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ELF/일 기

민욱아빠 2020. 3. 27. 10:46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며, 정적을 강요당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여 사람들은 알아서 정적을 택하지만, 인간의 삶은 정적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도 생존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닌 한, 길을 걷다가 모르는 사람을 적어도 하나 이상 만나듯, 우리는 살아가며 사람을 마주쳐야만 한다.  마주침의 순간에, 전에 없던 불안은 얹어야 한다는 건,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심대한 스트레스이고, 정상적으로 형성되는 관계의 상처를 만들어낸다.  바이러스라는,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실체는, 이 과정을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강요된 정적은 어쩔 수 없이 답답하지만, 개인으로서는 답답함이 조금 덜하다.  일상의 진동이 그다지 요란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왔기에, 나는 그럭저럭 그대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시간을 버티고 있다.  텃밭을 가꾸고, 낚시를 하고, 프라모델을 하고, 책을 읽는 일련의 직업 외적 활동은, 사람을 거의 마주하지 않거나 북적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졌었다.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만, 내외없이 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마주했기에, 관계의 폭 역시 불필요하게 넓지 않았다.  이제까지 해 왔던 그대로, 약간의 염두를 두고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약간의 힘과 위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직업적으로 일차 의료기관에 종사하는 의사는, 어쩔 수 없이 하루의 일정 시간을 수많은 사람과 대면하는 일에 소비해야 한다.  요즘의 내 일상의 가장 큰 불안이라면, 내 직업적 입장이다.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변명이라 해도 좋을 마음으로 출퇴근과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의료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이 사태의 중심에서, 나는 동네병원 진료실이나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일말의 자괴를 느낀다는 이야기는 이전부터 해 왔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할 수록 변명으로 수렴된다.  보건소에 자원해서 시간나는대로 선별진료활동에 참여하면 될 일이다.  나는 어째서 선별진료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가는 여전한 고민거리로 남아 있다.  하지 않아도 될 고민에 빠뜨리는 한국의 의료체제에 대한 일말의 환멸도 어느 정도 담겨 있다.


  불안과 긴장에 빠진 인간들은 비교적 쉽게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불확실성이 주는 긴장 속에서,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았을 무심과 무념의 언행들이, 끓는 물 속의 기포들처럼 쉽게 떠오른다.  인간은 당장의 감정과 현상에 충실하다.  우리는 어째서 불안해야 하는가에 대한 객관적 원인이나 근거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주어진 불안과 긴장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나는 이것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가만 고민한다.  그 고민에는 타인에 대한 혐오와 비난이 포함된다.  쉽게 떠오른 누군가의 무념 무상은 기폭제가 되어, 다수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혐오와 비난의 피막을 터뜨리고 휘발시킨다.  그리고 다시 불안에 스스로 잠식된다.  나도 모르게 내 스스로가 기폭제가 되지는 않을지, 그래서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지, 떠오르고 터진 것들에 내가 희생양이 되어버리지는 않을지..  이쯤되면, 코로나19는 바이러스의 자체의 병리력을 가진 병원체라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까발리는 심리본능의 발현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불안과 긴장의 원인인 코로나19의 정체는 이전에 밝혀졌다.  치명률이 높지 않고, 독감정도의 경미한 증상으로 지나가는 바이러스라는 것.  아직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이도 완치자는 꾸준하게 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기저질환이 있거나 노인 연령층에서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삶에 불안과 긴장을 얹어야 할 정도의 위기인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아마도, 이런 위기는 의도적이던 아니던 간에 치료제나 백신이 나와야만 종식될 것이다.  국가가 방역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의료의 수용능력이 급증하는 환자에 가중되는 부담을 빠르게 최소화시키려는 데 있다.  해외거주민들의 국내 유입으로 환자수는 다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이전 신천지 관련하여 경험한 환자의 폭증과 이에 대한 대처경험이 국내에서는 불안을 경감시킬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국책병원이 10%도 안되는 한국의료 현실을 감안해야 하긴 하지만, 실제 가용한 의료능력이 예상되는 환자수를 수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객관적 고민도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의 코로나19 대처능력과 한국인들이 보여 준 사회적 질서능력은 상찬할 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용병이나 다름없는 의료인력의 자발성과, 국민들이 스스로 보여 준 최소한의 질서에 기인할 뿐이다.  국가는 방역대책의 지휘자 역할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국가는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 실패했다.  대표적인 예가 마스크 정국이었다.  마스크의 본질은 사라지고, 마스크가 생존의 필수가 되어 버렸다.  이에 대해 국가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마스크 심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불안은 증폭되고, 정부는 정치적 계산 하에 국민들의 눈치만 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선거까지만 잘 버텨보자는 심산이 느껴진다.    


  나의 일상은 어쨌든 흐른다.  내가 무어라 하든, 그것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좀 더 잘 아는 사람이나, 얼마간 흐르고 난 뒤의 시간이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세상은 누군가의 의도나 자연의 역학을 따라 그저 흐를 것이다.  거대하게 직조된 세상의 작은 톱니바퀴나 될까 싶은 나 하나가 세상을 널리 파악할 수는 없다.  결국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 톱니바퀴에 보너스처럼 부여된 사고와 이성으로, 나는 가만있어도 360도 회전하며 보이는 시야로 무언가를 말할 뿐이다.  수많은 상념과 자괴 가운데, 나의 일상은 이런 환란의 시대에도 이제껏 해 왔던 대로 이을 수 있음을 감사할 뿐이다.  환란을 잠재우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광일 것이다.  무명의 한 인간은 그저 없는 그대로 살며, 혹시나 주어질 작은 역할에 감사하거나 고사하거나 하며 주어진 명대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