼앗아 갈지도 모르지요.”

허허,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질 마시오.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털이 곤두섭니다, 그려.”

구불구불 험준한 갈재는 걷는 이들이 드문 탓에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하여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지만 선비를 따라 넘다 보니 지름길이라 정읍에 훨씬 가까이 닿을 수 있었다. 힘들게 갈재를 넘자 마을 앞 커다란 당산나무가 길손을 반겨주었다. 선비는 동학란이며 녹두장군의 이야기를 길 위에서 숨을 고를 때마다 맛깔나면서도 소상히 알려주었다. 어려서부터 선대 할아버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해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거로 생각했는데 참으로 나라를 위해 예부터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구국 선열들이 그리도 많았는지 고개를 주억거리고 듣고 있을 뿐이었다. 입암면 군령 마을에 이르니 가슴이 탁 트이는 호남평야의 끝자락 멀리 펼쳐져 있었다. 옛날에는 군대가 있어 마을 이름이 군령이라 했다. 군령 초입에 힘들게 고갯길을 넘은 길손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보였다. 주막에 들어서니 늙어 허리가 탁 꼬부라져 땅만 보고 걷는 주모가 힘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손님을 맞았다.

저 너머 철길이 생기면서부터 통 여기로는 길손이 들지 않았는디, 어서들 오쑈라우. 저녁 찬 거리도 씨원찮은디 얼릉 보리밥 두어 그릇 삶아 올텐께 소세나 간단히 하고 기다리시요잉

주모, 우리는 땅끝에서 하릴없이 시상 귀경이나 해 보려고 나온 참이라 괜찮은께 찬찬히 준비하쇼

윤 생원, 나는 잠시 어디 들려서 거기서 하룻밤을 유하고 동이 트면 다시 내려올 테니 여기서 하루만 유하시지요.”

선비님은 보천교 본부가 있다는 대흥리에 간 모양 이구만이요 잉, 간혹 독립군 군자금을 받아 가는 사람들도 있어라우, 딱 보니께 그짝인 것 같소. 보천교 교주님은 차경석인디 이곳에 뭐 거시기 왕국을 맹글어 갖고 죽어서도 벼슬을 얻을 수 있다고 함시롱 제주서까징 배 타고, 기차 타고 와서들 즈그덜 전 재산을 털어 바친다고 안하요? 십 일전이라는 누각이 있는디 만평도 더 된다고 합디다. 높이가 99척이고 하도나 웅장해서 임금님 궁궐도 그라코롬 크들 않을 것이지라우, 산 시상에도 배가 곯아 죽어 나가는 사람덜이 한 해 봄이먼 수백멩인디 옥상상제님은 뭣 함시롱 그란 천벌 받을 놈덜을 안잡어강가 몰러, 지 배아지 부르먼 죽어서도 호갱 할랑갑제, 우덜 같은 사람들 나눠주면 자자손손 칭송받고 살틴디, 쯧쯧. 창시 빠진 그런 인간덜이 수백, 수천 명이라 거그가 서울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께로, 참 무선 시상이여라우, 시상이 어세 두세 해싼게 꼴뚜기도 뛰고 망둥이도 뛰는 모양입디다. 베락 맞을 놈덜, 그라다가 즈그덜끼리 싸우고 난리도 아닌갑써요. 장흥 선비님은 그란 썩어 자빠질 놈들 울궈서 됙립자금 뜯어내 올 사람이라고 우덜은 그라고 보요. 누가 들을까 무섭소, . 이 속 창애지 없는 늙은이, 주댕이를 바늘로 꿰매 부러야 할 틴디, 생원님, 절대 이런 소리 입 밖에 내지 마시요잉, 왜놈 순사가 눈에 쌍심지를 키고 들에다 보고 있응께, 쥐도 새도 모르게 자패가라우.”

 

새벽 동이 터오자 장흥 선비는 슬그머니 낡은 주막으로 들어오며 누구 뒤밟은 작자가 있는지 연신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 살피면서 들어왔다.

주모,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었는지 창아지가 등짝에 찰싹 달라붙어서 갱신을 못 하겄소. 국밥 한 그릇 후딱 말아 주쇼.”

겨우 눈곱을 떼어 내고 치맛말기를 틀어 올리는 늙은 주모를 채근했다.

날이 밝기 전에 누구 눈에도 띄지 않을 때 얼른 군령을 뜹시다. 갈 길이 아주 멉니다. 내일 중으로 익산에 들러 홀로 계신 지인의 모친을 살펴봐야 합니다. 한양 길이 참 멀기는 합니다, 그려. 저기 앞에 보이는 곳이 과교천인데 거길 넘어야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답디다. 전에처럼 과거나 보러 이 길을 간다면 참으로 좋았을 것을, 이제 시험만 잘 치르면 벼슬길에 오를 테니 얼마나 좋은가, 희망에 부풀어 길 떠나는 길손이 부지기수였는데, 썩어빠질. 옛날 글에 빠져 공자 왈, 맹자 왈 이나 외고 불쌍한 종들이나 쎄가 빠지게 부려먹고, 종들 먹는 것은 시궁창 생쥐보다 못했으니 동학란이 일지 않았겠소? 나도 그렇고 생원님도 그렇고, 우리가 양반이라고 종놈들 꽤나 부려먹질 않았습니까? 이제 다 옛날얘기지만 말입니다. 생원님네도 종들 다 면천 해주었지요?”

, 기미년 만세 사건이 터지고 곧 내보냈습니다. 그래도 나랑 같이 자란 탓인지 한 놈만 의리를 지키고 곁에 있다가 마지못해 나갔는데 읍내 포목점에 들어가 잘하고 있습니다.”

 

백포양반은 장흥 선비를 따라 부지런히 호남평야를 건너며 지평선 끝까지 눈길을 주다가 장촌 골짜기에 자라처럼 움츠리고 살았던 자신이 한심스러워 괜스레 울적해서는 선비가 곧 태인면에 당도할 것이라고 태인면에 얽힌 여러 사연을 주저리 주절이 말하여 주는데도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간추려 듣자니 태인면은 그 옛날 최치원이라는 훌륭한 문장가가 군수로 와서 고을을 다스리며 무지렁이 백성들을 눈뜨게 했고, 왜놈들이 벌벌 떨며 무서워했던 이순신 장군님이 현감을 지냈으며, 말년에 상춘곡을 지었다는 정극인의 무상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전라도에서는 문향으로 꼽혀 선비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곳이라고 했다.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본적지 역시 태인이라고 했다. 그나저나 백포 양반은 세상일에 깜깜무소식으로 생전 처음 겪는 무수한 일들에 놀라기만 할 뿐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 하루라도 빨리 나와서 터전을 잡고 나라를 위하든 자식을 위하든 하고 싶은 일 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들로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익산에서 장흥 선비는 내년 봄 초파일에 목포역에 나와 있으면 만주까지 데려다줄 중늙은이가 마중 나와 있을 것이라고 하고, 그때 떠날 준비가 되면 나와서 지게꾼 임 서방을 찾으라고 했다. 이제부터 본인은 더욱 몸을 숨기면서 밤길을 도와 한양을 거쳐 만주로 갈 것이라며 초립을 쓰고, 그 위에 두꺼운 당목 두건을 둘러매고는 너덜너덜한 솜저고리에 핫바지를 입고 등짐장수 복색에 지게를 지고 나타났다. 강경에 가서 새우젓 한 통 짊어지고 젓갈 장수 노릇을 하며 한양을 거쳐 만주로 갈 것이니 누구한테라도 본인이 어디 사람인지 어디로 가는지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떠났다. 장흥 선비와 헤어져서 곧장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여 걷다보니 해남을 떠난 지 열흘 만에 대전 유성 온천을 거쳐 천안 삼거리에 닿았다. 천안은 예부터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많은 길손이 거쳐 가는 곳이라 길가에 국밥집과 마방이 여태 남아있었다. 백포양반은 제법 큰 장국밥집에 들러 허기를 때우고 한양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장국밥은 장흥 선비가 알려 준 대로 만주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져 그곳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만큼 맛이 훌륭했다. 속으로 이만하면 백포댁 음식 솜씨로도 만주 가서 일꾼들을 상태로 국밥집을 열면 우리 네 식구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 셈을 해 보며 정월에 태어날 애기가 백일이 넘으면 곧 준비해서 만주로 떠날 생각을 하였다.

 

샌님, 이곳은 처음 오싯써유? 과거가 없어졌으니께 과거 보러 올라오실 리도 없었겠지유?”

늙은 허드렛일꾼이 나름 아는 것이 많다는 눈치로 나서서 삼거리길에 ''하니 서서 손짓으로 가리킨다.

여그, 뭣이냐, 천안 삼거리 첫 번째 갈래는 한양으로 곧장 올라가는 질이구유, 저 짝에 오른짝으로 뻗쳐 내러 간 질은 도토리고개를 넘어 공주를 거쳐 논산, 강경, 전주, 송정리 나주 해남까징 쭉 내려가는 질이구유, 저짝에 왼짝으로 난 질은 병천을 거치고 진천을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로 통하거나 청주보은영동김천을 거쳐 대구경주동래로 통하는 질이라고 봇짐 짊어진 장시들이 그렇코롬 떠들어 대등만이유, 알것지유? 그러니께유 선비님은 위짝으로 곧장 올라 가시먼 쓰것네유.”

그란디유, 선비님은 곧 장돌뱅이 각설이 패들이 지나갈 틴디, 그 기막히게 좋은 것 귀갱은 안하셔유? 근디 그거 귀경하다가는 유 야바우꾼들 농간에 손 탈탈 털리고 거지가 돼서 떠나는 선비들도 많은께유, 조심하셔야 합니다유. 과거 보러 가다가 하룻밤 뜨내기 사랑을 파는 주막 각시한테 홀래서 팽생 신세 망치는 선비도 여럿 있었시유. 선비님도 곱상하니 주막 각시덜이 환쟁하고 댈겨 들것인게유 조심하시야 쓰것시유. 여그는 한양보다도 더 무선데랑께유. 잘 살펴 가시야 쓰것시유

늙은 일꾼이 알려 준 대로 백포양반을 한눈팔지 않고 곧장 한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만주로 떠나서 새로운 세상에서 아이들 신식 공부시킬 생각에 한양까지 가지 말고 곧장 해남으로 내려가서 서둘러 준비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망설이기도 하였으나 이왕 떠난 길이니, 한양까지는 가보고서 처남 의향도 묻고 조언 듣는 게 좋겠다는 결심이 서니 열흘 남짓 쌓인 여독이 풀려 저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해남 땅을 떠난 지 열하루 만에 어느덧 경기도 땅에 이르러 안성천을 건너니 시원하게 펼쳐진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소사 평야라 부르는데 그 드넓었던 호남평야에 비하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고 이미 이곳까지 오는 내내 험준한 산과 드넓은 곡창지대를 거쳐서인지 별 새로운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바다와 갯벌이 있어 안성천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는데 상전벽해라더니 바다를 막아 갯벌은 수만 평의 논으로 변했다고 했다. 논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야 평야 끝자락에 소사마을이라는 곳이 나오고 소사원비라는 비가 세워진 곳에 이르러서 비문을 읽어보니 대동법 시행 기념비라는 것이었고, 대강 대동법 시행이 어려울 때 충청도 관찰사 김육이라는 분의 업적을 기린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벼슬아치들의 욕심은 끝도 없는데 백성들을 위해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 내신 분이구나라는 존경심이 일었다. 재빼기 고개라는 곳에 이르러 아픈 다리를 쉬면서 얼마 남지 않은 미숫가루를 털어 주린 배를 채웠다. 평택에서 묵은 뒤 험난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할 큰흰치고개를 힘들게 넘으니 동짓달인데도 땀이 나고 갈증이 났다. 감주 거리라는 곳에 이르러 감주로 목을 축이고는 또 부지런히 걸어 오산을 거쳐 떡전거리라고 주막에 이름 붙여진 화성에서 점심 요기를 하고서는 다 닳아 먼 거리를 걷느라 부르튼 발을 더 아프게 하는 짚새기를 갈아 신고는 논길을 계속 걸으니 어느덧 수원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멀리에 정조대왕능행로라는 써진 현판을 만나고, 정조 대왕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새로운 도성을 지었다는 화성 팔달문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래 남쪽 지방에서 올라온 듯 이상한 말로 지껄이는 사람들과 전라도 사람들이 뒤섞여 팔달문으로 모두 쏟아져 들어왔다. 지나가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이 전라도 경상도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해 들어 와야 하기에 사통팔달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팔달문이라고 좀 식자가 든 것 같은 이가 큰 소리로 떠들었다. 팔달문에서 장안문을 거쳐 남태령을 지나면 곧 한양이 이른다고 또 어떤 이가 다 온 거나 진배없다고 떠들어 댄다. 네모반듯하게 잘 깎아서 견고하게 쌓아진 돌담은 성곽이라 하였고 장안문이라 이름 한 문은 그 크기가 실로 어마어마해서 나그네들을 단숨에 압도시켜놓기에 충분했다.

니는 이 문이 뭣인지 알제? 이 문은 장안문인데 한양에 가면 남대문이라는 것이 떡하니 한양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기라, 나는 그 남대문이라는 것보다 이기 더 크고 훌륭한 것 같은디 니도 그리 생각제?”

문딩이 자석, 니가 남대문은 가봤나? 남대문도 안 가본 놈이 무신 큰 소리고?, 남대문은 그 크기가 백 척은 넘고 한꺼번에 우마가 백 대는 들어갈 수 있지예, 어마 무시 하더래이.”

그라먼 니는 남대문 문턱이 있는지 없는지 보았능교? 어떤 사램덜은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덜은 없다고 하니께 뭔 소린지 원 당최 모리 것드래이, 이참에 한양 가거든 꼭 남대문 문턱이 있는지 없는지 보아야 하지 않컷나?”

남대문을 보지 못했으니 장안문이 제일 크다고 믿은 게 당연하였다. 남태령에 이르러 하룻밤을 자고 나니 한양에는 보름 만에 당도하였다. 한양 또한 어마어마하게 많은 집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어디로 가야 종로통으로 찾아갈 수 있을지 참으로 막막하였다. 남태령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길손들이며 짐꾼들이 아주 많았고 양복쟁이들과 갓 쓰고 도포 자락 펄럭이는 양반들, 흰 저고리 검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며 검정 학생모를 쓴 남학생들이며 갖가지로 행색을 갖춘 수많은 인파가 뻘등에 칠게들이 기어 다니듯 이리저리 바쁘게 떠밀려 다녔다. 한강이라 불리는 강은 북창에서 목포까지 길게 이어진 바다 보다 더 크고 수많은 나룻배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마포나루에 내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짐꾼을 붙잡고 종로통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지게에 짐을 잔뜩 짊어지고서 자개도 거기 가는 길이라며 따라 오라 하여 겨우 종각까지 와서야 다른 길로 갔다. 한양 인심이 야박하고 눈 감으면 코 베이는 세상이라지만 착한 사람도 있다며 감사의 인사를 여러 차례 하고는 겨우 집 주소들 들고 물어물어 저녁 어스름에야 겨우 처남이 기거한다는 집을 찾아 들어갔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그러잖아도 매제가 조만간 온다는 연통을 받고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멀고 험한 노정에 상한 데는 없는가?”

형님, 절 받으시지요. 아직 젊어 여독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한양까지 오는 동안 세상 구경은 잘했습니다. 대처에 나오는 길이 처음이라 두렵기만 하였는데 점잖은 길동무를 만나서 오는 길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전쟁 미치광이 왜놈 군부들이 저리 날뛰니 어디 온 나라가 제정신 가지고 살 수 있겠는가? 망하지, 망해. 불쌍한 조선 백성들만 배곯아 죽고, 전쟁터에서 죽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처자들이 황군들 욕정에 바쳐지고, 징용으로, 공장으로 수 없는 사람들이 끌려나가니 어찌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직하가 벌써 열 살이니 이대로 있다간 영락없이 총알받이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으니 어찌 당해낼 수 있을지 잠이 다 안 옵니다. 그놈의 자식이 머리가 너무나 잘 돌아가 제 꾀에 넘어가기가 일쑤고, 남 앞에 깃발 들고 나서길 좋아하니 더 크면 천지 분간 못 하고 짱뚱이 마냥 이리저리 날뛰고 다니다가 홀채 끝에 꿰이기에 십상이라 전쟁터에 나가서도 한철도 온전치 못할 것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이렇게 대처에 나와 봤습니다.”

그래, 자당께서는 안녕하신가? 장촌을 떠볼 요량인 것 같은데, 그 노인데 성질에 가만 보고만 있진 않을 터인데 어찌할 요량은 있는가?”

장조카 명하가 남양군도로 징용에 끌려간 후 어머님께서는 매일매일 성질을 끓이고 계십니다. 형님이 전답을 다 팔아먹고 남은 것이 얼마 없어 안사람이나 저나 큰집에 웬만해서는 내려가지 않고 있습니다. 정월이 산달이라 더욱 근신하고 있지요.”

아이고 저런, 그 많던 재산을. 자네한테는 안 될 소리지만 숙의에게 그리 모질게 굴었으니 벌을 받은 모양이네.”

, 이제 어머니도 기가 쇠하여 오래는 못 사실 것 같습니다. 집사람이 워낙 대가 세고, 성정이 올곧아서 바르지 않는 것은 참지 못하며, 흉잡힐 일은 병적으로 하질 않으니 어머니도 이제 더는 억지소리 못 하십니다.”

그래, 어디 가서 살 요량은 하고 왔는가? 내가 여기 광장시장에 나가 그릇 장사를 하고는 있네만 큰아이가 이제 경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러 간다고 하니 정리하고 우리도 같이 가야 할 것 같네. 놈들이 싫지만 그래도 5대 독자를 군에 안 보내고 살려보자니 그 길밖에 없는 것 같아 환장하고 미칠 노릇이네. 지인들한테 손가락질당해도 자네나 나나 자식 하나 살려두자고 이런 결단을 내리자니 차마 할 짓은 못된 것 같네, 그려. 나는 오사카에 가서 도기 공장을 한번 해 볼까 하네. 세또시에 도자기 공장들이 즐비하다고 하니 강진에서 가마를 하는 기술자 두어 명 데리고 가서 자리를 잡으면 자네한테 연락할까 하는데 어떤가?”

, 그러셔야지요. 형님은 그래도 여러모로 재산을 불려서 오늘까지 잘 지켜내고 계신 것 아닙니까? 아직 직하가 어려 이제 소학교를 가도 절대 늦지 않을 것이라 저희는 만주로 갈까 하고 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선대에 의병 활동을 하신 할아버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이라 만주에 가면 독립군 군관학교를 보내서 자신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싶습니다. 뭐 그렇다고 거창하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는 하질 못할 것 같습니다. 경술국치 이전부터 경상도 안동 일대에서는 혁신 유림 독립지사들이 사재를 털어서 식솔들을 이끌고 서간도로 가서 합리하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진 고난을 겪어왔다고 합니다. 이상설, 이회영, 이석영 선생들의 그 구국 충정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고 영암에서 만나 강경까지 길동무하여 같이 왔던 장흥 임 선비님께서 그쪽 상황을 소상히 알려주었습니다. 비록 신분을 꼭꼭 감추고 비밀리에 움직이신 것 같습디다만 그분 인품도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전라도 지역에서 독립자금을 운송하는 분이 아닌가 싶더군요. 그건 그렇고, 설령 거기 가서 산다 한들 어린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려면 저와 안식구가 죽어라고 일을 해야겠지만 왜놈들의 가혹한 통치하에서는 저 같은 가난한 양반들이 살 수나 있겠습니까? 북간도에 가면 저는 벌목꾼 노릇을 하고 집사람은 요량이 좋으니 한밭 집을 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소학교를 어렵게 마치면 어떻게 서간도에 있다는 무관학교는 보내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월사금도 없다고 합니다.”

여행 중에 잠깐 독립지사를 만나 꿈같은 소릴 들었던 모양인데, 한겨울에 북간도나 서간도나 만주 땅은 4월까지도 차가운 바람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혹독한 추위에다 초가을부터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계속 쌓여 얼음 눈이 되고 물을 구하지 못해 수토병이 걸려서 죽고, 동사에 죽고,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굶어서 죽고, 왜놈들의 무지막지한 감시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개죽음이 되기 일쑤라네. 아무 연고도 없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춥고 배고픔에 견디기 어려울 것인데 어찌 그 험한 곳으로 가려고 하는가? 만주로 가서 사는 사람들은 날씨가 하도 험난하여 고놈의 날씨 왜놈보다 더 독하다고 한다네. 그뿐인가? 날씨도 혹독한 악조건에다 집을 짓고 사는 것도 문제이며 허허벌판 땅은 지천이나 그것을 개간하는 것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는 것이 고작인데 풍토병도 만만치 않으며 더 무서운 것은 마적들 등쌀에 살아갈 수가 없다고들 하다네. 해남 가거든 잘 생각해 보고 꼭 그곳으로 가려거든 부지런히 연줄도 찾아보고 충분히 알아보고 준비하시게. 때론 북간도로 이주해온 순진한 사람들을 상대로 별의별 사기를 치는 사람도 많다 하니 더욱 조심하시고.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은 세운 훌륭한 김좌진 장군이나 이범석 같은 신흥 무관학교 출신 장교들이나 관계자들이 북로군정서에서 목숨을 내놓고 잘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고는 하나 얼마나 많은 어린 생도들이 이름도 없이 죽어 나갔겠는가? 이정천이 이끈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도수 부대가 전투에 나가 칼과 총도 없이 다른 군대의 도움을 받아 초개와 같이 목숨을 잃었으니, 참으로 전쟁터 아닌 곳에서는 영웅호걸의 무용담으로만 여기고 그 기개, 그 기상이 아름답게만 여겨지는 것이지.”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이 아닙니까? 시골 무지렁이로 의미 없이 살다가 나이가 차서 황군에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고, 어린 처자들은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군 욕정을 채우는 위안부가 되다 수치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자결하고 마는 일이 부지기수랍니다. 내 자식들이 그런 일을 당할 것이 뻔한데,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면 사람으로 태어나 너무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요? 북간도로 가서 산다는 것, 참으로 무모하고 어려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살다간 아비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뼈가 부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집사람의 반대가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그도 저도 어려울 것 같으면 염치없겠지만 형님의 도움을 또 청해 보겠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 일찍 내려가서 봄 농사 채비를 해 놓고 집사람 몸 회복되는 대로 하루라도 일찍 떠날 수 있게 서둘러 보겠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식모 아이가 밥상을 받쳐 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반주에 저녁을 마치고 손님 맞는 문간방에서 일찍 잠자리에 드는데 처남이 내려갈 때는 꼭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며, 새벽에 몰래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어느결에 사 왔는지 목포행 첫 기차표를 끊어왔다. 그러잖아도 집안일이 적잖이 걱정되던 차에 걸어서 다시 해남까지 가자면 설 안에 아무 탈 없이 당도할지 몰라 몇 번 손사래를 치면서도 건네준 표를 소중히 받아들고 감사의 인사를 거듭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숙의 그 사람 그렇게 가고 죄인이 되어 마땅한데 무슨 염치로 찾아갔나 싶지만, 친동기간으로 여겨주시고 아끼시니 친형님보단 의논하기가 쉬워서일 것이다.

형님, 염치없이 신세 많이 졌습니다. 세월 좋아지고 제 살길 자리 잘 잡으면 서신 올리겠으니 형님도 일본 가시면 소식 전해 주십시오, 저희는 봄 농사 끝내놓고 떠나렵니다. 갈 데도 정해 놓지 않았고,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왜 이리 마음이 급한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다시 뵐 날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부디, 자네도 마음 단단히 먹고 식솔들 잘 건사하고 건강하시게.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질 않으니 언제 다시 자넬 만날 수 있을지, 어찌 됐건 내 자리 잡히는 데로 연락함세.”

종각에서 걸으면 십 리 남짓 거리인데 처남은 굳이 새로운 문물을 맛보고 가라며 전차를 태워주었다. 넓은 신작로 위에 두 줄로 나란히 쇳덩이가 길게 놓여있고 멀리서 커다란 쇳덩이 상자 같은 전차가 덜커덩거리며 제법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양복쟁이며 학생들이 줄줄이 동그란 고리 손잡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남녀가 뒤섞여 서 있고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며 승객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순사가 물색없이 서성이다가 아무 소득이 없는지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며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지나갔다. ‘대한문이라 크게 쓰인 현판을 보고 누군가가 덕수궁이라고 소곤거리고는, 곧이어 남대문이 나오자 큰 소리로 남대문에 문턱이 있느니 없느니 떠들고 나서는데 어느새 서울역이라고 전차에서 땡땡 종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뛰어내렸다. 붉은 벽돌에 둥그렇게 지어진 커다란 굴속 같은 건물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들고나기를 반복하는데 백포양반은 그 광경이 난생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련마는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였다. 서울역까지 오는 동안 높고 뾰쪽한 첨탑이 하늘을 닿을 듯 서 있고 그 꼭대기에는 열십자 모양의 문양의 쇳덩이가 올려져 있었다. 예수쟁이들의 집인가? 개명 세상이니 저리 자유롭게 남녀가 드나들 수 있는 것인가? 벽지 산골 세상일에 캄캄한 시골 양반은 모든 것이 어리둥절할 뿐이고 참으로 요지경 속 같았다.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흘러 들어가니 아까 보던 전차보다도 열 배도 더 커다란 쇳덩이가 씩씩 콧김을 내 뿜으며 황소처럼 달려들어 한입에 수많은 사람을 꿀꺽 삼켜버릴 요량으로 턱 하니 버티고 서있었다. 드디어 목포행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순사들의 철저한 검문을 거치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 검문검색이 이어지니 속이 울렁거리고 뒤집힐 지경이었다. 왜 그리 덜커덩덜커덩 소리는 나는지 잠이 들 만하면 ~~’ 기적을 울리며 산모퉁이를 돌고, 강을 건너고, 역을 지나고, 끝도 없이 커다란 쇠 달구지는 아랫녘으로 꼬박 하루를 달려갔다. 가락국수를 판다는 역을 지나고 제법 구색을 신식으로 갖춰 입은 사람들은 식당 칸으로 드나드는데 백포양반은 처남댁에서 내리 두 끼를 넉넉히 먹어둔 터라 밥을 사 먹는 데 허투루 돈을 쓰지 않았다. 걸어서 한양을 갔을 때는 이모저모 참으로 볼 것도 많고, 묻고 배울 것도 많았는데 하루 만에 뚝딱 목포까지 내려오니 이상하게도 허망하였다. 그래도 이제 북간도로 떠나 살자면 이런 열차라는 것도 타야 할 것이니 미리 연습을 잘 해 놓은 것 같다. 목포역에서 선창까지는 금방이었고 이왕 빨리 갈 요량이니 북창까지는 여객선을 타고 만대산을 넘어 집에 당도하니 마당에서 연을 만든다고 열심히 시누대를 깎고 있던 직하가 달려 나오며 어무니, 아부지 오셨어라우. 빨리빨리 나와보쇼~”라고 흥분하여 큰소리로 외친다. 백포댁은 정지에서 늦은 끼니를 준비하는지 당목 수건으로 불티를 털며 아무 탈 없이 돌아온 남편이 반갑고 고마워서 발그레한 볼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고 나와서는 얼른 괴나리봇짐을 받아들고 빨랫감을 가려내어 우물로 가서는 함지박에 담아두고는 밥상을 차려 내왔다. 비록 소찬이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달고 맛난 집밥을 먹고 나니 속절없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것이 행복일진대, 우린 이제 이 편한 집을 두고 멀리 타국으로 떠나 모진 고생을 할 것이라 어찌 오늘같이 아늑하고 편할 날이 또 있을 것인가, 아직 속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 나오느니 한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