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ELF/일 기

민욱아빠 2020. 1. 3. 21:24

  나의 연말과 연시는 구분되지 않았다.  그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이었을 뿐이다.  해의 마지막 날을 밤 9시까지 야간진료를 하고, 시즌 숙제인 농어 낚시에 나섰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을 들뜬 채 보내는 서귀포 시내를 가로질러, 농어 포인트 몇 곳을 짚고 다녔다.  그러다 강정의 선녀코지에서 열심히 루어를 던지다 보니, 시계 날짜의 맨 앞은 2020이라는 숫자로 이미 변해 있었다.  00시 40분이 만조였던 첫 날 새벽의 바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었다.  나는 시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루어를 던져 농어를 노렸다.  그러나, 농어는 나타나주지 않았다.  자정 넘은 시간에 철수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어둡고 조용하고, 나직했다.  


  농어가 나타나주길 바랬다.  예년과 달리 이번 시즌은 농어를 좀처럼 만나지 못하고 있다.  멀리서 입질 잠깐 하거나, 발 밑까지 따라와 뻑 소리와 함께 수면 위로 주둥이만 보여주고 사라졌다.  농어를 잡으면, 한 해의 마지막 순간의 선물이거나, 한 해의 첫 순간의 행운이었다.  그러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것은, 9시 야근을 마치고 나오기 직전까지 꾸던 꿈에 불과했다.  한 해의 조용한 마무리는, 생각보다 덜했지만 어둠 속에서 하얗게 갯바위를 덮치는 파도소리에 어깨와 숨소리의 긴장에 묻혔다.  새해 많이 받으라는 복은, 만조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은 농어로 불길함에 뒤덮였다.  


  학생시절 이후 처음으로 혼자 맞는 세밑과 새해였다.  우울하지는 않았다.  우울은, 연말 분위기를 느낄 여유하나 주지 않았던 병원의 분주함 때문에 들었다.  성탄과 한 해의 마지막 주말과 새해 첫 날을 혼자서 보내는 일은 오히려 자유였다.  나는 자유의 시간에, 다니고 싶은 곳을 다니고, 쓰고 싶은 글을 썼다.  새벽까지 일정을 보내고 잠든 새해 첫 날은 느지막히 일어나, 읽고 있던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세 단원을 읽었다.  새해이니 첫 끼니는 특별하고 싶어 사골육수에 만두와 떡을 넣고 떡만두국을 끓여 먹었다.  이른 오후에 반려견 녀석을 차에 태우고 협재에 가서 금능까지 해안 산책을 했다.  맛있는 커피가 마시고 싶어 동네에 새로 생긴 해변가 까페에 가서 페루산 원두로 내린 드립커피를 한 잔 했다.  시간은 여전히 자연스레 흐르고, 새해 첫 날은 자연스런 흐름 위에서 만난 여느때나 다름없는 소중한 휴일이었다.  떡만두국 정도가 소소한 의미를 담은 새로움이었다. 


  이른 귀가 후 그래도 새해 첫날이니 챙겨보자 싶어 선물로 받은 와인을 열었다.  코르크가 완전히 굳어 오프너로 부수어 밀어넣은 다음, 거름망이 달린 디캔터로 걸러 마셨다.  냉장고를 뒤져 에어프라이어 전용 감자튀김을 꺼내고, 레인지에 데워 먹을 닭날개를 꺼냈다.  해가 아직 남은 흐린 오후에 라디오를 들으며 와인과 적당한 안주로 혼술을 하는 경험은 간만이라기 보다는 새로움에 가까웠다.  나는 그 시간이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러움은 와인 한 병을 짧은 시간에 비워냈다.  날은 어두워지고, 연말이라고 쉬고 있는 운동 덕에 부담스러워진 배가 의식되었다.  나는 다시 반려견을 데리고 동네 산책을 다녀왔다.  


  새해 업무 첫날의 병원은 마찬가지로 분주했다.  검진 환자가 빠졌음에도, 나는 밤 9시까지 점심 저녁의 두 시간을 제외하고 쉴 새없이 진료를 해야 했다.  연말의 분주함은 연시로도 이어져, 나는 새해의 어떤 달라짐이나 새로움을 의식하고 마음을 다잡는 통상의 새해의식 같은 건 생각조차 못했다.  이른 새벽 챙겨간 도시락 두 개를, 진료를 마치고 도망치듯 나와 질주하듯 달려 도착한 집에서 다시 설거지하여 말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정리를 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Montes Alpha, Merlot, 2010년 빈티지.  코르크는 완전히 굳어 입구에 딱딱하게 붙어버렸고, 와인 색과 맛은 살짝 어긋나 상해 있었다.  오프너 스크류로 여러번 파내다가 결국 파편들과 함께 병 안으로 밀어넣고 나서야 나는 와인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름망에 걸러지고, 베르누이의 원리를 응용하여 만든 소형 디켄터를 거쳐 공기와 접촉한 와인은 마시기 나쁘지 않았다.  메를로 품종은 까베르네 쇼비뇽 보다는 강렬하지 않지만, 피노누아처럼 변덕스럽지도 않다.  강렬하지 않아 애매하고 변덕부리지 않아 여일한 녀석이 칠레 땅에서 적당한 와인메이커를 만나 지구 반대편 동양인의 입 안에서 적당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쓰고나니, 분명하지 않지만 꾸준한 나와 많이 비슷한 모습이다.  타인에 함부로 반기를 들지 않고 적당히 맞춰주는 습성을 닮아 있다.  나의 연말연시는 여일했다.  특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특별함을 굳이 적용한다면, 직접 끓인 떡만두국과, 올해 첫 와인인 이 와인과, 하루동안 산책을 두 번이나 즐긴 반려견의 유난한 흥분이다.  나는 다시 달라진 시간의 숫자를 망각하고 언제나 그래왔던 일상의 흐름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