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ELF/나의 책

민욱아빠 2020. 2. 19. 11:25

 

해방은 혼란의 시작이었다.  혼란은 누군가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인민들에겐 고난의 반복이었다.  한반도의 내부에서는 자칫하면 목숨이 오갈 수 있는 이념갈등의 아수라장이었다.  외부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 의해 처지가 결정되어 버리는 정체성의 아수라장이었다.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정체성의 문제는 가볍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현실의 문제가 달라졌다.  해방이후 일본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처지로 남북한 또는 일본 어디에도 적을 둘 수 없었던 한인들의 명칭은 재일조선인이다.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으로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평온을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안착, 누군가에겐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한게 주어지는 그것을, 평생에 걸쳐 갈구해야 하는 삶을 강요당하는 이의 시선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사할린의 박승의 역시,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마음의 안착을 평생 동안 갈구하며 살아야 했다.


  정체성의 문제는 중요하다.  남한이라는 국가와 민족적 정체성 안에서 나고 자란 나 자신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그것을 평생 짐처럼 깨닫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간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서경식은 미술과 문학 그리고 정치사상적 관점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수준높게 이끌어낸다.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조성윤은 일제강점기 시절 남양군도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어쩔 수 없었던 정착생활로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되짚는다.  ‘피부색깔 꿀색’의 전정식은 북유럽으로 보내어진 한인 입양아들이 성장하면서 어떻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심지어 자살까지 이르게 만드는 정체성의 문제는, 나와 같이 안정적 테두리 안에서 살아 온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문제이다.  


  다시 사할린의 박승의에게 돌아가자.  그는 일제 강점기 당시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일본국적을 지닌 조선인으로 출생한다.  해방이 되었지만 소련당국에 억류된 조선인으로 아버지의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다.  한반도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나뉘었고, 아버지의 고향은 무주였다.  소련과 북한당국에 의해 국적선택 종용을 받았지만 고향에 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무국적 조선인으로 살게 했다.  이후 박승의 자신은 북한 공민과 소련 국적자, 이후 러시아 연방 국민에 이어 현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영구 귀국하여 살고 있다.  그는 일어, 러시아어, 한국어 세 개의 언어를 사용한다.  국적의 변화만으로도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파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삶의 파도와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이, 그가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정체성의 심각한 혼란을 대신 짐작케 해 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구냐?’란 질문에 대답할 때 머리가 터질 지경으로 혼란스럽다.  


  한 인간이 국적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시공간의 흐름 안에서 다양하다.  해방 전후 조선인이 한반도 외의 지역에서 살아야 했던 이유에는 아픔이 있었고, 정치적 격동에 의해 강제된 비극이 있었다.  그것이, 재외교포 1세대나 2세대에겐 국가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었을 것 같다.  이후를 살아가는 3세대 이후의 사람들이 그런 면에서 희박한 모습은 어쩔 수 없으면서, 환경이 인간을 규정하는 어떤 진리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박승의는 그런 면에서 사할린의 후대 한인들에 아쉬움을 이야기한다.  정체성과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면에서 아쉬움은 답없는 개인의 안타까움일 뿐이다.


  한 인간의 살아온 내력 안에서 우리는 역사를 읽는다.  그것은, 격동이라 표현되는 한반도와 그 주변의 정세 안에서는 극적인 드라마와 같다.  그래서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하고, 역사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우리에게 또다른 중요한 의미가 된다.  박승의는 자신의 삶 안에 역사적 의미의 결코 가늘지 않은 한 축을 담아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한반도에 사는 한인으로 우리가 잘 몰랐던 한인의 또다른 역사가 책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스스로 머리가 터지도록 정체성을 고민했고, 우리는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역사적 정체성을 그에게로부터 물려받아야 할 의무가 생겼다.  정체성은 인간의 생존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