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n JEJU/Essay

민욱아빠 2017. 6. 30. 22:36

  어둑해지는 저녁, 차를 근무할 병원에 두고 걷기로 했다.  부실하게 때운 점심의 허기는 저녁식사 시간이 다가오며 제대로 된 끼니를 열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추적이던 오후의 목적없던 방황은 여전히 내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비는 그쳤고 1월의 마지막날 바람은 쌀쌀했으나, 이제 막 섬에 들어온 육지사람은 춥지 않았다.  어딘가로 다니다보면 저녁을 때울 만한 식당이 나오겠지..  막연한 생각만이 방향감각 없는 발걸음 위에 얹혀있었다.

  내리막길을 걸어 차도가 넓어질 즈음에 건물 안쪽으로 시장골목같은 풍경이 보였다.  일요일 늦은 저녁의 파장분위기가 역력한 그 골목안을 보는 순간, 저기라면 뭐든 저녁거리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을 시장골목 안으로 옮겨 걸었다.  잡화가게, 귤이 진열된 과일가게와 채소가게를 거쳐 안으로 좀 더 들어가니, 눈에 띄는 건 순대였다.  골목쪽으로 튀김솥과 볶음솥을 놓고 떡볶이와 튀김 등등을 진열해 파는 집도 있었지만, 거무튀튀하고 두툼한 순대가 진열되고 그 옆의 찜솥에서 내장고기와 함께 데워지고 있는 두터운 순대는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새롭고 낯설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20센치 조금 넘어보이는 정도의 두툼한 덩어리는 진짜 돼지내장이었고, 끝은 푸른 비닐끈으로 단단하게 매어 있었다.  그것을 동강낸 토막이 찜기 안에서 수분을 더하고 있었다.  채운 속을 보니, 선지 조금 묻혀 집어넣은 당면이 아니고 짙은 선지와 찹쌀과 약간의 양념이 푸짐하게 뒤섞인 모습이었다.  그래, 오늘 저녁은, 그러니까 제주에 와서 제대로 된 첫 끼니는 순대다!  마음은 이런저런 고민없이 단번에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눈에 바로 보이는 순대국밥집에 들어가 한자리 차지한 뒤에 순대국밥 한 그릇 주문했다.  국밥만 먹으면 조금 서운할 듯 하여, 소주 한 병도 주문했다.  제주에 왔으니 한라산 소주, 하얀색은 조금 세니까 초록병에 담긴 순한 한라산으로 한 병 주문하여 저녁을 시작했다.

  뚝배기에 담긴 국밥 한그릇은 정말 든든했다.  멀건 국물에 당면비닐순대와 부추가 들어가서 새우젓을 한껏 넣어 간신히 간을 맞춰먹던 그런 순대국밥이 아니었다.  토렴하여 담아낸 국물에 두터운 순대와 머릿고기 조금이 들어가고 거기에 약간의 다대기만으로도 간이 충분하고 국물이 묵직해서 아쉬움없는 한 끼로 충분한 한그릇이었다.  두터운 내장껍질과 속이 국물에 약간 불고 따뜻해진 순대는 입 안에서 풍부한 감칠맛을 내며 찰지게 감겼다.  소주 한 잔에 국밥 한 수저, 순대 한 조각은 너무 맛있고 속을 든든하게 했다.  오후내 외롭고 싸늘했던 몸과 마음이 이렇게 위로받는구나 싶었다.  위로받은 몸과 마음이, 낯선 공간 안에 가벼이 안착하며 조금은 친숙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순대국밥은 이 섬에서 나의 제대로 된 첫 끼니가 되었고, 그것은 그대로 소울푸드가 되었다.  소울푸드는 투박하고 묵직한 영감으로 제주맛집 블로깅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일상의 일부가 되어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나 감기나 피로로 몸이 무거울 때 찾는 단골메뉴가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맛있는 무언가를 물어보면 나는 스스럼없이 순대국밥을 추천했고, 쌀쌀한 어느날 우리집에 방문하신 집안어른들의 나들이 메뉴로 순대국밥을 권해드렸다. 

  입도 첫 날의 첫 식사는 혼자였다.  우연히 선택하고 혼자 들어가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해 비운 순대국밥 한 그릇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순대국밥은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한 그릇이었다.  아니, 혼자라서 외로운 사람을, 외롭지 않게 감싸며 위로하는 투박한 손길이었다.  혼자 앉은 나의 앞 테이블에도 중년 사내 혼자 나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두터운 점퍼 속 살짝 굽은 등과 어깨가 하루만큼의 고단함을 담고 있었다.  수저로 국밥 한 번 뜨며 중간중간 고개를 젖혀 소주잔을 비우는 그의 뒷모습은 거칠고 조용했어도 외로워보이지 않았다.  국밥 한 수저, 소주 한 잔의 단조로운 리듬은 마치 국밥 앞에서 위로와 기운을 담는 제의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남자의 등 너머 문 바깥의 시장골목엔 분주한 사람들이 휙휙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문틀을 경계로 그와 내가 앉은 이 공간 안은 돼지국밥 냄새 가득하게 습하고 차분한 공기가 나직했다.  각자인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외로움에 또는 낯섬에 투박한 손길같은 위로를 받고 있었다. 

  순대국밥 한 그릇에 속은 든든했고, 한라산 소주 몇 잔에 몸은 조금 얼큰해졌다.  식당을 나와 파장이 한창인 시장골목을 돌아 거리로 나오니 어둠은 더욱 깊어졌고, 서울과 달리 거리의 불빛도 소소했다.  속이 따뜻하니 낯설음이 주는 어색함도 조금은 친숙함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걸음을 병원으로 향했다.  조금 친숙해졌다 해서 하루만에 너무 많은 것을 안아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 피곤했다.  하루사이, 조금 먼 거리의 이동과 조금 긴 시간의 긴장과, 그리고 조금은 급격한 감정의 기복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이동의 마무리와 긴장의 풀어짐과 감정의 굴곡엔 우연한 순대국밥 한 그릇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