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ELF/일 기

민욱아빠 2020. 3. 20. 10:27

  직업적 무기력함은 어쩔 수 없었다.  코로나19가 세상을 불안으로 뒤덮었지만, 나는 무기력에 뒤덮였다.  불안의 뿌리가 된 세상에 난무하는 모든 억측과 말들을 좀 더 객관적인 판단으로 불식시킬 힘은 나에게 있었다.  그러나, 힘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출퇴근하는 동네 병원 진료실에 앉아있는 일 뿐이었다.  코로나19로 느끼는 자괴감을 말하자마자, 전국의 의료진들이 대구로 지원하여 내려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나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에 묶인 발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확진자 2명밖에 나오지 않은 고립된 환경인 제주에서 대구를 다녀오는 일이 맞는가 하는 실질적 문제도 나를 고민하게 했다.  지역 선별진료소로 주말지원을 나갈까도 싶었지만, 여러 생각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이유가 많은 변명들이 나를 동여맺다.  


  직업 외적의 일들을 벌이는 이유를,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의료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 의료를 감내해야 하는 현실은, 정신줄 놓기 좋은 환경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방송에서 보이는 비상식적인 행위로 비난받는 의사들이 이해될 때가 있다.  자본주의 의료에서는 의사의 정체성과 본질의 문제에 있어 쉽게 길을 잃는다.  세상은 불가항력의 바이러스에 잠식당했고, 의료는 이에 대항하여 온 힘을 쏟아야 하는데, 나는 변함없이 그저 병원에 출퇴근하며 만나던 환자들을 만나야 했다.  이런 나를 누구도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수시로 회의가 들었다.  한국식 의료 자체로도 내 정체성은 수시로 흔들리는데, 코로나19는 내 정체성의 기둥을 붙잡고 휘둘러버렸다.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이 움직였다.  직업 외적의 일들로 채워진 일상의 루틴을, 좀 더 엄격하고 강렬하게 유지했다.  때마침 봄이어서, 삽과 호미를 들고 수시로 움직였다. 


  낮은 수가와 용이한 접근성 때문에 한국의료는 수준급이라고 말한다.  물론, 자본의 심리가 이끄는 발전의 속도가 한국의료를 수준급으로 이끌었고, 제도 자체의 낮은 문턱으로 효율적이다.  그러나, 수준급이라는 의료의 배치는 편향으로 치우쳐 있고, 낮은 문턱은 그저 불안과 걱정을 주사와 약으로 잠시 누그러뜨리는 정도로 활용될 뿐이다.  코로나19로 보여진 방역과 대처 역시 수준급이지만, 정부가 주도하는 방역에 의료는 반강제적 또는 자발적으로 동참한 모양새이다.  반쯤은 정부통제에 걸쳐있고, 반쯤은 자본에 방치된 의료는 코로나19 사태에 재능기부를 강요당한 것이다.  10%도 되지 않는 국책병원이 감당할 수 없는 국가적 세계적 재난 앞에서,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한국의료는 공공의료 빈약의 결과를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메르스 사태 때에도 그랬고, 역병의 재난 앞에서 우리나라의 빅5 병원은 감염의 매개체로 작용했을 뿐, 대응에 있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발적으로 병원 문을 닫고 재난현장으로 달려가는 대의 말고는, 그저 자기 병원을 지키며 의심환자가 지나가지 않기만을 바라는 소의의 기도 뿐이었다.  그것은 이기심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에 있다.  경제사회 복지의 문제까지 아우르는 구조의 문제를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다.  의사는 많지만 의사는 나설 수 없고, 간호사는 많지만 간호사는 의료에서 지쳐 나가버린다.  수준급이라는 의료제도 안에서 의료 주체들은 수시로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또는 사람을 치료하면서 ‘사람답게 일할 수는 없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은 이런 국가적 재난상황 하에서도 끊이지 않는다.  누군가들이 상찬하는 한국의 의료제도는 민낯이 이렇다. 


  의료인의 입장에서 나는 현 정부에 양가적 감정을 가진다.  나는 이 정권이 좀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의료의 문제로 보아서는 이 정권은 포퓰리즘에 너무 많은 발을 담근다.  정부의 코로나19에 대한 대처는 상당히 잘 했다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많은 부분 의료인들 자체의 의지와 역량에 기인한다.  건강보험 보장 확대 역시 방향성에 동의하지만, 우려했던 부작용은 코로나19 사태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MRI 급여 확대를 시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는 심평원을 통해 급여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그 결과,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들이 MRI 촬영이 필요해보여도 찍지 못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기본 물리치료로 낫지 않고 통증이 심해지는 환자에게 의뢰서를 들려보내 촬영을 의뢰해도, 의뢰받은 병원에서는 여러 핑계를 대며 MRI 촬영을 거부한다.  주로 의학적 판단이 아닌 삭감걱정과 의사들의 실적관리 때문이다.  ‘찍어 볼 필요는 느끼나, 찍어서 문제가 보이면 급여가 인정되지만, 문제가 보이지 않으면 삭감당한다.’는 내용이 내가 의뢰했다 거부당한 환자의 전언이었다.  자비로라도 찍어볼 수 없느냐는 질문에, ‘급여항목을 비급여로 전환하여 검사하면 심평원으로부터 사후 제재가 들어온다’ 역시 검사 거부의 부수적 이유였다.  훌륭한 의료체제의 잘 드러나지 않는 이면들이다.  심평원 통제가 얼마나 허술한지, 그리고 기준도 중구난방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의료의 현실인 것이다.  심평의학은 그래서, 한국에만 존재하는 절대적 의료교과서로 설명된다.  


  얼마 전, 대학 동기와의 메신저 대화에서 ‘나는 의료사회주의자에 가깝고, 최근엔 드러나 보이는 정치보다는 철학이나 내면같은 개인 고민에 치중하며 살고 있다.’고 답했다.  솔직히 나는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억지로 움직이는 기분이다.  맞지 않는 옷에 불편을 느끼다 못해 미치지 않으려고, 나의 안과 밖 여러 곳을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그것을 습관화 해서 버티는 기둥으로 삼고 살아간다.  그런 나의 삶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코로나19는 내 정체성에 대한 나름의 해결 기회이면서도 그러지 못한 절망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끊임없이 맞지 않는 옷을 조금씩 고치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계를 분명하게 깨달으며 순응하려 노력한다.  나는 봄의 화창함을 좋아하지만 감동하지 않는다.  화창함 안에서 내가 감내해야 할 무게들이 존재함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꾸준함에 있다.  일상의 습관화..  내가 마음의 무게를 지고 순간순간을 버티는 방식이자 기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