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맛, HEIMAT who walks over Mountains

산이 없는 동네에 태어나서 백두대간까지 진출하여 사진찍고 산행기 쓰고 소설도 쓴다

실화소설 : 홍탁의 질풍노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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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소설 Mountain Novels

2013. 3. 15.

 ( 탁의 탄생)

 

실화소설을 하나 구상했다. 사실과 허구가 서로 얽힌다는 뜻이다. 실화는 참말이고 소설은 구라다. 영어론 Faction(Fact + Fiction)이라고도 한단다. 누군가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어렸을 이야기이니까, 그땐 마초적 인생관이 풍미하던 때였다. 누구의 주먹이 셀까?하며 우린 활극을 보고 자랐다. 험한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해 가는 주인공의 멋진 이름이 필요했다. 생각 끝에 ‘홍 탁’(洪 卓)이라고 지어 봤다. 그냥 들으면 홍어와 탁주를 떠올리게 하는 평범한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자를 좋은 걸로 썼다. 외자 이름은 조선시대 왕들에게 주로 붙여졌다. 귀한 이름이다. 주인공과 대결하는 합기도 사범의 이름은 ‘김 철’이라고 역시 외자 이름을 부여해 보았다.

 

그의 성은 , 이름은 ‘탁’인데 본관은 남양이다. 다른 홍씨라도 상관은 없을 . 그러나 홍씨의 대부분은 남양 홍씨다. 그래서 그렇게 지은 것일 . 이름은 뛰어나다는 뜻의 이다. 나이가 들어 그가 세파에 물들어 탁해지면 탁할 濁자를 붙여 줄 수도 있다. 말년에 세탁업과 관련이 있으니 깨끗이 옷을 빤다는 濯이 될 수도 있겠다. 이도 저도 복잡하면 그저 한글로 탁이라고 부르면 된다.

 . 

(소설의 시작)

내 이름은 홍 탁이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들으면 먼저 홍어와 탁주를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 이름이 탁월하다는 뜻의 ‘卓’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다들 실망하고 만다. 홍어와 탁주가 서민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게 해서 어려워하지 않고 접근해도 되는 명칭으로 반가운 마음에 웃음을 지었지만, 탁월이라는 해석을 듣고는 선뜻 납득하지 못하고 올라갈 수 없는 나무를 쳐다보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내 이름엔 이중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겉으로 풍기기엔 서민적이고 평범하지만 이름을 지은이인 아버지의 바램에선 남이 보는 평범함을 딛고 일어서서 결국엔 지도자로 성장할 거라는 주문이 깃든 멋진 이름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그때, 나의 나이는 방년 25, 아니 한국 나이로는 26세의 총각이자 대학 2학년 복학생이었다.

 

때는 1974년 여름, 박통에 의한 유신의 위세가 한참 떨치던 시절이었고 6월이 다 가는 어느 늦은 봄날 밤.

 

위험천만한 그 녀석을 만난 것은 외나무다리가 아니라 동국대학교로 올라가는 장충동 산동네의 넓은 골목길이었다. 나와 그는 그 큰길을 정확하게 가운데를 따라 나는 올라가고 그는 내려오는 중이었다. 둘 다 길의 정중앙을 고수하고 길옆으로 비켜서는 양보를 사양하였기에 둘은 외줄기 철로를 두고 양편에서 질주해 오는 기관차처럼 마주치게 될 운명이었다.

나와 그 녀석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마주치고 서로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자 한 바탕 붙게 되었다.

 

“길 좀 비킵시다” 라고 내가 먼저 말하자 그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거칠게 응수하는 말이 “니가 비켜 임마”하고는 나를 째려본다. 나도 밸이 꼬일 수 밖에.

 

그리고 둘은 서로 설전을 펼쳤다. 그는 자기가 무슨 합기도 사범이라고 겁을 준다. 나 또한 지지않고 지금 학생이지만 공수부대 출신이다 뭐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합기도 사범 쯤 제낄 수 있다는 나의 오기와, 공수부대 녀석 오늘 잘 걸렸다고 생각하는 그의 오기가 서로 만나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었고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파란 전기 스파크가 이는 듯 했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짙은 술냄새가 나의 옅은 막걸리 냄새를 압도하고 있어서 그가 나보다는 조금 더 마신 듯 했다. 말싸움의 강도가 세어짐에 따라 그는 점점 더 흥분해 갔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녀석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 했다. 곧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게 보이는 몸뚱아리에서 화살처럼 빠르게 무쇠같은 주먹이 날아올 차례다.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그 녀석과 조우할 때 까지는.

 

그날 나는 학교 앞에서 학우들과 즐겁게 한잔 걸치고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학교앞 빈대떡집에 합석했던 학우랬자 나이가 한참 어린 여학생 (내가 3수한데다 군대도 학기가 맞지 않아 4년후에 복학했기에 새로 들어온 과 여학생들과는 7년 차이가 남) 서넛과 두 살이나 어린 동기생, 즉 복학생 남자녀석들 대여섯 명이었다. 마지막 시험인 중국어작문을 하나 내일 남겨 놓긴 했지만 우리들 마음은 시험이 다 끝난 것처럼 아주 가벼웠기에 내일 과 학우 전체기 모이는 종강회식 전에 오늘 작은 술자리를 하나 갖자고 해서 아름아름하는 친구들끼리 모였던 것이다.

 

오늘 친 전공시험인 중국근대사를 담당한 이지성 교수는 학생이 꼬박 수업에 들어오기만 하면 웬만해서는 B학점도 안주는 ‘A 폭격기’로 이름 난 교수였기에 아무도 그의 시험을 겁내지 않고 있었다. 또한 시험은 교과서를 맘대로 뒤져 볼 수 있는 오픈 북 방식인데다가, 시험문제는 정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중국역사에 대해서 갖고 있는 독특한 관점을 서술하면 아주 좋은 점수를 주는 그런 시험이기에 밤을 새우며 역사적 사건들의 연도와 관련인물들을 달달 외우는 시험공부는 오히려 답을 쓰는데 해로울 뿐이었다.

 

요는 독특한 관점을 가진 역사해석을 논리적으로 서술하되 자기의 관점만 확실히 하면 되는 시험으로 그 방법이 나의 구미에 아주 잘 맞았다. 외우는 것보다는 사실들을 해석하여 일관된 논리로 담당교수를 설득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방법이었으니까. 2년이 걸리는 3수 끝에 선망하지도 않던 2차 대학에 억지로 꿰어 맞추듯이 들어온 데다가 평소에 별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중국어과에 덜컥 붙어서,(중어과에 들어가게 된 진짜 놀랄 이유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자리에서 밝히겠다)   이 과에 들어온 나는 초기에는 학과에서 개설한 과목들을 심드렁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지성교수의 중국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학생들 앞에서의 흥미있고 열정적인 강의는 나에게는 하나의 놀라움이었고 그로 인해 나의 내면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이 차차 자라 오르게 해 주었다.

오늘 시험문제는 년 위 선배들에게서 입수했던 바와 똑 같이 ‘아편전쟁에서 당신이 배울 점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을 평가하라’는 두 문제 중 한 문제를 쓰는 것인데 해마다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미 지난 번 이 교수에게 제출한 리포트에서, ‘젠틀맨쉽과 아편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아편전쟁에 대한 나의 관점을 진지하게 서술하여 20쪽이나 되는 과제를 제출한 바 있었고, 이 교수는 지지난 주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나의 리포트를 극구 칭찬해 마지 않았다. 게다가 홍 탁군은 앞으로 훌륭한 중국전문가가 되리라고 예언까지 해 주었다. 그리고 나의 군대체험도 들어가며 공수부대 출신답게 구부러지지 말고 곧게 길을 헤쳐 나가라고 말씀해 주어 학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터였다.

 

작은 술자리에서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오늘 치른 중국근대사 시험과 나의 리포트가 화제에 올랐다. 눈매가 서글서글한 서영이가 물었다.

“오빠, 축하해. 이교수님이 탁 오빨 너무 감싸주는 것 같애. 훌륭한 중국전문가가 될 거라는 말씀에 블랙 베레의 직설적 용기까지 칭찬해 주셨으니 말이예요.

“뭘, 그 정도 가지고. 내가 사실은 조금 연굴 해 봤지. 그래서 말야 영국신사라는 말 진짜 다 구라더라. 이건 뭐 이렇게 나쁜 시키들이 세상천지에 없는 거야!

 

미니스커트를 걸치고 있어 훤히 들어난 무릎을 어색하게 책으로 가린 채 둥글의자에 걸터앉은 다혜가 거들었다.

“오빠, 정말 멋있었어. 그런데 오빠의 독특한 관점을 지금 한번 더 얘기해 줄래. 오늘 시험에 다 풀어서 썼겠지만. 나도 앞으로 참고하게.

 

그래서 난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나의 썰을 길게 학우들 앞에서 풀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 중국의 역사는 정말 웃기는 역사였다. 19세기 초엽 영국 녀석들이 중국의 차에 취한 나머지 많은 차를 중국에서 수입하게 되었고 그 대금을 지불할 방법이 궁해지자 인도의 아쌤지방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게 되었고 중국사람들은 이 마약이 만병통치약인 줄 알고 상시 복용하다 보니 아편의 해독에 점차로 희생되어가는 참이었다. 아편은 거의 독극물 수준의 해로운 물질이어서 청조 정부도 수입을 금지했으나, 정부당국의 무능함과 부패로 인해 수입금지명령은 있으나마나 했다.

 

아편이 수입되면서 그 대가로 중국의 은이 빠져나가는 중대한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청조 정부도 이제부터는 아편단속을 강화하기로 결심하고 1838년에 흠차대신으로 임칙서를 광주에 파견하였다. 임칙서는 영국 상인 소유의 아편 약 2만 상자(1상자에 60kg)를 몰수하여 불태웠는데, 이 사건으로 분쟁이 일어나 결국 1840년 영국이 함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1차 아편전쟁이었다. 강경책을 취하던 청조정부는 영국의 파병에 직면하자 변변한 대응도 못하고, 임칙서를 면직하고 대신에 투항파였던 琦善을 그 후임으로 세웠더니 기선은 홍콩을 떼어주고 배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지불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가조약을 영국과 맺어버렸다.

 

그러나 청조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파면했는데, 영국은 무조건 무력을 내세워 일을 해결하려 하여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청국군대는 전쟁에서 번번히 지다가 종국에는 양자강을 공격당해 남경이 함락직전에 놓이자 굴욕적인 ‘남경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경조약에서 중국은 5개 항구를 개항하고 홍콩을 영국에게 떼어주며 배상금 2,100을 물고 청조의 무역독점기구인 公行을 폐지하며 영국인의 자유무역을 허용하고 왕래문서를 평등하게 하는 등의 항목들이 체결되었다.

 

그 후로도 몇 개의 불평등 조약을 영국에게서 강요당하며 청국은 국제사회에 진입하였다. 그 후로도 아편은 중국에서 계속 팔리고 있었다. 이런 나쁜 시키들!

 

영국의 본을 본 다른 열강들도 차례차례 청국과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며 아편전쟁을 기화로 중국에선 치욕의 근대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특히 1842년 홍콩의 할양은 영국에게 155년동안 홍콩을 통치할 권한을 주었는데 홍콩은 1997 7 1일에야 중국에 반환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사도는 약자를 보호하고 공정한 룰에 의해 선의의 경쟁을 한다는 개념일진대, 19세기 영국인들은 그들의 국내에서는 신사도를 실행했는지 모르지만 바깥세계에 나와서는 신사도는 커녕 야만의 도를 실행하고 있었다. 중국의 은을 탈취하기 위해 인도의 아편을 들여다 팔아 중국의 은을 입수하고 인도에는 영국 본토에서 생산한 면직물을 팔아먹는 소위 삼각무역을 자행하였다.

 

나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총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서영에게 동의를 구하며 물었다.

“서영아, 영국놈들 얘기 들으니까 정말 나쁜 놈들이지. 너희들 영국이라는 나라가 니네들이 껌뻑 죽는 비틀즈의 조국이고 젠틀맨쉽의 나라라고 은근히 영국 좋아했었지?

 

“그래, 오빠. 얘기듣고 보니 영국 녀석들 조심해야겠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오빠의 독특한 관점은 뭐였어? 더 듣고 싶어.

 

“응, 내가 보기에는 말야. 큰 복수가 시작될 것도 같아. 중국사람들이 18세기 강희제나 건륭제 황제시대까지는 아마도 세게 최강국이자 부국이라고 할 수 있었잖아. 그런데 19세기에 와서 영국이나 다른 열강들에게 무릎을 꿇으며 그 자존심이 다 날아갔지.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던 거지. 오죽하면 상하이의 외국인 조계에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을 금지한다는 팻말까지 있었겠어. 엊그제 키신저와 닉슨이 중국에 가서 모택동과 만났고 이제 중국도 죽의 장막을 걷고 나라를 개방하기로 협약을 맺었으니까, 중국엔 외국자본이 대거 몰려올 것이고 중국인들은 장사를 원체 잘하는 족속이니 자본만 있으면 곧 경제가 크게 일어날 것 같애. 그래서 중국이 부강해지면 절치부심하던 속내를 들어내고 언젠가는 옛 열강들에게 큰 복수를 하지 않을까?

 

“음, 그럴듯 해. 근데 오빠, 그럼 우리의 스탠스는 뭐지?

“오, 그래. 그 점이 나의 독특한 관점이지. 우린 우리대로의 스탠스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거지. , 민주적이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물론,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가 돼야 해. 도덕과 정의로 무장한 나라는 쉽게 밀리지 않지. 19세기의 서양열강처럼 후안무치한 도덕률로는 세상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지. 또한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겠다고 중국이 언젠가는 힘을 과신하고 오버해서 무리수를 쓸 터인데 그것도 도덕적이지는 않을 거고, 결국은 또 다른 제국주의가 될 것 같애. 우린 실력을 키우고 또한 인류보편의 도덕과 평화를 앞세우고 실천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지.

 

“오빠, 오빤 조금 나이브한 것 같다. 도덕이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도 작은 나라가 주장한다고 큰 녀석들이 따라올까? 난 오빠가 아주 체력이 좋으니까 힘의 우위, 이런 걸 주장할 줄 알았지”

 

“사실 그게 나의 고민이란다. 앞으로 3-40년후엔 중국인들이 힘을 가지고 막 나올지도 모르는데 도덕률 하나로 그들과 맞서기는 힘들다는 것 인정한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부도덕하다면 필패일거야. 우리 나름의 평화주의-팍스 코리아나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 물론 그것은 이웃나라들과의 선린과 평화를 도모하면서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는 그런 방향이어야 할 것이고. 내 얘기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우위에 선다면 무서울 게 없다고 본다. 필요한 만큼의 경제발전과 민주화는 물론 달성한다는 전제이긴 하지만 말이야. 사실 나도 자신이 없구나, 중국의 힘을 견제하려면 도덕률만으론 안 될 것 같다고 고백해야겠다.

 

술자리는 막걸리 주전자가 더해감에 따라 소프트한 주제로 옮아갔다. 노래를 좋아하는 효리가 한 마디 한다.

“오빠, 지난 번 사릉에서 말야. 그 노래 참 잘 부르더라. 또 나중 곡도 참 멋있었어.

“그래, 고맙다. 시간 있으면 더 좋은 곡들도 들려주지.

 

지난 달 경춘선 연변에 있는 사릉으로 과 소풍을 갔다가 통기타를 튕기며 부른 ‘Proud Mary' 'House of the Rising Sun'을 말함이었다. 평소에 홀로 팝송을 즐겨 부르는 것이 과원들에게 알려져서 얼마 전부터 여럿이 모이면 나에게 꼭 한곡 청하곤 하는 것이 공식이 되다시피 했고 나도 나름대로 호응하고 싶어 시간이 있는 대로 기타 코드를 짚으며 팝송을 연습도 할 겸 즐겨 부르는 중이었다.

 

2년에 걸쳐 대입3수라는 어려운 시절을 지내며 기타는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고 할 만큼, 공부하는 틈틈이 기타를 튕기며 팝송에 젖던 습관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었다. 그 후 대학입학 후, 나의 학교는 내가 바라던 학교가 아니고 그것도 전공이 내가 원하지 않던 중국어라서 공부엔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고, 단지 전술한 이 교수의 과목처럼 내게 흥미를 주는 한 두 과목에만 집중한 채 건성으로 학교를 다니는 중이었다.

 

그런 나에게는 공부보다는 다른 재주가 있었는데,  다른 대학교 종강파티와 신입생환영 파티 등을 다니며 보수를 받고 사회를 보러 다니는 일이었다. 우리학교 Jazz festival에는 통기타를 들고 나가 ‘You are the reason I dont sleep at night‘ 로 예선에는 통과했었지만, 본선에선 “Before this day end”를 불렀는데 시상권에선 탈락하고 말았었다.

 

1학년 1학기를 끝내고 우선 군대를 끝낼 작정으로 공군 입대 준비를 하며 2학기를 등록 안 했는데, 이미 재수하는 중에 신체검사를 받았기에 육군에서는 휴학생 징집원칙에 따라 내게 후년 1월에 입대하라는 징집영장을 보내왔고 나는 30사단 신병훈련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특기로는 610(수송?)을 받아 부산 군수사령부에서 10주간 훈련을 받았다.

 

그후, 우여곡절 끝에 훈련을 끝낸 나는 생각지도 않던 특전사(특전사에 들어가게된 기막힌 사연 또한 나중에 밝히겠다) 에 배치 받아서 군 생활을 하게 되었고, 온갖 어려움을 모두 극복한 채, 자랑스러운 레인저 휘장과 낙하산정리 수료장을 받을 수 있었다. 군에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이었고, 그게 내게는 하늘 아래 무서울 것이 없다는 신념으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부드러운 팝송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이 신념이 과연 통할 것인지는 하늘에 계신 그분만이 아실 일이었지만....

 

이제 술자리를 파할 때가 되었다. 어머니께서 집에서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기다리신다고 했었는데 이미 저녁시간은 놓쳐 버린 것 같았다. 녀석들은 연장자인 나에게 결론을 내려달라고 한다. 착한 녀석들이다.

 

“서영아, 다희야, 그리고 효리, 재식이, 현석이, 승철이 그리고 나머지 애들, 잘 들어라. 난 앞으로 중국전문가가 되어 우리나라를 지킬 거다, 아까 말한 대로 도덕적인 힘을 길러 우리 민족이 동아시아 아니 나아가서 세계 최고의 정의로운 민족이 되도록 할 거다. 너희도 아다시피 힘으로 치면 아니 싸움으로 치면 날 당할 자 있겠냐? 그러나 난 머리로 승부할거다. 난 위기의 순간에 우리나랄 구할 거야. 지금 당장 외교관계가 없으니 중국으로 갈 순 없고 먼저 미국으로 건너 갈 거다. 거기서 기반을 마련하면 중국으로 뛴다. 중국어는 어느 정도 되어가니 내일부턴 영어공부도 병행한다. 대륙으로 같이 갈 사람 없냐?

“저요! 저요!

 

녀석들과의 술자리는 이렇게 끝났다. 집에서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작은 달 한 조각이 하늘에 떠 있긴 하지만 이미 어두워졌다.

 

아버지의 사업부진으로 이곳 산동네로 이사 온 후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한참을 걸어 올라가는 데에 난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남들이 빡세다고 생각하는 공수부대에도 잘 적응했다가 제대하고 돌아왔기에 튼튼한 다리를 가진 내게 10분 남짓한,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의 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젊은 혈기에는 운동도 안 되는 감질나는 거리였다고 해야겠다.

 

산비탈 언덕위의 집으로 향하는 길엔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순결한 하얀 색의 청초한 꽃무리는 덩굴위에서 가시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짙은 향기를 공중으로 내뿜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밤이라 향기를 내뿜는 작용은 그쳤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가로등이 드문 이 동네에 저녁이 되면 어두운 그늘에 가려 찔레꽃 덩굴은 보이지가 않고 어둑어둑한 한 구석에서 그 존재를 겨우 알아볼 수 있기에, 낮에 보아 두었던 기억을 되살려 깨끗한 꽃모양과 달콤한 향기를 머릿속에서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하늘엔 반달이 떠 있었지만 산동네의 어둠을 다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기에, 하얀 찔레꽃이 향기를 내뿜는다는 상상을 하기에는 주위가 조금은 어두웠고 길은 경사져 있어 약간의 주의가 필요했다.

 

찔레꽃은 내게 무언가 가난의 냄새를 떠올리게 했다. 작고 흰 꽃들이 떼를 지어 피는 모습이 산동네에 몰려있는 하꼬방을 연상하게 했다. 먼저 살던 집 정원엔 붉은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그러나 이곳으로 이사 와보니 좁은 집안엔 정원도 없고 꽃은 더군다나 구경할 수 없었다. 그저 길에 동네 한길에 마구잡이로 피어있는 찔레꽃 한 무더기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장미와 찔레의 차이는 부촌과 빈촌의 차이로 느껴졌다. 그러나 몇 달 이곳에 살다보니 찔레곷은 은근히 나에게 힘을 주는 듯 했다. 하얗고 소박하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양 같기도 하고 지금의 우리 가족의 모습 같기도 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순도순 서로를 아껴주며 우린 고단하지만 행복했다.

 

그 즈음은 월남전도 한참 끝나가며 미국이 고전하는 때였고 미국 국무장관인 키신저가 휴전협상을 위해 파리에서 북베트남인들과 만나고 있는 혼란기였다. 친구들 중 월남에서 싸우는 친구들도 있었다. 냉전시대였기에 군대는 약간은 마초 스타일로 흘렀고 우리는 그걸 가감없이 받아들였다. 죤 웨인이 나오는 ‘그린베레’라는 영화가 있었고 미국 특수부대인 그린베레의 용감한 모습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기에 충분한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특수부대인 공수특전단엔 녹색대신 검은 베레가 도입되었고 나도 어쩌다 보니 그 대열에 합류하였고 그 속에서 나의 몸과 맘을 튼튼하게 할 수 있었고 그들이 외치는 구호인 ‘안 되면 되게 하라’가 나의 적극적 성격과 맞아 떨어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 안 될게 뭐람!” 나는 산동네에서 고단하고 남루한 생활을 겪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꺾이지 않고 저 태평양 너머의 미대륙과 서해 건너편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자리잡고 앉아 아직도 열리지 않은 미지의 중국대륙을 굽어보고 있었다.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자주 불러보던 그린베레 노래가 흘러 나왔다.

 

Fighting soldiers from the sky

Fearless men who jump and die

 

Men who mean just what they say

The brave men of the Green Beret

 

Silver wings upon their chest

These are men, America's best

 

One hundred men we'll test today

But only three win the Green Beret’

 

하늘에서 내려와 임무를 수행하는

두렴없는 사내들 그이름 검은베레

 

가슴에는 은빛날개 사나이 자랑이요

백에 셋 가려뽑힌 영광의 검은베레

 

노래를 부르며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넓은 길 한가운데로 올라가고 있던 나는 그날따라 걸음을 옆으로 돌려 길을 비켜 주기가 싫었다. 약간 취한 탓도 있으리라. 저쪽 사람이 양보하면 난 정자세로 그냥 통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났다. 쟤가 양보하겠지. 설마. 내가 올라가는 쪽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그 녀석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질풍노도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오기이자 자존심이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서로 길의 정중앙을 차지하겠다는 사소한 오기를 부리다가 언쟁을 벌였고 그 결과로 무력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마초적 과정의 결말이었다.

 

우뚝 선 그에게서 짙은 술냄새가 풍겨왔다. 나보다도 더 취한 듯 했으나 나보다 장신인데다 거구인 그가 자세를 하나도 흩트리지 않고 있어 그의 모습은 매우 단단해 보였다. 그는 나와 말싸움을 하며 점점 더 흥분해 갔고 그에 따라 나의 아드레날린 수치도 급격 상승했다. 녀석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이는 듯 했다. 곧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게 보이는 몸뚱이에서 화살처럼 빠르게 무쇠 같은 주먹이 날아올 차례다.

 

나도 자세를 잡았다. 그 순간 내게 전광석화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그에게 여유있게 물었다.

“우리 그냥 개 싸움하듯 붙을까? 아니면 서로 한방씩 쓰러질 때까지 쎈팅을 놓을까?

진흙탕 속에서 개들이 마구잡이로 싸운다는 뜻의 이전투구보다는 한번 싸우더라도 격식을 차려 싸우는 것이 훨씬 신사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먼저 칠까? 아니면 니가 먼저 칠래?

그러자 그는 자신감을 배경으로 한 경멸에 찬 눈초리로 날 노려 보았다.

“니가 먼저 쳐 임마”, 하고 말하며 공격자세를 걷우어 들였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유연하고 탄력있는 허리를 우측으로 한껏 틀었다가 좌측으로 휙 돌리며 돌같이 단단한 오른 쪽 주먹으로 전광석화처럼 그의 왼쪽 턱을 힘껏 강타했다. 지금도 지인들과 골프장에서 어울리면 자주 장타상을 받을 정도로 나의 허리는 튼튼하지만 그때는 더욱 탄탄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는 큰 힘을 받아 뒤로 나자빠지며 머리를 뒤에 있던 동국대학 담 밑의 돌 축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크고 건장한 몸이지만 그는 통나무처럼 땅에 힘없이 쓸어졌고 잠시 넋이 나간 듯 했다.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자 그는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통금도 지나 12시가 넘은 이 시각에 자기 집에 가서 커피 한잔을 꼭 해야만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를 부축해서 그 자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그의 집, 아니 셋집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나는, 밤이 이미 늦었으니 이만 헤어지고 내일 술 깬 다음에 다시 붙자고 권했으나 그는 굳이 입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집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강권을 했다.

 

그래서 2층에 있는 그의 셋방에 들아가 보니 벽은 온통 합기도 도복을 입은 그의 사진과 도장에서 다른 사범들하고 운동하는 사진들이 걸려 있었는데 방안에선 여동생이 혼자 달게 자고 있었다. 그는 자고 있던 여동생을 억지로 깨워 내가 괜찮다는데도 빨리 커피를 끓여 오라고 채근했다.

 

커피 대접을 받은 후엔 여동생이 보아온 술상을 그와 나 사이 중간에 두고 술까지 마시고 있는데 그는 아픈 턱을 계속 어루만지며 내가 진짜 공수부대 출신이냐고 집요하게 내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답할 뿐 그 자리에서 증거를 보여주진 못 했다. 그의 생각에 오늘 무쇠주먹에 억울하게 당하긴 했지만 진짜 공수부대 출신에게 당했다면 덜 억울하다는 심정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우리집에 가자. 내가 보여줄 게 있으니.

그렇게 말하곤 당시 어머니 혼자서 계시며 초저녁부터 학수고대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아파트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내 방의 벽에 걸린 공수특전단의 훈련사진들과 낙하산 정비교육대 사진 등을 보여주고 내가 진짜 특전단 출신임을 그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 사실을 확인하곤 속지 않았다는 생각에 약간은 안도한 듯 했다.

 

그러나 조금 있더니 진짜 공수부대원을 만나서 그런지 그의 전의는 더욱 불타오르는 듯 했다. 내일 꼭 나를 묵사발 만들겠다는 둥, 당장 붙어도 자신 있다는 둥 말이 많아졌다. 나도 그에 질세라 당신 같은 사람은 한 다스도 문제없다는 둥 가볍게 받아치고 있었다.

   

야밤중 늦은 시각임에도 어머니께선 주무시지도 못하고, 옆에서 걱정스럽게 착한 아들(?)과 웬 우락부락하게 생긴 불량배가 야밤 그것도 새벽 한시가 다 되도록 방에 들어가 논쟁을 하는 것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계셨다.

 

다행히 그 밤에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우리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오후에, 내가 중어작문한 과목 시험만 남았으니 그 시험을 치르고 우리 동네 충무로길 옆에 있는 국민학교 뒤뜰, 으슥한 장소에서 다시 맞장뜨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섰다. 오늘 한 방에 당하고 복수를 하지 못한 데 대해서인지 일말의 아쉬움을 얼굴표정에 지은 채 돌아갔다.

 

다음날 오후, 나는 마지막 시험인 중어작문 시험을 사실 거의 망쳐버렸다. 왜냐면 그 녀석의 집에서 한잔 더 한 이유도 있었지만, 우리 집에서 늦게까지 그 녀석과 기싸움을 했기 때문에 잡을 설쳤었고, 더군다나 진짜 합기도 사범과 맞장 뜰 생각을 술이 깬 다음 하게 되니, 사실상 걱정이 되어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과 종강회식에서 술 한잔 하자고 집요하게 붙잡는 후배, 그리고 귀여운 여학우들을 뿌리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전이었고 지더라도 정정당당히 붙어야 했다. 상대는 진짜 특전대원을 꺾으려고 온갖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니 약간 겁이 나기도 했으나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오늘 최대한 잘 싸워 그를 제압하여 내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하겠다는 투지가 발동하였다.

 

어제의 선제공격과 같은 나름대로의 필승전략을 맘속으로 구상하며 집에 도착한 나는 내방에 가방을 던져두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었다. 시간을 보니 약속시간보다 15분이 늦었다. 서둘러야 했다.

 

대결장소인 국민학교로 향해 달려가면서도 나는 온 몸에 기를 모는 심호흡을 하며 내리막길을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가진 건장한 남자가 맞은 편에서 이쪽으로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녀석이었다.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나타나지 않자 배신감을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인 듯 했다. 우리 둘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손을 내밀며 누구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사과를 했다

“어제밤에 실례가 많았소. 정말 미안하오.” 내가 말했다.

 

“어머님께서 얼마나 놀라셨겠소.” 그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아니 어쩌자고 자고 있는 누이를 깨워 차를 대접하게 했소”

그리곤 우린 근처 주막집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들어갔고 코가 삐뚤어지게 화해의 술을 마셨다.

 

그의 이름은 김 철이라고 했는데, 나이가 나보다 4살이나 위였고 합기도 6단으로 근처에서 합기도 사범으로서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이가 위인 그를 형으로 부르기로 했다.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그 언덕길에서 만났던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살아 있겠지. 보고 싶다. 그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라는 태평양을 건너와 미국에 자리 잡았다.(미국에서의 파란 만장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가야 할 다음 목표가 중국이었지만, 나의 중국어는 다 녹 쓸고 이제 꿈은 접었다.

 

생각해 보니, 단잠에서 깨어 느닷없이 들이닥친 두 술귀신에게 술상을 차려 내오며 애처롭게 오빠를 쳐다보던 아리따운 여동생, 그의 누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떠 오른다. 술기운에도 그녀가 꽤 매력적이었음 나는 눈치챘었다.

 

그 녀석, 아니 형은 내가 그때 객기를 부려 먼저 선방 제의를 했었고 대인답게 그것을 허용해서 나를 살렸다.(기실은 그가 싸움에는 자신 있다는 넘치는 자신감 때문이었겠지만), 그런데 내가 술김에 여동생을 달라고 했다면 내게 주었을까?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런 질문은 부질없는 상상이다. 시절은 다시 올테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가 먼저 한방 놨기 때문에 내가 살았다. 오래 지났지만 그에게 감사한다.

 

나는 한달 전 뇌경색으로 잠깐 기절했었다. 911의 도움으로 이곳 로컬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아 살아났고, 그 후의 정밀검사에서 나의 뇌구조가 밝혀졌는데 나의 머릿속에 동맥과 정맥이 엉켜서 고착된 부분이 있다고 한다. 그건 선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기형의 일종으로 100명 중에 한 명꼴로 나타난다고 한다. 해결책으론 수술을 받아서 고치든가 과격한 움직임 없이 조용히 사는 방법 중에 택일 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런 상태라면 이미 젊어서 일이 터지는 것이 보통인데 여태까지 아무 일 없었던 것은, 내가 술은 좀 마시지만 매일 운동을 하는 등 건강 힘쓰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었는데, 최근의 스트레스 - 현재 벌여놓은 사업 그리고 얽히고 설킨 일들의 처리 때문에 몸이 견디 못해 이 터진 것이라 한다.

 

빨리 수술받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고 싶은 마음에 수술가까이 정했지만 주위에서 다른 의견도 들어본 후에 결정하라고 충고하는 바람에, 금년 1 7스탠포드 대학 병원에서 나 의견을 듣고 마지막 결정을 하려 한다.

 

기절하면서 몸부림을 치다 보니 허리에 통증이 생겼고 나는 병석 아닌 병석에 눕게 되었다. 방의 침대 위에서 조용히 수술을 기다리며 나는 나의 과거를 돌아 보았다. 동안 나는 앞에 끝없이 전개되는 장애물들과 사투를 벌이며 안되면 되게하라라는 나의 지상 모토를 실현하려고 애썼고 그들을 이겨내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그러나 한 달 전의 사건은 나를 주저앉혔고, 나는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은 하면 된다라는 모토를 안되면 껄껄 웃자로 바꾸 릴랙스하기로 했다. 글구 매일 꾸준히 걷기로 했다.

 

그때, 1974년 여름, 그의 무쇠주먹이 먼저 나를 쳤다면? 나의 뇌는 견디지 못하고 그만……

 

다시 한번 그에게 감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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