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SELF/텃밭일기

민욱아빠 2020. 4. 20. 10:20

  절기는 빨랐지만, 날씨는 쉬이 더워지지 않았다.  하루하루 오락가락 하는 낮기온에 몸도 을씨년스러웠다.  주차장 지붕 아래를 오가던 제비들도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이랑을 만들어 둔 텃밭에는 예측못한 정적과 긴장이 흘렀다.  언제쯤 모종을 심을 수 있을까, 하루하루를 가늠하는 나날이었다.  그다지 신뢰를 주지는 않았지만, 한 주를 예측하는 일기예보는 여전히 기온이 오르지 않을 거라고, 나열된 숫자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조급했다.  한주나 두주 늦어진다 해도 상관없을 일이지만, 모종들로 텃밭을 채우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그래서, 날이 따뜻했던 어느 오전, 나는 집부근의 모종 파는 집에 가서 여러 모종을 구입했다.  모종은 만들어 둔 이랑을 가늠하며 종류와 갯수를 미리 정해두었다.  매운고추, 안 매운 고추, 꽈리고추 각 10주, 방울토마토 2종 20주, 오이 10주, 물외 6주, 가지 20주, 호박종류 6주, 깻잎 상추 약간 등등 메모장에 미리 적어두었다.  그대로, 주문을 하고 박스 두 개에 빼곡히 담아 가져왔다.  서리태 콩과 잎콩도 준비했다.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면, 모종을 준비하는 일은 아주 쉬웠다.  그 외, 포트에 파종한 바질은 사각의 좁은 공간에서 열심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비가 내린다는 주말에 서둘러 모종을 심을 생각이었다.  비가 오고 나면 날이 좀 따뜻해지겠지.. 그러나, 날씨예보는 그러지 않았다.  더구나, 주말의 비는 강한 바람을 동반한다는 소식이었다.  모종을 심기로 한 토요일, 퇴근 후 도착한 집에는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비에는 한기가 실려 있었고, 바람은 마당의 나무들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 토요일 오후의 날씨는 ‘오늘 모종을 심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분명 후회할 거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모종은 박스에 담긴 채로, 마당에서 텃밭이 아니라 창고 안으로 옮겨졌다.  심으려고 전날 미리 불려둔 서리태콩과 잎콩만 계획했던 이랑 두 개에 간격을 두고 심었다.  


  모종을 심는다는 건, 단지 땅을 파고 뿌리를 덮는 일만은 아니다.  지주대를 세워야 하고, 바람이 많은 제주에서는 모종이 바람에 다치지 않게 지주대에 되도록 빨리 묶어줘야 한다.  토마토나 오이는 지주대가 훨씬 커야 한다.  그러니, 지주대 세우는 일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모종 심으려던 토요일을 그냥 보낸 후에, 일요일 오전 나는 지주대부터 세워주었다.  본말전도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모종을 오랜시간 가만 둘 수도 없고, 날이 풀린다는 주중에 잠깐씩 작업하려면 뭐라도 미리 해 두어야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토마토와 오이 지주대부터 작업했다.  지주대는 1미터 금속 지주대에 도장에서 가져온 폐죽도살을 이어서 2미터 높이로 만들었다.  검도를 하면서 좋은 것 중 하나가 망가진 죽도를 텃밭 지주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도장에 모아둔 폐죽도살을 미리 가져다가 케이블타이로 금속 지주대와 묶어서 길게 만든다.  두 이랑에 일정 간격으로 마주보게 꽂은 다음, 꼭대기를 서로 엇갈리게 노끈으로 묶는다.  그리고, 엑스자로 엇갈린 윗부분에 죽도살을 길게 얹어 다시 노끈으로 고정한다.  그러면 지주대는 입체적인 구조로 만들어져서 바람이 센 태풍이 아닌 이상 웬만한 바람에도 단단하게 견뎌낸다.  그렇게 오이와 토마토 지주대를 세워주었다. 


  모종을 심은 날은 수요일 선거일이었다.  날은 화창했고, 덥지 않게 흐르는 공기엔 여유가 배어 있었다.  나는 사전투표를 미리 했고, 출근을 해야 했다.  출근 전, 일찍 일어나 오전 내내 모종을 심었다.  지주대를 미리 작업한 토마토와 오이를 지주대 가까이 붙여 심었다.  고추와 가지를 미리 정해둔 이랑에 간격을 주어 심었고, 상추와 깻잎을 빈 자리에 나누어 심었다.  호박과 물외도 미리 생각해 둔 자리에 심었다.  바질과 고구마를 심을 이랑만 남겨두고, 텃밭은 모종들로 가득 찼다.  뒤이어, 모종 가까이 작은 지주대를 꽂아주었다.  그리고, 모든 모종에 노끈으로 지주대에 가까이 묶어주었다.  날이 더 이상 추워지지는 않겠지..  그러나, 이는 내 바람일 뿐이고, 텃밭에 뿌리를 심긴 모종들은 이제 운명의 많은 부분을 자연의 섭리에 맡겨야 했다.  작업을 마친 나는 마당의 호스를 들고 골고루 물을 뿌려 주었다.  


  모종을 심고 난 후, 첫 주말이 왔다.  오이 2주, 호박 1주가 시들해졌다.  저러다 뿌리를 내리고 새 잎이 돋으면 살아남기도 하는데, 어쨌든 지금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비가 내렸다.  모종을 심고 나면 내리는 비가 무척 반갑다.  비가 오고 나면 좀 추워진다는데, 이제는 피할 방법도 없으니 모종이 힘들어하지 않을 정도의 추위였으면 하는 바람만 가질 뿐이다.  모종을 심고 조금의 여유가 생긴 나는, 집안의 책장을 모조리 꺼내고 뒤집어, 집안 정리를 했다.  버릴 것들이 한가득 나왔다.  주말마다 비를 만난 반려견 녀석은 표정이 많이 우울해졌다.  눈치가 리드줄 안 꺼내냐는 듯 했다.  비가 그친 일요일 밤, 반려견 녀석을 데리고 잠시 동네산책을 다녀왔다.  해야 할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기분이다.  봄은 이렇게 몸과 마음이 분주하게 지나고 있다.